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호우주의보
a 2015. 2. 18. 12:31 |1. ㅇㅕㄹ대성 저기압 뒷 이야기
2. 내용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정말 이 글을 14일까지 올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3. 원래는 두 분의 리퀘였는데 리퀘해왔어요! 라고 말씀드리기도 민망할 정도의 글이라 면목이 없읍니다 8_8
4. 진짜 분에 넘치도록 짱짱 예쁜 팬아트 그려주신 분들 너무 감사해ㅐ요 (mm 열어분 모두 제 마음에 입주신고..
1.
‘민호, 자? …진짜 자?’
단순히 자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아님 자고 있는 것을 깨우려는 것인지 의도가 애매한 속삭임이 민호의 귓가를 간질였다. 음절 음절 뱉을 때마다 공기를 타고 귓불 아래에 닿는 은밀한 숨은 수면 속에 좌초된 정신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기폭제가 되었다. 으음…. 얕지만 여전히 정신없이 잠에 취한 채로, 민호는 눈썹을 꿈틀대며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다 이내 성가신 듯 고개를 바깥쪽으로 뉘였다. 난 아직 좀 더 자고 싶다고.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팍 위에 얹혀 있는 몸을 뒤채자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박처럼 상체를 칭칭 감고 있던 팔이 스륵, 풀리며 그를 구속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팔은 마치 살갗 위로 뱀이 기어가듯 미끈하고 느릿한 속도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시트 위를 유영하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삐걱. 삐걱. 낡은 스프링의 울음과 함께 매트리스가 푹푹 꺼지는 감각이 느껴지고, 누워 있는 저의 곁을 무릎걸음으로 빙 둘러 지나간 누군가가 제 허벅지에 올라탈 때까지만 하더라도 민호는 감은 눈을 뜰 마음이 결단코 없었다. 곧 FBS 시즌이라 늘어난 팀 훈련과 자발적으로 추가한 트레이닝은 매일 충분한 휴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만 대면 잠이 들 정도로 피곤에 찌든 요즈음의 민호는 숙면을 취하는 동안만큼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절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제 허리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제 아랫도리를 강하게 잡아 쥐고 꾹 압박하기 전까지는.
그건 민호의 침잠하던 정신과 눈을 단번에 뜨게 한 감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높이가 낮은 천장이었다. 촘촘하게 배열된 격자무늬. 장마 때 물이 샌 모양인지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진 것을 그대로 방치해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딱히 손님을 받는 숙박업소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제 집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히 인지한 민호는 턱을 집어넣고 허리 아래에서 끊임없이 느껴지는 자극의 정체를 쫓았다. 힘겹게 굴린 눈동자의 끝이 닿은 곳에는 생경한 벽지의 무늬와는 달리 무척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뉴트?’ 전날 과음이라도 한 것일까, 성대가 잔뜩 긁힌 것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부스스하게 뻗친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고 있던 그의 눈매가 살갑게 휘어졌다. ‘일어났네. 우리 한 발만 빼고 아침 먹자.’ 그제야 민호는 제게 벌어진 모든 상황을 인지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제 허리 위에 올라탄 뉴트는 제 물건과 민호의 것을 나눠 쥐고 느릿하게 비벼 올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민호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 잠깐만, 시발 뭐야 이거……! 피와 신경이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비틀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민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어렵게 들어 제 눈가에 덮었다. 직접적인 자극에 동요되고 있는 자신의 표정과 제 눈앞에서 뻔뻔스럽게 외설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뉴트의 모습이 가려진다. 손가락 사이의 좁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셨다. 눈두덩이 위로 덮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이 열기는 결코 쾌감에 달아오른 게 아니라 방 안으로 쏟아지는 채광 때문이리라, 애써 합리화를 하는 동안 그는 손 틈 사이로 울긋불긋하게 보이던 빛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끼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헐벗은 상체 위로 따뜻한 온기가 달라붙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 군살 없이 탄탄한 복부, 그리고, 아랫배 위에 적나라하게 와 닿는 단단한 욕망. 온전히 두 몸이 겹쳐졌다.
생동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박동 소리가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흐르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쿵, 쿵. 제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제 오른쪽 가슴팍 위에서 팔딱이는 뉴트의 것일 수도 있다. 가만히 몸을 붙인 채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를 공유하고 있자 묘하게 애틋하고 로맨틱한 감정들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얼굴을 덮고 있던 손바닥은 뉴트의 손에 붙잡힌 채 민호의 귀 옆으로 눌렸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예쁜 얼굴이 있었다. 열기에 젖은 눈매가 발갛게 물들었다. 여전히 그의 한 손은 빳빳하게 일어선 민호의 것을 움켜쥔 채였다.
‘다 좋은데 얼굴은 가리지 마.’
경직된 민호의 뺨에 입술을 거의 붙이다시피 하고 속삭이던 뉴트는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민호의 손목을 붙들었던 아귀의 힘을 풀었다. 제 몸을 덮고 있던 따뜻한 체온이 멀어지자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아쉬운 감정에 민호는 제 자신을 질책했다. 내가 미쳤지! 정신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제 밑에 누워 있는 민호가 겪고 있을 패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뉴트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 모습에서 민호는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에 열중하듯 찌푸려진 미간과 삐딱하게 올라붙은 뺨, 색이 하얗게 빠지도록 질끈 깨문 입술.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듯 제 이름을 부른, 그 때의 그 얼굴. 뉴트는 분명 제가 옷장 틈 너머로 은밀히 훔쳐보았던 그 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파르게 숨을 내쉬며 뉴트가 통보했다.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여유를 잃은 목소리를 들은 것을 기점으로 민호 역시 자신이 절정에 치닫고 있음을 느꼈다. 혹여나 민망한 소리가 잘못 새어나올까 입만 벙긋벙긋 벌리고 있던 민호가 떠듬떠듬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 물어보기엔 조금 타이밍이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저기, 야…… 뉴트, 그, 우…우리가 왜 이러고 있는데……?’
‘왜 이러긴.’
뉴트는 당연하다는 걸 묻는다는 태도로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몰라서 물어? 앞니로 비틀리게 깨물고 있던 그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진다. 천천히 입을 여는 뉴트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게 전부 다……꿈이니까 그렇지, 멍청아.’
꿈?
침대 위에서 엉겨 붙은 두 몸뚱이를 하얗게 물들이던 햇빛과 하체를 누르던 묵직한 무게, 수명을 다하기 일보직전의 스프링 소리, 누워 있던 머리 맡 너머로 희미하게 나던 구운 토스트 냄새. 선연하던 감각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헉, 다시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뉴트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아니라 밤하늘에 떠 있는 별무리였다.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짧은 기간만 머물던 전 세입자가 떼지 않고 간 북두칠성의 야광 빛 위로, 공유기 램프에서 비추어진 푸른 불빛이 어른거렸다. 마치 우주 쇼와도 같은 그 광경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하며 민호는 헐떡이던 숨을 찬찬히 골랐다. 아득해져 있던 정신이 천천히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익숙한 천장과 발바닥에 느껴지는 극세사 이불의 감촉. 낯익은 풍경. 진짜 제 방이다. 뉴트의 말대로 모든 것은 다 꿈일 뿐이었다. 민호는 한차례 열기를 머금은 태풍이 저를 휩쓸고 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몸을 뒤집어 모로 눕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테이블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밤중이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한참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냈다. 환하게 켜진 액정에 조금 눈이 시렸다. 습관적으로 들여다본 상단 알림 바는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연락을 포함해 간밤에 도착한 메시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머쓱한 낯으로 여섯시 반에 울릴 알람만 한 번 더 확인한 후 민호는 다시 머리맡에 그것을 밀어 두고 눈을 감았다. 기상까지는 네 시간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려고 노력해도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쪽으로 누웠다가, 몸을 굴려 저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자로 바르게 누웠다가. 몸을 뒤척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목 끝까지 끌어올렸던 이불이 답답해 가슴팍까지 끌어내렸다가, 종내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야광별의 개수까지 세어도 잠이 오긴 커녕 정신이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끼자 민호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 쥔 손으로 반듯한 이마를 콩콩 쳤다. 젠장, 요즘 따라 자꾸 똑같은 꿈에 새벽 기상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짜증을 내며 스스로에게 자문했으나 이미 그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였다. 문자도, 전화도 모두 무시한 채로 제 곁에서 뉴트가 아주 사라진 것이.
2.
민호는 제 친구가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해버린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한 차례의 컬쳐 쇼크를 겪고 뉴트의 집에서 도망치듯 달려 나간 그 이후로도 그는 뉴트와 함께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그것이 민호의 의지였냐 묻는다면 그건 결단코 아니었다. 아주 필연적인 이유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계기가 교양 강의였던 것처럼 공교롭게도 둘의 시간표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겹치는 강의가 무척 많았다. 다른 일과시간을 핑계로 어떻게 좀 피해보고 싶어도 같은 강의를 듣는 탓에 꼼짝없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했던 것이다. 늘 그래왔듯 옆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강의가 끝나는 정오 즈음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은 딱히 약속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지켜 왔던 일과이기에 민호는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뉴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자연스럽게 학생회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로는 잊어버려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명제를 증명해주는 좋은 예시였다. 밤새 봄비가 내려 젖은 보도블록 위를 함께 걷는 동안 민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래, 매일 지켜 오던 일과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이상하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저를 두고 뉴트가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 혐오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물론 저도 그러하듯, 식욕보다 성욕이 더 크다 말할 정도로 한창 피가 끓는 나이대의 사내자식들인데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동질감에 관대하게 여길 수 있다 말하기엔 이건 좀 특별한 경우였다. 민호는 얼마 전 같은 팀원들과 연습 경기가 끝난 후 샤워 실에서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트레이닝 쇼츠만 걸치고 나와 목 위로 민소매 티셔츠를 끼우고 있던 그에게 쿼터백을 맡고 있는 프레드는 장난치듯 말했었다. ‘와, 민호. 대체 가슴 사이즈가 몇이야? 계집애들보다 큰 거 아냐?’ 그래. 그때 분명 탐스럽니 어쩌니, 제 여자 친구의 사이즈보다 큰 것 같다며 봉긋하게 만든 손을 올리고 저질스럽게 크기를 가늠하는 프레드에게는 분명 죽여 버린다며 있는 힘껏 정강이를 차 주었던 것 같은데….
저를 생각하며 손을 놀렸던 뉴트의 수음 행위에 비하면 팀원들의 저질스러운 음담패설은 애교 수준에 가까웠다. 비록 그 머릿속에 있는 제 모습이 어땠을 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는 아주 제 물건을 세우고 쓸어내리며 저와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더럽진 않았다. 철벽같은 제 기준이 뉴트에게만은 무뎌지고 관대해졌다. 다만 그냥… 한없이 어색하고, 민망하고, 머쓱할 뿐. 싫다는 감정이 들기보단 자꾸만 그 때의 얼굴이 떠올라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왼손에 들린 제 사진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밀려오는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잔뜩 젖히고 제 이름을 불렀던, 지켜보는 사람까지 화끈거리게 만들었던 그 표정. …역시 뭘 해도 미워 보일 수 없게 만드는 그 껍데기 때문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호는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생각해도 좀 이상한 핑계였다.
아무튼 그는 뉴트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맞출 때마다 느껴지는 어색한 감정을 감추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제가 좁고 어두운 옷장 너머로 그를 훔쳐봤던 것과는 달리 뉴트는 민호가 자신이 한 짓을 봤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저를 보고 있는 그의 마음속에는 친구 이상의 사사로운 감정이 움트고 있을지 몰라도 일단 저와 제 3자의 눈에 비추어진 뉴트의 태도는 무척 평온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민호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난을 치고 말을 걸며, 그 날 일은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무리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에 도가 튼 뉴트라 할지라도 속마음을 알게 된 이상 사소한 행동들에서 보여지는 사심 묻어난 배려는 민호를 초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뭐야?”
접시 위로 잘 구워진 쇠고기 패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달걀 조각을 깨작거리던 민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스가 묻은 포크 끝을 입에 문 채로 뉴트가 턱짓을 했다. 먹어.
“주말에 바비큐 파티를 했더니 이제 기름진 건 보기만 해도 물려.”
“어? …아, 어엉. 그래, 본가 다녀왔다고 그랬지…….”
그럴싸한 핑계였지만 뉴트가 그리 까탈스러운 식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창 요리를 익히기 위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삼시세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놓았을 때 맛도 보장되지 않은 그것들을 군말 없이 먹어치운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 때도 실은 맛이 없었는데 억지로 견뎌내며 먹어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너는 언제부터 나를…. 민호는 패티 두 장이 놓인 접시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다면 줬다 도로 빼앗는 거 아니냐며 뒤도 안 돌아보고 얼른 먹었을 텐데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어떠한 감정에서 기인한 배려라고 생각되자 학생 식당의 싸구려 패티도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를 대하는 것처럼 적잖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나 제가 맛있게 먹어주었음 하는 표정으로 끈질기게 지켜보는 눈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별 수 없이 뉴트가 건넨 패티를 베어 물고 경직된 표정으로 턱을 움직였다. 잘게 분해된 고깃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단백질로 축적될 때까지도 결국 그는 제가 먹은 고기의 맛을 알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긴장은 자꾸만 실수를 낳았다. 유년시절의 영향인 것인지 이제는 미국으로 건너와 지낸 시간이 한국에서 살았던 햇수보다 더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아직까지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편했다.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토마토 파스타를 잔뜩 담아온 민호는 마치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때처럼 스파게티 면을 한 움큼 집어 입 안으로 후루룩 들이마시듯 투박스럽게 밀어 넣었다. 바로 맞은 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뉴트가 제 친구의 턱 끝에 벌겋게 묻은 소스를 발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턱을 괴고 민호의 등 너머로 지나가는 친구에게 눈인사를 건네다 저기 토마스 지나가는데, 하고 알려주기 위해 무심결에 민호의 얼굴을 살핀 뉴트는 픽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너 뭐 묻었다.’ 어색함에 긴장을 한 탓인지 아님 다른 이유인지, 포크 끝에 걸리기만 하고 잘 찍히지 않는 방울토마토를 노려보며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던 민호는 과장되게 입가를 더듬었다. ‘어… 어디?’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온 것에 놀라 그 한 마디를 하는 데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억양이 괴상하게 튀었다. 민호가 계속해서 엉뚱한 곳을 훔치고 있자 샐러드를 뒤적이고 있던 뉴트는 미간을 모으며 손을 뻗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 턱 끝에.
그러나 제 친구가 칠칠맞게 묻힌 것을 닦아주기 위해 다분히 상냥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간 손은 민호의 다급한 손끝에 가로막혀 매몰차게 떨어졌다. 민호는 순순히 손을 거두는 뉴트를 보며 당황했다. 우선 그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불편하고 -물론 저 혼자서만- 견디기 어색한 이 상황에서 이거 언제 다 먹고 일어나나, 잔뜩 예민하게 신경줄을 세우고 있는 이 때 자신이 의식 중인 뉴트가 스스럼없이 손을 제 얼굴에 가져다댄 것에 한 번 놀랐고, 또한 저도 모르게 방어하듯 뉴트의 손을 쳐내버린 스스로에게 또 한 번 놀랐다. 미안하다는 말은 곧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크게 뜬 눈으로 눈동자를 불안정하게 굴리며 입을 뻥긋거리자 잔뜩 당황한 그 얼굴을 확인한 뉴트는,
“그래, 거기. 안 그래도 멍청한 얼굴이 더 멍청해 보이잖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밥을 먹었다. 일견 태연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민호는 찰나의 순간에 그의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나간 감정들을 읽었다. 무안함, 머쓱함, 그리고 또 약간의 상처. 뭐 그런 것들. 물론 그는 제 스스로도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으며 뉴트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부터 Z까지ㅡ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실 네가 은밀한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으며, 그 와중에 너를 위로하던 오른손이 실은 나 대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어색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 내막을 가감 없이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호는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옆에 놓인 물컵만 기울였다. 항상 짧아 아쉽다고 생각했던 점심시간이 오늘따라 유구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민호가 일방적으로 느끼고 있는 둘 사이의 어색함은 비단 식사자리 뿐만 아니라 강의시간으로도 이어졌다. 언제나 그래왔듯 이른 시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아침을 해결한 뒤 스냅백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등교준비까지 완벽히 마친 민호는 일부러 시간을 늦춰 딱 수업을 시작하기 3분 전 아슬아슬하게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180분간 이어지는 여가학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뉴트와 함께 시간표를 짰을 때 신청했던 교양 강좌였다. 졸업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각 영역별 강의를 세 과목 이상씩 이수해야 했기에 민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넣은 것이지만, 굳이 그런 의무를 띄고 있지 않아도 여가학은 강의를 담당하는 호르헤 교수 때문에 언제나 수강생들과 청강생들이 넓은 대강당을 가득 메우는 인기 강좌였다. 아마 적당한 시간에 도착해 괜찮은 두 자리를 꿰찬 채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한 뉴트가 줄곧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빈자리를 맡아주는 것은 아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육중한 대강당의 문을 밀고 들어간 민호는 계단 형식으로 설계되어 층계를 내려갈수록 좌석의 개수가 줄어드는 강의실 안 어디엔가 앉아 있을 뉴트의 뒤통수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맨 앞줄에서부터 훑자 곧 어렵지 않게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는 제 몫이었을 뉴트의 옆 자리에는 아니나 다를까 긴 포니테일의 뒷모습이 발랄한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뉴트와 제 인맥의 교집합은 꽤나 범위가 넓었기에 이 수업을 들을만한 여자 친구들을 몇 추려 보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걸로 미루어 봐선 저도 뉴트도 처음 보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민호는 모자의 창을 치켜 올리고 이마를 긁적였다. 어느 기집앤지는 몰라도 아침부터 운 좋다고 생각하고 있겠군. 물론 민호는 교수의 강의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려는 학구열에 그녀가 그 자리에 앉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실은 그녀에게 뉴트의 옆자리를 꿰차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훔쳐보며 어떻게든 그 이상의 연을 잇고 싶어 하는 의도도 아주 없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뉴트가 앉은 왼쪽으로 묘하게 몸을 틀어 앉은 그녀의 자세가 민호의 그러한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라 하더라도 어찌 됐든 겉보기에 근사하고 교제할 때만큼은 정중한 뉴트를 탐내는 여자애들은 꽤 많았으니까.
아, 아무튼 다행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자리가 똑같은 맥북을 두드리는 학생들로 모조리 꽉 찬 것을 보며 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뉴트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의 빈자리를 물색하며 휴대폰을 꺼내었다. 암호를 입력하고 잠금을 해제하자 곧 회색 말풍선이 줄을 잇는 문자창이 떠올랐다. 벌써 아까 전에 확인해놓고도 일부러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어, 저기 비었네. 판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딱 하나 빈 자리를 확인한 민호는 한 쪽으로 맨 백팩을 고쳐 매고 액정을 두드렸다.
「나 도착. 앞에서 세 번째 줄이니까 천천히 와」
「어디야?」
「왜 안와, 아직도 자?」
「무슨 일 있어?」
「민호」
무슨 일이 있긴 뭐가 있어, 똘추야. 늦게 일어나서 지금 봤네. 지금 강의실 안.
미리 생각해둔 핑계를 늘어놓으며 메시지를 이제야 본 척 답장을 하고 고개를 치켜 든 민호는 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는 뉴트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저 새낀 사람도 많은 강의실에서 어쩜 저렇게 쉽게 나를 찾아? …뭐 설마 안도하는 내 표정을 본 건 아니겠지? 민호는 멀리 떨어진 앞자리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뉴트에게 비추어지는 제 얼굴이 부디 자연스럽길 바라며 억지로 뺨을 당겨 웃고 휴대폰을 흔들었다. 메시지 확인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잠시 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확인하던 그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다시 교단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핑계가 통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알겠다는 의미였다. 여태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기에 의심하며 따져 묻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민호는 빈자리를 찾아들어가 앉았다. 담담하게 고개를 돌리는 그의 표정에서는 멀리서 보아도 서운함이 묻어나 무척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능청스러운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은 계속 도망치는 수밖에.
물론 자꾸 피하기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안이 될 묘책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필기가 느린 저를 위해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며 놓친 내용을 설명해 준다던지, 종종 제가 졸고 있으면 뒷목을 주물러 잠을 깨워준다던지 하는 뉴트의 사소한 행동들을 예전처럼 무심한 감정으로 수용하기가 버거워진 민호는 자꾸 핑계를 댔다. 훈련이 있어서, 몸이 안 좋아서, 왠지 오늘따라 수업 들을 기분이 아니라서…. 핑계도 각양각색이었다. 하루 이틀 핑계가 늘어나자 둘 사이의 거리가 소원해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왜?’ 처음엔 의아하게 여기던 뉴트의 얼굴에 슬슬 체념의 기운이 짙어지고, 이거 정말 이래도 되나, 이러다 영영 멀어지면 어쩌지. 하며 무작정 피하기만 하던 민호가 벌어진 둘의 틈을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을 때쯤, 큰 건널목을 두고 맞은편에 선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뿌연 안개가 내리듯 점점 희미해지던 뉴트의 연락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통화목록을 꽉 채우고 있던 뉴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친구들의 이름이 그 자리를 하나 둘 채워가고 있을 때쯤에는, 학교 그 어디에서도 뉴트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짙은 안개 너머로, 아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3.
“잠깐 10분간 휴식!”
그 이상은 없으니까 적당히들 쉬어라, 알았냐? 기록표를 쥔 손을 뒷짐진채 헤드코치가 돌아서고, 고된 훈련에 체력이 방전된 선수들이 인공 잔디 위로 늘어졌다. FBS가 코앞이었다. 시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아 연습도 실전처럼 임하고 있는 선수들은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민호.”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경기장 밖으로 나와 라인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던 민호는 제 머리위로 진 그늘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와 같은 색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한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이마를 닦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팀의 센터이자 주장을 맡고 있는 알비였다. 제 옆으로 와 퍼질러 앉는 알비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눈썹을 치켜 올린 민호가 입을 붙이고 있던 음료수 병을 내밀었다. ‘줘?’ 고개를 끄덕인 알비는 절반정도가 남은 페트병을 받아들었다. 건강한 초콜릿 빛의 목울대가 수어 차례 오르내렸다. 다 마신 병을 옆에 놓은 그는 아예 민호의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팔짱을 끼고 제 팀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꼭 할 말을 고르는 모양새다. 경기장 밖에서는 흡사 아버지와 같은 너그러움으로 팀원들을 이끌어 주는 그의 신뢰감 넘치는 모습이 오늘따라 왠지 엄격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져 민호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 이 자식 이거 진지한 얘기 할 때 나오는 표정인데.
“오늘따라 컨디션 안 좋아 보이네. 개막 다가와서 걱정인 거야?”
좀처럼 그런 적이 없는데 팀의 백업 선수들과 함께 편을 나누어 했던 연습 경기임에도 집중을 못 하고 자꾸 공을 빼앗기는 모습을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요 근래 들어 계속 잠을 설쳐 예전보다 피곤해진 건 사실이었다.
“뭐, 비록 컨퍼런스에서 우승은 못 했지만… 그래도 작년에도 잘 해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잘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방패막이 되어 주는 놈들이 나 말고 넷이나 더 있잖아? 우릴 믿어.”
“그래, 걱정시켜 미안하다.”
“뭐, 미안하긴. ……근데 너 뉴트랑 싸운 건 풀었어?”
호기심에 기초한 우려의 목소리에 민호의 눈썹이 구겨졌다. 정말 그 이름 좀 그만 들을 수 없나. 벌써 오늘만 해도 뉴트의 이야기를 네 번째 듣고 있었다. 알비보다 앞서 그의 안부를 물어왔던 갤리, 토마스, 그리고 트리사. 절친한 친구의 소식을 묻자 모르쇠로 일관하는 자신을 보며 의아해 했던 두 녀석을 지나쳐, 락커에서 스포츠 백을 꺼내고 있다 말고 옆으로 다가와 제게서 뉴트를 찾는 트리사를 만났을 땐 참다못해 따져 물었었다. 아니, 대체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왈칵 짜증을 내는 민호에게 트리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한테 안 물으면 누구한테 물어?’
‘…….’
‘자, 이거. 반납 기간 얼마 안 남았다고 오늘까지 돌려달라고 했었는데 대신 좀 전해줘.’
품에 안고 있던 전공서적 몇 권을 제게 잔뜩 떠넘기고, 용건만 간략히 전한 채 트리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민호는 락커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래서야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둘의 관계를 남의 입으로 재차 확인만 한 꼴이었다. 그는 말없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팔에 안긴 책이 미련처럼 무거웠다. 메시지건 전화건 간에 도통 답이 없었으므로 별 수 없이 바로 옆에 붙은 뉴트의 락커를 열어 책을 던져 넣었다. 여섯 자리로 설정해둔 비밀번호를 누르다 문득, 훈련 때문에 책을 반납할 시간이 없었던 자신을 대신해 언제나 뉴트가 도서관까지 책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떠오른 민호는 화풀이를 하듯 애꿎은 락커 문만 쾅 닫았다. 개새끼. 하여간 내 학교생활의 모든 순간에 빠지질 않지.
오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 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알비는 민호를 구슬리듯 말했다. 그는 아예 민호와 뉴트가 싸웠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박하게 굴어, 네 라인 맨에게.”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이 라인 맨이라니. 라인맨은 너잖아.”
“아니, 단순히 풋볼 얘기가 아니라… 너희 둘의 관계를 좀 봐. 이건 민호 너도 인정하는 부분일 걸.”
그러니까…… 아, 이거 솔직하게 말해도 되냐? 뭐라고 말을 늘어놓으려던 알비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민호에게 동의를 구했다. 민호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비는 말을 이었다. 좋아, 옛날 얘기야.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기분 나쁘게 듣진 마.
“네가 우리 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주장으로서 널 많이 걱정했어. 이쪽 지구에서 풋볼로 제일 유서가 깊은 우리 학교에 특기생으로 들어왔다고 하니 실력이 훌륭한 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고, 실제로도 러닝백답게 우리 팀 내에서 제일 빨랐지만… 뭐랄까. 너 우리들 사이에 잘 끼지 못했잖아. 어쩌다 훈련 끝나고 다 같이 먹으러 간 술자리에서도 구석에서 구겨져 있기만 하고, 말 걸어도 그냥 웃기만 하고. 물론 그게 낯가림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지만 말이야. 어…. 아무튼 벤이 부상을 입었을 때라 당시 러닝백 포지션으로 뛸 수 있는 건 너 하나밖에 없었는데, 프레드와 함께 공격의 핵이 되어야 할 네가 영 겉돌고 있으니까 여간 고민이 되는 게 아니었지.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러닝백은 라인맨들과의 호흡이 중요한 자리니까.”
“…….”
“그런 너를 우리와 한 술집에 불러다가 같이 맥주잔을 기울이게 만든 게 뉴트였지, 기억 나? 물론 우리와 너는 이 풋볼 팀에서 먼저 만났지만 우리를 묶어준 매개체는 뉴트였다고.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이상하거나 나쁜 애는 아니다, 낯가림이 심하니 곧 있으면 나아질 거다, 네 편을 들고 우리한테 부탁하면서 말이야. …아, 생각해 보니까 그때 너는 술 취해서 거의 테이블에 엎어져 있다시피 했지?”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팀에 합류했던 초기에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뉴트가 ‘러닝백? 나 벤이랑 친한데. 같이 맥주나 한 잔 할래?’ 하고 술자리를 만든 일이 있었다. 셋이 간단히 한 잔 하겠거니 싶어 나간 자리에는 예상외의 인물들이 여러 명 더 있긴 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일년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민호는 그 때의 제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비가 말한 것처럼 그 날의 자신은 무척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숙사 방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생활하면서 여러 모로 뉴트의 도움을 받은 건 너도 인정했잖아. 예전에 한 번 그러지 않았어? 뉴트 아니었음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민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너무 팀에 융화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한 헤드코치는 얘가 이러다가 그만두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말했다.
“거 봐. 물론 지금 넌 우리 팀이 생긴 이래로 최고의 러닝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나 또한 그 말에 적극 동의하지만, 거기엔 분명 뉴트의 도움도 있었을 거야. 민호 네가 공을 들고 40야드를 안전하게 내달릴 수 있도록 우리가 대신 블로킹을 해 주는 것처럼, 뉴트도 네가 이곳 생활에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온갖 태클과 어려운 일을 도와주면서 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게 해준 거라고.”
“…….”
“비유가 좀 이상한가? 어쩔 수 없어. 나는 줄곧 미식축구만 해서 멋진 표현 같은 건 잘 모르는 걸……. 뭐, 어쨌든 너네 둘 되게 라인맨과 러닝백 같단 얘기야. 그러니까 계집애들 마냥 삐쳐 있지 말고 사내답게 풀라고. 그렇게 넋을 빼고 있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엉? 인마, 스포츠는 정신력 싸움이야!”
얼른 화해하고 경기에 집중하라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알비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식시간 종료를 알린 헤드코치가 휘슬을 불며 선수들을 경기장으로 다시 불러 모을 때까지, 그는 물끄러미 허벅지만 쥔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라인맨이라.
연습 경기가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씻을 생각도 못하고 침대 위에 드러누운 민호는 훈련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알비의 한 마디를 생각했다. 비록 알비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비유가 이상한 것이냐 물었지만 적어도 그처럼 미식축구에 집중된 열정을 쏟아온 민호의 눈높이에 그것만큼 단번에 이해되는 표현은 없었다. 땀에 젖어 축축한 등을 이불 위에 붙이고 누운 채로 민호는 중얼거렸다. 라인 맨….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플로리다에서 꼬박 만 하루가 걸리는 거리에 있는 댈러스까지 와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된 일학년 때 지루한 교양 강의에서, 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쓴 룸메이트로 만나 친해지게 된 이후 민호는 정말로 다방면에서 뉴트의 도움을 받았다. 운동 바보, 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흠뻑 빠져 있던 풋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제가 학교생활에 적응한 것도, 겉돌던 팀에 자연스럽게 섞여든 것도 생각해보면 다 뉴트 덕분이었다. 마치 상대 팀의 골문까지 가로질러 달려가는 러닝백의 포지션이 라인맨들의 어시스트로 빛을 발하듯, 새 보금자리에서의 모든 생활의 안정은 뉴트의 도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정의 근원이었던, 늘 옆에 있던 뉴트가 없었다. …사람 하나 없다고 이렇게 쓸쓸하다니. 옆으로 돌아누운 민호는 느리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라인백이 없는 러닝백은 상상할 수 없는 법이다. 공을 들고 전력 질주를 하려 도약을 하기도 전에 상대 수비수들에게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문제는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머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골똘히 생각하던 민호의 눈에 문득, 책상 아래의 구석에 놓아둔 낡은 물건이 띄었다. 어, 내가 저걸 저기에 뒀었나. 민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가 잔뜩 구겨지고 밑바닥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진 종이백,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장비를 꺼내었다. 이곳 댈러스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본격적인 대학 풋볼을 시작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썼던 어깨 보호대였다. 연습 경기 때 이걸 어깨에 채우고 수많은 수비수들의 사이를 빠져 나가며 경기장 위를 달렸었지. 제가 험하게 쓴 탓도 있었지만 200파운드를 훌쩍 능가하는 거구들을 밀치고 달리다 보니 보호대의 플라스틱 어깨 한 쪽이 완전히 깨져 이젠 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양 가슴팍에 나란히 붙어 있는 두 나라의 국기와 누가 그려놓은 것인지 모를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푸른 별을 웃음기 섞인 얼굴로 보며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민호는 의문이 일었다. 이제 수리도 안 되고, 이제 낡아서 못 쓰는데 이거 왜 안 버렸지?
잠시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의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뉴트. 결국은 또 뉴트였다. 이 보호대 역시 뉴트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래, 기억났다. 텍사스의 명문 팀을 상징하는 이 별도 둘이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던 어느 날 뉴트가 NFL에 꼭 가라고 장난스럽게 그려 준 것이었지.
훗날 학교의 지원으로 모두가 더 좋은 장비로 교체하고, 낡아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구식의 것이 되었는데도 이 보호대만큼은 버리지 못하고 책상 아래에 소중하게 보관해둔 이유가 다 있었다. 제 친구인 뉴트가 선물해준 소중한 물건이었으니까. …나아가 이후로도 몇 번 보호구를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것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 역시, 제가 이것을 선물해준 뉴트를 제게 소중한 이라 여겼기 때문일 테다.
마치 아주 연약한 것을 다루는 것 마냥 민호는 보호구의 단단한 겉면을 매만졌다. 언뜻 보기엔 갑작스럽게 형성된 태풍에 휘말려 든 것 같지만, 실은 그는 별안간 몰아닥친 태풍이 아닌 가랑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게 한 방울, 두 방울씩 아주 서서히, 삶에 스며들다가 비로소 어깨가 흠뻑 젖고 나서야 그 존재를 깨닫게 만드는.
지면을 흠뻑 적시는 비는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언제나 동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영양분이 된다. 이렇게나 깊숙이 제 삶에 스며들어와 뿌리를 내린 뉴트가 제 옆에서 사라지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항상 제가 있는 곳에 뉴트가 있는 건 당연한 일상이었다.
민호는 낡은 보호구의 어깨에 내린 먼지를 쓸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 너머로 새하얀 빛깔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래, 그동안 내가 뉴트를 피해왔던 건 그 자식이 싫다거나 불편한 게 아니었어.
그냥, 갑작스럽게 달라진 감정의 빛깔에 적응하지 못한 거라고.
4.
지난날들에 대한 사과와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느꼈던 상실감, 그리고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점점 견고하게 굳어져 가고 있는,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최신형 도어락을 설치해 놓은 것과는 상반되게 낡아서 고장 난 초인종을 아직도 손보지 않은 뉴트의 집 앞에서 민호는 거듭 심호흡을 하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마음속으로 몇 날 며칠, 몇 번이나 연습한 문장을 다듬었다. 정말 과제 제출용 에세이를 쓸 때도 이 정도로 고민은 하지 않았었는데.
실은 오늘 오전 즈음 알비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은 참이었다. 「도서관 앞에서 누가 뉴트를 봤다던데? 화해한 거야?」하긴, 성적 관리를 성실하게 하는 편이었으니 제가 수업을 제끼고 집에 틀어박힌 동안에 교수님이 내어 주었을 과제라든지 시험 따위를 걱정하지 않을 순 없었을 테다. 동굴에서 그가 운둔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기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뉴트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에 대한 모든 질문을 대신 받아내야 했던 제가 이제는 남의 입으로 한 발 늦게 뉴트의 소식을 듣게 되다니, 동시에 약간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이 자식 진짜 나한테 연락 안 하려고 그러나. 양가감정이 대립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러닝백이 할 줄 아는 일은 오로지 전력질주밖에 없다. 그를 아주 잃게 될까봐 조바심이 일었던 민호는 알비의 연락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정리를 끝내기가 무섭게 뉴트의 빌라로 달려왔다.
시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사실은 교내 풋볼 팀에 열광하는 여자애들이 보내 온 초콜릿을 받고서야 깨달았다. 뉴트와의 일도 그렇고, 바쁜 훈련 일정도 그렇고 그동안 얼마나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 없는 날들을 보내온 건지 아주 날짜도 모르고 살았다. 뉴트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바짝바짝 목이 타 물을 사러 편의점에 들린 그는 얼떨결에 초콜릿도 하나 샀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값싼 초콜릿 바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물과 함께 제 손에 들려 있는 초콜릿에 민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카운터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집어 저도 모르게 같이 계산해 달라고 내민 거였는데, 내가 어쩌자고 이걸 산거지. 그러니까 뉴트를 주려고 산 것 같긴 한데…… 아, 시팔 몰라. 계집애냐. 그는 멍청한 행동을 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요즘 들어 부쩍 저 답지 않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모 아니면 도, 의 사고방식으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며 매사 모든 결정을 단순 명료하게 판단 내렸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이도 저도 아닌, 쉽사리 어느 쪽으로 치우쳐 판명하기 애매모호한 것들이 늘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머릿속이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이 모든 것을 초래한 범인의 집 앞에 서서 민호는 문자를 보냈다. 「너희 집 간다. 줄 거 있어.」통보에 가까운 메시지였다. 도어락의 캡을 밀어 올렸다. 어차피 문을 열 수 있으니 대답은 필요 없다. 뉴트가 살고 있는 빌라의 비밀번호는 자신과 뉴트가 태어난 날짜의 조합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평온한 모습으로 비춰지길 바라며 민호는 문을 열고 발을 들이밀었다. 그를 내부로 집어삼킨 철문은 끼익, 노후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혔다. 뉴트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의 공기가 살갗에 와 닿자 꼭 중요한 경기에 나가는 것과 같은 긴장감과 결의가 민호를 사로잡았다. 제 세계의 선을 넘고 들어선 뉴트의 공간. 모든 것은 변한 점이 없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액자도, 혼자 있을 때면 보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틀어놔 약하게 흘러나오는 TV 소리도. 줄을 지어 창틀에 세워놓은 조화 화분들과 분무기, 텅 빈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오레오 박스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그리고 제가 예전에 시트를 걷고 앉아서 팝콘을 먹다가 부스러기를 종종 흘렸던, 꿈속에서는 옷을 벗은 채로 제 친구와 함께 엉킨 몸으로 뒹굴었던, 결국 이 관계의 변화를 불러온 가장 큰 이유가 된, 낡은 침대.
뉴트는 그 위에서 벽에 상체를 기댄 채 긴 다리를 뻗고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 있었다. 종이에 적힌 무언가를 읽는 데 열중한 뉴트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왔어. 고저없는 목소리가 예상과는 달리 무척 평온하고 무심했다. 민호는 그의 시선을 빼앗은 것들과 시트 위에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것들의 정체를 살폈다. 앙증맞거나 혹은 화려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모양새로 포장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은 뉴트가 여자애들로부터 받아 온 게 틀림없는 초콜릿 박스들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분명 내가 만든 건데, 맛있게 먹어 줬음 좋겠어, 등등 로맨틱한 시기를 틈타 간지러운 마음을 전하려는 러브레터일 테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메신저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최첨단 시대에 저런 유치한 아날로그 감성이라니. 비웃고 싶었지만 수줍은 마음을 대변하듯 연한 핑크빛을 띈 편지지는 반박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아, 그래. 너는 뉴트 오스본이었지. 민호는 쯧,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새삼 납득했다.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와 손바닥 안에 쥔 포장지가 눅눅해진 초콜릿 바를 슬그머니 청바지 뒷주머니에 감춰 넣었다. 갑작스레 전의를 상실한 기분이다. 맥이 빠졌다. 말없이 편지를 몇 줄 더 읽고 있던 뉴트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상술인데 이런 건 왜 주는지 몰라. 게다가 난 단 것도 싫어하고.”
“…….”
“게다가 나랑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앤데, 얜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안다고 대뜸 좋다는 거야? 이렇게 고백할 정도로 날 잘 알아? 아니,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연애감정이 들 수가 있나?”
고백을 부정하는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흥도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선물을 건넸을, 이름도 모르는 편지 속 여자애가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 친구들과 의논을 하고, 역시 돈을 지불하고 손쉽게 사는 것보단 손수 만드는 쪽이 낫겠다 싶어 더운 불 앞에서 초콜릿을 중탕하고, 굳힌 후 그 위 온갖 아기자기한 캔디와 크림을 끼얹어 정성을 더했을 결과물. 아마 만드는 과정에서 뜨거운 조리 기구에 손을 데였거나, 주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며 그녀의 어머니와 다퉜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있었을 모든 고충을 감수하면서까지 초콜릿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있었을 것이다. 정성스럽게 만든 그것을 내밀면 기쁘게 웃어 줄 뉴트의 얼굴. 그것을 상상하면서 온갖 귀찮음과 불편함도 참아가며 만들었을 초콜릿이 정작 그것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별 것도 아닌 취급을 받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미간을 좁힌 민호는 저도 모르게 여자애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주는 성의가 있잖냐.”
“성의……그래, 뭐, 성의. 그 성의를 발휘해 내 취향을 좀 더 알아보는 게 좋았을 텐데.”
뉴트는 권태롭고 나른한 손짓으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팔랑, 날려 보냈다. 마치 쓸모 없는 휴지 조각처럼, 누군가의 진심을 담은 연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시트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앉았다. 민호는 뉴트가 하찮게 던져버린 종이의 주인이 꼭 제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완벽하게 같진 않지만, 내가 큰맘 먹고 네게 털어놓으려 했던 말을 전해도 너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 진심을 밀어내는 게 아닐까.
짜증이 끓어올랐다. 네가 달아오른 몸을 달래며 불렀던 내 이름과, 내 사진을 보며 육욕에 젖어 있던 그 얼굴을 본 이후로 난 갑자기 태풍에 휩쓸린 듯 매일 밤잠을 설치고 여유를 잃고, 일상의 흐름이 무너졌는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멀쩡하냐, 엉? 물론 훈련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음고생-일 것이라 생각했다- 으로 몸무게가 눈에 띄게 내린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얼굴에 반질반질 윤마저 나는 듯한 뉴트를 보며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삼켰다. 너는 이 새끼야, 장난으로 친구 사진 가져다가 딸 치냐? 이거 혹시 정말로, 내가 그날 옷장 안에 있었던 걸 알고 일부러 짓궂게 장난친 거 아냐?
몇 날 며칠을 고심한 끝에 어렵사리 준비한 배려의 말과 제 뒤춤에 꽂아둔 초콜릿. 그것들과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를 일직선상에 놓고 보자 예전처럼,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더 나아질 관계를 기대하며 자신이 준비해온 모든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저는 뉴트를 걱정했다. 대단히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호는 수많은 선물 꾸러미를 뒤적이며 초콜릿에는 손도 대지 않고 어느 상자에 붙은 또 다른 연애편지를 떼어내는 데 열중한 뉴트를 흘긋, 노려보며 쓰레기통의 페달을 꾹 밟았다.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쓰레기통 안으로 제가 사온 초콜릿을 처박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싱크대 안쪽에 놓인 냉장고의 문을 열어 물병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돌려 물을 털어 넣는다. 목 안쪽으로 차가운 물이 밀려들자 부아가 치미는 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 맞다. 줄 거 있어서 왔다며.”
뭔데? 밤색 눈동자가 움직인다. 뉴트는 그제야 시선을 민호에게로 돌렸다. 민호는 기울이고 있던 물병을 입에서 떼어냈다. 그 과정에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시팔 이것마저 짜증나게 하네. 턱을 손등으로 투박스레 훔치며 민호는 다시 물병을 넣어둔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반동에 의해 다시 문이 열리며 불빛과 냉기가 새어 나왔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반항 심리였다. 민호는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결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구한 표정으로 뉴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 지금 네게 무진장 주고 싶은 게 있지. 뭐냐면….’ 원망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결의에 찬 듯 중지를 치켜세우며 민호가 말했다.
“이거, 씨발놈아.”
그리고 그냥 휙 나와 버렸다. 엉망이 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민호는 뉴트의 쓰레기통을 떠올렸다. 가치를 잃은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진 초콜릿이 꼭 제 마음 같았다.
어떻게든 엉킨 사이를 풀어보려고 왔는데 오히려 더 꼬이고 말았다. 섣불리 속단한 자신을 탓해야 할지, 아님 괜히 오해하게 만든 뉴트를 탓해야 할지. 원망의 화살촉을 어느 쪽에 겨눠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채 민호는 터덜터덜 빌라의 현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실 억울했다.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단 걸 싫어했다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와플 같은 건 잘만 처먹더니? 사실 저만큼 뉴트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뉴트의 새 면모를 발견한 오늘부로 자만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고? 그것도 매번 네 식사를 챙겼던 내가, 딴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꿰뚫고 있다 자신하는 네 입맛을?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더니, 제가 꼭 그 짝이었다. 그래, 사실 초콜릿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지만 자신이 뉴트에 대해 모르는 점이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이 지금의 민호를 진짜 억울하고 분하게 만들었다. 좀 더 솔직한 그의 본심은 이런 것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민호는 발치에 채이는 애먼 돌멩이에게 화를 풀었다. 운동화 코에 떠밀린 돌멩이가 느리게 굴러갔다. 사실 세게 걷어찰 기운도 없었다.
그래, 사실 뭐 그걸 전해주기도 좀 그랬지. 침대에 쌓여 있던 것들에 비하면 내 껀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에 모양새도 볼품없었고, 또 어차피 그 자식은 단 것도 싫어한다고 하니까 안 전해주는 게 오히려 나았던 걸지도 모르지…. 그와의 관계를 조금도 개선하지 못했다는, 가장 중요한 점을 일부러 뒤로 미뤄둔 채 힘없는 발걸음을 놀리며 쓸데없는 생각을 늘어놓던 민호는 결국 차오르는 원망과 섭섭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위를 햇빛으로 줄무늬 짓게 할 블라인드가 달린 뉴트의 방.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2층의 창문을 올려다본 순간 민호는 그 자리에서 놀라 까무라칠 뻔한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블라인드를 끝까지 밀어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연 채,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뉴트가 민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에 아주 낯익은 초콜릿을 든 채로.
금박 포장지를 벗겨내고 우물우물 초콜릿을 씹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경악에 물든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민호를 발견한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와 태도. 민호는 확신했다. 뉴트의 한 쪽 손에 들린 것은 원래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어야 할, 제가 준 초콜릿이었다. 아까 분명 못 봤을 텐데…? 굼뜨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한 민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천천히 창문 아래로 다가갔다.
“야, 너…….”
“왜. 좀 줄까? 이거 되게 맛있네.”
단 거 싫다며…? 오만하던 자신을 자괴감에 빠지게 한 이유를 말하며 민호가 삿대질을 하는 것에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뉴트는 방금 전까지 쓰레기통을 신나게 뒹굴었을 초콜릿의 포장지 위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흔들어 보였다. ‘잘 먹을게~.’ 빙글빙글 웃으며 쾌활한 기운을 발산하는 그 표정에서 민호는 어떠한 것을 읽어냈다. 그러니까 저 자식… 다 알고 있었던 거였어. 제가 사간 초콜릿도, 초콜릿의 의미도. 뺏어 먹었으면 뺏어 먹었지 사내새끼가 또 다른 사내놈에게 초콜릿을 먹으라고 사 오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을 거라는 걸!
결국 지금처럼, 모든 걸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민호의 얼굴이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창문 너머의 그는 이미 면역이 되어 이제 씨알도 안 먹힐 독설을 쏟아냈다.
“꺼져, 뉴트! 먹고 뒤져버려!”
“어…, 독 든 초콜릿이야? 괜찮아. 네가 와서 키스로 깨워주겠지.”
“좆 까 미친놈아!”
하하! 등 너머로 기분 좋게 웃는 뉴트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개자식. 미친 새끼. 끝없이 욕이 튀어나왔지만 밉진 않았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욕이다.
이제는 깡통 하나 없이 말끔해진 거리를 달리며 민호는 문득 몇 주 전의 데자부를 느꼈다. 이 길 위로 도망치듯 달려 나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느꼈던 혼란스러움, 어지럽게 얽힌 감정과 순식간에 엉킨 관계의 실타래, 아주 거대한 태풍이 밀려오듯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들. 그러나 오늘은 저번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길 위를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 들었다. 작은 점이 되어 모퉁이 너머로 돌아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등을 바라보았을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든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쿵, 쿵. 있는 힘껏 달려 그런 것인지, 아님 말하지 못할 다른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묘한 감정을 품은 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입 꼬리 끝에 마침내 해답을 찾은 이의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이로써 완벽한 소강상태.
태풍이 끝난 후 찾아온 햇빛이 뜀박질을 멈춘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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