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Not your fault
a 2015. 1. 20. 01:18 |1. 중2중2와 지지부진의 끗판왕
2. 할 말이 많은 글이긴 한데 음..
BGM:: Elliot Smith- Between the bars
1.
-파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실수로 잘못 눌렸다던가, 혹은 실수가 아니라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눌렀더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친절하게 재고의 기회를 주는 팝업창 위에 올린 손가락은 유감이 있는 모양새로 몇 번이나 액정 위를 헛돌다 이내 굳게 결심한 듯,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이게 마지막. 셔터로 묶어 멈춰버린 순간들이 모두 지워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친절한 팝업창이 떠올랐다. 「갤러리에 사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방금 전 제가 지운 마지막 것까지 포함해 모든 사진이 지워진 휴대폰의 사진첩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몇 초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아 결국 액정이 까맣게 변해 버릴 때까지, 민호는 제 손에 들린 자그마한 기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문득, 안드로이드 로봇이 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생동하게 살아 펄떡이는 것이 아닌, 차가운 쇠붙이로 빚어 낸 심장을 품고 있는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 이 휴대폰처럼 데이터베이스에서 파일을 삭제하거나, 혹은 포맷을 하면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인간의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은 뇌이니까 심장은 상관없나.
어찌 됐든 사람의 뇌는 기계적인 프로그래밍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이 아니었으므로, 휴대폰과는 달리 순간순간의 추억들을 단번에 쉽게 지워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강제로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은 독이 되어 앞으로 더 얼마나 제 속을 먹어치울 것인지. 사실 가장 지우고 싶은 것은 휴대폰 속의 사진 몇 장이 아닌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이었다. 시간이 약이다. 이 말을 종교처럼 믿고 살아온 세월이 이십 육 년이었다. 과연 이번에도 착실한 신자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시간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마법을 보여줄까.
‘우산 없어요?’
역시 잊고 싶은 기억은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게, 끝까지 남아 몇 번이고 되풀이 된다. 거꾸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던 도중 민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목소리였다. 그리고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아직 모든 것에 낯설고 서툰 신입사원 민호가 고개를 돌리면 그의 뒤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브루넷. 분명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나 아직 이름을 익히지 못한 그녀는 핸드백에서 작은 삼단 우산을 꺼내 내밀었다. ‘쓰고 가요, 난 하나 더 있으니까.’ 과연 그녀의 팔목에는 커다란 장우산 하나가 더 걸려 있었고, 곧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창밖의 빗줄기를 보며 민호는 일단 우산을 받아들었다. 무뚝뚝한 성격에 감사를 표현하느라 그는 한참 말을 골랐다. ‘우산을 두…개 가져 오셨네요…?’ 훨씬 괜찮은 선택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다는 말이 하필 저런 거였다. 나중에 커피 한 잔 살게요, 라든지 깨끗하게 잘 말려서 돌려드릴게요 등등의 그럴싸한 답안들은 이미 말이 입 밖을 떠난 후에야 생각났다.
말도 더듬은 것 같은데. 머저리! 등신새끼! 마음속으로 골백번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으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전에 사무실에 하날 두고 갔었거든요. 언젠가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 빌려줄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었나 봐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 꼬리와 봉긋하게 솟아오른 광대, 웃을 때 찡그려지는 한 쪽 눈썹. 비 내리는 건물 밖, 비가 내리지 않는 건물 안 모두 우중충한데 그녀의 주위만큼은 화사했다. 꼭 비온 뒤 구름을 걷고 해가 뜬 것처럼. 그 순간 민호는, 제가 멍청하게 말을 더듬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 때문인지, 아님 본인도 깨닫지 못한, 입 밖으로 내긴 섣부른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민호는 비오는 날의 신세를 갚겠다며 그녀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모국의 땅을 못 밟은 지 칠 년은 된 민호에게 그녀는 지난 해 여름휴가 때 다녀온 한국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상상 그 이상으로 즐거운 자리였다. 두 사람이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횟수는 한 번, 두 번, 세 번으로 자꾸 늘어났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어간다고 느꼈던 어느 날, 퇴근 후 함께 보았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그녀가 팔걸이 위에 얹은 민호의 손을 잡았을 때, 저보다 한 마디나 작은 손 사이로 깍지를 끼며 민호는 서두르지 말아야지, 욕심내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의 연애에 행복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푹 빠진 대부분의 남자가 그러하듯 민호는 제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연인의 손에만 신경을 기울이느라, 자신의 반대편 손 틈으로 빠져나가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 놓치고 있는 것이 자신을 만날 때마다 항상 하얗게 자국이 남는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과도 같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행복의 대가는 아주 컸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회사 비상구에서 남편과 통화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고, 연이어 1층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일하는 지미로부터 확인사살-‘아, 제인 씨요? 아드님이랑 살 거예요. 남편 분도 계신데, 건축업에 종사하셔서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으시다구.’-까지 당했다. 이제 그 어마어마하게 큰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쌓았던 추억을 모두 지우고, 아직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을 억누른 채, 민호는 내일 그녀에게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의 끝을 고할 것이다.
막상 전화를 걸어 내일 얼굴을 보자는 말을 전하려니 망설여졌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그러고 보니 여태 주말에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저 혼자 연애라고 명명했던 것을 하는 동안, 그녀는 주말에 뭘 했을까. 여느 어머니들처럼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근교로 낚시를 가는 남편의 도시락 같은 것을 챙겨 주었을까.
사실 민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이번 달부턴 끊는다, 끊는다 하던 담배를 꺼내었다. 손이 자주 가는 서랍에 넣어놓았던 걸 보아하니 끊는다는 건 그냥 말뿐인 다짐이었던 모양이다. 몇 개피 남지 않은 것들 중 하나를 빼어 물고 라이터의 부싯돌을 굴렸다. 칙, 칙 불을 붙이는 소리가 시원찮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름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증정 받아 집에 모아뒀던 것들은 월초의 강력한 금연 의지와 함께 죄 내다 버렸다. 정말 끊을 거면 담뱃갑도 같이 버렸어야지. 일말의 여지를 남겨둔 스스로를 탓하며 가스레인지 앞으로 걸어갔다. 밸브를 돌리고, 점화 후 담배 끝에 열기를 붙인다. 타일 벽에 한 손을 짚고 기대어, 한 모금 빨고 입 밖으로 빠져나간 연기가 집 안의 건조한 공기와 뒤섞이는 것을 보고 있던 민호는 이따 마트에 들릴 때 새 라이터를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담배는 끊을 수 없겠다. 지금은 더 더욱.
전화가 온 것은 그 때였다. 창가 옆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휴대폰의 벨소리를 들으며 민호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래, 사진은 지웠는데 저걸 바꾼다는 걸 깜빡했구나. 샴페인 수퍼노바. 가사가 예쁘다며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였다. 좁은 방 안을 메우는 노엘 갤러거의 목소리에, 민호는 천천히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가 얼마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와 있었는지 생각했다.
발신자는 사무실에서 그저 데면데면하게 친한 동료였다. 이제 내일이면 주말인데 무슨 일이지. 의아하게 여기며 그는 큼, 큼, 잔뜩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회사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성실하고 밝은 청년의 목소리가 나왔다. 인위적인 느낌으로 들리지 않길 바라며 한번 숨을 고른 후에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2.
교통사고.
정상 속도로 운행하고 있던 차가 비틀대다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고 있던 트럭과 그대로 충돌한 모습이 그대로 담긴 CCTV 자료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핸들 조작 실수가 아니었겠냐, 고 그들의 몇 없는 친척이 고개를 기울이고 소곤거리는 것을 어깨 너머로 들었다.
비가 그친 직후의 습윤하고, 무거운 공기와 땅으로 돌아간 두 사람을 위한 기도문이 부부의 이름으로 나란히 새겨진 묘비 위에 내려앉았다. 민호는 안개가 낀 듯 어슴푸레하고 불분명한 머릿속으로 새 묘비에 쓰인 문구를 읊었다. Love is gonna save us. 참된 박애주의를 설파하던 어느 성직자의 자서전 제목 같기도 했고, 낭만과 자유를 외치는 로큰롤 그룹의 노래 가사 같기도 했다.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리라. 상투적이고 흔한 표현이었다.
그는 물었다. 전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동의하시나요. 정말 사랑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면, 적어도 거기 그렇게 잠들어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깊이는 얕았어도 자신이 준 것은 분명 사랑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통해 구원받았을까. 자문하던 민호는 애초부터 서로가 상대방에게 갖는 감정의 온도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손바닥의 체온을 나누며 함께 영화를 보고, 거리를 함께 걷는 동안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자신이 사랑을 속살거릴 때 그녀는 항상 애매하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에는 수줍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백일도 되지 않은 그간의 일들을 되짚던 민호는 새삼 놀랐다. 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녀에게는 그저 진한 호감 정도의, 아주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건 틀린 질문이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민호의 셔츠 깃, 그 위로 드러난 목 새로 음습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민호는 잘게 어깨를 떨며 제 등 뒤에서부터 스쳐간 바람의 자취를 쫓았다. 제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고 지나간 바람은 묘비의 맨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마른 소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스산한 바람에 금발의 머리가 흩어졌다.
저렇게 다 큰 아들이 있는 줄 몰랐어요. 몇 명 없긴 했지만, 한참 앞에 서 있는 친척들이 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말하는 행정복지 팀의 브로디와 진의 대화를 들으며 민호는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처음 지미에게서 제인이 아들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왠지 그녀의 아들은 제인과 닮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추측했었다. 그리고 소년의 부친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은 금발과 길고 여린 목, 하지만 성인 남자의 그것과도 같은 마르고 단단한 등이 몸을 틀어 조문객들을 위로하는 그 담담한 옆선에서 민호는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닮았구나.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고, 언젠가 그녀와 남편의 존재가 사람들로부터 잊혀 질 때쯤, 전혀 다른 곳에서 그를 만나면 완전히 잊고 있던 그간의 기억과 감정, 생각을 불러올 수도 있을 만큼.
‘사실 저는 제인 씨 결혼하신 줄도 몰랐는걸요. 정말로 너무 동안이셔서 우리 또래 같았잖아요.’ 브로디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더라도 브로디는 그녀와 한 사무실을 쓴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것이 제인의 외모 탓이 아니고 평소 그녀가 사소한 업무만 담당했던 계약직이라 그냥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민호는 따져 묻고 싶었다. 브로디의 후회어린 목소리가 침울하게 늘어졌다. ‘정말 아는 게 없었네… 자주 얘기라도 나눌 걸 그랬어요….’ 제가 감히 속단할 수 없지만, 사실 죽은 동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뒤늦게 후회하는 얼굴들이 진심인지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곳에 온 것도 그저 의무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회사 동료였으니까.
그러나 그 허울 좋고 정당한 사회적 관계 덕에 민호는 지금 이 곳에 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뒤에서 소곤거리는 그녀들처럼 회사 동료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포장하면서. 만약 제인과 저에게 회사라는 교집합이 없었더라면, 처음 만난 곳이 회사 로비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그녀의 아들과 친척들에게 뭐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것인가. 적당한 핑계가 없었을 텐데 애초에 여기에 올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그녀가 차려주는 식사를 들고, 그녀와 남편이 꾸린 가정 아래에서 자라왔을 아이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물론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 가정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도 몰랐고, 그녀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을 사회의 손가락질로부터 숨겨줄 방패가 될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잘못이 그녀의 탓도 아니었다. 민호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한 발짝 물러서 철저히 제 3자의 입장으로, 조금만 더 냉철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면 얼마든지 그녀가 결혼한 여자라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터였다. 반지 자국과 주말에 만나자고 하면 어물어물 넘어갔던 태도, 뒤늦게야 발견한 그것들만 봐도 충분히 미심쩍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잠든 자는 말이 없다. 도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당연히 그 누구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은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민호 하나뿐일 것이다. 안도로 풀어지는 얼굴을 하던 민호의 시선 끝에 다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덜 여문 소년의 어깨가 걸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이 덮이게 된 것에 대해 안도하다니, 제가 ‘다행’ 이라 여긴 죽음으로 인해 묘비 앞에 서 있는 소년은 부모님을 잃고 이 험한 세상에 저 혼자 남았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민호는 뺨을 굳히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추악스러워. 이보다 최악일 수가 없다.
3.
7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는 이유가 출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천의 무역센터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맞추어 짜인 일정은 목요일 저녁까지였다. 평일이라 각자 살기 바쁜 친구들은 못 만나더라도 출장 기간 동안만큼은 어머니가 차려주신 그리운 집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으나 그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사실 말이 좋아 통역 업무였지 오전 중으로 무역센터에서의 일이 끝나면 민호는 하루 종일 부장에게 끌려 다니며 운전기사와 관광 가이드 노릇을 했다. 하룻밤 새에 없던 건물이 올라와 있거나 혹은 사라지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게 서울인데 칠 년 만에 보는 저라고 달리 알겠는가. 그는 하루 종일 운전석 옆에 아이패드를 세워 놓고 검색을 하느라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집에서 먹은 것은 결국 마지막 날 밤의 저녁식사 한 끼 뿐이었다.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신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첫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동생의 이야기 같은 것은 시간이 없어 물어 보지도 못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2박 3일의 일정은 빠르게 종료되었고, 금요일 새벽 비행기로 다시 런던에 돌아와 보고를 마쳤다. 박람회에서 둘러본 업체들이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담당이사는 수고의 의미로 뒤풀이를 제안했고, 방금 막 그 뒤풀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두세 명의 상사들을 모두 캡에 실어 보낸 참이었다. 장시간의 비행에 피로를 제대로 풀지도 못한 몸이 온통 찌뿌둥했다. 저도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택시를 탈 생각이다. 딱히 길 막히는 시간도 아닌데 그냥 블랙 캡 탈까, 음주 후 습관적으로 나오는 버릇으로 담배를 빼어 물고 도로 쪽으로 막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 때,
마음속에서 밀봉해둔 유리병이 깨져 그 안에 찰랑이던 내용물이 서서히 흘러나오듯, 거짓말처럼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감정이 그대로 돌아왔다.
민호의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 그녀의 얼굴을 빼어 닮은 소년은 얄팍하고 날렵한 수트 차림으로 옆 건물의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호는 제 손에 들린 것에 불을 붙일 생각도 못하고 그를 보았다. 필터 끝을 자근자근 씹으며,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 그것을 무표정하게 들여다보는 데 여념이 없는 그는 민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트!’ 그리고 그가 기대 서 있던 건물의 출입문을 밀고 나온 여자가 그를 발견한 것인지, 민호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부르며 얼른 계단을 내려와 그의 뺨에 키스했다. 소년은 옅게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아 토닥이는 손길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슬립 원피스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골적인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민호는 건물의 간판을 확인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네온사인. 그가 너무나도 편하게 기대어 서 있는 저 가게도, 헐벗은 차림을 한 여자도 아직 어린 소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밤을 집어삼킨 이 거리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단정하게 내려와 있던 머리를 손질해 올려 그때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풋풋하고 어린 티는 숨길 수 없었다. 일행이 있었던 모양인지, 금세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거리 끝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소실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호는 이내 홀린 듯, 본능적으로 다가가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그의 손목을 쥐었다. 사납게 올려다보는 얼굴에 그는 확신했다. 맞구나.
“너, 왜 이런 데서 일해?”
“……뭐야. 사람 잘못 본 거 아냐?”
미간을 모으고 눈썹을 치켜 올리는 그를 보며 흠칫, 단단한 손목을 잡은 아귀의 힘을 풀었다. 민호는 소년이 제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소년은 민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잊고 있던 사실을 한 발 늦게 인지하자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 장례식 날에 저와 마주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소개도 하지 않고, 그냥 수많은 회사 동료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당연했다. 만약 소개를 했을지라도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소년이 모친의 회사 동료라며 방문한 사람들의 얼굴 한 명 한 명까지 기억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민호는 바싹 마른 윗입술을 축였다. 제인의 회사 동료. 물론 표면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수많은 회사 동료들 중 한 명에 불과한 제가 무슨 각별한 사이라고 그녀의 아들 일에 참견한단 말인가. 소년은 제 팔목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이 상황을 매끄럽게 해결하기 위한 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중인 민호를 훑었다. 마치 탐색하듯 시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게…,’ 끝을 얼버무리며 분주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민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오만하고 어린 눈동자는 제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흡사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새였다.
“아, 뭐, 새로운 식의 접근인 건가. 신선하긴 하네.”
“뭐?”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남자도 안 될 건 없지. 돈만 준다면.”
그제야 저 느긋한 시선이 제 아랫도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꼭 싸구려 남창 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며 민호는 혀를 억척스레 움직였다. ‘…그런 거 아냐.’ 단호하고 담백한 태도에, 상대방의 속을 꿰뚫어 보고 있으리라 자만했던 소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럼 말고. 나 이제 일하러 가야 하거든. 가 봐도 되지?’ 짧아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민호는 그가 돌아갈 ‘일터’ 를 보았다. 불야성의 거리 한 복판에 있는 가게답게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무척 화려했지만 그 너머까지 화려하고 아름답진 않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았다. 약과 술에 절어 섹스와 웃음을 사고 파는 사람들. 그런 쪽으로는 영 흥미가 없다 못해 싫어하는 편인 민호였지만, 그 역시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었기에 본의 아니게 그런 곳에 가본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대략적인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덜 자란 소년 역시 그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을까. 저 근사하고 어린 얼굴로 가짜 미소를 짓고, 하룻밤의 저를 돈 주고 산 누군가의 젖가슴을 주무를까.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에서 털지 못한 재가 뚝, 뚝 떨어져 보도블록 위를 수놓았다.
불분명한 감정들이 취기 올라 무거운 몸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것이 아직 그녀에 대해 정리하지 못한 감정인지, 아님 단순히 양친을 잃고 친척들에게도 거둬지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거리로 내몰린 소년에 대한 동정심인지 알 수 없지만, 저 굳건한 척 하는 껍데기 너머의 유약하고 곪은 속이 너무나 훤히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붙잡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명목이 없다. 담배를 비벼 끄고 돌아서는,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해. 나랑 자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계산해 줄 수도 있어.”
코끝을 훔치며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오르려던 등이 우뚝 멈추었다. …그래?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 민호와 눈을 마주했다. 반듯한 입꼬리를 길게 늘려 웃는 얼굴에서 두 달 전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겹쳐 보였다.
4.
안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온통 젖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극은 통증과 흥분을 동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감이 고조되자 생리적인 눈물이 맺히고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생경한 감각에 온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어느 쪽이야?’ 소년이 셔츠의 단추를 끌러 주며 물었을 때, ‘박는 것보단 박히는 게 좋아.’ 하고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는 데 경험이 많은 것처럼 과시하듯 말했던 것은, 민호가 잠시 후 그와 있을 섹스를 자신에게 주는 체벌 비슷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의 옆집에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온 게이 커플이 살고 있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침대 삐걱이는 소리를 일주일에 서너 번씩이나 들으며 민호는 아무렇지 않게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아파 죽겠다며 꺽꺽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게이 섹스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구나, 라는 사실을 본의 아니게 학습하게 되었다.
제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 이 가엾은 소년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고통도 없었으면 했다. 그를 아프게 하기 싫은 마음에 마치 벌 받듯 제가 등을 대고 눕겠다 한 것인데, 이렇게 쾌감이 늘어나면 곤란했다. ‘안 풀어도 되니까 그냥 해.’ 시트를 쥐어뜯던 손을 어깨 위로 올리자 갈라진 둔덕 사이를 집요하게 살피고 있던 얼굴이 허벅지 너머로 올라왔다. 예쁜 얼굴이 상냥하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그냥 하면 아플 거야.’ 물론 아프겠지. 하지만 쾌락이 아닌 고통을 위해 택한 것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대답 대신 채근하듯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끌어 올리자, 순순히 딸려 올라온 몸이 고개를 갸웃대며 자신의 드로즈를 끌어내렸다. 뭐 급하면 어쩔 수 없고. 근데 정말 아플 텐데…. 배려심 깊은 말과는 달리 그의 아래는 이미 성을 내며 꺼떡이고 있었다. 소년은 무릎을 세워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왔고, 곧 몸속으로 밀려드는 흉포한 느낌에 민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5.
쫓기는 꿈을 꾸었다.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붙잡혔다. 쫓기고, 잡히고, 또 다시 쫓기고, 또 다시 잡히고. 민호는 무릎에 손을 얹고 가파른 숨을 내쉬었다. 마치 패배자와도 같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등 뒤의 햇빛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말했다. 넌 지구를 도는 달처럼 평생 내 주위에서 맴돌게 될 거야.
눈을 떴을 땐 이미 한낮이었다. 커튼이 미처 가리지 못한 채광이 머리 위로 쏟아져 눈을 찡그렸다. 몇 시쯤 됐으려나. 출근 시간에 맞춰 설정해놓는 알람 때문에 항상 제 팔이 닿는 사정거리에 휴대폰을 두는 민호는 머리맡을 더듬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손에 잡힌 것은 줄무늬 패턴의 베갯잇이었다. 보드랍고, 폭신하고, 제 것이 아닌. 그제야 낯선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입주 초부터 한 번도 도배를 하지 않아 때가 탄 벽지가 아닌 실크 벽지가, 치우지 않은 시리얼 그릇과 신문지가 무질서하게 쌓인 좌탁이 아닌 고급 협탁이 각각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곳은 자신의 좁은 아파트가 아닌 호텔 룸이었다. 테이블 위, 포장이 뜯긴 채로 나뒹구는 일회용 칫솔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어느새 헤드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앞이 벌어진 샤워 가운만 걸친 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그의 차림새를 보자 비로소 지난밤에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났다. 민호는 누운 자세 그대로 턱을 집어넣고 가슴팍까지 올라와 있는 이불을 들추어 보았다. 간밤의 일을 상기시켜주는 자국이 온 몸에 울긋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허벅지 안쪽이 근육통에 시달리는 것처럼 아팠다. 이 정도라면 아마 서 있을 때도 후들후들 떨릴 것 같은데. 그는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램 챠우더 수프, 괜찮아? 룸서비스 부탁했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 아무거나 시켰어.”
평온한 목소리. 소년은 민호 쪽으로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말했다. 뒤척거리는 움직임에 잠에서 깬 것을 용케 안 모양이었다. 베개에 짓눌린 머리 아래로 팔을 접어 넣고, 민호는 허리 아래로 불쾌감과 둔통이 느껴지는 몸을 천천히 돌려 누우며 소년의 옆얼굴을 훑었다. 각이 져 남성미가 두드러지는 이마를 따라 내려오면 보이는 짙은 눈썹, 콧대. 둘 다 끝이 날카롭고 곧았지만 콧망울은 작고 둥글어 어린 인상을 주었고, 곧게 뻗어있는 콧대가 시작되는 미간에는 습관처럼 자주 찡그리는 표정 탓에 옅게 음영이 패였다. 그리고 밤색의 눈동자를 덮고 있는 속눈썹과 평평한 뺨 아래에 위치한 입술, 하관을 이루는 턱선은 무척 섬세하고 얇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을 더디게 흘러가는 것처럼 만드는 예쁜 얼굴이다. 그러나 소년은 결코 외모처럼 예쁘고 온순하기만 하진 않았다. 얇고 가는 입술에서 나오는 험한 욕설과 거친 몸짓은 그 사실을 증명했고, 민호는 지난 밤 그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그렇게 순수히 소년의 얼굴에 경탄하던 그는, 소년이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는 휴대폰이 자신의 것임을 눈치챘다. 반사적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이 떠오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제인과 주고받은 메시지며 통화 기록, 사진 같은 것들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잠시 멈추었던 신체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고 머릿속에서 무질서했던 명령 체계가 다시 순서대로 나열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추스른다. 경직되어 뻣뻣하던 어깨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
“뭐…해?”
겨우 뱉은 첫 마디의 목소리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제야 소년은 민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불이 들어와 있는 휴대폰 액정을 들이미는 눈빛이 둥글었다. “번호 저장했어.”
민호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막 저장한 주소록의 이름을 읽었다. 뉴트 아이작. 분명 아이작 뉴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 테다. 사과가 중력의 이끌림으로 땅에 떨어졌듯이, 아주 당연하게, 너 또한 중력만큼 강력한 인연에 이끌려 부모님의 품으로 떨어져 안겼겠지.
뉴트…. 중얼거리듯 제 이름을 부르는 민호에게 소년, 뉴트는 웃으며 물었다. 순서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이름이 뭐야?
“…Min.”
“그게 다야?”
“…Minho. Minho Park.”
“한국인이지?”
“어떻게 알아?”
“자주 보는 드라마에 한국인 수사관이 나오는데,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붙이더라. 한국에 대해선 잘 몰라. 미안.”
그렇게 말한 뉴트는 다시 두툼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와 제 몫의 베개 위에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민호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 사과처럼, 빛나고 싱그러운 얼굴이 있었다.
“애인 없지? 그럼 앞으로 나랑 자주 봐. 돈 안 줘도 돼.”
천진한 표정으로 그는 민호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톡, 건드렸다. 애정과 장난, 호기심 그 사이의 호의적인 감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민호는 밤새 울어 부르튼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무것도 알 리가 없는 뉴트가 재차 물었다. 들떠 보이는 표정이 10대 소년 특유의 느낌처럼 짓궂었다.
“솔직히 말해 봐, 처음이었지?”
“…….”
“맞나 보네. 처음인데 그렇게 꼬실 작정을 했어? …아, 오해 마. 싫다는 거 아니니까.”
“너를…… 거기서 꺼내 주고 싶어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살짝 그을린 얼굴의 이곳저곳을 쓸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진심이야?” 민호는 제 뺨을 쓸던 손 위로 제 손을 다독이듯 겹쳐 쥐었다. 거의 다 자란 뉴트의 손은 민호의 것보다 한 마디가 더 길었다. 민호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런데서 왜 일해, 위험하잖아.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난 뉴트에게 다짜고짜 건넸던 첫 마디를 반복했다.
“학비와 생활비가 필요해. 돈을 빨리 모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타고난 게 껍데기뿐인걸.”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차라리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편이 좋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두 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엄마의 외도 때문에.”
아빠 모르게 만나는 남자가 있었더라고. 마치 어제 본 드라마 줄거리를 서술하듯 담담한 투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민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인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만나고 있던 상대는 자신이 아니었던가. 심장이 끝없이 깊고 어두운 수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엄마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건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어. 내가 본 것만 해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거든. 외로움을 잘 타는 분이셨어. 아빠는 항상 일 때문에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씩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지. 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엄마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낯선 차, 운전석에 앉은 남자와 키스를 하는 엄마를 봐도 아무 말 할 수 없었어. 어렸던 나에게도 와 닿을 정도로 아빠의 빈자리는 컸으니까. 아빠는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매달 엄마와 내가 쓸 생활비를 보내 주었지만, 아빠의 부재와 거기서 비롯된 공허함은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 그 공허함과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엄마는 옳지 않은 방법을 택했고… 돌아온 아빠가 우연히 그걸 알게 된 거야. 추궁하고, 부정하고, 한동안 격렬하게 싸우더라고. 차 안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아니었음 아마 영영 몰랐을 거야.”
“…….”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아들과 당신의 어깨가 필요했던 젊은 아내를 두고 홀로 외국으로 떠난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어떻게 원망하겠어. 가족이잖아. 세상에서 나에게 유일무이한 애정을 주는 사람들인걸.”
원망과 그리움의 빛이 섞인 눈동자 속의 제 모습이 마구 흔들렸다. 새카맣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아직까지 보호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소년에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애정을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를 바닥없는 수렁으로 떠밀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제인의 사랑, 자신의 행복. 민호가 취하고 싶었던 것들은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었으나 잠시나마 그것을 가졌다는 이유로 더 무겁고 견뎌내기 힘든 것들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옭아맸다. 제인과 그녀의 남편이 죽은 것도, 부모를 빼앗긴 소년이 혼자 넓은 세상에 남게 된 것도, 아직 미성숙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가 스스로 그늘 속에 걸어 들어가도록 만든 것도.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섣부른 욕심에서 기인된 일이였으며, 짧은 행복의 대가였다.
뉴트로부터 소중한 존재를 앗아간 절도범, 부모를 죽인 살인자. 내면의 목소리가 스스로를 힐난하며 생채기를 냈다.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민호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숨어 열 달을 버티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암전이 찾아왔음에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뉴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몹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민호의 안색을 살피며 뉴트는 그의 짧고 까만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아, 미안. 이런 얘긴 좀 불편하지? 민호는 감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니, 술이 덜 깨서… 계속 해.
“내가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지 알아? 처음이었거든, 민호 당신이. 남자든, 여자든 이 얄팍한 천 조각 너머에 숨겨져 있는 몸은 궁금해 하면서 오늘 아침에는 뭘 먹었는지, 일은 할 만한지, 퇴근 후에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어떤지. 진짜 나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아. 살결을 부딪치고 박거나 혹은 박히면서 다들 본인 얘기만 하거든. 실적이 안 오른다, 애인이랑 사이가 안 좋다, 직장 상사가 좆같아서 스트레스다…. 뭐 본인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 사람인지 자랑 반 하소연 반으로 늘어놓는 그런 것들 있잖아. 물론 나는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그 모든 것을 받아 내야 하지. 자기 옆에 누워 숨을 고르고 있는 사람의 비참한 삶에 비하면 본인의 고민은 얼마나 가벼운 것들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투정을 말이야. ……아, 뭐, 그래. 어쩌면 안 물어 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돈을 주고 나의 하룻밤을 사고, 나는 돈이 필요해 그 사람들에게 나의 하룻밤을 내어주는, 이해관계로 묶인 사이니까. 말하자면 이 일회용 콘돔 같은 거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걸로 끝나는.”
“…….”
“처음에 나한테 물었었지, 왜 하필 이런 일을 하냐고. 그래, 당신 말대로 이것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겠지. 레스토랑 서버, 피자 배달, 하다못해 편의점 파트타임 같은 거라도. 생각해보면 높은 급여라든지 팁, 많은 돈을 빠른 시간 내에 모을 수 있다는 장점 같은 건 사실 다 핑계인지도 몰라. 돈을 받고 사람들과 섹스를 하면서 아마 난…… 허전한 외로움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외로움?”
“그래, 외로움. 이렇게 따뜻한 살갗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고 있으면 아주 잠깐이나마 외로움이 덜해져. 같이 일하는 애들은 이런 날 보고 애정 결핍이라고 하더라. …그래, 맞을지도 모르지.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애정이 필요해. 이제 부모님의 애정은 받을 수 없으니까. 비록 화목한 가족의 관계로 묶이기엔 너무 틀어져버린 부모님이더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는데.”
아마 누군가에게 처음 보였을 속내일 테다. 하룻밤 상대의 체온으로 가질 수 없는 애정을 대신하며 그동안 얼마나 위태롭게 최근의 나날들을 버텨왔을 것인지. 민호는 거짓과 가식을 내려놓은 뉴트의 얼굴을 쓰다듬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결국 그의 뺨에 돋아난 솜털 끝에도 닿지 못하고 도로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내가 그를 위로하고 걱정할 자격이 있을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소년의 외로움은 다 저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이성보다 앞섰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민호?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뉴트를 보며, 민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입술을 가르고 낮은 숨이 빠져나왔다. “찾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어머니가 만났다던 남……자 말이야.”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면 너는 나를 용서해 줄 거야?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은 하지 못했다. 뜻밖의 물음에 뉴트는 누운 자세 그대로 팔꿈치만 세워 머리를 괴었다. 그는 어렵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어떻게 하긴.” 그리고 이불 속에서 꺼낸 다른 한 쪽 손이 민호의 시야에 점점 가까이 스며들었다.
“콱.”
턱 끝에 차오른 숨을 황급히 뱉었다. 칼날보다 예리한 손아귀가 숨통을 틀어쥐었다. 잠시 놀라 바르작대던 민호는 이내 체념의 빛이 짙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래, 이대로 죽여 줘.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목을 죄던 압박이 사라지고 다시 머릿속에 산소가 돌았다. 피가 몰려 벌겋게 물들었던 이마와 뺨 역시 제 빛깔을 되찾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표정이 가장 먼저 보였다.
“죽일 거야.”
하하, 뭘 그렇게 놀라? 해끔한 얼굴로 그는 민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초가을의 햇볕과 그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먼지 입자들,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얇은 입술이 민호의 뺨에 스쳤다. 결 좋은 밀빛 머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민호의 어깨 위에서 뭉그러졌다. ‘오늘 약속 없으면 나랑 저녁까지 같이 보내지 않을래?’ 오만함과 경계심을 내려놓은 어리광. 자주 다니는 거리에 있다는 케밥 집, 한식당, 와플 가게 같은 것들을 조잘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민호는 결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그러나 혀끝에서 간지럽게 맴돌던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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