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오해와 오해 上
a 2015. 1. 27. 00:58 |1. 상하로 나눌만큼의 퀄리티는 아닌데 그냥 뒷부분이 얼마나 늘어질지 몰라서 짧게 짧게!
2. 2014 최고의 사약: 오스본 가 설정..... 이젠 그냥 뉴트 원래 이름이 뉴트 오스본 같다
1.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등심구이입니다.”
벌써 육년 째 저택의 퍼스널 셰프를 맡고 있다는 남자는 과연 솜씨가 좋았다. 간략하게 메뉴 설명을 마친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두어 걸음 물러나 전면을 향해 한 번 더 허리를 굽혔다. 수고했어요, 롤랑. 뉴욕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타워의 꼭대기 층, 통유리 벽 근처의 사무용 책상에 앉은 젊은 남자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이제 제법 권위 있는 분위기를 갖춘 고용인의 미소에 새삼 경탄하며, 남자는 맛있게 드시라는 말과 함께 이사실의 문을 나섰다.
민호는 넓은 사무실 안을 가득 메운 냄새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진 식욕이 당기지 않는 상태였음에도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는 절로 군침을 돌게 했다. 잃어버린 입맛이 제자리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 값비싼 요리를 먹어보겠는가. 길게 망설이지 않고 나이프를 들었다. 롤랑의 친절한 설명 속에서 우육은 철분과 칼슘 함량이 높아 빈혈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보통은 한식이나 샌드위치로 식사를 해결하기에 익숙지 않아 뻣뻣하기 그지없는 칼질에도 육질이 훌륭한 고기는 부드럽게 잘렸다. 칼날에 짓눌리며 배어나온 육즙과 양파와 와인을 넣고 졸였을 소스가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렸다.
…아. 기대감에 부풀었던 민호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스테이크의 굽기 정도를 따로 말하지 않은 게 떠오른 것이다. 미디엄 레어. 짙은 핑크빛을 띈 단면은 상상하기 싫은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미친, 먹는 거 앞에 두고 이 무슨 불경한 짓이야. 그는 께름칙한 상상을 떨쳐내고 대신 사무실 내에 흐르고 있는 클래식 음악에 집중했다. TV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음악 시간에 익혔던 짧은 지식을 꺼내보려 노력했지만 학창 시절은 영 까마득한 과거였을 뿐더러 공대 출신인 민호는 이런 쪽엔 영 문외한이었다. 별 수 없이 포크로 한 점을 찍어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이사님, 검사 끝났습니다.
“들어와요.”
책상 앞에 앉은 남자가 내선전화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그의 비서실장인 진이 들어왔다. 투피스 차림의 옷맵시가 좋은 그녀의 손에는 머그잔을 받친 트레이가 들려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A등급이었습니다.” 보고와 함께 그녀는 남자의 곁으로 가 트레이를 내밀었고, 남자는 가늘고 마른 손으로 머그잔을 들었다. “그래요.” 결과를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음미하듯 숨을 들이마셨다. 흡사 원두커피의 신선한 향이라도 즐기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잔속에 든 것은 신선하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그와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민호는 못 본 것을 본 사람 마냥 눈가를 구겼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을 것 같던 고깃덩어리가 순식간에 찝찝해졌다. 스웨덴 공예 장인의 작품을 공수해와 더럽게 비싸다는 저 머그컵 안에 든 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아직 입 안에 든 것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음악에 집중하며 민호는 천천히 어금니로 볼 안쪽에 물고 있는 스테이크 조각을 으깨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머그컵을 기울이며 안에 든 액체를 호로록 들이키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삼키는 소리는 음악 소리에 묻혔지만 크게 오르내리는 목울대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꿀꺽. 그리고 와득, 깨물며 으깨어진 덩어리에서 터진 육즙이 입 안을 흥건하게 적셨다. 달짝지근한 소스와 고소한 살코기의 풍미 사이로 혀끝에 비릿하게 퍼지는 날 것의, 신선한, 저 멀리 앉아있는 남자 역시 홀짝홀짝 삼키고 있을 어떠한 맛.
울컥, 욕지기가 치밀었다. 민호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에 딸린 개인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몇 모금 남지 않은 것을 삼키며 그 뒷모습을 보는 남자의 눈빛이 둥글었다. 한 잔을 여유 있게 비운 그의 뺨에는 생기가 돌았다. 검붉은 잔여물이 묻은 윗입술을 혀로 훑으며 그는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음, 임신인가.
“서른이라……. 그래, 아빠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나이지.”
미처 삼키지 못한 것들과, 오늘 아침 먹은 것들까지 게워내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 뉴트 오스본은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2.
사건의 발단을 따지자면 꼭 민호가 오스코프 사의 인턴으로 채용되었던 이 개월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명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조금 모자랐지만 관련 분야에서는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공대를 졸업한 민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고, 졸업 후 몇 개월 동안 수 십 장의 지원서를 뿌리고 다닌 결과 그는 생각지도 못한 쾌거를 이룩했다. 차선책도 아닌, 설마 되겠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오스코프 사로부터의 인턴 채용 메일을 받은 것이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민호는 지금 보고 있는 지메일 계정이 제 것이 맞는지 눈을 비비고 재차 확인까지 거쳤다. 그도 그럴 것이, 과장 좀 보태어 연매출과 영업 이익이 이미 천문학적 단위를 넘어섰다는 의약업계의 그 대기업은 인턴사원 경쟁률도 무척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인턴사원으로 뽑히는 이상 웬만해선 정 직원으로의 전환이 쉬움을 다들 잘 알고 있는 탓일 테다. 정규직 공채 대신 길들여지고 검증된 인턴사원으로 제 식구를 꾸리는 것은 오스코프 사만의 차별화된 인사 전략이었다.
하필이면 같은 달에 아버지의 퇴직이 겹쳐 시기상으로도 무척 타이밍이 좋았다. 허리띠를 졸라맬 걱정을 하던 어머니는 안도했고, 그 동안의 마음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민호는 합격통보를 받은 날 귀갓길에 샴페인 한 병을 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서서 호구처럼 도와주고 그러지 마. 그거 다 형 손해야. 그냥 중간만 해, 중간만.’
평소라면 돈을 아끼느라 사지도 않았을 훈제 립의 포장을 뜯으며, 수습 기간이긴 해도 이제 사회인이니 제 밥값을 할 수 있다고 넉살 좋게 웃는 제 형에 비해 다소 시니컬한 구석이 있는 그의 동생은 세상물정을 일찍 깨친 애늙은이 같은 태도로 충고했다. 물론 승리감과 성취감, 환희에 도취된 민호가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제 막 대학교 입학한 게 사회생활에 대해서 뭘 안다고 까불어 인마.’
그러나 그렇게 머리나 쥐어박고 넘겼던 동생의 맹랑한 조언을 진지하게 새겨들었어야 했음을, 그 때의 민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예상 외로 민호는 연구개발 팀에 배치되었다. 전공 분야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의문이 들었으나 알다시피 많은 회사가 그러하듯 이제 막 학사 과정을 졸업하고 들어온 인턴사원에게는 그리 중대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 몇 주 동안은 그냥 통계 결과를 코딩하고 설문지나 세팅하는 단순 작업만 반복되었다. 아마 새 직장과 배정받은 팀에 적응할 기간이나 가지라는 사측의 방침 같았다. 그러나 민호는 민호대로 직장 생활에 첫 발을 디딘 사회 초년생 특유의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가로운 와중에도 할 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랩에 들어갈 물건 옮기기, 복사 및 팩스 심부름, 그 외에 비품 구매 및 기타 자잘한 잡무들…. 모두가 성실한 그를 보며 좋은 자세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올해 그의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해리 오스본이 취임 후 처음으로 사내 시찰을 돌기로 해 온 부서가 정신이 없던 날, 민호는 선임 연구원인 니콜을 다급하게 찾는 팀장의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손에는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으로 보이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으며, 때마침 니콜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전달만 하실 거라면 제가 다녀올까요?
유감이 있다는 듯 선뜻 봉투를 내어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팀장을 보며 민호는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어떤 미션이든 완벽하게 수행해 낼 수 있다는 신뢰감 넘치는 얼굴. 일종의 어필이었다. ‘음….’ 자신감 있는 태도가 먹힌 것인지, 아님 제출 시간이 촉박한 탓인지 -민호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팀장의 시선이 자꾸만 시계 쪽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민호에게 서류봉투를 넘겨주었다. ‘57층의 비서실에 가져다주면 되는 건데… 그…… 실수 없게 잘 좀 부탁합니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위 줄어드는 숫자를 망연히 바라보며, 특 1급의 기밀문서라도 건네는 사람처럼 엄청난 사명감을 떠넘긴 팀장의 태도를 되짚던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서류 하나 넘기는데 왜 저 야단이지.
안일한 태도는 결국 사고를 낳았다. 암갈색 카펫 위로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우수수 쏟아져 흩날렸다. 팀장님은 이럴 줄 알았던 걸까.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던 팀장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리 위를 떠도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허둥지둥 허리를 굽혔다. 제가 볼썽사납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로 옆으로 모퉁이를 돌면 비서실과 대회의실이 있고,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는 이사실과 전무실이 차례로 있었다. 누가 오면 어쩌지. 텅 빈 복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이 실수를 수습하고 싶었다.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몇 걸음 옮겨 흩어진 낱장들을 꼼꼼하게 줍고, 빠진 클립을 꽂기 위해 페이지의 순서를 맞춰보고 있던 민호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하단부의 숫자를 확인하다 문득, 평범해 보이는 서류봉투 하나에 유별나게 굴던 팀장의 태도가 떠올라 갑자기 이 안에 쓰인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인 탓이었다. 대체 뭐가 적혀 있길래……. 그러고 보니 전자결재나 사내 클라우드를 통한 정보공유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마당에 전자문서가 아닌 종이 위에 쓰인 서류라, 생각하니 좀 이상하기도 한 것 같았다. 민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표지 위에 쓰인 코드를 훑었다. A7. 봉투 안에 들어있던 서류는 연구 예산을 지원 받기 전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 팀에 보내지려 했던 보고서였다. 뭐, 거기까진 무척 평범했다. 그러나 민호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코드 아래에 적힌 문서의 제목이었다.
Project V? 우리 팀 이런 것도 하고 있었나. 물론 세세한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 순 없어도, 파티션 너머로 오가는 대화나 주간 회의 같은 것을 어깨 너머로 들은 탓에 민호는 대충 제 팀에서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지, 어떠한 약을 개발하고 있는지와 같은 대략적인 정보들을 꿰고 있었다. 개발 성과를 높이기 위해 각각의 팀들은 분업화를 하고 있었고, 지금 제 팀에서 맡은 프로젝트는 많아 봐야 두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단 이야기는 일절 들어본 일이 없었다. 기존에 진행하고 있는 두 가지 프로젝트 중에서도 역시 어느 쪽도 해당되지 않았다. 민호는 천천히 보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목차와 개요, 목적. 일목요연하게 기재되어 있는 활자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본 프로젝트에는 저명한 혈액 학자 테일러 캠벨과 마크 조슈아가 참여… 인공 혈액 대체제…… 오스본 가의 유전자를 분석……… 일반인들과 다른 염기 배열을 가지고 있으며… 혈액이 아닌 대체제를 음용하며 생활을 영속할 수 있게 함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
민호는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온 몸에 돋은 소름과 흥분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이성적이며 냉철한 판단을 하기 위해 애썼다. 방금 읽은 내용과, 제게 발생한 상황이 본사에서 일할 만한 자질을 가려내기 위해 인사부에서 꾸며낸 신입 사원 모니터링의 최종 관문 같은 게 아니라면 이 보고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민호가 이과를 선택하고 공대로 진학했던 것은 평소 정확분명하고 사실적인 것을 선호하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값을 넣으면 답이 나오는 수식처럼 객관적이고 눈에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만큼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들을 싫어했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추상적이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거나.
그러나 그의 훌륭한 상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민호가 유년 시절 인정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 십 장에 걸쳐서 하고 있었다. 정말로 믿기 힘들지만, 저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늘의 일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방금 막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셈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회사의 고용주와 그의 일가인 오스본 가문에 대한, 첨단 과학 시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이야기.
난 못 본 거야.
민호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페이지를 맞추고 클립을 끼웠다. 그리고 서류봉투에 그것들을 집어넣어 처음과 같은 상태로 반듯하게 접었다. 제 몸을 떠난 현실 감각이 되돌아오길 바라며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는 그 때, 낮은 그의 시야로 고급 원단에 감긴 다리와 말끔하게 닦인 구둣발이 나타났다. 그는 감히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경미한 배송 사고가 있었네요.”
상자는 열렸고 이미 한번 열린 틈 사이로 빠져나간 재앙은 다시 뚜껑을 닫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민호의 손에서 힘없이 봉투가 빠져나갔다. 싱긋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금발의 남자.
끊임없이 언급되고 있는 보고서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이 제 앞에 서 있었다.
3.
이십 여분을 꽂고 있던 채혈바늘을 빼고 알코올 묻은 소독 솜으로 그 자리를 짓눌렀다. 한참 동안 누워 있어 공들여 세운 머리가 망가지진 않았는지, 민호는 뒷머리를 몇 번이나 매만지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곧추세웠다. 몸 관리를 잘 하는 건강한 체질이라 특별히 어지럽다거나 메스꺼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났지만 아직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그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비서를 제외하고는 오가는 이가 없던 이사 실에 다시 한 번 낯선 이가 들어온 탓이다. 이번엔 핸드카트였다. 카트를 끌고 온 남자는 정해진 수순처럼 뉴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후 민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민호는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와 악수를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강세가 특이한 억양으로 미루어 보아 프랑스계로 추측되는 남자는 자신을 오스본 가의 퍼스널 셰프라고 소개했다. “뤽 롤랑입니다.” 그리고 민호가 앉은 접대용 테이블 위로 테이블 보와 수저 류가 빠르게 세팅되었다. 플레이트 커버를 열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훅 끼쳤다.
“발틱 해 산 훈제 연어와 뵈프 부르기뇽입니다. 철분을 보충할 수 있는 메뉴 위주로 만들어 보았는데 혹시 선호하시는 메뉴가 있으시면 다음부턴 그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예? 아뇨, 저, 그….”
선호하는 메뉴를 논할 것도 없이 이대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요리에 대해선 그저 어머니가 차린 밥상을 들거나, 혹은 허술한 정크 푸드로 끼니를 해결하는 정도로 지식이 없는 민호였지만 그런 그가 봐도 제 앞에 진상된 요리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시중에 내어 놓았을 때 얼마의 값에 판매될지 얼핏 보기만 해도 가격대가 짐작되었다. 여태 살면서 이런 요리를 제 돈 주고 사 먹은 적은 한 번, 아니, 확신하건데 한 번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걸 내가 그냥 먹어도 되는 걸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경청할 자세를 갖춘 요리사와, 그가 만든 황송스러운 요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민호는 이 모든 것을 지시한 책상 앞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처음부터 저만 보고 있었다는 듯 깍지를 낀 손 위에 얹은 얼굴이 꽃처럼 웃었다. “부담 갖지 말고 들어요. 식사가 끝나면 함께 준비한 철분제도 잊지 말고.”
하루 꼬박 벌어도 못 사먹을 정도로 비싼 음식을 부담 갖지 말고 들라고? 근로자들의 최저 임금이 얼마인지 알기나 하는 거, 아니, 대체 사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 거야? 그러나 뉴트는 그와 자신과의 괴리감을 새삼 깨닫는 민호의 패닉을 알 리가 없었다.
때마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이 연구실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연결해요. 그리고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첫 숟갈을 뜨는 민호에게 한번 눈길을 주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분석 결과 나왔습니다. A등급으로 판정되었고, 혈소판, 혈장 모두 정상 수치입니다.
“수고했어요. 보고서는 메일로 보내줄래요?”
요리가 기대 이상으로 입에 맞았던 모양인지 오전 내내 허기졌던 배에 음식물을 욱여넣던 그와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직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뺨을 씰룩대며 어설프게 웃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뉴트는 눈 꼬리를 휘었다. 만족의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역시.
그때 그렇게 문 밖을 나섰던 것은 신의 한수였다. 한 층 위의 사무실을 쓰고 있는 해리에게 들리기 위해 복도를 가로지르던 뉴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도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웅크려 앉아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정신없이 줍고 있었다. 허둥지둥하는 꼴이 영락없는 신입이었다. 뭐, 보나마나 심부름을 온 모양인데 저런 가벼운 실수 정도야. 평소 직원들에게 관대한 상사의 이미지를 내세우던 그는 가볍게 웃으며 다가갔다. 저 열혈한 신입사원이 일어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면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라도 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다소 불편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집요한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 느낌이 좀… 산업 스파이인가? 신약을 발표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성분까지 똑같은 약을 교묘하게 다른 식으로 베껴내는 게 의약 업계였으므로 그는 그런 부분에 무척 민감했다. 눈썹을 치켜 올린 뉴트가 그의 앞에 설 때까지 남자는 조금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서류를 훑고 있었다. 왜 이렇게 둔감해? 이 정도 경계도 없으면 아닌 건가. 정말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서 뉴트는 앉아 있는 남자의 정수리 위로 고개를 힐끔 내밀어 그가 보고 있던 보고서를 훑었다. Project V. 뉴트의 낯이 딱딱하게 굳음과 동시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온도가 다른 두 쌍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에 묻어난 경악과, 진실을 알게 된 자가 가진 약간의 두려움. 뉴트는 안도했다. 거짓말 못할 것 같은 얼굴을 보니 산업 스파이 감으로는 영 못쓰겠군. 평범한 인간보다 기민한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많이 놀랐나 봐요?”
“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어설프게 둘러댈 줄도 알고 귀엽네. 근데 얼굴에 티가 난다니까?
뉴트는 주머니에 꽂아 넣고 있던 양 손을 빼고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남자의 앞에 마주 앉았다. 눈 아래의 도톰한 살점이 파르르 떨렸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몸이 천천히 기울고 남자의 귓가로 얼굴을 가져간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체향을 맡으며 뉴트가 속삭였다. “……다 봤잖아.” 공명하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그을린 피부 위로 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정말이지 그 때의 표정이란. 뉴트는 단단한 팔뚝을 감아쥐며 남자를 일으켰다. 얼굴을 희끄무레하게 물들이는 실내조명이 아니어도 그는 이미 충분히 희게 질려 있었다. 그래, 산업 스파이는 아니고 어쩌다 이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가엾은 양인데 이걸 어쩌나. 제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당사자인 오스본 가의 형제들과, 오랫동안 그들을 모셔 온 사용인들, 그리고 ‘그 프로젝트’ 를 진행 중인 지하 연구소의 연구원 몇이 전부였다.
정말 요즘 같은 시대에 살생은 좀 아닌데. 썩 내키지 않는 해결책밖에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고민하던 뉴트는 눈의 깜빡임이 잦아지고 마른 침을 삼키는 남자를 훑었다. 저와 비슷한 키에 번듯한 수트를 빼입은 몸은 제법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고, 의욕적으로 걷어붙였을 소매 아래에 드러난 핏줄은 제법 탐스러웠다. 느긋한 눈길로 그 모습을 어루만지듯 감상하며 뉴트는 재차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한 번, 달큰한 체향이 후각을 자극하며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왔다. 이렇게 신선하기까지 한데, 으음…. 입을 꾹 다물고, 턱 끝을 천천히 문지르며 그는 공황상태에 빠진 남자의 앞을 천천히 활보했다.
대부분의 ‘그들’ 처럼, 뉴트 역시 젊은 성인 남성의 피를 가장 선호했다. 우선 조금만 빨아도 빈혈이다 뭐다 하며 비실거리기 일쑤인 여자들보다는 확실히 남자 쪽이 생존할 확률이 높았고, 또한 운동을 즐겨 하는 경향이 있는 그들의 피가 성분 면에서도 훨씬 깨끗했다. 게다가 흡혈 여부를 떠나 저, 얼굴. 비록 지금은 경황이 없어 평정심을 잃은 것 같지만 평소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 무척 금욕적일 것처럼 보일 칭키 아이도 무척 제 타입으로 구미가 당겼다.
마침내 느릿하고 여유로운 보폭으로 그의 앞을 가로지르던 발걸음이 멈췄다. 뉴트의 발길에 따라 졸졸 따라붙던 시선도 한 곳에 멈추었다. …더 이상 잴 것도 없겠군. 뒷짐을 진 채 우뚝 멈춘 몸을 빙글 돌리며, 뉴트는 형용 못할 긴장감이 감도는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건넸다. 자네, 담배 피우나?
“예?”
매끈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뉴트는 비스듬하게 턱을 들고 심판자와도 같은 얼굴로 첨언했다. 지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건데. 그러자 짧고 곧은 속눈썹이 여러 번 빠르게 눈꺼풀을 덮었다. “아뇨.”
“그럼 술은?”
“못 먹는 편은 아니지만…… 많이 마시진 않습니다. 그냥 친구들과 운동경기 볼 때 맥주 한 캔 하는 정도입니다.”
일종의 생활습관에 대한 질문이 무척 뜬금없을 법도 했으나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신중한 시선이 마지막으로 서류봉투를 안은 팔뚝에 머물렀다. 크고 체계적인, 그것도 제약 회사에 채용된 이상 당연히 그럴 리도 없겠지만 건강한 빛깔의 살갗 위는 주삿바늘 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래. 저 나름의 감정을 마친 뉴트는 확신에 찬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며 남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연구개발 1팀의 박 민호입니다.”
“민호? 그래요, 민호, 민……아 여보세요, 진? 그래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힘들게 일했을 당신에게 도움을 주려고 전화했어요. 요즘 업무가 많아서 좀 버겁죠? 구원 투수 보낼 테니 잘 가르쳐서 쓰도록 해요.”
나 말하는 거 아냐?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앞뒤 상황을 미루어 보아 저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는 말에 민호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고, 그의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르며 뉴트는 민호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열린 입구 안으로 몸을 밀어넣으며 뉴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비서실 앞으로 박 민호 씨가 갈 겁니다.”
당혹스러워 하는 얼굴이 점차 좁아지는 간격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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