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열대성 저기압
a 2015. 2. 7. 22:42 |1.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연성한데다 제목 붙이기
2. 뉴트민호 밥 굶지말고 다녀라.. ~랜선맘~
3. 얼마전 트이타에 풀어놓은 썰을 기반으로 썼읍니ㄷㅑ
4. AU
“뭐, 이쯤하면 됐나.”
폭신하고 노릇노릇한 오믈렛 위 케첩을 두르는 것으로 작업을 마무리하고, 뚜껑 밖으로 벌겋게 새어 나온 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쪽 빨았다. 짜지도 않고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은 맛. 간도 완벽하게 맞추었고 모양새도 훌륭한데다, 일 년 간 붙어 다니며 저절로 학습하게 된 그의 취향에 맞추어 메뉴도 딱 좋아할 만한 것으로 엄선해서 만들었다. 아마 접시에 오른 이것들 중 그 녀석의 손이 가지 않는 메뉴는 없을 테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훔쳐내며 민호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요리를 하느라 잠시 풀어놓은 시계가 열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짓을 하기 위해 아침 알람도 한 시간 반이나 당겨 맞추고 오전 내내 더운 불 앞에 서서 기름과의 사투를 벌였다. 어디 그 뿐이랴. 꽤 먼 거리의 시장까지 가서 재료를 사오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어제 저녁에 만날 뻔 했던 토마스와의 술자리도 물렀다. 빼앗긴 수면 시간은 그렇다 쳐도 그건 좀 아쉬웠다.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심지어 제가 열 번을 사면 겨우 한 번 사줄까 말까한 ‘그’ 토마스가! 사준다고 했다고!
아무튼 그 엄청난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완성 후에 따라오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허기져할 새벽 시간대 즈음 인스타그램에 올릴 생각으로 자세까지 비틀어 가며 사진을 찍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민호는 한 발짝 물러나 팔짱을 끼고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는 그것들을 한 눈에 담았다. 달걀옷을 만드느라 애를 먹은 오믈렛, 닭 가슴살을 썰어 넣은 크림 스튜, 신선한 야채와 드레싱으로 버무린 연어 샐러드를 비롯한 대여섯 가지의 음식들.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나 만족스러운 메뉴로 좁은 식탁 위가 가득 찼다. 턱과 상체를 내밀고 자랑스러운 모양새로 자신의 손에서 태어난 그것들을 내려다보는 민호의 얼굴이 뿌듯함에 젖어 있었다. 시팔. 짝사랑의 아픔에 빌빌거리는 정도 가지고 이렇게까지 위로해주는 친구가 세상에 또 어딨냐? 진짜, 고마운 줄 알아라. 자화자찬하며 민호는 눈을 흘겼다. 밉지 않은 그의 시선이 TV위에 놓인 액자에 닿았다. 액자 속 올드 트래포트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빨간 레플리카를 입은 민호와, 그와 같은 옷을 입은 금발머리의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며 웃고 있었다.
뉴트는 좀처럼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했다. 상대를 두고 바람을 핀다든가 하는 몰염치한 짓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연애에서 결별로 이어지는 과정이 무척 짧다는 뜻이다. 아, 그의 연애기간이 석 달을 넘긴 경우가 드물게 딱 한 번 있긴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마음이 떠나 기울어진 관계를 여자 쪽에서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외도를 의심하는 고함과 함께 뺨을 얻어맞고 끝난 것으로 결말이 좋지 못했다. 아무튼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 미련 없는 제 친구 덕에 매번 밥이며 커피를 얻어먹는 것은 민호의 몫이었다. 커다란 볼에 담긴 샐러드 파스타를 우적우적 씹는 민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뉴트의 옛 그녀들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번 똑같은 것을 물어왔다: 뉴트 정말 나 만날 때 다른 사람 생긴 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사귄지 채 두 달도 안 돼서 이렇게 마음이 식을 수가 있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 아직 뉴트 못 잊었거든? 다시 잘 해볼 방법 없을까? 넌 알 거 아냐,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럴 때마다 민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기집애도 헛돈 썼구나. 명쾌한 해답을 내리면 제가 먹고 있는 이 파스타가 아니라 파스타 가게 한 채를 사줄 것처럼 절박하고 가련 떠는 얼굴을 하고 있어 좀 미안하지만 어차피 제가 건넬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몰라, 그냥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연애를 좋아하나보지. 포기하고 딴 사람 알아봐.’ 지구 종말을 맞이한 사람과도 같은 낯빛을 한 그녀들의 앞에서 민호는 무심히 피클이나 집어먹었다. 어쩌겠는가. 자신은 거짓말을 하는 족족 티가 나는 O형 남자였다. 그 의도가 좋든 나쁘든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하느니 애초부터 그냥 하늘에 우러러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떳떳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뉴트를 천하의 나쁜 놈 취급하는 그녀들로부터 제 친구의 역성을 드는 것이 아니라 민호는 정말로 뉴트의 연애관이나 구구절절한 속사정에 대해서 잘 몰랐다. 물론 뉴트와 민호 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나이대의 사내애들이란 다들 그런 법이었다. 여자들처럼 카페에 가 다과를 즐기며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까지 공유하는 취미를 가진 경우는 열에 하나 정도로 극히 드문 것이다. 그냥 수업 끝나고 시간 맞으면 같이 점심 먹고, 민호의 집에서 함께 위닝 내기를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뉴트의 집에서 DVD를 보거나. 두 사람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스테레오 타입이었으나 똑같은 질문과 상담 횟수가 정확히 두 자리를 넘어서자 민호는 뉴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듣다 보니 저 역시도 뉴트의 속내가 슬슬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의외로 뉴트는 자신이 플래그가 꽂히면 길고 긴 연애를 하는 순정파라고 밝혔다.
순-정-파아? 야, 지금 학교 광장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백 명 붙들고 물어봐라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저번처럼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실컷 코웃음을 치고 그의 말에 반박하는 민호에게 뉴트는 중요한 전제조건을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애를 하면 말이야.’ 민호는 그제야 제 친구의 앞선 연애들 중 그가 먼저 고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관계의 상실에 대한 미련이 없었구나. 그러니까,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목 넘김이 부드러운 맥주를 마시는 뉴트와는 대조적으로 대회가 코앞이었기에 저칼로리의 과일 스무디나 빨고 있던 민호가 빨대를 잘근거리며 물었다. ‘뭐, 못 잊는 사람이라도 있냐? 옛날 여자친구? 차였어?’ ‘아니, 못 잊는 여자 친구는 아니고 그냥….’ 그냥? 그냥 뭐? 혀를 내어 입가에 묻은 거품을 핥는 뉴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민호의 눈동자가 허공으로 굴렀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고, 영혼도 없고 껍데기만 있는 연애를 하는데 못 잊는 사람은 없다면…… 뭐,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을 못하는 건가? 한 바퀴 빙글 돈 시선이 다시 뉴트의 얼굴에 머물렀다. 깨끗해진 입가를 당기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기가 찼다. 허, 그런 비밀을 여태 숨기고 있었단 말야? 제일 친한 나한테도 말 안 해주고? 얼마나 혼자 알고 싶길래? 따져 묻고 싶은 질문이 무척 많았지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남자들의 질문은 늘 그렇듯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예쁘냐?’
‘별로 예쁜 진 모르겠는데….’
‘뭐야,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누군데 그래? 네 주변 사람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오는데……. 야, 그냥 나한테만 말해줘 봐.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어?’
자신의 과묵함을 어필하며 팔꿈치로 쿡쿡 찔러도 말없이 웃고 말던 뉴트는 이틀 전, 벌써 올해 기준으로만 통산 네 번째의 이별을 맞이했다. 보통 정신적 타격에 이별한 당일 하루정도는 넋 나간 사람처럼 굴기 마련인데 어찌나 미련이 없는지 분명 그가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한 날 여자 친구와 있어야 할 카페가 아닌 제 집에 와있지 않았더라면 민호는 그 사실을 영영 모를 뻔 했다.
나 왔다-. 나간다고 말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제 집처럼 들어와 카우치에 앉은 민호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눕듯 자리를 차지한 뉴트를 보며 소파 끝으로 밀려난 민호는 고개를 내렸다. ‘여자 친구 만나러 간다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은 제 친구를 보지도 않고 리모컨으로 채널이나 돌리며 아무렇지 않게 뉴트가 답했다. ‘어,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이제 여자 친구 아냐.’
‘왜 또…, 그 애 때문에?’
‘…….’
‘그… 남의 연애에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뭐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백이라도 해 봐.’
까놓고 말해서, 네가 고백하는데 어느 똘추같은 애가 싫다고 하겠냐?
평소 칭찬이나 살가운 표현에 인색한 편인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모로 누워 코미디 프로그램을 감흥 없이 보고 있던 뉴트의 눈길이 흘긋, 제 얼굴로 향하는 게 느껴져 민호는 얼른 턱을 치켜들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기에 아마 엄청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렇지만 시발 뭐, 뭐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제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견디며, 애써 머쓱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하는 민호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뉴트는 이내 픽 웃고 고개를 저었다. 뻣뻣한 청바지 직물 위로 부드러운 뺨이 문질러졌다.
‘눈치 없는 새끼라 안 돼. 고백하면 놀랄 거야.’
‘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애한테 새끼라는 말은 좀….’
그러나 뉴트는 대답 대신 자세를 고쳐 일자로 바르게 누웠다. 꾹 감긴 눈 위로 주먹 쥔 손등이 덮였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그래 뭐….’ 민호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일 년 가까이 지겹도록 붙어 다닌 결과 이젠 눈빛만 봐도 대충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침묵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민호였기에 그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거 뭔 사연이 있길래 말도 못하고 그러냐. 손바닥 아래로 드러난 뉴트의 오묘한 표정이 못내 신경 쓰인 그는 뒷목만 벅벅 긁었다. 따뜻하고 낯간지러운 말로 위로를 해 주는 건 영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억지스럽게 밝은 척을 하고 있는 제 친구를 보고도 그냥 넘어갈 정도로 무정한 면이 있지도 않았던 민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소소한 계획을 세웠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뉴트에게 기운을 북돋워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그의 방식이란 건, 민호의 취미이자 특기인 요리였다. 학교를 대표하는 훌륭한 러닝백이자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입학한 민호는 체대생답게 규칙적인 트레이닝과 체중 조절이 필요했고, 고칼로리 식단으로 구성된 학생 식당의 음식 대신 도시락을 직접 싸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가 주방 칼을 잡게 된 계기였다. 맨 처음 주방 벽에 붙여둔 인터넷 레시피에 의존해 떠듬떠듬 몇 가지를 만들어내던 민호는 의외의 면에서 발견된 자신의 재능에 흥미를 붙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본가에서 요리책을 챙겨왔다. 어쩔 수 없이 하기 시작한 일이 즐거운 취미가 되자 습득 속도도 예전보다 빨라졌다. 닭 가슴살 조림이나 연두부 샐러드 등의 간단한 단백질 도시락으로 시작한 요리는 점점 굽고 튀기고 끓이며 시간과 손이 많이 드는 요리로 이어졌고, 곧 그는 자취방에 있는 조리 기구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요리를 섭렵했다. 물론 아쉽게도 체중은 제자리로 돌아와 두 배로 운동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집 주인이 수업을 가고 없던 어느 날, 뉴트의 침대에 늘어진 몸을 뭉개며 밤샘 과제의 피로를 풀고 있던 민호는 제 친구의 냉장고를 열어보고 기함을 했다. 절반쯤 남은 생수 두 병, 토마토케첩, 머스터드 소스… 하다못해 물러터진 과일이나 옥수수 캔 같은 것도 없었다. 전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냉기가 도는 냉장고 속 살림은 참으로 단촐했다. 아니 대체 이 자식은 뭘 먹고 사는 거야?!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건강관리에 무척 신경을 기울이는 그는 술 담배를 즐기고 깡마른 뉴트의 몸을 떠올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밥 대신 물고 다니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담배에 대해 나무랄 생각은 없었으나 텅 빈 냉장고는 잔소리를 들어 마땅한 일이었다.
몇 날 며칠을 벼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제 것과 뉴트의 시간표를 비교했다. 마침 공교롭게도 제가 수업이 없는 금요일 오전에 뉴트는 세 시간짜리 강의가 잡혀 있었고, 알맞은 기회를 잡은 민호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에 문을 여는 시장에서 공수해온 신선한 재료들로 한 상을 차렸다. 뉴트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기도 민망할 정도로 없었으니 아마 제가 한 짓인 것을 쉽게 알아차리리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올 뉴트가 호화찬란한 식탁에 어리둥절하고 있으면 그의 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 튀어나와 놀래켜 줄 생각이었다. 그 침착한 얼굴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웃길까. 스푼과 포크를 가지런히 진열하고, 머그잔 아래에 끼워둘 쪽지를 쓰며 민호는 키득키득 웃었다.
요즘 영 의욕도 기운도 없어 보이는 뉴트는 아마 약속이고 뭐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백발백중 집으로 곧장 올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수업을 마쳤을 그의 귀가 시간이 다 되었다. 아마 지금쯤이라면…. 훤하게 꿰고 있는 동선을 그리며 젖은 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고 창밖을 내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가방을 매고 빌라의 현관으로 들어서는 뉴트의 모습이 보였다. 민호는 망설임 없이 얼른 옷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졸업을 할 때까지 혼자 나와 살고 있는 뉴트의 집은 평범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곧장 보이는 낮은 문갑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TVㅡ그 반대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스프링이 꺼진 싱글 침대와 오아시스의 해체 전 포스터가 붙은 옷장. 딱히 주방과 침실의 경계가 없어 유일하게 분리된 공간인 욕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활이 방 한 칸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대학생의 싱글 룸이었다. 이른 오전부터 이어진 연강에 지친 모양인지 문고리를 돌려 닫자마자 한 쪽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백팩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은 그는, 싸늘함이 느껴지던 여느 때와는 공기가 다른 집의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뉴트는 위화감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식탁.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천천히 식탁 앞으로 걸음을 옮겨 잘 차려진 일인분의 식사를 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 오믈렛을 포함한 대여섯 가지의 음식들. 식탁 위를 구성하고 있는 메뉴마다 정성 어린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춘 그것들을 살피던 뉴트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자그마한 크기의 쪽지를 두터운 머그잔이 누르고 있었다.
「밥 좀 처먹고 다녀라. 냉장고가 그게 뭐냐?」
괴발개발 엉망인 필체는 굳이 이름을 써 놓지 않아도 쪽지를 남긴 이의 정체를 짐작케 했다. 언제나 말은 투박스럽게 해도 실은 그 누구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기고 걱정하는 제 친구의 옅게 그을린 얼굴을 떠올린다. …아침에 메시지 보내도 답장 없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냐. 쪽지를 손에 쥔 뉴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웃었고, 어둡고 좁은 틈 사이로 그 현장을 모두 지켜본 옷장 속의 민호 역시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헤치고 뛰어 나가 화들짝 놀란 뉴트의 마른 등을 호쾌하게 때리며, 먹고 기운 좀 내라는 응원만 해 주면 제가 생각한 이벤트는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아, 완벽해. 자신의 계획에 만족하며 민호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제 슬슬 나갈 타이밍인가.
그런데 상황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의자를 내어 앉아서 식사를 할 것처럼 굴던 뉴트는 갑자기 어디론가 걸어갔고, 민호는 시야에서 벗어난 그가 뭘 하는지 볼 수 없었다. 좁고 한정된 문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동체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도 쉽게 알아차릴 만큼 작은 방이라 틈을 조금이라도 넓게 벌렸다가는 성공을 코앞에 둔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해 슬쩍 문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아, 뭐하는 거야.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을 때 다시 뉴트가 나타났다. 그는 식탁으로 가지 않고 무언가를 시트 위에 내려놓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허리를 갑갑하게 만드는 버클을 풀고 바지를 조금 끌어내렸다.
뭘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다. 양감이 드러나 팽팽해진 속옷 안으로 손이 기어들어가는 광경을 보는 민호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 저 미친 새끼, 식욕보다 그깟 성욕이 먼저란 말야? 저렇게 먹음직스러운 밥상을 앞에 두고 딸을 치고 싶냐고!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확 뛰쳐나가서 뭐 하는 거냐고 놀래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는 시간에 누군가가 불쑥 끼어든다면 얼마나 놀랄까. 좁고, 어둡고, 밑위 긴 겉옷들이 머리 위를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공간 안에서 민호는 문득, 그 언젠가 방에서 야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덜컥 누나가 들어왔던 일을 떠올렸다. 꼭 제가 죄인이 된 것과도 같은 민망스러운 경험. 제가 지금 튀어나가면 뉴트 역시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아마 놀라서 기껏 세워둔 좆이 확 죽을지도 모른다.
결국 민호는 잠깐 장난을 쳐 볼까 하던 생각을 접었다. 그냥 같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챙겨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의리 같은 것이다. 그는 당시 제 누나가 도로 방을 나가며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나도 뭐 똑같은 놈이지만 하여튼 남자 새끼들이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웃은 민호는 둥글게 몸을 말아 무릎을 세우고 그 위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래, 친구에게 해피 타임을 즐길 권리 정도는 줘야지. 그는 지금쯤 몇 백 개의 폭죽과 별이 터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뉴트의 상상 속 상대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좋아는 하는데 고백은 못하고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는, 일전의 그 여자애일 것이다. 마치 맹수가 그르렁거리듯 낮게 억눌린 듯한 숨소리와 살갗이 부딪히는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만이 한동안 밀폐된 방 안의 정적을 메웠다. 그리고 손으로 무언가를 잡아 흔드는 마찰음이 점차 빨라지고 잦아질 때쯤,
“아, 민호….”
묘하게 야릇해지는 기분에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쓰던 민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시발, 들켰나? 이런 좋지 않은 타이밍에? 저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떠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무뎌졌던 감각이 되살아나듯 암순응이 되어 민소매 티셔츠의 성조기 무늬와 코트의 체크 패턴, 제 발치에 나뒹구는 가죽 클러치와 같은 옷장 안의 물건을 천천히 인지하고 있을 때, 마치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뉴트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잔뜩 쥐어짜내듯 앓는 음성은 분명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민호는 옷장의 틈 사이로 눈을 바짝 들이댔다.
얇은 커튼 천을 투과해 노곤한 햇빛이 쏟아지는 오후의 자취방. 창문과 마주보고 있어 시트 가 환하게 물든 침대 위, 잔뜩 여유를 잃고 달아오른 뉴트가 상체를 젖히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은 비틀어 질끈 깨물고,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 뉴트의 얼굴을 보자 민호는 저까지 낯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함께 지낸 친구 사이라 해도 이건 제 3자가 개입할 수 없는 지극히도 개인적인 부분이었고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뉴트의 시선은 줄곧 바지가 흘러내린 허벅지를 향하고 있었는데, 민호는 그제야 뉴트가 다른 한 쪽 손에 반찬삼아 들고 있는 것이 TV위에 올려져 있던 자신과 뉴트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작스럽게 옷장 속의 공기가 뜨거워졌다. 열대성 저기압. 스쳐 지나가는 미풍이려니 여긴 바람은 강풍과 집중호우를 동반한 태풍이 되어 망망대해 속 돛단배를 집어삼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풍에 휘말린 민호는 이미 태풍의 눈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뭐야….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으로 경악에 물든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쯤 절정에 이르러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한 번에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뒤처리를 할 것을 가지러 갔던 모양인지 뉴트가 곽에 든 티슈를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간신히 버클만 채운 차림으로, 침착하게 손을 닦으며 그는 두세 장의 휴지를 더 뽑아 액자를 문질렀다. 자신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담긴 그 액자에 무엇이 묻었는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눈썹께로 헝클어져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긴 뉴트는 바지 뒤춤에서 찾아낸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열기 섞인 숨을 뿜으며 미간을 문지르는 폼이 조금 피로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땀이 배어나와 꿉꿉해진 셔츠의 단추를 뜯으며 욕실로 걸어갔고, 곧 닫힌 문짝 너머로 샤워기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일련의 과정들을 빠짐없이 지켜본 민호는 떨리는 손으로 옷장 문을 밀고 나왔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빠져나와 다리를 내리고 침대가로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동안 그는 ‘사실은--’ 따위로 시작하는 가설들을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일종의 방어 기제들이었다. 사실은 나랑 이름이 비슷한 여자애라 내가 잘못 들은 거였다던가? 아님 사실은 옷장 사이의 문틈이 너무 좁아 내가 뭘 잘못 본 거였다던가?
그러나 침대 위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액자와 질척한 무언가를 닦는 데에 사용했을 휴지뭉치가 구겨진 채로 놓여 있었고, 분명 제가 요리를 할 때 환기를 시키고 다시 닫아 놓은 창문도 열려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틈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떠밀린 휴지뭉치들이 침대 위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제가 서 있는 공간 안의 모든 정황들이 제가 옷장 너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헛것 아닌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민호는 액자 속 같은 옷을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저와 뉴트의 모습을 보았다. 응원하는 축구 팀, 좋아하는 밴드, 즐겨먹는 식당 메뉴. 두 사람 모두 비슷한 행동양식과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였다. 그렇기에 더 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저와 절친한 또래 남자애가 자기 위로를 할 때 한 손에 누군가의 사진을 쥐고 있는 의미를.
아, 설마.
갑자기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누구냐고 말해 달라고 추궁할 때마다 답변을 하지 못하고 솜씨 좋게 화제를 돌렸던, 애인과 보내야 할 기념일에 제 집에 와 비디오 게임을 하며 하루 종일을 붙어 있었던, 그리고 고백을 해보라는 제안에 ‘눈치 없는 새끼라 안 돼.’ 쉽게 포기했던, 그 묘한 태도. ‘고백하면 놀랄 거야.’ 빙긋 웃고 말았던 표정 위로 아까 전 침대 위에서 거친 숨을 뱉던 낯선 얼굴이 일렁였다. 흥분에 단단하게 근육이 오른 종아리와 허벅지, 곱은 발끝, 팔뚝에 돋아난 힘줄. 정염에 젖은 얼굴로 제 물건을 쓸어 올리며 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상대가 나였다니, 아, 미쳤어. 미친 자식! 다시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계집애도 아니고. 오늘 하루 동안 저 답지 않은 일을 몇 번이나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각기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모두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머리를 비우던 민호는 일순 문 너머의 물소리가 멈추었음을 깨달았다. 아, 그래.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샤워를 끝낸 뉴트는 마른 타월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 욕실 문 앞에 널린 옷들을 세탁물 바구니에 던져 넣고 침대 위를 정리한 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액자를 원래 세워져 있던 TV 위에 올려 두었다.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유가 승리했던 몇 개월 전의 어느 날, 승리의 기쁨에 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엄지를 치켜든 사진 속의 민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방긋.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얼굴을 보는 뉴트의 다물린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성적 관리에는 소홀해도 훈련과 규칙적인 생활 패턴에 엄격한 너는 내게 먹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칼같이 고수하는 네 수면 시간을 앞당겨 잠을 쫓았겠지. 그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장을 보고, 강의 시간에 맞추어 아무도 없는 내 공간에 들어와 내 생각을 하며 나를 위한 요리를 굽고, 볶고, 삶고, 튀기며 네 시간과 정성을 쏟고. …허구한 날 퉁명스러운 대답에 타박밖에 할 줄 모르던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생각해 주었다니.
평소 정이 깊은 성격의 그가 저를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명확히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확인을 받자 새삼 기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뉴트는 허리를 굽혔다. 간질간질한 감정을 담은 입술 끝이 차가운 유리 위에 짧게 머물렀다. 아무도 없는 싸늘한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의식처럼 행하는 이 습관이 종종 스스로를 서글퍼지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치나 기르라지.”
실물을 두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건네며 뉴트는 마저 머리의 물기를 털고 창가로 걸어갔다. 홈웨어로 입는 반바지 하나만 걸친 채로 기지개를 쭉 펴며, 바람에 살랑대는 커튼을 걷고 반 쯤 열어둔 창문을 끝까지 밀었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고는 하지만 초가을의 날씨는 아직까지 따뜻했다.
물기 묻은 몸을 말리며 제법 나른한 기분을 즐기고 있던 뉴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창 밖의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곧 생각하고 있어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닐까. 제 빌라 앞으로 민호가 지나가고 있었다. 닮은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살고 있는 집은 고작해야 2층이었으므로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의 이목구비를 식별 못할 정도의 높이는 아니었다. 등짝에 학교 엠블럼이 그려진 훈련용 져지를 입고 저와 맞춰 산 러닝화를 신은 창밖의 남자는 분명 민호가 맞았다.
성큼성큼, 그러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보폭으로 걷고 있는 민호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뭔가 심사가 꼬인 사람 같았다. 걸음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멀쩡한 머리를 헝클고, 급기야 길가에 있는 음료수 캔까지 걷어찬다. 그러나 정작 날아간 것은 음료수 캔이 아닌 그의 신발이었다. ‘아오 시발!’ 모국어로 욕을 하며 -욕이라고 일러준 적 없었지만 그가 매번 그 말을 사용하는 상황과 억양을 미루어 보았을 때 욕이 틀림없었다- 민호는 저만치 굴러가는 운동화를 주우러 깨금발로 뛰었다. 하여간, 귀여워가지고. 마치 단막 개그의 한 장면과도 같은 모습이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뉴트는 픽 웃으며 등을 돌렸다. 허기에 굶주린 몸이 얼른 민호가 식탁위에 차려놓은 것들을 뱃속에 집어넣으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래, 식기 전에 얼른 먹어야지. 생각하며 옷장 앞에 서서 말끔한 티셔츠를 꺼내려던 뉴트의 눈에 못 보던 것이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밤색 지갑.
아깐 분명 못 봤던 건데…. 뉴트는 눅눅해진 타월을 목에 걸고 그것을 주워들었다. 사용감이 느껴지는 두 귀퉁이에 우측 아래 양각으로 박힌 브랜드의 로고. 굳이 지갑을 펼쳐 신분증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이 지갑은 분명 민호의 것일 테였다. 몇 개월 전 민호의 생일 때 비싸다고 못 받는다는 것을 제가 꾸역꾸역 선물한 것이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분명 말끔하던 바닥이었는데 왜 이게 여기에……. 골똘히 생각하던 그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는 옷장 문에 닿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문 밖으로 튀어나와 끼어 있는 제 집업 점퍼의 소매에.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제가 씻고 나온 후 늘어난 낯선 부분들을 의아하게 여기며 뉴트는 천천히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옷걸이 아래에 반듯하게 개어 차곡차곡 쌓아 올려둔 바지며 티셔츠들이 잔뜩 엉망으로 뭉개지고 무너져 있었다. 마치 누가 안에 기어들어가 정리해둔 그것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이거…… 요리 말고 또 다른 취미가 있었네.”
양쪽 다 끈을 반듯하게 동여 맨 운동화를 신고 지금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중일 민호를 생각하며, 뉴트는 들고 있던 지갑을 흔들었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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