[뉴트민호] 오해와 오해 下
a 2015. 2. 2. 22:56 |1. 픽션은 픽션일 뿐: 실제로 2주에 한번 전혈 헌1혈하면 사람 주거여 8v8
2. 늘 언제나 그래왔듯 캐붕 주의........뉴트야 미노야 매번 미안하다 이런 나라서.......
1.
수 백, 아니 수 천 년이 될지도 모르는 오랜 세월동안 인간은 자신들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이 일구어놓은 세계가 전부라 생각하고, 그 협소한 세계 안에 살면서 모든 것들의 척도를 그들의 기준에만 맞춰 판단할 줄 아는 종족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비록 그들보다 개체 수는 적지만 인류의 상상이 만들어 낸 허구의 피조물이라 여겨지는 뱀파이어들은 지금도 인간들의 틈에서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루마니아, 혹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 선조가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시작된 가보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스본 가는 그 시초부터 누군가의 희생을 양분 삼아 대를 이어온 가문이었다. 몸이 냉하고 송곳니가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우며, 매월 보름달이 뜨는 시기를 기점으로 누군가의 피를 빨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존재들. 소수의 그들은 늙지 않고 영원을 살 것 같지만 뱀파이어라고 해서 소멸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뱀파이어는 300년을 주기로 긴 잠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그 긴 잠에서 깨어나면 대개 잠들기 이전과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게 되었다. 물론 본인의 의지에 따라 이전 삶에서 취하고 있던 재산과 기억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오스본의 일원들은 대대로 축적해온 재산을 토대로 오스코프 사를 설립했다. 초기의 막강한 자본금으로 대략적인 구색을 모두 갖춘 신생 기업은 설립한 지 딱 십 년만에 의약업계에 입지를 다진 가장 큰 대기업이 되었고, 해마다 인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신약을 개발했다.
그렇게 인류의 건강에 공헌하는 한편, 오스본은 수면 아래의 좀 더 은밀한 세계에서 그들 사회에 통용되는 혈액 팩을 유통하는 사업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번창한 사업을 유지한 지도 수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 그들은 더 이상의 혈액 팩 제조와 공급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튀기가 생기고, 또한 인간들의 세계에 섞여들어 사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온건파가 두 종족이 함께 동시대를 걸어가는 이 시점에 흡혈을 위한 더 이상의 살생은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인들의 질환이 늘어남에 비례하여 떨어지는 혈액의 영양도와 몇 백 년 만에 부활한 ‘헌터’ 들의 존재도 더 이상의 유통 사업을 저지하는 데 한 몫 했다.
고민 끝에 오스본은 신약 개발로 벌어들인 양지의 자본으로 자신들과 같은 존재를 위한 혈액 대체제를 개발하고자 결심, 프로젝트에 본격 착수하고 연구에 들어간 상태였다. 대체제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면 생존을 위한 무분별한 도륙과 무자비한 학살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라는 게 그들의 예측이었고, 지금까지의 연구는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 숙원을 이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인간의 피를 빨지 않고도 불사에 가까운 삶을 사는, 완벽에 가까운 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2.
2주에 한 번씩 신선한 피를 제공하는 것.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된 민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대신 뉴트가 요구한 조건이었다. 처음 그것을 들었을 때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제 목을 어루만지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혀를 찼다. 헌혈 해 봤을 거 아냐, 피는 팔에 바늘을 꽂아 채혈하는 방식으로 받을 거야. 그렇게 받은 혈액이 연구소에서 성분 분석을 거쳐 팩에 진공 포장된 상태로 전달되어 오면 나는 그걸 간편하게 마시는 거고. 옛날처럼 무식하게 인간 목에 구멍 뚫었다가 죽으면 그거 뒷수습은 어떻게 하라고, 과학 수사와 CCTV가 판치는 이 21세기에? 게다가 그거 위생에도 안 좋아. 그는 민호와 제가 살고 있는 작금의 시대가 서기 2015년이라는 점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인간의 목을 물어뜯는 건 교양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오스본의 가풍에 맞지 않는 일임을 재차 강조했다.
마치 신데렐라처럼 연구개발 팀의 수습 인턴사원에서 하룻밤 새에 비서실 소속 직원으로 격상된 민호는 아침 댓바람부터 이사실에 불려와 새로이 근로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진을 시켜 다리를 달달 떠는 민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게 한 뉴트는 비서실로부터 건네받은 그의 인사 기록을 살폈다. 과연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동양인이라 그런 것인지,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몇 년 전의 긴장어린 얼굴이 상단부에 붙어 있는 것을 살피며 작게 웃던 그는 그 아래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의외의 기록들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제 회사에 채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검증된 실력을 갖추고 있겠거니 예상은 했었지만 민호는 기대 이상으로 우수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사로운 이유로 제가 굳이 끌어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제 회사의 식구로 일할 자격이 있는 인재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흥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느끼며 뉴트는 민호의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들도 찬찬히 읽었다. 1990년 9월생, 한국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옴, 그리고…….
“본가는 풀러튼에 있군? 남동생과 부모님이 살고 있는.”
생년월일과 성장 배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사항을 언급하며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뉴트는 저와 마주친 이후로 줄곧 두려움과 의기소침한 태도로 일관하던 민호가 처음으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결연에 찬 얼굴로 질끈 감쳐물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일입니다. 가족들과는 별개인….” 사뭇 비장함까지 서린 말투에 담긴 속뜻을 읽은 뉴트는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이봐요, 우리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라고 몇 번을 말해? 윤리 경영 한다고, 윤리 경영.
잘못된 노선으로 한참을 앞서 나간 그의 발칙한 발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고, 또한 자신 역시 친애해 마지않는 두 친형을 둔 입장이었으므로 가족을 약점으로 잡는 비겁한 짓은 뉴트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그냥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다. 공포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대담하게 원망서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민호의 모습에 뉴트는 엷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이내 그만두었다. 해명을 하기도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다. 어떻게 비추어질진 모르겠으나 뉴트는 그저 어깨만 으쓱 올렸다. 알겠으니까 그 계약서나 가지고 올래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들만의 전유물이지만 피로를 느끼는 건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출근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들여다보고 있던 업무용 모니터를 끄고 눈썹 뼈와 눈두덩이의 사이를 꾹꾹 누른 후 다시 눈을 뜨자 어느새 서류철을 안은 민호가 앞에 서 있었다. 상의의 단추를 단정하게 채운 차림의 그는,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듯 정장 재킷의 아랫단을 힘 있게 잡아당겼다. 구겨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민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결연함이 서린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남아 있던 마지막 공포감이 방금 내쉰 숨 자락과 함께 빠져나간 것 같았다.
뉴트는 민호가 두 손으로 건넨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문서의 머리에 적힌 제목이 두 사람간의 관계를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근로 계약서. 상단부터 차례로 사용자와 근로자의 간략한 신상, 근로 조건, 기본급과 기타 수당 상여금 등이 명시되어 있는 임금 지급 체계. 그리고 그 아래, 표준 계약서와 조금 다른 내용이 ‘기타 근로 조건’의 항목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두 당사자 간의 특별한 조약이었다. 몇 줄 적혀 있지도 않은 그것을 뉴트는 다시 한 번 읽었다. 2주에 한 번씩 혈액을 제공하는 것과 외부 스케줄 시 뉴트의 차를 운전하는 것. 거의 한 쪽의 일방적인 요구사항에 가까운 그 조항들 밑에 반듯하게 이름을 적어 넣은 민호의 서명이 문서의 첫 장을 마감하고 있었다. 뉴트는 민호의 이름 옆 사용자 란에 제 이름 열 자를 채워 넣을 만년필을 뽑아들며 말했다.
“앞으로 잘 해봅시다. 나가 봐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 출입문으로 향하는 까만 뒤통수에 흘긋, 한번 시선을 주고 뒷장을 넘겨보던 뉴트의 시선이 멈췄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그는 눈썹을 슥 올렸다. 민호를 닮아 반듯하고 각진 글씨가 몇 자 더 추가되어 있었다. 「가족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미 비장한 목소리로 들은 내용이 확인하듯 한번 더. 앞으로 바뀔 업무 내용과 근무 환경에 대해 뭔가 요구하거나 의견을 제시할 사항이 있으면 쓰라고, 혹시나 싶어 건의사항 칸을 비워 놓은 건데 진짜로 이걸 활용할 줄이야. 결국 미간을 모으고 있던 뉴트는 픽,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사를 두려워하면서도 강단 있게 자기의 소신과 가족의 안위를 확인받는 것이 꼭 저보다 몇 배나 덩치가 큰 맹수를 만나도 가족과 제 영역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수컷 늑대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뉴트는 고개를 들어 넓은 사무실을 침착하게 빠져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늑대의 그것처럼 탄탄하고 길게 뻗은 다리와 팽팽하게 감긴 감색 옷감 안에서 육감적으로 오르내릴 허벅지 근육, 운동과 관리로 다져졌을 복근이 감추어진 허리와 셔츠를 타이트하게 만드는 가슴. 발끝에서부터 거꾸로 훑어 올라간 눈동자가 매끈한 목덜미에 닿았을 때, 작은 위화감 같은 것을 느끼며 뉴트는 민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이름을 반 새기다 만 만년필이 서류 위에 놓였다.
민호는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쭉 찢어진 눈이 무심하게 깜빡였다. 다시 한 번,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아랫배를 싸르르 달구었다. 작게 웃음기를 머금은 낯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뉴트는 잠시 입술을 축였다. 요악하고 새빨간 혀가 빠져나와 쓸고 간 입술 선 아래로 예리한 송곳니가 반짝였다. 망설이듯 뜸을 들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의 조건을 더 추가했으면 좋겠는데.”
3.
“쓸 만해?”
“뭐?”
“쓸 만하냐고.”
사람 반 빌딩 반으로 밀도 높고 번잡한 뉴욕의 중심부를 벗어나 한적한 근교에 위치한 오스본의 저택에서, 아주 오래간만에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뉴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찻물 속에 비친 제 얼굴이 잠시 일렁이는 것을 지켜보며 말을 고르다가, 맞은 편 의자에 마른 몸을 기댄 제 형제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일견 오만해 보이지만 품위를 잃지 않은 자태로 두 무릎을 포개고, 비어 있는 팔을 등받이에 얹은 채 여유롭게 차를 들이키던 해리 오스본은 턱짓을 했다. 그의 시선은 응접 테이블의 두 사람이 어렴풋하게 비치는 통유리 벽 너머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정원으로 향해 있었다. 사실 못 알아듣는 시늉을 했지만 뉴트는 주어가 빠진 그 질문의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해리는 정원에 서 있는 두 명의 장신 중 옅은 체크 셔츠에 넥타이를 졸라 맨, 오늘 역시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는 민호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쟤가 걔 아냐?’
물론 제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오스본 일가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회사 내의 여타 기밀 정보를 알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일하게 여길 수만은 없는 일이라 판단한 뉴트는 해리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인턴사원 하나가 실수로 알게 됐어. ‘연구소’ 의 문서를 가져다주는 길에 서류가 쏟아져서 본 모양이야. 뭐, 함부로 입 못 열도록 내가 옆에 달고 다니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일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말에 예상대로 해리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우리의 존재를 아는 건 극히 일부여야 해. 늘어나봤자 좋을 게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더 듣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는 대답에 뉴트는 서둘러 말허리를 잘랐다. 알잖아, 이젠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뉴트의 말이 맞았다. 물론 인간들은 두뇌와 신체능력 면에서는 뱀파이어보다 떨어지는 족속들이지만 그 엄청난 개체수를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기반을 닦아놓은 세계에서 인두겁을 덮어쓰고 숨어 있는 이상은 그들의 생활양식에 적응하고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했겠지. 결국 민호의 일에 더 이상 신경을 두지 않겠으니 모든 판단을 뉴트의 몫으로 넘기겠다는 대답을 돌려준 해리는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다 큰 걸까. 성장기 소년도 아니고 올해로 꼭 서른인 성인 남자에게 ‘다 컸다’ 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어폐가 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헌터의 손에 죽임을 당한 부모님 대신 뉴트를 키우다시피 한 두 형의 기억 속에 그는 언제나 어린 동생이었다. 이젠 의젓한 어른이 되어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하는 뉴트의 어릴 적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해리는 절반 쯤 남은 차를 홀짝였다. 얼마 전에 선물로 저택에 들어왔다던 새 홍차는 특유의 몰트 향이 무척 짙었다. 비싼 거라고 다 입맛에 맞는 건 아니구만. 평소에 즐겨 마시던 얼 그레이의 맛이 절로 떠올랐다.
쌉쌀한 끝 맛에 해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때? 옆에 달고 다니는 걸 보니까 일을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무슨 담소를 나누는지 제 옆에 있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이는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뉴트가 꺼내놓은 대답은 아주 의외의 것이었다.
“…귀여워.”
귀여워? 재차 물은 해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댔다. 공감해 주기에는 조금 곤란하다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죽이지 않는 대신 목숨이 담보로 잡혀 비서와 운전기사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남자는 키가 뉴트와 엇비슷할 정도-어쩌면 그가 조금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로 컸고, 수트를 입어 반듯한 어깨가 벌어진 것이 피지컬도 무척 뛰어나 보였다. 대체 어디가, 그러니까 저 동그마한 얼굴에 약간 매력적인 면모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모양새를 귀엽다고 표현하기엔 좀…. 동생의 미적 기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해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창 밖에 있는 남자를 향한 제 형제의 처음 보는 얼굴. 시선을 받는 당사자가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명민한 감은 오스본 가 특유의 속성이었다. 간만에 발견한 흥밋거리에 은근슬쩍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억누르며, 평정을 가장한 능청스러운 얼굴로 해리가 말했다.
“여자였다면 오스본 가의 피가 섞인 튀기가 태어났겠군.”
“뭐?”
“아니라고 말하진 마. 네 얼굴이 그렇잖아. 여자였으면 당장 침대에 데려가고도 남았을 눈빛인데.”
“무슨… 그 정돈 아니야.”
그리고 침대 위에서 배를 맞춰본지는 벌써 꽤 되었지. 뉴트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뒷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뱀파이어에게 있어 인간의 양기는 혈액만큼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었으나 그 또한 도움이 되었음 되었지 해가 되진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니까 양기를 흡수한다는 것은 거의 빛깔 좋은 구실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뉴트가 한 가지의 조건을 덧붙였을 때, 거부하진 못해도 주저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던 민호는 의외로 한숨을 쉬며 경험이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왜 저렇게 고분고분하지. 혹시 남자 좋아하나. 나중에 사람을 시켜 알아본 민호의 유투브 검색 기록에서 헐벗은 여자가 나오는 B급 포르노 사이에 낀 뱀파이어 물 영화를 발견한 뉴트는 혀를 찼다. 괴기스러운 연출이 제가 봐도 좀 섬뜩하긴 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제가 그 반례이듯이, 모든 뱀파이어가 이렇게 무덤에서 튀어나온 언데드처럼 소름끼치게 생긴 건 아니잖아! 대체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야 이거.
살기 위한 의지, 또는 뉴트에 대해 사라지지 않은 공포감,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안타깝게도 뱀파이어에게는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없었다. 아무튼 요구에 의해 섹스를 하게 된 민호는 잠자리에서 뻣뻣하기 짝이 없었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쳐올리는 대로 가만히 흔들리기만 하는 그를 보며 내가 지금 민호와 똑같이 생긴 섹스 토이를 상대로 욕정을 풀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통나무 같기도 했다. 그래, 본인 의지도 아니고, 연인 사이도 아닌 데다 시키는 대로 안 따르면 제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니까 안 하겠다고 할 순 없었겠지만 그래도 느껴 주면 좋을 텐데…. 종종 자신이 나서 펠라티오를 해줄 때, 이따금씩 쾌락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도 정말 잠깐이었다. 침대 위에서 구르는 몸뚱이는 두 개인데 왜 달아오르는 것은 저 혼자뿐인 것 같은지, 입 꼬리를 늘어뜨린 뉴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옆에 서 있는 정원사가 농담이라도 한 모양인지 건물 안의 뉴트가 자신을 보는 것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민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눈 꼬리와 함께 휘어지는 눈썹,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벌어진 입매, 보조개가 들어가 옴폭하게 패인 뺨. 제가 모르는 얼굴. 역시 저와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아주 박수까지 치며 박장대소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듯 내리며, 뉴트는 내용물이 차갑게 식은 찻잔의 애꿎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자신이 민호와 섞고 싶었던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인지도 모른다.
4.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은 여전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자라며 여름 내내 서핑보드를 끼고 살아 그을린 저와는 다르게 하얀 피부도, 보기 좋게 마른 몸에 유일하게 살이 올라 동그란 뺨도 모두 그대로였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그가 응원하는 야구 팀 정도일까. 다저스의 로고가 붙어 있는 스냅 백을 뒤집어 써 눈썹 위로 까만 앞머리가 가지런히 내려온 민석을 보며 민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야, 너 친구들이 중학생 같다고 안 놀리냐?’ ‘…동양인이 어려보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뭐.’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며 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민석의 옆으로 종업원이 다가왔고, 막 구워내 김이 오르는 바비큐 플레이트와 햄버거 세트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경제력이 없는 대학생의 형편엔 좀처럼 쉽사리 사먹기 힘든 바비큐 플레이트를 보며 샐쭉하던 표정이 풀렸다.
많이 먹어라, 그의 앞으로 그릇들을 밀어주고 물휴지로 손을 닦으며 민호는 멍하니 입을 벌린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야 좀 제 또래 같네. 평소엔 제 형을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답답이 취급하며 온갖 잔소리에 훈계를 다 하더니.
“파트타임 자리는 구했어?”
“어?”
“…너 학비 말이야. 보태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함을 품은 민호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이 주 전에 받은 첫 급여는 입금되기가 무섭게 집세를 포함한 각종 공과금과 교통비 등으로 빠져나갔다. 뉴욕에서의 생활과 새로운 집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불가피하게 쓰게 되는 생활비도 많았다. 이제 다음 달부턴 고정된 비용만 빠지고 크게 돈 쓸 일이 없을 텐데. 장학금을 몇 퍼센트 지원받고도 돈이 조금 부족했던 동생은 학비를 벌기 위해 다음 학기를 아예 휴학하겠다고 선언했다.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부모님에게 민석은 말했다. ‘한국에 있는 내 또래들은 대학 다니면서 휴학 안 하는 애들이 없대. 뭐, 나도 공부하기 싫었는데 잘 됐잖아?’ 그는 시원스럽게 웃었지만 가족들 중 그것이 핑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 깊고 어른스러운 제 동생. 몇 달 전 제가 합격 연락을 받고 이곳 맨해튼으로 나와 살기 전에도 그렇게 조언했었지.
‘괜히 나서서 호구처럼 도와주고 그러지 마. 그거 다 형 손해야.’
그래, 그걸 좀 새겨들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민호는 옆자리에 걸어놓은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지금 통장에 얼마 남았더라, 은행 어플을 켜며 머릿속으로 잔고를 떠올린다. 학비를 보태줄 정도는 안 되지만 이번 달 생활비를 아끼면 동생에게 용돈을 부쳐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나 다음 학기 등록했어. 휴학 안 하는데?”
“뭐?”
콜라를 마시고 있던 민석이 빨대를 문 채로 답답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형도 참…… 생각을 해 봐. 내가 휴학을 했음 뭣 하러 뉴욕까지 왔겠어. 풀러튼 시내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서빙이나 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해결한 건가, 그거 중간 정산 하지 않았었나, 하고 민호가 등록금의 출처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민석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오스본 씨가 대신 내 주셨잖아. 얘기 못 들었어?”
동생의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장 화면을 만지작대던 민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시초문이었다.
“뉴트 오스본? …오스본 씨가 왜?”
“뭐야. 형 진짜 몰랐어? 나랑 전화통화도 했는데?”
작고 유순한 눈매와, 그보다는 조금 더 큼지막하고 치켜 올라간 눈매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함께 꿈뻑인다. 두 사람 모두 의아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자신의 형제를 응시했다. 먼저 고개를 갸웃대며 시선을 돌린 것은 민석의 쪽이었다. 그는 옆에 올려둔 백팩을 뒤적여 아이패드를 꺼냈다. 잠금을 풀고, 손가락을 여러 차례 밀어 몇 개의 사진을 띄운 민석은 그대로 화면을 돌려 제 형에게 그것을 건네었다.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나 생활감이 느껴지는 액정 위에 표시된 것은 등록금 수납 영수증이었다. 보라색 횃불이 그려진 학교의 엠블럼 아래로 적힌 학부, 학과, 학번, 등록금 환불에 대한 안내사항 몇 줄, 그리고 입금 날짜와 함께 맨 아래에 적힌, 익숙한 이름. 민호의 가족들이 플러튼 몇 번가에 사는지 까지도 알아냈던 뉴트였으니 제 동생의 학적사항을 알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에선 아무 내색도 없던 그가 덜컥 제 동생에게 학비를, 그것도 제가 모르게 지원해 준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민석은 기름기가 묻은 입가를 휴지로 훔치며 말을 이었다.
“원래 복지혜택 중에 임직원 가족들 학자금 지원해주는 거 있다며? 역시 대기업이야. 장난 아니다. 형은 진짜 좀 애사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
“아무튼 그때 그 일로 오스본 씨가 직접 전화 했었는데, 솔직히 나 좀 쫄았거든. 근데 진짜 친절하고 상냥하게 얘기하더라. 형 칭찬도 엄청 많이 했어. 일 되게 잘 한다고. 뭐라더라? 그, 아… 흉내도 못 내겠네. 아무튼 엄청 멋진 사람 같아. 나도 취직하면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정도로. 오스코프 사 사무직은 상경계열도 지원할 수 있겠지?”
생산 재무, 아 아니 배우고 싶은 건 마케터 일인데, 형네 회사에 마케팅 부서 있어? 흡사 스타를 동경하는 팬보이처럼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하는 제 동생을 보며 민호는 턱을 괴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오스본 씨라…… 그래, 결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근로계약서를 쓰던 날 아침, 뉴트는 같은 내용이 적힌 두 장의 계약서 중 한 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 그 실수를 했던 걸 본 게 내가 아니라 해리 오스본이었다면 민호 씨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 걸요.’ 마치 아침 식사로 뭘 먹었어요, 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으나 결코 농담은 아니었고, 민호 역시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뉴트에게 서류 속의 내용을 본 걸 들켰던 날 그는 스스로도 이제 나는 죽겠구나, 하고 낭패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신 뉴트는 서류와 펜을 내밀었고, 주기적인 혈액 공급과 관계를 나눌 것을 요구했다.
물론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호는 철저한 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상대는 미국 내에서도 손에 꼽는 대기업인 오스코프 사의 뉴트 오스본이자,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제 목을 꿰뚫고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이미 뒷조사를 끝낸 모양인지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본가와 가족들의 인적 사항까지 모두 꿰고 있었다. 아무리 먼 곳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알아내지 않을까. 엄청난 자본과 회사를 등에 업고 있는 ‘그 오스본’ 이니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은 뉴트의 손아귀 안에 있는 종이쪼가리와도 같았다. 얄팍하고 연약한 종이가 아주 약한 힘에도 구겨지고 바스라지는 것은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아는 일이다. 어차피 저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뼛속까지 이과생이었던 그는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게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득실을 따졌다. 피를 내어주고 욕망을 받아내는 배출구처럼 그가 내키는 대로 관계를 가지는 것이 무척 수치스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찌 됐든 뉴트의 요구를 따라 잘 이행하면 저도 살고 제 가족들도 살 수 있다. 게다가 하나 더,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외적으로 자신을 곁에 붙이고 다닐 구실을 만들기 위해 뉴트는 민호를 비서실 소속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했다. 꽤 높은 급여조건이 적힌 계약서 위로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객지 생활 중인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휴학을 하고 파트타임을 뛰며 학비를 벌어야 하는 동생, 퇴직하신 아버지. 실수를 만회하는 셈 치고는 그래도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하나라도 더 많다. 그래, 결국 나만 눈 딱 감고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여자가 아니니까 임신할 리도 없잖아? 자기 최면을 걸며 민호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계약이 성사되고 뉴트와의 계약 관계가 몇 주 차에 접어들었을 때, 줄곧 곁에서 뉴트를 지켜본 민호는 제 동생의 말대로 그가 제법 괜찮은 사람, 아니,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과 같은 걸까. 생명을 위협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죄질이 무척 크지만,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는 정말 괜찮았다. 우선 저를 대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피를 뽑은 날은 어김없이 롤랑의 수준급 요리들과 자사에서 만든 철분제와 영양제 같은 것들을 챙겼고, 아픈 곳이 없는지 건강검진을 받게 했으며, 회사 내 그의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민호의 앞으로 할당된 업무량을 줄여 주었다. 또한 뉴트는 회사 건물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직원들에게 친절하고 세심하게 말을 걸며 관심을 기울였다. 직원들 사이에서 젊고 유능한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이사에 대한 칭찬이 줄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지극히도 프라이빗한 이야기지만, 그는 침대 위에서의 관계에 있어서도 무척 정중했다.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뱀파이어 역시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신체적인 흥분을 느끼는 부위도 똑같았다. 허리를 들이밀 때마다 민호에게는 ‘괜찮아, 민호? 너무 빨라? 아프지 않아?’ 하는 조심스럽고 정중한 말과 함께 감도 좋은 애무가 내려졌다. 그래서 최근엔 정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허벅지와 팔로 뉴트의 허리와 목을 감으며 엇박을 맞춘 적도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처음 혈액을 요구받았을 때 목을 물리게 되는 건가 오해했던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기던 뉴트의 말이 떠올랐다.
‘옛날처럼 무식하게 인간 목에 구멍 뚫었다가 죽으면 그거 뒷수습은 어떻게 하라고, 과학 수사와 CCTV가 판치는 이 21세기에?’
그래, 여러 가지 사정들로 인해 뉴트는 민호를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죽일 수 없으니 그 계약서를 내밀며 자신의 옆에 데리고 다니며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와 자신의 사이는 죽이지 못해 데리고 있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관계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민호는 생각했다. 피도 내어주고 몸도 부닥치는 이 관계가 어쩌면 기회다 싶어 어떻게든 더 엮이고 싶어 하며 질척거리게 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직원들 사이에서 해리와 뉴트 형제의 이야기가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것처럼 여자들이 봤을 때 그는 충분히 반할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아니, 성별을 떠나서 뉴트 오스본은 남자인 제가 봐도 충분히 반…….
아, 미쳤네.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의식의 흐름에 깜짝 놀라며 민호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세상에서 둘도 없이 편한 가족과 편한 장소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과, 업무 시간이 아니라 긴장이 풀린 머릿속은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뉴트도 언젠가 결혼을 하지 않을까. 한다면 누구와, 애초에 평범한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임신이 가능한가? 아님 남자 좋아하나. 자신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몸놀림이 능숙한 걸 생각해보면, 역시 게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럼 2세는? 어차피 가주는 장남인 그의 형이고 그가 대를 잇는 것이니 뉴트는 상관이 없나? 여전히 턱을 괸 민호는 반 쯤 베어문 감자튀김이 박힌 포크로 플레이트 위를 무의미하게 휘저었다. 남아 있던 토마토케첩으로 난도질당한 접시 위의 벌건 자국은 꼭 제 머릿속처럼 난해하고 번잡스러웠다.
“형, 그거 안 먹어? 안 먹을 거면 나 주든가.”
어어? 순식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민호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그의 동생을 보았다. 어, 그래, 먹어. 손도 대지 않은 수제 버거가 맞은 편 접시로 넘어갔다. 제 형의 복잡한 속을 알 리가 없는 민석은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며 개구지게 웃었다. 맛있기만 하네. 왜 먹는 걸로 장난 쳐?
“동생에게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직장인들을 괴롭게 만드는 월요일의 날이 밝고, 출근을 하자마자 민호는 곧장 이사실로 올라가 뉴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현재 오스코프 사에서 주력을 기울이고 있는 새 항생제의 개발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듦과 동시에 바빠진 뉴트는 밤 낮 할 것 없이 서류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로 여유가 없었던 모양인지 눈동자를 올려 감사를 표하는 민호의 얼굴만 흘긋 확인한 뉴트는 다시 손에 쥔 서류를 주시한 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파일을 팔락팔락 넘겨보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 그거. 민호 씨 동생의 성적이 무척 좋기에. 유능한 인재를 후원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죠.’ 타인으로부터 제 가족의 칭찬을 듣는 것은 무척 쑥스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겸연쩍은 얼굴로 슬쩍 미소를 짓자 반 쯤 세워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 위로 온전히 내려놓은 뉴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민호의 얼굴에 닿았다.
“민호 씨, 오늘 퇴근하고 약속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같이 저녁 먹을까.”
끝이 내려간 그의 말은 제안이 아닌 통보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므로 민호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고, 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비서실을 연결해 진을 불렀다. 곧 스피커폰 너머로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팔짱을 낀 채로 상체를 숙여 스피커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가며 뉴트가 말했다.
“이따 일곱 시 쯤에, 회사에서 멀지 않고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예약 좀 해줘요. …한식당으로.”
짧게 용건을 전한 뉴트는 모니터 옆에 쌓여 있던 새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앞뒤로 넘겨가며 검토하던 그의 입가가 옅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와서 산 지 꽤 됐잖아요. 한국 음식 먹고 싶을 것 같아서.” 민호를 배려해 메뉴를 정하였다 말하는 목소리가 무척 부드러웠다.
또다.
민호는 제 마음 속에서 머리를 치켜드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요 근래 들어 자꾸만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복합적인 감정들과 추상적인 생각들은 민호를 정신적으로 괴롭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적당주의를 고수하며 그리 복잡한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더욱 이러한 무차별적 공격에는 면역력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뉴트의 몸에 배인 배려와 그로 인해 파생된 상념들이 쓸데없는 착각으로 이어지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민호는 생각했다. …그래, 공대에서 실험이나 할 때가 좋았지.
5.
H호텔의 컨벤션 홀에서 개최된 신약 발표회의 결과는 무척 성공적이었다. 연구팀은 몇 년간 쏟아 부은 노력의 결실을 맺었고, 업계의 전문가들은 피부 알레르기나 백혈구 감소와 같은 항생제의 고질적 부작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이번 제품이 또 한 번 오스코프 사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입을 모아 말했다. 의료-의약계의 굵직한 인사들과 언론사, 기타 내빈들이 참석한 이번 행사는 근 7년 만에 오스코프 사에서 내어놓은 신약을 발표한다는 점과, 새 회장인 해리 오스본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개최한 행사라는 점에서 무척 크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외부 업체에 프로젝션 맵핑을 의뢰하는 데만 해도 수억이 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 했다. 노고에 대한 격려와, 회사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로 권해지는 술잔들을 사양 않고 모두 마시며 제법 술에 취한 뉴트는 전화를 걸어 밖에 대기하고 있던 민호를 호출했고, 곧 차키를 챙겨 호텔로 올라온 민호는 뒤풀이가 거의 끝나가는 행사장 밖 로비 구석에 구겨져 있는 뉴트를 발견했다. ‘댁으로 모실까요?’ 거의 만취상태인 몸을 부축하느라 자신의 팔 아래로 어깨를 집어넣은 민호의 목을 끌어당기며, 뉴트가 속삭였다. ‘아니, 방으로 올라가자.’ 내뱉는 숨결에서 알코올 냄새가 묻어났다.
“먼저 씻어.”
뉴트는 앞섶이 벌어져 겨우 어깨 언저리만 가려진 가운을 걸친 채로 객실의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까지 휘청대며 걸어갔다. 룸에 올라와 침대에 뛰어들기 전 민호에게 한 잔 권하느라 미니바에서 꺼내둔 잭 다니엘을 들어 얼음 잔에 부었다. 그렇게 먹고 또 마시면 속 버릴텐데, 눅눅한 드로즈를 꿰어 입고 일어나던 민호는 그런 생각을 하다 곧 스스로의 멍청함을 자책했다. 뱀파이어에게 숙취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요즘 그는 이렇게 종종 뉴트를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 착각할 때가 많았다. 처음 그에게 가지고 있던 공포심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탓이다. 형편없이 구겨진 침구를 정리하고 시트 위를 뒹구는 콘돔 껍질을 쓰레기통에 넣은 후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던 민호는 자신을 부르는 뉴트의 목소리에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근데 말이야, 민호.”
절반정도를 비운 얼음 잔을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문 그가 지포를 열었다. 뚜껑을 밀어 세우는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아마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민호는 참을성 있게 그의 뒷말을 기다렸고, 뉴트가 미간까지 모으며 재차 시도한 결과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불이 붙었다. 담배 끝을 일렁이는 불 위에 가져다 붙이는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고, 불을 붙이느라 고개를 기울인 그의 이목구비에 그늘이 졌다. 관자놀이 옆으로는 격한 정사가 남긴 땀방울이 맺혀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더욱 더 반질거리게 만들었다.
후우…. 점화에 성공한 후 어렵사리 한 모금을 들이마신 그의 날숨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고급스러운 쿠션 위로 마른 다리가 의욕 없이 늘어졌다. 거의 반쯤 누웠다고 보아도 무방할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은 뉴트가 민호를 보았다.
“요즘 되게 적극적이네.”
방금 전에도 나눈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적극적이라……. 순수한 칭찬일까, 아님 칭찬을 가장해 자신의 주제넘음을 질책하는 비꼼일까. 묘한 어조에 민호는 신중히 뒷말을 골랐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쪽이지.
“많이……늘었어. 누가 보면 진심이 담긴 손길이라 생각될 정도로.”
“예?”
“아직도, 내가 가족들을 어떻게 하고 널 죽일까봐 그게 겁이 나?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 비위를 맞추는 거야?”
언제나 차분하고 평정심을 유지해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던 그가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붙어 있던 시간이 길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제 지인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편하게 상대한 것일까, 아차 싶은 민호가 자신의 잘못을 곰곰이 되짚고 있을 때 뉴트는 취기 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기대어 있던 몸을 힙겹게 일으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후, 한숨을 뱉고 담배를 쥔 손으로 민호를 가리킨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얼굴을 덮은 채였다.
“힘들게 부축해서 데리고 왔더니 술주정까지 받아줘야 한다고, 지금 속으로 욕하고 있지? 그래, 나도 취한 거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
“몰라.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알아줬음 하는 게 있어. 그…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처음부터 네 가족들에게 어떻게 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었어. 물론 너도 그렇고. 그러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네 입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대며 굳이 널 하루 종일 내 옆에 두는 비서로 뽑은 건…… 후우. 아무튼 약점까지 잡아가면서 내 곁에 두고 싶진 않아.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안 하고 싶다고. 억지로 옆에 두면 뭐해? ……어차피 진심도 아닐 텐데.”
“잠깐만요,”
“좋아, 오늘부로 약속할게. 앞으로도 신변에 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계약은… 없던 걸로 해. 이제 자유라고. 그동안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하도록 괴롭혀서 미안했고…… 다음 주부터 지원하고 싶은 다른 부서로 이동해도 좋아. 내가 인사부에 말해놓을 테니까….”
“저기, 오스본 씨?”
“……그러니까 약점 잡힌 것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그런 거짓 연기 하는 거라면 그만 둬. 자꾸 그러면 받는 쪽에서는 착각하게 된다고. 아주… 곤란하단 말이야, 이런 거.”
매사에 느긋하고 권위 있던 뉴트 오스본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헝클어 엉킨 머리에, 가려진 손 위로 짜증스럽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구겨진 미간, 조금은 자포자기 하다시피 한, 탈력한 말투. 그러나 민호는 잔뜩 여유를 잃고 고고한 껍데기를 취기 아래 깊숙이 밀어 넣은 채 속내를 가감 없이 고백하는 이 남자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간 꾸역꾸역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씨앗이 끝끝내 싹을 틔웠다.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날이 갈수록 뭉게뭉게 부피를 더해가는 감정의 빛깔은 민호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감정을 몰라 헤매는 헛 똑똑이 같은 짓을 하기에 민호는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보지 않으려 애써 외면을 한 것 뿐.
민호는 반 쯤 돌리고 섰던 몸을 완전히 틀어 뉴트를 바로 보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자라 어느새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그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니로 감쳐물었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지시하시지 않는 이상 제가 부서를 옮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처음엔 물론 계약 때문이었지만 이제 제가 오스본 씨 곁에 남아있는 이유는 순전히…….”
제 의지거든요.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전한 민호는 그 말만을 남기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불투명한 문 너머로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뉴트가 저게 무슨 소린가, 그의 말을 곱씹다 번뜩 고개를 치켜든 것은 한 박자 이후의 일이었다. 다급히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들리고 욕실 문 너머로 마르고 키가 큰 그림자가 비쳤다. ‘민호, 민호! 방금 그거 무슨 뜻이야?’ 유리문을 두드리고, 곧 찰칵찰칵 문고리를 돌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미 욕실 문은 들어올 때부터 잠가 놓았다.
-듣고 있어? 민호!
애타게 불리고 있는 이름의 주인은 밖에서 들리는 열렬한 목소리에 볼우물이 깊게 패이도록 웃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술이 덜 깬 머릿속으로 자신의 말을 해석하고 있을 그의 고용주, 아니, 저 문 밖을 나서면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지도 모르는 남자를 생각하며 샤워기를 틀었다. 곧 물줄기가 쏟아지고, 따뜻한 온수가 전신을 감쌌다. 이상하게도 욕실 안의 공기가 몹시 다정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군가처럼.
'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트민호] 호우주의보 (0) | 2015.02.18 |
---|---|
[뉴트민호] 열대성 저기압 (0) | 2015.02.07 |
[뉴트민호] 오해와 오해 上 (0) | 2015.01.27 |
[뉴트민호] Not your fault (0) | 2015.01.20 |
[뉴트민호] 주인을 찾습니다 (0) | 2015.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