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중률이 팔십 퍼센트를 넘어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고 지지하는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기상청의 예보대로라면 내일은 올해 첫 눈이 내리는 금요일이 될 예정이었다. 기온이 낮은 위쪽 지방이라면 ‘뭐야, 또 눈이야? 세차는 다음 주로 미뤄야겠네.’ 하고 무던히 넘기겠지만 이곳 A주의 주민들은 근 일 년 만의 눈 예보에 몹시 들떠 있었다. A주는 일 년 내내 온난한 기후로 좀처럼 눈 구경을 하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씨에 익숙하지 않아 소량이라도 눈이 쌓이면 도로가 마비되고,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지각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되며, 때문에 시청 공무원인 아버지가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기출근과 야근을 자청해야 한다고 짜증을 내지만, 그래도 불평 불만보다는 눈이 내린 도시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도시 전체에 로맨틱한 기운이 깃든다. 좀처럼 보기 힘든 존재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소 같았다면 저 역시 도시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일은 올해 A주의 첫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된 날임과 동시에, 민호의 학부 졸업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대학 4년의 과정을 마무리 짓고 수확의 결실을 얻는 날이다. 아마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니 그리 억울하진 않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총 네 과목. 시험을 하루 앞두고 새로운 문제를 풀이하는 것은 여러모로 시간 낭비였다. 그는 간결하게 기재된 요약본과 꾸준히 정리해온 오답 노트를 펼쳤다. 색색이 부착되어 있는 포스트잇 아래로 빼곡하게 필기된 활자들이 시야로 어지러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노트 귀퉁이가 닳을 때까지 읽어서 보고 있지 않아도 다음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발 시험 때도 이랬으면 좋겠는데…. 민호는 가지런한 앞니로 샤프 끝을 물었다. 아, 이 부분은 좀 약하니까 몇 번 더 읽어야겠지. 이해하기 편하게 예시를 들어 볼까. 플라스틱 뚜껑에 잇자국이 생길 정도로 그것을 자근자근 씹었을 때, 무의식중에 나온 그의 행동을 나무라고 저지하기라도 하듯 전공 책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의아한 표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방금 전까지 자문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는 그라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전화를 해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가 속을 알 수 없고 의뭉스러운 사람이니까. 민호는 굳게 닫혀 있는 제 방문을 향해 확인하듯 눈길을 주며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에요, 뉴트?
-통화 괜찮아?
“네.”
혹시 과외 구해?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학생회관 앞 게시판에 붙어 있는 구인지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고 돌아선 민호는 코앞으로 뛰어든 인영에 놀라 주춤 뒤로 몸을 물렸다. 갑작스럽게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저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정오의 햇볕이 내려앉은 밀빛 머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아 놀래라. 헤져서 물이 빠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딱 민호가 물러난 만큼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남자는 민호의 손에 들린 아이폰에 턱짓을 하며 재차 물었다. ‘과외 구하냐고.’ 민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주가 지나면 길고 긴 방학도 끝이었다.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 개강 후에는 속절없이 시간이 빨리 흐를 것임을 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쏟아지는 페이퍼와 중간 고사, 기말 고사, 그리고 졸업 시험. 시간이 반년도 남지 않았는데 민호는 아직도 공학 수학에 어설펐다. 중간고사와 기말 고사야 차치하더라도 졸업 시험 전까지는 무조건 마스터를 해야 했다. 과목별로 평균 점수를 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하고 그러면 자연히 졸업 또한 늦어지게 된다. 민호는 그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주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학금은 못 타더라도 최소 제 몫만은 성실하게 해내고 있구나 하는 인상만은 주고 싶었다.
'거기 붙어있는 그 애들이 성실하게 가르쳐 줄 지, 아님 술과 파티에 절어 수업을 펑크내고 네 돈만 떼어가는 선생이 될 지 어떻게 알고. 증명된 게 하나도 없잖아? 음, 어디 보자, 게다가 수업료가 아주 말도 안 되는 가격이네. 같은 학부생에게 그 돈 주고 배우느니 차라리 잠을 줄이고 독학을 하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네가 방금 연락하려고 한 그런 애들보단 차라리 훨씬 증명된 사람에게 배우는 게 어때?'
민호는 이 시점에서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는 그가 말하는 ‘훨씬 증명된 사람’이 본인을 지칭하는 것임을 눈치 챘다. 남자는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목걸이용 ID 카드를 꺼내어 민호의 앞에 내밀었다. 눈앞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몇 년 전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한쪽 귀퉁이에 찍혀 있었다. Newt Sangster, X 공대 소속 산업 진흥원. 명확히 증명된 학력과 소속이긴 했다. 그는 첨언했다. 이 쯤 되면 자질은 확실히 증명되었을 테고… 좋아, 인터뷰가 필요하다면 지금 해. 뭐, 어필 한번 해 볼까? 나한테 배우면 특별히 좋은 점? 앞으로 내가 네 과외수업을 하게 된다면 일단 펑크 따윈 없을 거야. 이건 맹세해. 왜냐면 지금 난 엄청나게 절실하거든. 적어도 잃어버린 이번 달 방값을 다시 마련하기 전까지는.
할 거지? 뉴트라고 부르면 돼, 우리 앞으로 잘 해보자.
그리고 뻗어 나온 그의 손이 제 손을 낚아채듯 끌어가 두어 번 흔들었다. 무언가 휘말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민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버린 지갑과 구멍 난 한 달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시작했던 과외는 그 이후로 반 년이나 지속되었고, 어느덧 민호는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책을 펴면 절반 밖에 손을 대지 못하던 공학 수학은 이제 졸업 시험을 무난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 유능한 과외 선생의 덕이었다.
기분 어때? 뉴트가 물었다. 민호는 미열을 발산하는 휴대폰을 뺨과 어깨 사이에 붙인 채 구석에 널브러진 백팩을 끌어와 유인물과 연습 노트를 꺼내었다.
“떨린다기보다는, 뭐….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래. 6개월 동안 고생 많았어. 타전공이라 내가 뭐라고 조언을 해 줄 순 없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 끊는다.
“뭐야. 더 할 말 없어요? 그게 다에요? 그래도 가르친 학생인데 시험 잘 보라든가, 뭐 그런 말 안 해줘요?”
-나는 상대방에게 부담 주는 말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할 말은 오히려 네가 있을텐데? 나한테 할 말 없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 말고. 너 지금 딱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거 있잖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마음을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젠장. 뭐라는 거야? 끊어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속살거렸다. 그의 음절 음절마다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단호하게 종료를 누르려던 손가락은 몇 번이나 빨간 버튼 위를 헛돌다 결국 차가운 테두리를 쥐었다.
-내일 끝나고 정문 앞에서 기다릴게. 저녁 같이 먹자.
저녁? 민호는 블라인드 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창밖의 풍경을 살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지만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 눈 온다던데요?”
-알아. 그것도 올해의 첫 눈이지. 그러니까 내일 보자고 하는 거야.
“뭐라고요?”
-…아, 세탁기 다 돌아갔네. 끊을게, 내일 봐.
어느새 종료되어 홈 화면으로 돌아간 액정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그 해의 첫 눈을 함께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건가. 눈을 내리깔고 잠시간 생각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 남자가 속설 따위를 믿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그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길 바라는 제 희망사항인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 가장 크고 무서운 착각이 저 사람도 설마 나를, 하는 기대라고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까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에 비춰진 기대감 섞인 표정을 애써 지워내며 민호는 샤프를 고쳐 쥐었다.
1. 메이즈러너 전력 60 분 ! 주제는 '눈'
2. 캐붕 주의 / 짝사랑하는 민호 같지만 과연 짝사랑일까
3. 글 속 민호 졸시 과목중에 공/학 수학 있다고 했는데 남의 전공 커리큘럼같은 건 1도 모르며
“크리스마스 말이에요. 그런 날 집에만 처박혀 있어야 한다니…. 아아, 연애하고 싶다아~.”
정작 연말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연애의 ‘연’ 자도 못 꺼내게 될 걸?
소금구이로 유명한 고기집의 한 테이블을 꿰차고 있는 일행들 중 가장 체구가 작지만 사무실의 팀원들을 이끄는 대담함과 통솔력은 모두 저 쿨한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책상을 들인 순으로는 팀원들 중 가장 막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의 접시 위로 잘 익은 고기 서너 점을 적선하듯 얹어주며 윤 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가망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고기나 드시죠, 미스터 그리니?
이제 일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발 좀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아, 뭐, 팀장님 말대로 제가 골 때리는 짓을 많이 하는 건 인정하지만요, 제 기발한 아이디어 덕분에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잘 풀린 적도 있었잖아요?
풋내 나는 별칭으로 저를 부를 때마다 이렇게, 익숙한 레퍼토리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변함없이 일행들에게 놀리는 재미와 보람을 선사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만큼은 조용하다. 이제 제법 손에 익었지만 쥐는 폼은 여전히 엉망인 젓가락질로 기름장에 적신 고기를 집어 삼키고, 정작 본인은 몇 점 먹지도 못하고 고기만 굽고 있는 윤 팀장으로부터 집게를 빼앗듯 건네받은 토마스는 불판 위에 자글자글 익고 있는 목살을 뒤집었다. 첫 번째 회식 때 자신만만하게 제가 굽겠다 나서 결국 비싼 생삼겹을 세 판이나 태워먹은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제법 뒤집고 빼는 타이밍을 맞출 줄 안다. 이게 뭐 별 거라고 마치 모니터 안의 오류를 잡아낼 때처럼 미간을 모으고 집중하는 폼에 윤 팀장은 웃으며 반 쯤 남은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집게로 불판 위를 긁어 제법 익은 그것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얇게 썰린 양송이를 얹으며 토마스가 입을 떼었다. ‘그래요, 성탄절 날 근무 안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죠. 그날마저 사무실에 처박혀서 특근하라고 시켰으면 정말로 우울했을 거예요.’ 지사장님이 크리스챤이라 천만 다행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 묻어났다.
“뉴트 씨는 계획 있어요?”
“…어?”
“또 혼자 딴 세계 여행 중이셨구만. 크리스마스 때 뭐 할 거냐고요.”
일주일간의 업무피로가 누적이 되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와서도 포기할 수 없는 축구 경기를 챙겨보고 자서 수면이 부족해 그런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피로한 몸은 알코올의 기운에 쉽게 잠식되었다. 초점 없이 테이블 어딘가로 던져두었던 시선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두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제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고기며 채소를 우겨 넣은 토마스의 쌍꺼풀 짙은 눈이 깜빡거리고, 막내 팀원의 비어있는 술잔에 소주를 꽉 눌러 담던 윤 팀장이 소주병을 들고 멈춘 자세 그대로 되짚듯이 물었다. 약속 있어요, 그날? 그제서야 뉴트는 물고 있던 젓가락을 기름기 가득한 테이블 위에 놓고 입 꼬리를 끌어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어, 아뇨. 저도 뭐 그냥 집에서 쉬는 거죠.
“잘 됐네. 그럼 이브 날 저녁에 모여서, 우리끼리 다음 날 새벽까지 올나이트 하는 거 어때요? 뭐 두 사람이 원한다면 그날 하루 제 자취방을 오픈하죠. 좀 좁긴 하지만 남자 셋이 끼어서 자는 데는 문제없을 거고, 아, 플레이 스테이션도 있거든요? 맥주랑 피자 시켜서 다 같이 위닝이나….”
“장난해? 매일같이 사무실에서 보는 이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금 같은 휴일 날도 봐야겠어?”
“와, 진짜 너무하다. 윤 팀장님, 우리가 지긋지긋해요?”
두 사람이 아웅다웅 다투는 것도 벌써 일 년째 봐온 광경이었다. 지금이야 톰과 제리처럼 서로에게 잡아먹을 듯이 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사내의 유일한 리버풀 광팬이었다. 저렇게 다퉈 놓고도 리버풀이 아스날이나 첼시 등의 클럽 빅 매치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날이면 직원 휴게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함께 Gerrard is GOD을 외치며 대단한 동지애를 형성하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기에 뉴트는 그냥, 저 만담에 가까운 말싸움을 만류하기보다는 술안주 삼아 구경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컨디션도 안 좋은 것 같으니 오늘은 이거 한 잔만 마시고 그만 마셔야겠네. 술이 반 정도 차오른 소주잔을 기울였고, 곧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맛에 절로 코끝이 찡그려졌다. 예리한 모양새의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며 뉴트는 재빨리 입안을 헹굴만한 것을 집어 삼켰다. 신선하고 텁텁한 맛의 생당근이 아삭아삭 씹혔다.
“그래, 지긋지긋하다. 어쩔래!”
“윤 팀장님은 왜 저한테만 못되게 구세요? 여직원들한테는 안 이러시잖아요?”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핏대를 올려가며 다투는 제 일행들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제법 견디기가 무안하여 그는 괜히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켜 보았다. 까만 액정 위로 비치던 제 얼굴 대신 환한 빛이 쏟아지고 오늘의 날짜와 시간 따위를 알려주는 잠금 페이지가 떴다. 뉴트는 속눈썹을 느리게 팔락거리며 몇 자리 숫자의 나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토마스의 말대로 이번 크리스마스도 여기서 지내게 되었다. 이제 밤에는 코트를 걸쳐도 서늘할 정도의 날씨. 벌써 한국에서 맞는 세 번째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뉴트가 올해로 사 년째 몸을 담고 있는 W사는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다. 비단 한국뿐이랴, W사는 본사가 위치한 런던에서도 아는 사람들보다는 모르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소규모 사업체였다. 대담함을 넘어서 지나치게 모험정신이 강한 W사의 회장은 회사가 국내 업계에서 대충 발을 붙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예상보다 십 년은 앞서간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 본토도, 유럽도 아닌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것.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임직원 모두가 시기상조라며 회장의 계획을 우려하고 그냥 이직할까, 를 한 번쯤은 고려해보고 있을 그 때 마침 회장의 계획을 실현할만한 소스가 들어왔다. 한국의 L사에서 영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에이전트를 구한다는 입찰 공고였다.
그들 역시 감히 확신하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며 제출한 입찰 제안서는 예상 외로 쟁쟁한 경쟁 업체들을 제치고 L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창립한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업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이름만 존재하다시피 했던 해외지원팀은 젊고 유능한 새 이사 아래 빠르고 체계적으로 재구성되었다. 리젠트 스트리트 어딘가에 지사가 설립되었고, 본사를 대표할만한 인재들이 대거 런던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는 기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L사에서는 이번 사업을 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고 있었기에 W사 역시 자사의 직원들을 한국으로 파견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인사부의 눈에 띈 것이 엉뚱한 영업팀에서 일하고 있던 뉴트였다.
외근을 다녀오자마자 벼락같이 떨어진 호출에 어리둥절하게 이사실로 들어섰던 뉴트에게 그의 하늘같은 상사 벤 크록포드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질문을 건넸다. ‘미스터 뉴트, 한국어 제법 한다면서요?’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벤의 손끝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흔들렸다. 풋풋함을 감출 수 없는 옛 사진이 부착된 뉴트의 인사평가서였다.
아무튼 이사의 그 한 마디에 짐을 꾸려 한국에 발을 붙인 지가 어느덧 삼 년이 되었다. 이제 반 년 정도가 남았다. 이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삼년 반이면 될 거라고, 이후 런던에 돌아왔을 때 고속 승진과 그에 상응하는 연봉 인상, 복지 혜택 등을 약속했지만 말이 좋아 삼년 반이지, 두 회사의 계약 기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삼년 반이 될지 오년 반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런던 지사에서 나날이 상승하고 있다는 L사의 수익률을 들은 뉴트는 그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넣었다. 어머니 아버지, 내년 추수감사절 때도 저는 못 갈 것 같으니 저를 보고 싶거든 그냥 두 분이 한국으로 오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런던에 비해 생활비도 훨씬 적게 들고, 날씨도 안정적이며, 음식도 입에 맞았다. 한국은 확실히 생활하기에 좋은 나라였다. 하지만 끊김 없이 축구중계를 볼 수 있는 인터넷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종종 템즈 강과 런던 아이, 익숙한 모국의 언어가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존재했다.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을 하면 브리프케이스를 받아들며 수고했다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어머니가 아닌 불 꺼진 좁은 자취방이 저를 반길 때 푹 꺼진 매트리스 위에 쓰러지듯 누워 뉴트는 고향 땅을 떠올렸다. 그렇게 이역만리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사람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은 적도 있었으나 결국 그 향수병을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해준 것 또한 사람이었다. 일 년 전 부족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뉴트와 마찬가지로 W사에서 파견근무를 나온 토마스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모두 맨체스터에서 보내고 귀국한 윤 팀장이 그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셋은 한두 살 터울로 나이까지 비슷했다. 마음이 곧잘 맞았던 세 사람은 지금처럼 근무가 끝난 날 이렇게 소주도 곧잘 기울이곤 하였다. 회식 때마다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차올라 곤혹을 치르고 반 죽는 시늉을 하던 토마스가 이제는 소주 밑잔 깔면 안 된다며 정수리 위로 빈 잔을 엎는 걸 보면서 뉴트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제 한국사람 다 됐네.
“그럼 크리스마스 전에 술자리라도 주선해 볼까? 옛날에 유학원 통해서 알게 된 여자애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이 근처 근무하거든. 한 명은 스페인에 있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고, 어, 한 명은 영어가 좀 서툴 텐데….”
“오! 얼굴 봐요. 어때요? 예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왜 저한테만 못되게 구냐는 둥 언성을 높여 가며 팀장의 발언에 공격적으로 응수하던 토마스는 돌연 그게 다 뭐였냐는 듯한 얼굴로 메신저 주소록을 확인하는 윤 팀장의 옆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아, 예쁘긴 한데 너무 매섭게 생겼다. 예전 여자 친구 생각나서 싫어요. 저는 좀 이렇게, 눈 쫙 올라간 것보다 좀 청순한 게 좋던데.’ 정신없이 품평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고개를 들어 제 선배를 챙기는 여유를 발휘한다. 아니 뉴트 씨, 그렇게 젓가락만 물고 있을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란 말이에요. 한 번 보기나 하라는 듯 윤 팀장의 손에 들린 아이폰을 향해 턱짓을 하는 토마스를 보며 뉴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아, 난 정말 괜찮은데…….
“뉴트 씨가 됐다니까 어쩔 수 없네. 미팅 결렬.”
“아니, 왜?! 이건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온기와 애정이 절실한 사람이고, 뉴트 씨는 연애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고요. …근데 그러고 보면 뉴트 씨도 이상하네. 외국 생활 외롭지 않아요? 아님 저 한국 오기 전에 만나던 사람 있었어요?”
“아닐 걸. 그죠? 나도 삼 년 동안 뉴트 씨 보면서 딱히 연애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음, 혹시 런던에 두고 온 애인 있어요?”
저를 두고 벌어지는 갖가지 추측을 흥미롭게 듣고 있던 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애인 없는데. 윤 팀장은 의자 등받이에 마른 등을 기대고 상체를 젖혔다.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한국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아, 혹시. 큰 눈이 좌우로 구르다 순식간에 우뚝 멈추었다. 더 이상 식욕이 당기지 않는지 일치감치 수저를 내려놓고 낀 팔짱을 풀고, 그가 젖혔던 상체를 숙이며 적당한 거리로 다가왔다.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어딘가 주저하는 것 같으면서도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물어 오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혹시 한국사람 별로에요? 아니 뭐랄까,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고 기호의 문제니까요. 음. 저는 이해하거든요, 그런 거.’ 이번에는 손까지 들어 보이며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아이디어로 먹고 사는 직업의 폐해인 것인지 상대방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절반을 앞서나가 지나치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생각의 고삐를 붙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게 아니면 정말로 언제 토마스랑 다 같이 자리라도 만들어 줄 테니까 그 때 나와요. 부담 주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집에 있는 것보다야 사람도 좀 만나고 복작복작 사는 게 좋잖아요. 그러다가 좋은 인연 만나면 더 좋은 거고. 말해 봐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으음…. 뉴트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고 턱 끝을 문질렀다. 양념이 강한 파절임을 하릴없이 뒤채고 있던 토마스가 보기를 제시해 주었다. 얼굴 봐요? 아님 몸매? 아, 껍데기보단 마음 뭐 이런 구닥다리 멘트 하려면 집어 치우세요. 어차피 우리끼리 말하는 건데 뭐 어때요? 어물쩡 대답하고 넘어가려던 속셈이 간파 당하자 뉴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선택지가 두 가지로 좁혀진다면 별 수 없다.
“난 얼굴보단 몸매. 미끈하게 잘 빠진 몸 보면 보기 좋잖아요. 핫하고.”
오 역시! 토마스는 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제 선배의 말을 경청했고 뉴트는 말을 덧붙였다. 몸매 잘 빠지고, 귀염성 있는 스타일이 좋지. 피부는 마냥 흰 것보단 조금 그을린 게 예쁘고.
“그거 섹시하면서 귀여운 매력도 갖춘 사람이 좋단 얘기 아녜요?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뉴트 씨 취향 은근히 까다롭네. 그거 정말 어려운 건데.”
“그러게요. 아! 그 주말 저녁에 S방송국에서 하는 드라마 여주인공 그런 스타일 아니에요? 윤 팀장님 보세요 그거? 배우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그, 키 좀 큰데 얼굴 까무잡잡하고….”
이모 여기 밥 세공기요! 불판 좀 빼주시고요! 호출 벨이 따로 없어 크게 소리치는 윤 팀장의 옆에 앉은 토마스는 휴대폰 액정을 두드렸다. 회사에서 보급용으로 나눠 준 기종의 운영체제가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모양인지 구글 앱을 켜 검색을 하는 머리통이 연신 갸웃댔다. 아, 그 드라마 제목이 뭐였더라. 뉴트 씨는 그거 안 보세요? 법정 드라마 같은 건데, 기억 날 듯 말 듯 한데 그게 아…. 근데 여하간 그런 스타일 맞죠? 네?
그러나 영국에 있을 때부터 뉴트는 드라마 같은 것을 본 적이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학교를 다니고 취직 준비를 하느라 늘 바쁘기도 했고, 필연을 가장한 우연, 운명론적 로맨스, 뭐 이런 간질간질한 것들이 저와는 영 딴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영국에서도 보지 않은 드라마를 한국이라고 열심히 챙겨볼 리가 없다. 게다가 업무에 쫓겨 좁은 자취방에 있는 TV를 켜는 시간이라고는 아침 뉴스를 볼 때와 반나절 시차가 나는 EPL을 볼 때뿐이었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 반,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한 수단 반으로 예능이며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 봐 한국 연예인들의 이름을 제법 꿰고 있는 토마스와는 달리 뉴트는 정말로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것이 전무했다.
아! 얜가? 한XX?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얻은 토마스가 들뜬 목소리로 윤 팀장에게 휴대폰을 떠넘겼다. 얘요, 얘!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동료를 보며 뉴트는 미미하게 웃었다. 어느 여배우의 사진을 들이민다고 한들 제 취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제 취향은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몸매가 탄탄하고 귀여운 ‘남자’ 지 여자가 아니니까. 열심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으므로 뉴트는 애꿎은 고기만 우물거렸다.
열기를 발산하는 불판 앞에 앉아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님 적당히 도는 취기 때문에 그런 건진 잘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겠지. 얼굴이 뜨거워지고 온 전신에 열이 올라 찬바람을 쐬며 조금 걷고 싶었다. 저녁식사 겸 술자리가 파한 후 윤 팀장과 토마스를 각각 택시와 대리기사 편에 실어 보낸 뉴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찾아 물며 가게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기가 목덜미 새를 파고 들어와 저도 모르게 코트의 깃을 여몄다. 올해는 작년보다 추위가 일찍 찾아왔다. 작년 이맘때는 이 정도로 춥진 않았었는데…. 물론 일교차가 크게 벌어지는 이 날씨가 며칠간의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다가올 겨울이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7월생으로 한여름에 태어난 뉴트는 겨울과 추위엔 쥐약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겨울은 영국의 겨울보다 배로 춥게 느껴졌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지리적 이유 때문인지, 아님 외로운 타향이라는 심리적 이유 때문인지, 아무튼 한국에서 보낸 두 번의 겨울은 영국에 있을 때보다 견뎌내기가 힘겨웠다. 뉴트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귀찮아서 벽장에 처박아 두었던 겨울용 침구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누군가와 한 이불을 덮고 잠들던 시절에는 내가 아닌 상대방을 생각해서라도 때가 되면 일찍이 꺼내곤 했는데,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자연히 나 자신에 대한 배려도 소홀하게 되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런던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이내 그 생각을 그만두고 절친한 친구인 갤리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 취할 정도로 마시지도 않았지만 왠지 어머니라면 제가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건 사실을 용케 눈치 챌 것 같았다. 당신이 배 아파 낳고 기른 자식이라 그런 것인지 어머니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뭐 그런 것들. 어머니의 육감은 언제나 정확했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장성한 아들이라 하더라도 시차가 반나절이나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염려가 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혹여나 타국 생활이 힘들어 술을 마신 게 아닌가, 염려를 살까 차선책으로 걸었던 친구와의 통화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휴일을 맞아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던 갤리는 피곤에 찌들어 두 갈래로 찢어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잠시간 헛기침을 하고 정신을 차린 후에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해주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한국이든 영국이든 직장인의 일상은 매한가지였다. 일-집-일-집의 반복, 대인관계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바쁜 일과를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연애, 줄담배 등등. 얼마 전 새로 바뀐 상사의 험담을 하며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던 갤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대학 동창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에이든 알지? 응, 결혼한댄다. 난 이러다가 제때 결혼도 못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럼 굉장한 워커홀릭처럼 말하겠지. 나는 일이랑 결혼했어요, 하하! 시발 그거 다 핑곈데 말야.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어 공감도 하고 간간히 웃기도 하며 정신없이 통화를 하다 끊고 보니 주민 센터와 낡은 연립빌라, 나지막한 상가에 입점해 있는 서점과 동네 베이커리 등이 보였다. 어느새 반이나 걸어왔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한 정거장만 지나면 집이었다. 뉴트는 지갑을 뒤적였다. 잡히는 지폐가 모두 만 원 짜리였다. 아예 걸어가기엔 좀 멀고, 그렇다고 택시를 타자니 기본요금도 아까울 정도로 짧은 거리이고. 짧은 고민 끝에 결국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빳빳한 코트의 깃을 재차 치켜세우며 안주머니를 뒤적여 정갈하게 감아 놓은 이어폰을 찾아냈다. 말랑말랑한 고무패킹을 꽂고 휴대폰의 어플을 실행시키자 편안한 음색의 보컬이 시린 귓가를 어루만져 주었다. 엣취, 뉴트는 작게 재채기를 했다.
삼년 반을 사귀었던 애인과 헤어진 이후로 연애세포가 모두 죽었다. 그 어떤 누구를 봐도 연애감정이 들지 않는 마음은 마치 스위치를 내려 컴컴해진 방 같았다. 대학교 클럽 활동에서 처음 만났던 그는 뉴트보다 세 살이 어렸다. 그다지 유머감각이 뛰어나지 않은 제 말주변에도 성의껏 반응해주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대다수의 그들과 피부색이 다른 아시안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게 만드는 매력과 사랑스러움에 반해 연애를 시작했고 유년시절에 했던 풋내기같은 연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들을 공유했다. 처음 맛본 행복감은 뉴트가 먼저 졸업을 하고 딱 취업에 성공할 때 까지만 이어졌다. 모든 것을 이해과 관용으로 품어 주던 부모님과 학교의 품을 떠나 정글과도 같은 큰 세상에 던져진 뉴트는, 성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사회생활과 막 입사한 회사의 업무 매뉴얼 같은 것들을 힘겹게 소화해내고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긴장과 압박에 절은 몸을 힘겹게 침대에 뉘였다. 체온이 느껴지는 포옹이라든가 애정과 격려가 담긴 한 마디 응원이 절실했다. 그는 종종 답장이 늦어지는 텍스트 메시지 창과, 친구들과 웃고 즐기는 애인의 모습이 태그되어 올라온 페이스 북 계정을 번갈아 보며 가늘게 숨을 뱉었다. 물론 그가 뉴트에게 아예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뉴트와의 연락에 매우 성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보통의 주변 사람들과 다른 관계로 묶여 있었던 뉴트는, 저와 그의 특별한 사이처럼 타인들과 차별되는 어떠한 것을 기대했다.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섬세하게, 나의 활력을 채워줄 수 있는 애정을 담아.
지나친 기대는 지나친 실망을 낳았다. 그에 대한 서운함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지만 뉴트는 그것을 애써 떨쳐내었다. 친구들과 한창 즐길 때인 대학생이니까, 각자의 생활이 있음을 그보다 삼 년을 더 산 연장자의 관점에서 이해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대신 그 대가로 내 자신을 상처 나게 만들었고, 이해를 위한 노력은 뉴트의 정신을 좀먹었다. 늘어가는 서운함은 그와 뉴트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고 벽은 물 먹은 종이처럼 점점 불어나 두터워졌다. 지쳐버린 뉴트는 끝을 예감했다. 끝을 짐작한 것은 비단 뉴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몸 상태가 위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셨대.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아직 대학교도 가지 않은 동생이 둘이나 있고. …아마 영국으로 두 번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몰라. 아주 어렵게, 한숨처럼 뱉어낸 말이 이별을 고하는 뜻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말이야, 네가 네 자신을 최고로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나는 그렇게 만들어 주지 못한 것 같으니까…. 네 자신을 좀 더 사랑했으면 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뉴트는 그 누구와도 연애를 하지 못했다. 쌍꺼풀이 없고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운 아시안을 보면 항상 그가 떠올랐다. 윤 팀장의 질문에도 그렇게 답했듯이, 누군가가 제 이상형을 물을 때마다 버릇처럼 말하는 ‘쌍꺼풀 없고, 그을리고, 웃는 모습이 귀여운 스타일’ 은 한 치의 빗나감도 없는 그의 생김새였다. 삼년 반을 만나고 나니 모든 연애의 기준이 그가 되었다. 사실 그의 나라인 한국으로의 파견 근무가 결정되었을 때도 못 이기는 척 건너가는 시늉은 했지만 사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미련이었다. 오래 전에 받아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아버지는 괜찮으셔? 요즘 어때?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었다.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그 분 찾는 전화 꽤 왔었는데 번호 바꾼 지 좀 됐어요.
뉴트는 깨달았다. 아, 이제 진짜 끝이구나. 그리고는 새로운 연애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연애가 귀찮아졌다.
그래, 스스로에게 합리화하고 있지만 어쩌면 연애가 귀찮다는 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한번 호되게 맛본 상실이 두려워 누군가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뉴트는, 연애가 귀찮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며 먼저 제게 다가와 불 꺼진 방의 스위치를 올려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이 두 곡쯤 넘어가자 퇴근길에 종종 지나쳤던 정류장의 모습이 보였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다 걸어가 버려, 싶었지만 더 이상 체력을 방전시키고 싶지 않았다. 얼른 집에 돌아가 셔츠를 벗어 세탁바구니에 넣고, 고기와 기름 냄새에 찌든 몸을 말끔히 씻어낸 후 푹신한 카우치에 드러누워 축구 중계나 보고 싶었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7분여가 남아 있었다. 버스 노선 안내도와 컴퓨터 수리, 수학 과외, 공연 홍보지 같은 것들이 붙어 있는 유리부스 안의 벤치에는 할머니 한 분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각각의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연방 까닥이며 졸고 있었다. 크로스백과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전공 서적, 스냅백. 소지품을 옆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졸고 있는 걸 보니 술을 마신 것 같았다.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가 기울어 유리벽에 잔뜩 짓눌리고 귀에서 흘러나온 이어폰 한 쪽이 목 언저리에서 달랑거렸다. 입을 맥없이 벌리고 정신없이 졸고 있는 폼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 뉴트는 픽 웃었다.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선 벤치에 앉는 편이 좋겠지만, 널브러진 소지품을 밀어내고 저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앉을 것을 생각하니 그가 깰 것 같았다. 저렇게 달게 자는데 깨우는 것도 미안하지. 쓸데없는 배려심이 발동했다. 어차피 도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처럼 밖에 서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뉴트는 고개를 돌려 정면의 횡단보도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4차선 도로를 수놓은 자동차 불빛들과, 파랗게 점멸하는 보행자 신호등 등을 보고 있자니 익숙하고 뜨끈한 느낌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아, 벌써 휴지를 챙겨 다닐 때가 됐나. 11월의 바람이 차긴 한 모양이다. 안구 건조증 때문에 매년 겨울 찬바람이 불 때마다 눈물샘을 압박해 발생되는 비정상적인 생리 현상은 뉴트를 종종 또 자주 성가시게 만들었다. 그는 별 수 없이 찬바람에 메마른 손등으로 눈물이 맺힌 눈꼬리를 꾹꾹 찍어냈다. 토마스의 연애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나가는 미팅이고 뭐고 간에 시간이 나는 대로 안과부터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지금 이 순간 저에게 순간이동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로에 찌든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섰다. 알바가 끝나자마자 밥도 먹지 못하고 술을 마시러 가는 게 아니었나 싶지만 몇 달 만에 휴가를 나온 동기 때문에 만든 술자리라 빠지기도 애매했다. 민호는 제 동기들 중 제일 먼저 군대를 다녀온 축에 속했다. 이제 막 이병 딱지를 뗀 동기가 저보다 새파랗게 어린 선임의 갈굼을 받고 있다며 하소연을 토로했을 때 민호는 그의 빈 잔에 황금비율의 소맥을 말아주며 타박했다. 그러게 누가 미뤄서 가래? 멍청아. 전역모를 쓰고 위병소 밖을 나섰을 때 민호의 나이는 고작 스물 둘이었다. 한국에만 있는 빠른 년생의 최대 수혜자였다.
아무튼 초저녁부터 부어라 마셔라 한 결과 술자리는 예상외로 일찍 파토가 났다. 신입생 여자 후배들에게 연락을 돌려 같이 노래방을 가자는 것을 마다하고 그는 막차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정류장에 자리를 붙이고 앉았다. 피곤하고 졸렸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던 정신은 드물게 울리는 전화 한 통에 깨어나게 되었다. 졸음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눈으로 민호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동생이었다. 형, 엄마가 어딘지 물어보래.
어, 여기 C 사거리. 곧 가. 어. 채 20초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간결한 통화 후 종료 버튼을 눌렀다. 겉보기엔 둘은 여느 형제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사내자식들다운 삭막함과 무심함. 그러나 다르면서 또 비슷한 두 형제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배려했다. 사실 방금 전의 통화도 엄마 핑계를 댔지만 제가 걱정되는 마음에 자의로 전화한 것일 테지. 민호는 저보다 네 살 어린 동생에 대해 부모님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와는 달리 얼굴도 하얗고, 이목구비도 또렷한 막내.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 때문에 민호는 육상을 포기했다. 아무리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라도 두 아들 모두 체육계로 키우기에는 형편이 빠듯해지리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 동생 민석이 체육 특기생으로 진학하여 축구화 끈을 묶을 때 민호는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카페의 에이프런 끈을 묶었다. 아쉬움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동생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제 선택이었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스포츠 백을 둘러멘 민석이 갔다올게, 하고 문을 나서는, 제 눈엔 여전히 작지만 어느새 많이 자란 뒷모습을 볼 때마다 민호는 뿌듯함을 느꼈다.
세관 앞, 예상 도착시간 5분. 이대로 한 번 더 눈을 붙이면 버스를 놓칠 것 같아 잠을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뺨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떠 주변의 것들을 시야에 새겼다. 셔터가 내려간 약국, 오래된 피아노 교습소, 옆에 계신 할머니…. 그리고 11월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유리 벽 밖에, 긴 코트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화려한 간판 불빛과 가로등에 어른어른 비치는 금발에, 평평한 광대를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하관이 몹시 예리하고 좁았다. 떨어진 거리가 제법 되었지만 외국인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근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와, 잘생겼다. 모델인가? 저런 사람이 서 있으니까 여기가 동네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화보 촬영장 같네. 공간감각을 뒤엎는 남자의 외모에 탄복하고 있던 민호는 제가 한참동안 보고 있던 그에게서 문득 한 가지 수상쩍은 점을 발견했다. 꼭 들어맞는 핏의 수트에 코트까지 걸쳐 입어 더욱 더 도회적이고 젠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울고 있었다. 그림 같은 모습의 남자가 울고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무척 처연한 느낌이 들게 되었다. 물론 이곳은 행인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눈물을 훔쳐내고 있으니 짙은 슬픔을 억누르고 절제하는 것 같아 더 슬퍼졌다. 안타까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표정으로 민호는 남자를 응시했다. 왜 우는 거지. 실연했나. 때마침 제가 끼고 있는 이어폰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눈앞에서는 연예인 같은 남자가 눈물을 훔치고 있자 꼭 제 생각이 들어맞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 도착 시간을 알려주는 LCD 알림판을 다시 한번 살폈다. 전 정류소 도착. 민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요.”
외국인인데 혹여나 한국말을 못 알아들을까 싶어 어깨를 두드렸다. 인기척에 남자는 금방 뒤를 돌아보았다. 건너편 상가들의 불빛에 반사되어 안광이 비치는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작고 섬세한 얼굴에 민호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그간 가장 잘생겼다고 여겨왔던 배우들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열거했다. 그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남자의 외모는 훌륭했다. 그래서 더더욱 안타까워졌다. 이렇게 생긴 남자도 실연을 당하는구나…. 그에게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민호는 이미 무의식중에 그를 사랑에 생채기가 난 비련의 남주인공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어폰을 뽑고 남자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뜻밖의 인물에 놀란 것 같았다. 어쩌면 실연당해서 울고 있는 모습을 타인에게 들킨 것이 부끄러울지도 모르지. 취기와 피로에 풀린 눈을 하고, 하지만 이 말 한 마디만큼은 꼭 전하겠다는 불굴의 태도로 민호는 말을 붙였다. …힘내요. 그리고 야구점퍼 주머니에 쑤셔 박아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조금 놀라는 듯 하면서도 그는 그것을 얌전히 받아들었다. 남자의 등 뒤로, 모퉁이를 돌아 저를 집으로 실어 나를 버스가 전조등 불빛을 밝힌 채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가 붙잡을 새도 없이 민호는 등을 돌려 정차한 버스의 계단을 올랐다.
학생 그거 교통카드 아닌 거 아냐?
어 네…? 민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금 전까지 제가 열심히 찍고 문지른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자꾸 삑삑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결제 처리가 되었다는 안내 음성이 나오지 않길래 기계가 고장인가, 했는데 제가 엉뚱한 카드를 대고 있었다.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두 정거장 건너 집에 갈 때까지 카드 리더기와 무의미한 씨름을 하고 있을 뻔 했다. 서둘러 제대로 된 교통카드를 꺼내 찍었다.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정상적인 반응이 나온다. 술과 잠에 취한 정신이 아직 완벽하게 깨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털어내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며, 민호는 내리는 문과 가장 가까운 뒷좌석에 앉았다. 슬슬 막차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 버스 안이 한산했다.
승객 둘을 새로이 태운 버스는 곧장 출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탑승을 완료한 후 엑셀을 밟기 전 앞에 끼어든 택시와 학원 통학차량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신호에 걸린 모양이었다. 에이 거 참, 기사님의 탄식을 들으며 민호는 달구어진 뺨을 유리창에 붙였다. 추위를 잘 타는 성격이라 평소 같았으면 호들갑을 떨었을 유리창의 차가움은 술기운에 높아진 몸의 온도에 상쇄되었다. 아 시원하다. 전공 책과 스냅백은 무릎에 올려둔 채 머리를 기댄 그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어, 이대로 잠들면 정류장 지나치는데. 그레도 이러고 있으니 술이 좀 깨는 것 같다. 집에 가면 또 술 마셨냐고 잔소리 들으려나? 어머니가 잠들어 있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분 좋은 서늘함을 즐기고 있던 민호는 문득 유리창에 기대고 있는 제 오른 뺨 쪽으로 쏟아지는 열렬한 시선에 얼굴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소 의문스러운 시선. 잘 생긴 외국인이네. 왜 나를 저렇게 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머리꼭지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 내리던 민호는 그의 손에 들린 얇은 천 조각에 시선이 닿았다. 음, 손수건이네. 되게 낯익은 거네. 나랑 똑같은 거…….
“…?!”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몸을 완전히 돌려 창문에 손바닥을 붙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님이 다그쳐도 몽롱하던 정신이 단박에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제가 저 창문 밖의 남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 울고 있는 남자가 안쓰러워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건네버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민호의 다급한 시선이 다시금 남자의 손수건에 닿았다. 손수건 위에 그려진, 지나치게 깜찍하고 발랄한 만화 캐릭터를 확인한 순간 민호의 귓불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 병신, 하필이면 칩 앤 데일이 뭐야…!
귀엽기 짝이 없는 두 다람쥐가 그려져 있는 손수건은 단언컨대 민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의로 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제가 아닌, 동생이. 운동을 해서 몸은 단단하지만 얼굴은 제법 귀여운 민석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무슨 기념일마다 받아오는 군것질거리와 편지, 선물이 한 가득이었다. 물론 그는 그런 선물들과 여자애들에게 냉랭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한창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나이일법도 하건만 정말 묵묵히 운동만 했다. 얼마 전 코감기에 걸려 연신 코를 훌쩍이던 민호에게 민석은 포장도 뜯지 않은 새 것의 티가 역력한 손수건을 휙 던져주었다. 난 이런 거 필요 없으니까 형이라도 써. 그러니까 손수건에 그려져 있던 칩과 데일은 저와 달라도 한참 다른 동생의 얼굴을 닮은 것이었다.
미간을 모은 남자는 손수건을 든 손을 가볍게 흔들며 민호를 응시했다. 이거 나 가지라고? 어쩌라고?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어, 어…. 민호는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의 그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버버 하는 사이에 신호가 바뀌고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다. 몸이 뒤로 또 다시 앞으로 왔다갔다 쏠리는 동안에도 남자의 시선은 민호의 얼굴에 따라붙었다. 민호 역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 둔 진동이 다시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하니 민석, 진짜 칩 앤 데일이었다. ‘형 올 때 아이스크림. 집 앞에 베스킨라빈스 문 안 닫은 거 봤어. 아몬드 봉봉이랑, 그린 티랑,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문하는 전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귀에 수화기를 댄 채로 민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어지는 풍경 속에 점처럼 남은 남자가 아직도 제 쪽을 보고 있었다.
형, 다 들었어? 다시 안 말해줘도 돼?
몰라 이 새끼야…. 민호는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전공 책 위로 엎드리며 머리를 처박았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1. 현대물 AU
2. 이괴모죠 이게 무슨 결말이야 나는 1도 모르겠네
3. 사실 이 뒤에 뉴트가 동네 카페에서 알바하는 민호 마주쳐서 손수건 돌려주고 제대로 대화하는 것 까지 쓰고 싶었는데 너무 아.이돌 팬/픽 스럽게 달달해지는 늑김에 잘라버렸더니 저런 결말이..
4. 캐붕 쩐다 특히 미노.. 몬가 뉴트민호가 아니라 톱생 x 기호옹이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
글레이드를 발갛게 물들이는 동틀 녘의 태양 대신 먹구름이 가득 낀 잿빛 하늘이 심상치 않다 여겼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쏟아진 비는 고립된 땅을 적셨다. 몇 년을 동고동락해온 아이들이든, 가축들이든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은 모두 그들의 익숙해진 보금자리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거친 장대비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들판을 보고 있자니 꼭 어느 시간에 멈춘 채 그대로 죽어버린 도시 같았다. 움푹 파인 지형에 따라 드문드문 생겨난 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으로 보아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은 날씨는 아니었다.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기 위한 대부분의 활동은 야외에서 이루어지므로 비가 오는 날은 모든 일과가 취소된다. 건축, 경작, 도살, 잡무…… 물론 미로를 뛰는 것도. 미로 안을 달리며 구조를 암기하고 모두의 출구를 찾기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러너들은 글레이드의 소년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속했다. 요리나 경작처럼 대체 가능한 인력 자원이 아닌 것이다. 비에 맞아 독한 감기라도 걸려 그 자리가 공백으로 비어버리면 손실이 크기에 비가 오는 날만큼은 미로를 돌지 말자고, 러너 팀의 소년들은 저들만의 규칙을 세웠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끼니를 때운다.’ 는 표현이 좀 더 알맞을 법한 식사를 들고 늦은 오후가 되자 늘 그렇듯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해먹 하나씩을 차지하고 누워 낮잠에 빠져들었다. 땅을 요란스럽게 두들기는 빗소리에 묻혀 드문드문 들리는 제프와 윈스턴의 말소리를 뒤로 한 채 뉴트는 본부 밖 비가 쏟아지는 글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힘으로 일구어둔 토마토며 감자, 옥수수 같은 경작물들이 흠뻑 젖고 있었다. 토지에 스며든 빗물은 땅 속 식물들의 뿌리를 배부르게 하고 그것들은 공급받은 물과 햇빛을 양분삼아 성장하겠지. 때가 되면 수확할 그것들을 먹고 글레이드의 아이들 또한 성장할 테고. 박스에 실려 올라오기 전의 기억이 없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로 몸만 성장하는 것이다. 하늘과도 같은 어두컴컴한 색을 하고 있어 오늘따라 더욱 더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미로의 돌벽을 망연하게 응시하고 있던 그 때 뉴트의 곁으로 차가운 바깥 기운과 함께 인기척이 끼쳤다. 민호였다.
습한 날씨 탓인지 매번 손질하여 세워두던 앞머리가 눈썹께로 착 가라앉은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본부에 들어와 뉴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조심성 없이 걷는 탓에 민호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탕물이 뉴트의 바짓단과 워커 끝에 튀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잇새에 물고 있던 육포 같은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민호가 불평했다. 시발 창조자 새끼들, 기왕 보내줄 거면 여러 가지로 골고루 보내주던가 하지 말야, 또 육포라고. 이 말라비틀어진 걸 먹고 배가 찰 사람이 어디 있냐? 안 그래?
매주 같은 시간에 박스를 통해 올라오는 보급품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는 보급용으로 제공되는 음식들을 그 누구보다도 잘 먹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라이의 형편없는 스튜도 두 접시씩 먹어치우곤 했으니 말이다. 그냥 상념에 젖어 궁상이나 떠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오늘 이거 말고 보급품 뭐뭐 올라왔냐?”
정오 즈음, 그러니까 이제 적응이 된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박스가 올라왔을 때를 되짚어 보니 그 자리에 민호가 없었다. 아침식사를 할 때 제 옆 해먹이 비어있던 것을 확인했고, 늦잠을 잔 건 아니었을 테니 아마 몇 년을 걸쳐 완성시키고 있는 지도 제작실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매번 목숨을 내어놓고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러너들의 노고를 알기에 비가 오는 날 정도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쉬어도 다들 나무라지 않을 텐데, 칼 같이 정확한 바이오리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말이야, 뭐라도 해야 돼. 지도라도 한 번 더 들여다봐야 빨리 여길 나갈 수 있지 않겠어?’ 민호는 그 누구보다도 미로 밖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열망하고 집착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뉴트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로 밖의 세상에 대한 열망은 본인의 희망이 아닌 여기 남은 아이들의 희망이 아닐까? 어느새 묵직한 부담으로 변해버린 그들의 희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달려야 하는 치프 러너라는 소임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이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미로를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뭐랄까, 의무감 같은 게 아니겠냐고.
“뭐 별 거 없었어. 밀가루 세 포대랑 모포 다섯 장, 옷 몇 벌,”
…그리고 이거. 뉴트는 헤진 바지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병을 꺼내었다. 뉴트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병이었다. 코르크마개로 닫혀 있는 투명 유리병 안에는 마치 물처럼 보이는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턱을 쭉 빼어 뉴트가 내민 것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민호의 눈매에서 경계심이 걷혔다. 아, 이거 술이구나! 그렇지! 소년과 성인 남자의 경계에 서 있는 나이 치고는 높은 목소리로 외치며 그는 핑거스냅을 날렸다.
“뭐야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마시더니 역시 뉴트 너도 갤리가 만든 술이 별로였던 거구만. 그래. 어쩔 수 없이 먹긴 하지만, 갤리 그 자식이 만드는 술 정말 맛없단 말이지. 뭘 넣고 만든다더라?”
“삭힌 무화과.”
“-아 그래! 삭힌 무화과. 최악이지. …그래서 이건 애들 주기 싫어서 빼돌렸냐? 차기 리더한테 이런 면이 다 있었네.”
그런 게 아니라, 뉴트는 첨언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평소 그는 식탐이나 제 몫의 물건을 더 가지려 하는 물욕과도 같은 욕구에 매우 담백한 편이었다. 매일 삼시 세끼 배식해주는 대로 식사를 하고 정해진 일과에 따라 제 몫의 일거리를 수행했으며, 글레이드의 다른 아이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곤궁한 차림으로 똑같은 모포를 덮고 잠이 들었다. 정말로 모두를 위해 공평하게 보급되어지는 보급품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은 털끝만큼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나갈 수도 없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더 취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들이 창조자들에게 요구한 품목과 실제 그들이 보내준 물건들을 대조해 보기 위해 매주 같은 시간대에 올라오는 박스 안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W-C-K-D. 아마도 저들을 글레이드로 올려 보낸 ‘창조자들’ 의 정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글귀는 마치 한 공정 안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보급되어 올라온 모든 물건들에 찍혀 있었다. 프라이의 새 메뉴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울 밀가루 세 포대와, 짙은 풀색의 모포, 아마도 러너 전용으로 보이는 티셔츠 몇 장, 그리고, 그리고…… 유일하게 창조자들의 ‘낙인’ 이 찍혀 있지 않은 유리병. 아주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크기도 아니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사전에 메모해 놓았던 종이를 꺼내들어 보급품 목록을 체크하던 뉴트는 허리를 굽혀 발치에 있던 그것을 집어 들었다. 높은 체온의 손바닥 위로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닿자 일순 생경한 기분이 전신을 감돌았다. 승강기와도 같은 박스가 멈춰 서 있는 어두운 지하통로 안에서 병이 반짝, 빛을 발한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내가 마셔야 해.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뉴트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내가 이걸 왜…?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은 내면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뉴트, 네가 들고 있는 그걸 모두 마셔버려. 이 정체도 모르는 물을 내가 왜……, 하지만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낯선 느낌은 뉴트를 재촉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야, 뉴트!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아, 아니. 머리 위로 박스 안을 내려다보는 알비의 목소리가 들리자, 뉴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바지주머니 안으로 은근슬쩍 유리병을 밀어 넣었다. 완전 범죄. 이성을 앞지른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다.
“넘겨 봐, 맛 좀 보게. 미로 밖의 술은 대체 무슨 맛이냐?”
“기다려. 반 마시고 나눠줄게.”
어금니로 무른 코르크마개를 물어 당겨 뽑아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무색 무취. 술이라면 무언가를 숙성시켰거나, 또는 증류시키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알싸한 향이라도 있을 것인데 미간을 모으고 온 몸의 세포를 후각에 곤두세워도 알코올 특유의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뭐지, 정말로 그냥 물인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주 잠시간 고개를 갸웃대던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병의 주둥이를 엷은 입술에 붙이고 그것을 기울였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투명한 액체들을 삼켜냈다. 무색 무취, 무미. 술이 아니라 물이었던 모양이다. 야, 남겨준다며 이 자식아! 별로 크지도 않은 병인데 그러다 다 마셔버리겠다며 어깃장을 놓는 민호에게 그냥 물이니까 꿈 깨, 하고 일갈하기 위해 막 병에서 입을 떼어냈을 때, 두 손으로 목을 옥죄는 것보다 더한 감각이 목구멍 안쪽에서 느껴졌다. 짜릿함의 범주를 넘어서, 식도가 타들어갈 것 같은 통증이었다. 뉴트는 찢어질 듯한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컥컥거리는 기침과 함께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액체를 토해내듯 뱉어낸다. 손에서 놓친 유리병 또한 벌써 저만치에 굴러가 남은 내용물을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었다.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민호가 윽박질렀다. 야 이 똘추 새끼야, 그게 뭔 줄 알고 함부로 마셔! 이거 시발 무슨 사람 병신 만드는 이상한 약 아냐?! 미친 창조자 새끼들! 점차 잦아드는 통증에 여유를 되찾은 뉴트는 잔기침을 하고 입가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야, 잠시 잊었나본데 내가 마시기 이전부터 이걸 탐낸 똘추 새끼는 바로 너였거든….
짧고 강렬하게 찾아온 통증이 말끔하게 가시자 뉴트는 흙이 묻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짙은 눈썹을 잔뜩 구기고 무릎에 손을 얹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민호를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발 새끼니 똘추 새끼니 항상 말은 험하게 하지만 실은 그게 다 걱정과 관심이요 애정표현의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나 아니어도 근심 걱정 많을 치프 러너의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게 내버려둘 순 없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얼굴로 뉴트는 검지를 들어 민호의 이마를 툭 밀었다. 방심하고 있던 유순한 이목구비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냥 존나 독한 술이었던 것 같아. 갤리가 만든 것보다 더 심각한.”
“으 미친…… 세상에 그런 맛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 떠올 테니까 기다려.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고르자 인상을 죽죽 쓰며 몸서리를 치던 민호는 빈 수통을 찾아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저거 봐, 저렇게 걱정하면서 하여간 쌀쌀맞은 척은. 별 노력 없이도 몇 년 동안 미로 안을 달리며 자연스레 가꾸어진 등 근육과 은근하게 비치는 날개뼈,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허리 등을 감상하듯이 지켜보고 있던 뉴트의 신발 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허풍 좀 보태어 저를 저승의 문턱까지 끌려갔다 돌아오게 만든 의문의 그 병이었다. 아까 떨어뜨리면서 바닥에 쏟아버린 탓에 내용물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술도 아닐 테고, 식수용 물은 더더욱 아닐 테고, 대체 이 따위 용도도 모르는 걸 왜 보낸 거야…. 빈 병을 주워들고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던 뉴트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창조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표기가 적혀있지 않았던 병의 납작한 밑바닥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박스에서 건져 올릴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는 오로지 한 문장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뉴트는 무심코 그것을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당신이 보게 될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뉴트는 어느 순간부터 제가 익숙하지 않은 길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계획적으로 잘 정리된 구역 안에 지어진 붉은 지붕의 집들과 포장된 도로, 길의 가장자리에 심겨 녹음을 형성하고 있는 잎이 넓은 가로수들. 턱을 치켜들고 생 장미의 향이 코를 찌르는 화단 너머를 살피면 넓은 정원 안에서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그의 옆으로 샛노란 스쿨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뉴트의 허리춤까지 올 법한 꼬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고, 마중 나와 있던 부모들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여유와 평화로움, 따사로운 감정들. 그제서야 뉴트는 깨달았다. 제가 서 있는 이곳은 글레이드 밖이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미로의 벽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혼자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경한 풍경들. 분명 처음 보는 모습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낯이 익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이곳에서 머물렀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혼란스러운 의식과는 다르게 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남자와 어느 집 앞에 묶여있는 녹색의 자전거를 지나쳐 두 갈래로 찢어지는 갈림길에서 멈춰섰다. 오른쪽이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 모퉁이로 몸을 틀었다. 행선지가 어디인 줄 알고, 이 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색깔이 누렇게 변한 플라타너스 잎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보도를 밟으며 뉴트는 생각했다. 이미 학습된 지식처럼 익숙한 느낌. 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낯선 풍경과 기억들을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것 같았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딱딱한 담벼락 대신 손질이 잘 된 묘목들이 뜰을 둘러싼 가정집이었다. 그리 규모가 크거나 호화로운 대저택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물을 먹여 적당히 자란 잔디와 열을 맞춰 대문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화분, 수돗가에 정갈하게 감겨 있는 수도호스 등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에 살고 있는 주인이 무척이나 이 집을 열심히 가꾸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집 주인의 애착이 느껴지는 이 붉은 지붕의 벽돌집에도 익숙함이 느껴진다. 뉴트는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열매가 탐스럽게 맺힌 나무와 낡은 그네,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옆에 놓여 있는 농구공을 지나쳐 뜰을 절반정도 가로질렀을 때, 자그마한 창문이 달린 현관문이 열리며 마른 체구의 중년 여성이 상체를 내밀었다. 자신과 꼭 닮은 밀빛 머리를 가진 그녀는 깜짝 놀라며 아는 체를 했다. 오, 아가! 어디 갔었니? 그렇잖아도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질 않길래 찾으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절 아세요? 소리 내어 말하려 했으나 뉴트의 흰 뺨에 그녀의 입술이 닿은 것이 먼저였다. 분명 열일곱, 열여덟이 되어 키가 성인 남성 못지않게 훌쩍 자랐고, 또한 계속 자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뉴트는 잠시 한 쪽 손을 들어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어른의 것에 가까운 제 손이 아닌 어린아이의 자그마한 오른손이 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맞춤을 자연스럽게 받아내며 뉴트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작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글레이드에 올라왔던 시절보다 더.
얼른 들어와, 소개시켜 줄 친구가 있단다. 저를 집안으로 이끄는 그녀의 커다란 손과 정신은 그대로인 채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몸을 번갈아보며 잠시간을 생각하던 뉴트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 그러니까 박스에 실려 글레이드로 던져지기 전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애정이 넘치는 반응으로 저를 맞아 준 것은 아마 자신의 모친일 것이다. 이미 등을 돌린 채 주방으로 들어간 그녀의 이목구비를 되새기려고 노력했지만, 놀랍게도 방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주방은 향긋한 홍차 향과 달큰한 쿠키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자잘한 꽃병이 놓인 사인용 원탁에는 흑발의 성인 여성과 앉은키가 의자의 등받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어린 아이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뉴트를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뉴트의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웃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도 그녀의 이목구비가 인식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인사하렴, 뉴트. 아이작 씨가 살던 옆집에 새로 이사왔단다.”
어머나! 아드님이 정말 귀엽네요. 우리 아들도 새 친구에게 인사해야지? 조금은 어눌한 발음의 영어가 들리고, 저와 다를 바가 없는 자그마한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고 와작와작 깨물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뺨과 아래로 처져 유순해 보이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눈, 작게 벌린 입술 아래로 드러난 자그마한 치아들.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분명 뉴트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뉴트가 보고 지나쳤던 수많은 풍경, 그 어느 모습보다도 낯이 익었다. 앞머리를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아이가 Hello, 하고 한 마디를 떼기도 전에 뉴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흑백으로 멈춘 세상에서 그 혼자 생동한 빛깔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민호?”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마치 스위치 끄듯 단번에 그의 세상이 사라졌다. 암전. 시야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뉴트는 당황한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저와 마주보고 있던 어린 날의 민호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저의 모친도, 홍차 향이 가득했던 주방과 아늑한 거실의 모습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 엄마? 민호? 떠오르는 대로 불러 보았으나 제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부딪혀 돌아올 뿐이었다. 시커먼 어둠이 그들 모두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이게 대체…….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세 번 빠르게 깜빡였을 때, 다시 조명을 켠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와 민호, 그의 모친이 함께 있던 그 주방이 아니었다. 하얀 색으로 칠을 해 놓은 주방 선반에는 어머니의 소녀스러운 취향이 드러나는 들꽃무늬 접시 대신 아무렇게나 쌓인 통조림이, 레이스 조각보 위 화병이 놓여 있던 식탁에는 절반정도 먹어 후레이크가 우유에 불은 시리얼 그릇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전혀 다른 집. 깔끔한 것은 이전과도 같았으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지는 않는 투박한 공간이다. 그 곳에서 그는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던 중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아니, 글레이드에 있던 때보다 몸이 더 자란 것 같다. 그는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와 먹색 티셔츠 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뉴트, 웬일로 일찍 일어났…… 야 이 시발, 너 인마 내가 집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했지!”
도어 락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목에 커다란 헤드폰을 걸친 남자가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뉴트는 암전이 찾아오기 전 그가 불렀던 남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발음했다. 민호.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피넛 쿠키를 든 채 저를 말갛게 쳐다보던 꼬마가 십 몇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또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다.
민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케이트보드를 내려놓고 하얗고 까만 운동화를 벗어냈다. 슥슥 다리를 밀어 발을 몇 번 움직이자 신발장 타일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신발들이 가지런히 열을 갖추었다.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으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 새끼냐고 욕을 하는 폼이 제가 알고 있는 민호가 맞았다. 옆에 놓여있던 용도모를 종이컵에 담배를 비벼 끈 뉴트는 저도 모르게 그의 뒤로 다가가 민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매끈한 복근 위로 팔을 감고 민소매를 즐겨 입어 그을린 어깨 위로 뾰족한 턱을 얹었다. 판판한 등짝에 가슴팍을 딱 붙이고 무게를 실어 누르자 온 몸에 힘을 빼고 있던 민호는 밀리는 대로 몸을 움직여 반사적으로 몇 발짝을 걸었다. 아, 무거워 이 새끼야.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가슴팍에 달라붙는 체온을 느끼고 있던 뉴트는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입을 열었다.
“피자 시켜 먹을까? 오늘 너 좋아하는 풋볼 경기 있던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계처럼 입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뉴트의 제안에 민호는 화들짝 놀라는 대단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 맞아! 레드스킨스랑 이글스! 하마터면 까먹을 뻔 했네.’ 뉴트가 알지 못하는 생소한 이름을 말하며, ‘피자 시켜? 페퍼로니?’ 동글동글한 뺨이 옴폭 패이고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어, 이건 처음 보는 모습이다. 미로를 나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글레이드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활짝 접힌 눈매 아래로 애교 있게 차오르는 살점. 정말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민호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더욱 어리고 귀여웠다.
쿵, 잠버릇이 고약한 누군가가 해먹에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뉴트는 눈을 떴다. 자연에서 구한 재료들로 만들어낸 오두막의 익숙한 천장, 점점 자라는 몸에 맞지 않아 좁게 느껴지는 익숙한 해먹, 자그마한 횃불을 들고 불침번을 서는 동료들의 익숙한 뒷모습. 글레이드였다. 그래, 우리는 갇혀 있었다. 뉴트는 빠르게 돌아오는 현실 감각을 느끼며, 느닷없이 꾸게 된 하룻밤의 달콤한 꿈의 내용을 되짚었다.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고, 지금보다 조금 더 자란 성인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으며……민호. 그래, 민호가 있었지. 몸을 반대로 틀어 묵직하게 내려앉은 옆 해먹을 살피자 양 쪽 팔을 접어 머리 뒤에 받친 채 팔자 좋게 자고 있는 민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과거에 함께한 민호. 하필이면 왜 민호일까. 뉴트는 마치 제 곁에 누워 잠든 민호가 그러하듯 깡마른 팔뚝을 머리 밑으로 집어넣었다. 몸을 뒤채어 오래된 해먹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유의하며 오래된 동료이자 친구의 잠든 얼굴을 살폈다.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진, 무방비한 모습. 지금처럼 매일 밤 들리는 흉악스러운 그리버의 울음소리에도 적응이 된 몸은 일정한 간격으로 고르게 오르내렸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내리고 있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배정받은 일을 해야 한다. 평화로운 글레이드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만들고 동의한 룰이었다. 지금 선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내일 오전이 힘들 텐데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복잡한 머릿속은 수면을 방해했다. 하여간 이게 다 그 이상한 꿈 때문이야, 하고 탓했지만 그 ‘이상한 꿈’이 싫진 않았다. 마치 백지상태와도 같은 그의 과거에 ‘실은 이런 유년시절을 보냈었지.’와 같은 단편적인 기억 한 폭을 그려 넣은 기분이었다. 다정한 어머니의 입맞춤을 받으며 어린 시절의 민호를 만났던, 그 모습이 내 진짜 과거라면 어떨까. 그럼 그 이후에 보았던 성인이 된 내 모습과 민호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던 뉴트는 문득,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떠한 것을 떠올렸다. 아까 제가 토해내듯이 뱉어냈지만 결국은 다 삼킨 꼴이었던 유리병의 이상한 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병의 밑바닥에 적혀 있던 글귀.
당신이 보게 될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비약이 과했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그 꿈이 내 미래이자 현실이 될 거라고? 우리가 저 미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설마. 그는 픽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그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꿈을 꾸었다.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진짜인 것처럼 지나치게 생생해졌고, 뉴트는 설마, 하고 어처구니없다 생각했던 제 가설을 더 이상 비웃을 수 없게 되었다. 벌써 오 일째 같은 꿈을 꾸고 이젠 꿈속에서 제게 외치는 민호의 욕지거리를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고민했다. 밤마다 보는 이 모습들이 내 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말어? 이미 생각은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었다.
사실 뉴트라고 글레이드 밖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로 밖을 나가면 그리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어린 척처럼 마냥 희망적인 상상을 하고 있진 않았다. 성숙해진 몸과 마음이 그에게 지나치게 냉철한 사고를 요구한 것인지, 아님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미로 밖의 세계가 글레이드 안의 상황보다 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모험보단 안위만은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차선책을 택했다. 지금 이대로, 무풍지대와도 같은 글레이드의 삶에 안주하는 것.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매일 밤 반복해서 꾸는 그 꿈이 모든 것을 바꾸고 흔들어 놓았다. 마침내 뉴트는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본 그것들이 나의 과거였고, 또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미래가 확실하다면, 저 지긋지긋한 미로의 돌벽을 뚫고 지금이라도 글레이드 밖으로 나가고 싶다. 진심으로. 닻을 내리고 아주 오랫동안 정박해 있던 한 척의 돛단배가 순풍을 받아 물결을 헤치고 항해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안자고 뭐하냐?”
망루 꼭대기로 향하는 사다리 위로 얼굴 하나가 쑥 올라왔다. 팔을 뻗어 등 뒤를 짚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그를 발견한 뉴트는 밤에 저 얼굴을 보다니 이것도 꿈인가, 하고 눈을 꿈뻑이다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그와 자신이 나오는 꿈은 언제나 햇살이 쏟아지고 안락한 집 안이지 답답한 글레이드 안이 아니었다. 그러는 너는? 뉴트가 물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역을 돌고, 가능한 한 빨리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새벽 동이 트자마자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러너들이기에 이 늦은 새벽에 깨어 있는 민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읏샤, 민첩한 몸놀림으로 두 무릎을 망루위에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몇 발짝을 옮긴 그는 뉴트의 옆에 풀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목말라서 깼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어떤 새끼가 감쪽같이 없어졌길래 잡으러 왔다, 왜.
걱정했어, 솔직한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민호는 언제나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늘여서 포장하듯 말하는 버릇이 있다. 항상 그랬다. 그래도 혼자 앉아있을 때보단 허전하다거나 쓸쓸하지 않아서 좋다. 비록 말을 예쁘게 하지 않는 민호라 할지라도.
“있잖아, 민호.”
“왜.”
“나가면 뭐 하고 싶어?”
긴 정적을 가르고 뉴트가 불쑥 말을 붙였다. 목적어가 빠졌지만 아마 영리한 그는 단번에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미로 밖을 나가면 뭘 하고 싶어? 그러고 보니 알비, 갤리와 함께 글레이드에 사는 소년들 중 가장 최초로 이곳에 올라와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둘인데도 불구하고 ‘미로 밖’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뉴트는 글레이더의 부대장으로, 또 민호는 치프러너로, 그간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볼 틈도 없이 치열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맡은 직책을 잘 수행해왔다는 뜻이다. 저 미로 밖을 나가기 위해서.
“잠도 늘어지게 실컷 자고, 프라이가 만든 게 아닌 진짜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 몰라, 뭔가를 하고 싶은 감정이 들 수가 있나? 글레이드 오기 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잖냐. 그리운 것도 없고 말이야.”
“…….”
“그럼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아, 어디 내가 한번 맞춰볼까? 음…… 예쁜 여자애랑 손잡는 거? 입 맞추는 거? 그동안 글레이드가 우리 같은 사내새끼들만 우글거려서 여간 삭막한 게 아니었잖아. 야박한 창조자 새끼들.”
물론 식료품 가게에서 구입한 참치 캔에 가공 베이컨, 부실한 시리얼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어쨌든 프라이가 만들어 주는 실험정신 강한 메뉴보단 훨씬 맛있는 편이고, 비가 오는 날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지만 역시나 그렇지 않은 날은 스케이트 보드를 끼고 새벽같이 나가던걸. 몸에 익은 생활 패턴은 밖에 나가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내가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상대는 예쁜 여자애가 아니라 너던데, 민호…. 매일 밤 꿈 속에서 너와 나의 미래를 한 장면씩 엿보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뉴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분명 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 무뚝뚝이는 무슨 소리냐고 비웃을게 뻔하다. 아니, 미친 소리 말라고 주먹부터 날리려나. 어느 쪽이 되었든 오롯이 저 혼자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삼키는 대신 뉴트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했다. 전엔 없던, 아주 확신에 찬 말투였다.
“…나가는 길 말인데,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뭔…. 왜, 이제 여기 지겹냐?”
“그래, 지겹다. 아주 지긋지긋해.”
나 참…. 한숨처럼 뱉어내는 대꾸에 ‘계집애처럼 징징대기는.’ 따위의 답변이 이어질 것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저와 똑같이 두 다리를 쭉 펴고, 팔을 뒤로 젖힌 채 상체를 앞으로 내민 뉴트의 어깨를 툭 쳤다. 두 어깨가 나란히 맞닿았다. 일견 깡마른 것 같아도 미끈한 근육이 붙어있는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해서, 제가 밀어도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랐지만 듬직한 부대장의 어깨는 글레이드의 평화를 유지하고 아이들을 보호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민호 역시 그 강인한 어깨에 기대고 의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신체적인 접촉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물론 말을 하지 않았으니 본인은 모를 것이다.
맨 살갗이 닿는 감촉에 장막을 두른 듯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뉴트는 민호를 보았다. 꿈속에서처럼 볼에 옴폭 우물이 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가에 미미하게 웃음기가 묻어있는 얼굴로 고개를 젖힌 채 눈만 슬쩍 내려 뉴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걱정 마 인마, 내가 꼭 찾을 거니까.’ 그 또한 전엔 없던, 아주 확신에 찬 말투였다.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뉴트는 망루의 통나무 바닥을 짚은 손을 옆으로 슬금슬금 밀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이제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짧은 거리에 매일같이 미로 안을 달리는 치프러너의 손이 있다. 뒤통수를 맞대고 발꿈치를 딱 붙인 채 키를 쟀던 것도 몇 년 전이라 이젠 서로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 손은 제 것이 더 크다. 마음 같아선 저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얽어 빈틈없이 맞물리게 하고 싶은데, 대담함은 매년 자라는 몸과는 달리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손바닥은 넓지만 아직 손가락은 뭉뚝하고 짧아 어린 그 손 위로 몇 번을 헛돌던 뉴트의 손은 결국 민호의 어깨를 짚었다. 찬 공기에 옅게 소름이 돋아난 맨살 위로 손끝의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이제 제법 골격이 모양새를 갖추어 단단하고 넓어졌지만 뉴트도, 민호도 아직은 성장하고 있는 소년들이다.
덜 여문 몸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을 때까지 완벽하게 자란 너와 내가 함께 잠들고, 함께 눈뜨던 그 꿈이 정말 우리의 미래인지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민호. 꼭 찾아, 출구를.
“내일 늦잠 자기는 글러 먹었구만. 미로 뛰기 딱 좋은 날씨겠어.”
아쉬운 척 하고 있지만 경쾌함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민호는 벌러덩 망루 위에 드러누웠다. 어, 그러게. 나도 내일은 꼼짝없이 일을 해야겠네. 뉴트 역시 등을 나무바닥 위에 붙이며 민호의 옆으로 몸을 뉘였다. 아침이면 다시 괴기스러운 입을 벌릴 미로의 벽 대신 망망대해처럼 검푸른 밤하늘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