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말 알겠지, 아무튼 ‘미끼’는 폭발물 처리반에서 맡을 거고, 우리 몫은 그 쥐새끼를 잡으면 되는 거니까 뉴트, 아까 말했던 입국 신청 목록 받아서 탑승자 명단이랑 대조해 보고 갤리, 넌 혹시 모르니까 전화해서 도면이랑 CCTV 회로 확보해 놔. 그리고 민호, ……민호?”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쪽으로 움직였다. 모두의 이목을 끌고 있는 주인공은 열렬한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아니, 고개를 숙이다 못해 십오 분 전에 나누어준 서류 위로 고개를 처박다 시피 하고 있다. 정신 놓은 지 한참은 된 와중에도 발휘한 프로 정신인지 뭔지 손에 쥔 볼펜만은 꼿꼿이 세우고 있는 그 꼴에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던 알비는 팔짱을 끼고 제 팀원을 보았다. 그는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척에게 턱짓했다. 야, 여기가 경찰서인지 호텔방인지 구분도 못 하는 저 얼간이 좀 깨워라 깨워. 이제 발령받은 지 딱 두 달이 된 척은 까마득하게 높은 선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저 선배님, 일어나시죠…. 그러나 척을 포함한 회의실 안의 팀원들 모두가 이미 그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예상대로 그는 이마와 콧등을 종이에 붙인 채 미동도 없이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원래부터가 민호는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타입이었다. 때문에 그는 잠복수사를 할 때 위장약까지 복용해 가면서도 커피를 달고 살았고, 대용량 자일리톨 껌 또한 아예 글로브 박스에 봉지 째로 쟁여 싣고 다녔다. 그렇게 잠과의 전쟁에 고역을 치르는 그를 알기에, 척은 그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정수리를 보이는 제 선배가 코라도 안 굴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알비는 미간을 모았다. 어제 분명 비번이었을 텐데 저건 잠 안 자고 뭐한 거야? 요즘 여자 만나? 민호가 깨어나길 바라는 의도로 언성을 높였으나 정작 답변을 내어놓은 것은 맞은편에 앉아 라떼나 홀짝이고 있던 뉴트였다.
“만나는 여자 없다에 50달러 겁니다. 왜냐면 얘 저희 집에서 비디오 게임하다가 밤 샌 거거든요.”
아, 물론 저도. 그러고 보니 검지와 중지를 펼쳐 제 눈을 가리키고 있는 뉴트의 흰자위가 벌갰다. 밤샘에 충혈 된 눈을 내리깔고 마치 체내 수액을 주입하듯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며 몽롱한 정신을 카페인에 의존하는 동료의 애잔한 모습에 갤리는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났다 정말. 아무리 여자가 없어도 그렇지 오프 날까지 직장 동료 만나고 싶을까.”
“엊그제 아예 퇴근을 우리 집으로 했는걸 뭐.”
“그래요? 사지 육신도 멀쩡한 놈들이 대단한 자랑 나셨다! 뭐 너네 둘이 살림 차렸냐?”
음,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평온한 대답과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티를 들이키던 척이 입 안에 있던 것을 뿜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처억-! 아직 항마력이 부족한 그가 자신이 뱉어낸 레몬즙을 그대로 덮어쓴 토마스에게 허둥지둥 사과하는 것을 들으며, 생화학 테러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공한 뉴트는 아무렇지 않게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였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빡빡한 도표 위에 기재된 깨알만한 활자들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뉴트는 피로감이 잔뜩 내려앉아 무거운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아, 나도 자고 싶다.
2.
“세상에, 에르마노! 이게 누구야?”
며칠간 집에 못 들어가고 숙직실에서 먹고 잤더니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비단 저 하나 때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오늘 아침 서류를 전달하러 들린 수사과의 나타샤는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강력계만 오면 홀아비 냄새가 나더라, 왜 그런가 몰라.’ 급한 대로 찝찝한 머리를 화장실에서 대충 감고 물기를 털어내던 민호는 전면 거울로 비치는 제 등 너머의 인물에 살가운 기색으로 뒤를 돌았다. 호르헤 과장님! 들고 있던 타월을 아무렇게나 목에 걸치고 내민 손을 맞잡았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이제 형사과장이 된 자신의 옛 사수는 조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그러나 괄괄한 분위기는 여전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근무한다는 얘긴 들었는데, 뭐, 도통 얼굴이 보여야 말이지. 코빼기도 안 비치길래 내가 잘못 안 줄 알았다고. 강력 A팀 많이 바쁘지?”
“아, 예. 인사드리러 간다는 게 얼마 전까지 마약 건을 맡은 게 하나 있어가지고……. 꼬리를 무니까 밑에서부터 윗대가리까지 줄줄이 딸려 나오더라고요. 어제 부로 검찰에 넘기고 저희 선에선 마무리 지었습니다. 과장님은 요즘 어떠세요?”
“알잖아, 우리도 매사 바쁜 건 마찬가지지 뭐.”
그나저나 자네가 벌써 5년차라니, 감회가 새롭구만. 경찰학교에서 갓 올라온 새파란 신참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핸드 드라이어의 온풍에 손을 비비며 추억 팔이를 하는 호르헤의 얼굴을 보며 민호는 물끄러미 옛날의 일들을 회상했다. 처음 막 경찰학교에서 10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서로 발령을 받은 민호는 제 몫의 자리를 만들기가 무섭게 새 사건을 맡은 전담팀에 긴급 투입되었다. 그래,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 또한 마약 사건이었다. 원래 갓 발령받은 순경을 사건에 투입시키는 일은 드문-이라기보다는 거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 서에서 관할하고 있던 더 큰 사건에 쓸 만한 인원들이 모두 차출 당했고, 그 와중 갑작스레 터진 마약 사건에는 충원할 인력이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긴급 수혈을 한 것이 민호였다. 본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지지리도 운이 나쁜 케이스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옆구리에 총 맞고 칼 맞는 거야, 알았나? 브리핑 회의 첫 날,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들었던 그 섬뜩한 말 한 마디 이후로 민호는 선배들을 따라 현장을 다니며 이리 뛰고 저리 굴렀다. 물론 넘치는 의욕만이 최고의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것은 아니었고 실전 경험이 없었던 민호는 그러한 가르침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대가리에 구멍 뚫리고 싶어서 환장 했냐 이 새끼들아, 엉?!’ 사회 초년생이기도 한 입장에서 폭언을 들을 때마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사직서 내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의 세탁소 일이나 도울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내적 갈등을 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쨌든 민호는 우직한 근성으로 터지고 깨져 가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리고 아침마다 이 새끼 저 새끼를 찾는 호르헤의 걸쭉한 언사가 학창 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생활 잔소리 비슷한 것으로 여겨져 면역이 형성될 때 쯤, 호르헤는 인사 발령으로 인해 다른 서로 근무지를 옮겼고 이후 민호는 고민 끝에 진짜 형사과로 보직을 지원했다. 모두 5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 맡았던 사건이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어렵고 무거운 사건들을 여러 번 맡았던 민호는 제가 처음 호르헤의 팀에 합류해 고생하던 때 그가 팀원들에게 그토록 빡세게 굴며 폭언을 일삼은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하루에도 사건 사고가 몇 백 건이나 발발하는 이 넓고 위험천만한 곳에서 제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은 저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는 것 뿐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안위를 반납해 가면서 타인의 뒤치다꺼리를 해줄 여유는 없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에게는 본인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야, 똘추.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옆구리에 총 맞는 거야, 알겠어?’ 호르헤로부터 5년 전에 들었던 그 말을 이제는 제가 똑같이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안 보던 새에 많이 컸다, 엉? 아직도 비쩍 골았음 어쩌나 싶었는데 몸도 좋아졌고. 상체 근육이 아주 훌륭하군, 벌크업 한 거야?”
하하 아 그게요…. 드물게 받은 칭찬에 축축한 뒷머리를 매만지고 쑥스럽게 웃으며 뭐라 답변하려던 민호는 별안간 둘 사이를 가르고 나타난 불청객에 의해 옆으로 떠밀렸다. 팔꿈치 부분이 닳아 반질반질해진 블루종을 입은 그는 소매를 걷어 손바닥에 세정제를 짜며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건 아니고 애인이 끝내주게 빨아줘서 그렇답니다.” 외설적인 의미가 담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으며 빼꼼 고개를 들어 거울 너머의 두 사람을 확인한 그는 민호의 파트너였다. ‘뉴트?’ 그와도 면식이 있는 호르헤가 놀란 듯 눈을 치켜뜨자 뉴트는 옅게 웃었다. 과장님 진급 축하드립니다, 이번 주 내내 현장에 가 있느라 인사드리러 갈 기회가 없었네요. 거품을 헹궈낸 손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이 친구 애인을 좀 잘 알거든요.’ 그는 물을 털지도 않은 손을 그대로 민호의 가슴팍에 문질러 닦았다. 채도가 낮은 회색 티셔츠 위로 정확히 두 개의 손자국이 남았다.
그 모습에 자네 둘은 아직도 여전하다며 호탕하게 웃던 호르헤는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크흠, 흠, 웃음을 갈무리하기 위해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며 그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제법이야 민호, 애인이 아주…적극적이구만.’ 액정을 밀어 전화를 받고 나중에 보자는 듯 두 사람에게 눈길을 한번 주며 그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Hello, 첫 마디를 떼는 그의 뒷모습은 화장실 문이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졌고, 둘만이 남은 공간 안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민호는 타월을 끌어다 마저 머리를 닦으며 짓궂은 얼굴을 한 제 파트너를 향해 눈을 홉떴다.
“놀리니까 재밌냐? 어?”
“그럼. 세상에서 너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어디 있다고.”
“자꾸 이딴 식으로 소문이 나니까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이 자식아.”
“핑계는. 연애 할 생각도 없으면서.”
정곡을 찌르는 답변에 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뉴트의 말이 맞았다.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학생 시절 CSI나 기타 범죄 수사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요원들을 보며 키워나갔던 환상은 서에 발령받은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고, 좁은 순찰차 안에서 하루 종일 붙어 소소하게 서로를 챙겨주며 간질간질한 감정을 키워나가는 잠복 수사 같은 건… 죄다 시커먼 사내놈들과 하고 있었다. 허황된 꿈은 모두 접기로 했다. 환상은 박살나고, 와중에 일은 자꾸 터지고, 이 쯤 되자 연애고 뭐고 모두 귀찮아졌다. 퇴근 후 꿀 같은 휴식 시간에 짬을 내어 여자 친구와 만나고, 그녀가 기르는 강아지가 어쩌고--친구의 남자친구가 이랬다더라, 따위의 끝없는 수다를 들어 주며, 쇼핑센터에 끌려 다니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뉴트의 집에서 피자나 시켜먹고 비디오 게임이나 하며 쉬는 편이 훨씬 좋았다. 문득 주말에 먹은 피자를 떠올리자 탈력한 태도로 이런저런 신세 한탄을 늘어놓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한 가지의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오늘 퇴근하고 저녁 뭐 먹지. 지극히도 본능적이고 착실한 생체 리듬에 의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등을 차가운 타일 벽에 붙이고, 삐딱하게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민호는 물었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거 뭐 없지? 카레 땡기는데.
“당근이랑 감자, 버섯…. 아마 채소류는 하나도 없을걸. 사러가야 해.”
“그럼 마치고 마트 들렸다 가자.”
“그래, 가는 김에 네가 찰 브라도 살까? 가슴 크다잖아.”
“거 지랄하지 말고 차나 미리 빼놔.”
키득거리고 나가는 뉴트를 보며 민호는 다시 세면대 앞으로 돌아왔다. 말을 말자, 저 새끼 저러는 게 한 두 번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거울 앞에 서 머리를 털어내는 그의 시선에 얼룩덜룩한 제 티셔츠가 걸렸다. 퇴근까지 십 분도 남지 않았거늘 짙게 물든 손자국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시발 진짜…. 결국 물기에 젖어 서늘해진 가슴팍에서 티셔츠를 떼어내 펄럭거리며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말리던 그는 문득, 손자국을 남기며 저를 응시했던 뉴트의 눈빛을 떠올렸다. 장난스러운 미소, 그러나 그 한 꺼풀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무겁고, 차마 입에 담기 애매모호한 감정들.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스쳐가는 찰나였지만 함께 호흡을 맞춘 지도 3년이 넘었으니 못 읽을 것도 없었다.
애인이 끝내주게 빨아줘서 그렇답니다.
한 발 늦게 벌개진 귀를 하고 민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질 나쁜 새끼.
1. 형1사2물 AU
2. 며칠 전에 이혀어언우랑 기임우비이이인 나오는 ㄱㅅㅈㄷ 보고 왔는데 수2사대 사람들 회의하는 장면에서 한 분이 종이에 얼굴 처박고 주무시는데 (진짜 완전 스쳐지나가는 장면인데) 그 장면이 너무 기여웠달까..
3. 너무 짧고 퀄이 음.. 그래서 제목 붙일 것도 없었다
4. 본인들은 사귀는거 아닌데 남들이 보기엔 쟤네 최소 잤잤 ◐◐ 이런 분위기 좋다. 그러다 점점 미묘한 어떤 걸 느끼면서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내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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