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첫눈 / 메이즈러너 전력 60분
a 2014. 11. 15. 22:57 |적중률이 팔십 퍼센트를 넘어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고 지지하는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기상청의 예보대로라면 내일은 올해 첫 눈이 내리는 금요일이 될 예정이었다. 기온이 낮은 위쪽 지방이라면 ‘뭐야, 또 눈이야? 세차는 다음 주로 미뤄야겠네.’ 하고 무던히 넘기겠지만 이곳 A주의 주민들은 근 일 년 만의 눈 예보에 몹시 들떠 있었다. A주는 일 년 내내 온난한 기후로 좀처럼 눈 구경을 하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씨에 익숙하지 않아 소량이라도 눈이 쌓이면 도로가 마비되고,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지각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되며, 때문에 시청 공무원인 아버지가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기출근과 야근을 자청해야 한다고 짜증을 내지만, 그래도 불평 불만보다는 눈이 내린 도시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도시 전체에 로맨틱한 기운이 깃든다. 좀처럼 보기 힘든 존재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소 같았다면 저 역시 도시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일은 올해 A주의 첫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된 날임과 동시에, 민호의 학부 졸업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대학 4년의 과정을 마무리 짓고 수확의 결실을 얻는 날이다. 아마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니 그리 억울하진 않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총 네 과목. 시험을 하루 앞두고 새로운 문제를 풀이하는 것은 여러모로 시간 낭비였다. 그는 간결하게 기재된 요약본과 꾸준히 정리해온 오답 노트를 펼쳤다. 색색이 부착되어 있는 포스트잇 아래로 빼곡하게 필기된 활자들이 시야로 어지러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노트 귀퉁이가 닳을 때까지 읽어서 보고 있지 않아도 다음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발 시험 때도 이랬으면 좋겠는데…. 민호는 가지런한 앞니로 샤프 끝을 물었다. 아, 이 부분은 좀 약하니까 몇 번 더 읽어야겠지. 이해하기 편하게 예시를 들어 볼까. 플라스틱 뚜껑에 잇자국이 생길 정도로 그것을 자근자근 씹었을 때, 무의식중에 나온 그의 행동을 나무라고 저지하기라도 하듯 전공 책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방금 전까지 자문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는 그라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전화를 해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가 속을 알 수 없고 의뭉스러운 사람이니까. 민호는 굳게 닫혀 있는 제 방문을 향해 확인하듯 눈길을 주며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에요, 뉴트?
-통화 괜찮아?
“네.”
혹시 과외 구해?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학생회관 앞 게시판에 붙어 있는 구인지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고 돌아선 민호는 코앞으로 뛰어든 인영에 놀라 주춤 뒤로 몸을 물렸다. 갑작스럽게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저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정오의 햇볕이 내려앉은 밀빛 머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아 놀래라. 헤져서 물이 빠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딱 민호가 물러난 만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남자는 민호의 손에 들린 아이폰에 턱짓을 하며 재차 물었다. ‘과외 구하냐고.’ 민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주가 지나면 길고 긴 방학도 끝이었다.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 개강 후에는 속절없이 시간이 빨리 흐를 것임을 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쏟아지는 페이퍼와 중간 고사, 기말 고사, 그리고 졸업 시험. 시간이 반년도 남지 않았는데 민호는 아직도 공학 수학에 어설펐다. 중간고사와 기말 고사야 차치하더라도 졸업 시험 전까지는 무조건 마스터를 해야 했다. 과목별로 평균 점수를 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하고 그러면 자연히 졸업 또한 늦어지게 된다. 민호는 그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주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학금은 못 타더라도 최소 제 몫만은 성실하게 해내고 있구나 하는 인상만은 주고 싶었다.
'거기 붙어있는 그 애들이 성실하게 가르쳐 줄 지, 아님 술과 파티에 절어 수업을 펑크내고 네 돈만 떼어가는 선생이 될 지 어떻게 알고. 증명된 게 하나도 없잖아? 음, 어디 보자, 게다가 수업료가 아주 말도 안 되는 가격이네. 같은 학부생에게 그 돈 주고 배우느니 차라리 잠을 줄이고 독학을 하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네가 방금 연락하려고 한 그런 애들보단 차라리 훨씬 증명된 사람에게 배우는 게 어때?'
민호는 이 시점에서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는 그가 말하는 ‘훨씬 증명된 사람’이 본인을 지칭하는 것임을 눈치 챘다. 남자는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목걸이용 ID 카드를 꺼내어 민호의 앞에 내밀었다. 눈앞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몇 년 전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한쪽 귀퉁이에 찍혀 있었다. Newt Sangster, X 공대 소속 산업 진흥원. 명확히 증명된 학력과 소속이긴 했다. 그는 첨언했다. 이 쯤 되면 자질은 확실히 증명되었을 테고… 좋아, 인터뷰가 필요하다면 지금 해. 뭐, 어필 한번 해 볼까? 나한테 배우면 특별히 좋은 점? 앞으로 내가 네 과외수업을 하게 된다면 일단 펑크 따윈 없을 거야. 이건 맹세해. 왜냐면 지금 난 엄청나게 절실하거든. 적어도 잃어버린 이번 달 방값을 다시 마련하기 전까지는.
할 거지? 뉴트라고 부르면 돼, 우리 앞으로 잘 해보자.
그리고 뻗어 나온 그의 손이 제 손을 낚아채듯 끌어가 두어 번 흔들었다. 무언가 휘말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민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버린 지갑과 구멍 난 한 달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시작했던 과외는 그 이후로 반 년이나 지속되었고, 어느덧 민호는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책을 펴면 절반 밖에 손을 대지 못하던 공학 수학은 이제 졸업 시험을 무난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 유능한 과외 선생의 덕이었다.
기분 어때? 뉴트가 물었다. 민호는 미열을 발산하는 휴대폰을 뺨과 어깨 사이에 붙인 채 구석에 널브러진 백팩을 끌어와 유인물과 연습 노트를 꺼내었다.
“떨린다기보다는, 뭐….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래. 6개월 동안 고생 많았어. 타전공이라 내가 뭐라고 조언을 해 줄 순 없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 끊는다.
“뭐야. 더 할 말 없어요? 그게 다에요? 그래도 가르친 학생인데 시험 잘 보라든가, 뭐 그런 말 안 해줘요?”
-나는 상대방에게 부담 주는 말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할 말은 오히려 네가 있을텐데? 나한테 할 말 없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 말고. 너 지금 딱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거 있잖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마음을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젠장. 뭐라는 거야? 끊어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속살거렸다. 그의 음절 음절마다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단호하게 종료를 누르려던 손가락은 몇 번이나 빨간 버튼 위를 헛돌다 결국 차가운 테두리를 쥐었다.
-내일 끝나고 정문 앞에서 기다릴게. 저녁 같이 먹자.
저녁? 민호는 블라인드 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창밖의 풍경을 살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지만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 눈 온다던데요?”
-알아. 그것도 올해의 첫 눈이지. 그러니까 내일 보자고 하는 거야.
“뭐라고요?”
-…아, 세탁기 다 돌아갔네. 끊을게, 내일 봐.
어느새 종료되어 홈 화면으로 돌아간 액정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그 해의 첫 눈을 함께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건가. 눈을 내리깔고 잠시간 생각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 남자가 속설 따위를 믿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그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길 바라는 제 희망사항인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 가장 크고 무서운 착각이 저 사람도 설마 나를, 하는 기대라고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까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에 비춰진 기대감 섞인 표정을 애써 지워내며 민호는 샤프를 고쳐 쥐었다.
1. 메이즈러너 전력 60 분 ! 주제는 '눈'
2. 캐붕 주의 / 짝사랑하는 민호 같지만 과연 짝사랑일까
3. 글 속 민호 졸시 과목중에 공/학 수학 있다고 했는데 남의 전공 커리큘럼같은 건 1도 모르며
심지어 우리 과는 졸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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