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로미오와 로미오 1/2
a 2015. 9. 24. 00:39 |1. 월간뉴민 7월호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읽어주셨던 분들 주최여러분 모두 정말 감사했습니다!! ♥♥
2. 센티넬버스 아니고 그냥 C급 히어로물
3. 이제 생각해보니 제목 약간 싸이코와 싸이코로 고쳐야 할 거 가튼데..
1.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냐?
얼마 전 이웃집에 불을 지른 혐의로 체포된 방화범의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이다. 피의자인 범인은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이웃에 살고 있는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자신의 여동생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라 진술했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사회적으로 많은 이들의 동정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갑론을박하게 만들었던 위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성악설을 반박하고 드는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직접 말했을지도 모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혀 다른 의도이지만, 당장 극장에서라도. 육감적 몸매에, 섹시한 코스튬을 입고 히어로의 정신을 빼놓는 악당의 매력에 푹 빠진 관객들 또한 상영관을 나오며 그녀를 위한 두둔을 하지 않는가. 그래 맞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냐?
인정한다. 나쁜 새끼가 된 데에는 그게 무엇이 됐든지 원인이 있는 법이지. 하지만 실제로 범죄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또 그게 아니다. 매일같이 많은 사회악에 맞서 싸우다 보면 저 말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당최 인두겁을 쓰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는 놈들을 상대하고 있자면 아 이 새끼들은 필시 날 적부터 악마로 태어났음이 틀림없다고 판단 내리게 되는 것이다.
…뭐,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이런 경우에도.
폴리스라인 밖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여러분 뒤로 물러나세요! 전투복 차림의 대원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구경꾼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전을 기다리던 민호는 문득 엊그제 술자리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고? 대체 누가 그런 지랄 같은 소리를 한 거야? 제프? 윈스턴? 아니 저 꼴이 난 걸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 누군진 기억 안 난다만 아주 대단한 낙관주의자 나셨네.
위험하니까 물러나세요! 재차 강조를 하는데도 하루건너 하루 꼴로 사건이 터지는 곳에 살아 적응이 된 것인지 자리를 뜨지 않고 구경을 하는 시민들로 현장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각종 SNS로 생중계를 하는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그래, 도시의 랜드마크와도 같은 빌딩에 불이 났는데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것도 어렵겠지. 민호는 뚫어져라 사건 현장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80층짜리 건물의 꼭대기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끝없이 솟고 있었다.
신고가 접수된 후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건물 안의 사람들은 모두 대피한 상태였다. 화재의 원인이 전기 합선이라든지, 혹은 담뱃불에 의한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고의적으로 저지른 테러로 밝혀질 경우 문제가 커진다. 민호는 지금으로부터 십 몇 년 전, 제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할 때쯤에 일어나 세계의 정세를 크게 뒤흔들어 놓은 테러를 기억했다. 규모나 건물의 중요도 면에서 그 때의 두 빌딩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대로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천루는 자그마치 S시의 금융 산업을 한 손에 틀어쥔 금융 센터였다. 은행부터 시작해서 보험 회사니 증권 회사니 한 건물에 소속된 사무실만 해도 수 백 개가 넘고 그 사무실에 딸린 근로자들은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만약 그 엄청난 인원이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쨌든 인명 피해는 없으니 다행이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상념을 떨쳐내며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손으로 눈썹 위를 가려 차양을 만들고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하늘이 뿌연 연기로 뒤덮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발화지점이 옥상이란 말이지. 근데 고의적으로 불을 낸 게 아니고서야 옥상에서 불이 붙을 일이 뭐가 있나. 아니라면 역시, 담배꽁초의 불을 제대로 안 껐을까? 아 그나저나 새 전투복 이거 더워 죽겠네 시발 통풍도 안 되는 이런 걸 한여름에 입으라고 보급해 줬단 말야 융통성 없는 새끼들…. 결국 갈무리하지 못한 생각은 일터에 대한 한탄과 불만으로 이어지고, 손바닥으로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쓸어 손끝에 묻어난 축축함과 소금기를 바지자락에 문질러 닦고 있을 때 노이즈와 함께 무전이 울렸다. 제가 아니라 신고를 받고 함께 출동한 소방대원의 손에 들린 것이었다. 무전을 듣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고했다.
“화재가 아니랍니다. 옥상에서 연막탄이 발견되었다는데요?”
남자의 목소리는 사다리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민호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큰 편이었다. 뭐? 구조대장의 얼굴에 의아함과 안도의 표정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어리둥절하기는 사건이 발생한 건물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민호 쪽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불 난거 아니래? 구조대장이 요청했던 헬기의 지원을 취소하고, 시민들 앞에서 눈에 띄게 술렁이는 대원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민호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대원들 중 하나가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엇 저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젖힌 민호는 선글라스 하나 착용하지 않고 올곧게 바라본 태양에 인상을 찌푸렸다. 태양광의 잔상이 새하얗게 남은 시야로 마치 흑점 같은 물체가 뛰어들고, 곧이어 불길 번지듯 시뻘건 천이 화르륵, 뭐야, 낙하산인가?
시야를 점점 메우며 지상으로 가까워지던 낙하산은 정확히 폴리스 라인 안쪽으로 떨어졌다. 착지를 할 때 얼핏 보았던 체격은 분명 남자의 것이었는데 커다란 파라슈트가 머리에 덮이는 바람에 신원 파악이 쉽지 않았다. 서로 시선을 두리번대며 눈치를 보는 대원들 사이에서 한숨을 푹 쉰 민호는 한 발짝 앞서 낙하산 근처로 다가갔다. 꼭 좋은 건 지들이 먼저 다 찾아먹으면서 이런 건 다 나 시키지…. 홀스터에 꽂혀 있는 글록도 체크했지만 꺼낼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미처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피자일지도 모른다.
“저기, 선생님?”
“후우…. 역시 스릴 넘쳐. 최고야.”
캐노피를 주섬주섬 걷어내며 말하는 목소리가 어째 귀에 익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빨간 천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제가 아는 인물이었다.
이 여름에도 까만 레더 재킷과 반장갑, 찢어진 청바지. 햇빛을 등진 뱀파이어처럼 얼굴은 흰 편이다. 시선이 부딪히고 덥수룩한 앞머리 새로 스모키를 칠한 눈매가 고글 밖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등 뒤의 누군가가 어머,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낙하산을 매달고 빌딩 위에서 베이스 점프를 하는 정신 나간 짓을 즐기기보다는 TV 속 보이그룹이나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외모였다. 나도 처음엔 저 순진무구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에 속았었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자와 그가 뛰어내린 빌딩을 번갈아 살피던 민호는 불현듯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80층 높이의 이 금융 센터에 연막탄을 설치해 연기를 피운 장난을 친 배후의 정체와 같은, 현장의 모두가 쫓고 있는 사실을.
싱긋. 섬세한 눈 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남자의 의미심장한 눈웃음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들었던 추측을 확신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온 몸의 긴장이 풀리며 탈력감이 찾아왔다. 혹시 모를 생명의 위협에서 안전하기 위해 완전 무장을 한 전투복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또 너냐?
잔뜩 지쳐 이골이 난 투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태연하고 평화롭기가 짝이 없는 반문이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병신에게는 먹이를 주면 안 된다. 능청스럽기 이를 데 없는 물음에는 상대해주지 않는 게 여러모로 신상에 이로웠다.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남자와는 다르게 민호는 필사적으로 짜증을 억누르며 눈꺼풀을 한 번 느리게 여닫았다. 가늘게 한숨을 뱉고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당소 알파 하나, 당소 알파 하나. 알파 둘은 수신확인 바람.”
-수신 확인.
“당소 알파 하나임을 알리고 실제 화재상황 아니며 애새ㄲ……후우.”
-…? 재송신 바람.
“……단순 연막 장난이니 철수할 것.”
-양호.
“그리고 너 인마.”
나 왜? 전원이 꺼진 무선기의 안테나가 남자의 얼굴을 찌를 듯이 위협했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예리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 끝이 내려오고 눈 꼬리 아래가 짙은 음영을 남겼다. 더욱 더 어리고 유순해진 얼굴이 된 그는 뒤로 물러서 제 몸을 조이고 있던 안전장치들을 풀어냈다. 라이저의 벨트를 풀고 하네스를 벗으며 말을 건네는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전투복 바뀌었어? 잘 어울린다. 그전 것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데.”
뭐래 씨발 야 네가 입어 봤냐? 낫긴 개뿔 뭐가 나아 이거 존나 덥기만 한……아니 그 전에 어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민호는 아차 싶은 마음에 반사적으로 불만 불평을 토로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대체 이 망할 놈의 화법은 어떻게 된 것인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쯧, 혀를 차며 그는 다시 한 번 무전기의 안테나로 남자의 어깨를 꾹 밀었다.
“악당이라면 말야, 어? 최소 빌딩 깨부수고 사람 죽이고, 뉴욕 시내에 핵미사일 떨어뜨리는 그런 짓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저지르던데. 넌 영화도 안 보냐?”
“음……. 그런 과격한 취향이구나, 민호. 아쉽지만 내가 피를 못 봐서 그런 장난은 못 치는데.”
“장난? 그래 말 잘했다. 야, 이 더럽게 크고 치안 엿 같은 동네에 하루 몇 건의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줄 알아? 봐, 너 때문에 지금 여기 투입된 인원이 대체 몇 명인가.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나더러 이 왔다갔다 거리는 머릿수를 전부 세어보란 얘기야?”
“이까짓 장난에 매번 바쁜 사람들 개고생 시키니까 하는 말 아냐 이 나쁘고 멍청한 새끼야!”
이까짓 장난이라….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선 채로 민호의 짜증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웃으며 코끝을 훔쳤다. 그래 뭐 내가 장난치는 스케일이 좀 작지.
“하지만 다른 것들까지 작을 거라 생각하면 곤란해. 아주 엄청나단 말이야. 예를 들면…아, 여기서 확인하긴 조금 그렇지? 이 사람들 많은 데서 바지를 내릴 순 없는 거잖아.”
“…벤, 이 새끼 당장 연행해가라고 해. 법률 팀이니 뭐니 와서 풀어달라고 지랄하면 그 자식 대가리부터 쏘라고 알비한테 전하고.”
개소리 하는 거 보니까 약 빤 거 같은데 마약청에도 전화하라 그래!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는 둥 얼굴 좀 보자는 둥 침착하게 지껄이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버럭 소리를 지른 민호가 의전용 버스로 걸어가며 전투복의 단추를 뜯었다. 그는 문득 엊그제 담배와 함께 샀던 로또 복권을 떠올렸다. 그거 당첨되면 얼마지? 하지만 아직 발표되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제게 주어진 일생의 행운은 어렸을 적에 다 써버렸으니까.
현실로 돌아오는 버스의 계단을 오르며 그는 하루에 수 십 번씩 반복하던 그 생각을 정확히 백만 스물 두 번째 되뇌었다.
아……퇴사하고 싶다.
2.
“다음 분 주문하시겠어요?”
그야말로 청년 구직난의 시대였다.
저기요 여기서 일하면 한 달에 얼마 받아요? 상냥하게 주문을 받는 파트타임 종업원을 보며 민호는 이런 것이 묻고 싶었다. 꼭 고객 응대 매뉴얼에 나올 법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등 뒤로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콘과 탄산음료를 뽑아내는 기계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너머에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주문받은 메뉴를 만드는 직원들이 보였다. 모두 하나같이 빨간색 피케이 티셔츠에 캡 모자를 눌러쓴 차림이었다.
민호는 눈동자를 가만히 오른쪽으로 굴렸다. 이제 계산을 하는 데는 도가 텄다. 최저임금이 8달러 조금 안 되는 정도니까 하루에 65달러 정도. 그러면 한 달 월세에 생활비에……음. 역시 맥도널드로는 부족하겠지. 팔짱을 끼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고개를 갸웃거린 직원은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저, 손님?
“……치즈버거요.”
“다른 음료나 사이드 메뉴 같은 건 괜찮으세요?”
“네.”
“치즈버거, 단품으로 하나. 총 4달러 계산 도와드리겠…,”
…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운터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동전 더미에 직원은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죄다 10센트에 25센트, 간혹 보이는 50센트짜리가 두어 개. 많기도 했다. 민호는 제 뒤로 길게 늘어져 있는 줄을 흘긋 곁눈질하며 헛기침했다. 그, 빨리 계산 좀. 얼른 그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은 동전더미들을 카운터에서 치워 제 쪽팔림과 체면을 구제해 달라는 뜻이었다. 아니 나는 님이 잔돈 정확히 맞춰 가지고 왔는지도 모르는데 50센트짜리도 아니고 지금 10센트짜리만 존나 많은 이걸 빨리 세고 계산해 달란 말씀이세요? 묘하게 사투리 억양이 배어 텍사스 출신이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이 손님의 뻔뻔한 태도가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꺼져가는 평정심 속에서도 서비스 종사자의 마인드를 잊지 않았다. 하필이면 손님 제일 붐비는 시간에 이런 개 진상…. 욕은 마음속으로만 굴리며 탑처럼 쌓은 10센트짜리와 25센트짜리 동전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감쳐 문 입 꼬리는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미간은 내 천川자를 그리는 그녀의 기묘한 표정을 민호는 애써 못 본 체 했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업계의 격언을 완벽하게 실천한 그녀는 민호와 아주 관계가 멀어 보이는 쿠폰 이용과 포인트 적립까지 물은 후 달랑 하나만 시킨 치즈버거를 큰 봉투에 넣어 주는 친절까지 발휘했다. 참으로 투철한 CS정신이었다.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돌아선 민호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테이블들을 지나 출입문 옆 통유리에 붙어 있는 아일랜드 바에 자리를 잡았다. 뽀작뽀작 포장을 까 내리다 일순 무언가 생각난 듯 청바지 뒤춤을 더듬거렸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그는 둘둘 말아 주머니에 꽂아놓은 지역신문을 꺼내 펼쳤다. 이달의 어린이 세트 장난감과 새 메뉴 프로모션을 홍보하는 테이블 위로 S시의 구인 정보가 쏟아졌다. 설마 여기서 내 자리 하나 없겠어? 민호는 따끈따끈한 치즈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원래부터 그가 이렇게 궁상맞은 청춘은 아니었다.
홀로그램 형태로 벽에 붙어있는 텔레비전에서는 G-07구역의 가뭄을 해결한 센티넬에 관한 뉴스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농민 여러분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입 바른 소리를 하는 얼굴을 보며 뒷 테이블의 여대생 셋이 떠들었다. 어머, 저 센티넬 잘 생겼다. 물 능력자인가 봐. 몇 살 같아 보여? 정부군 소속이면 스물은 넘었겠지? SNS 할까? 저기 자막에 뭐라고 적혀있는 거야 스펠링이? 아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오려나……. 지금이야 센티넬 3세대들의 인권 신장 운동으로 상황이 좀 나아졌다지만, 국가에 귀속되는 센티넬에 대한 각종 규제와 국가보안법 같은 복잡한 사정들을 일반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있지도 않을 페이스북 계정을 찾기 위해 조막만한 아이폰 위로 머리를 맞대고 고군분투하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비치는 유리창을 보며 치즈가 묻은 입가를 닦던 민호는 그에 대한 칭찬이 꼭 제 얘기인 것 마냥 씩 웃었다.
동시에, 조금 씁쓸해졌다.
…그래, 어쩌면 저 남자도 내 동기가 될 뻔 했지.
메마른 농작지에 물을 채워주는 능력은 없지만 고속열차보다 빠른 두 다리는 있었다. 스피드스터. 민호는 남들과 다른 시공간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24시간 만에 끝낼 일을 단 2분 만에 끝낼 수 있는 무한정 가속의 능력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평균보다 이른 나이부터 능력이 발현된 그는 학창 시절 내내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다. 지각 따위로 꾸중을 듣거나 벌 청소를 받는 일은 그저 남의 이야기였다.
인구의 3%. 그러니까 날 때부터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른 능력을 가진 ‘센티넬’ 의 집안에서 태어난 민호였다. 신인류. 능력자. 제 6의 감각. 일반인들과 다른 염기 배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학계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 그들을 칭하는 이름은 많았고 민호의 아버지는 센티넬 2세대였다.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전기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을 가진 아버지와 염동력을 가진 첫째 형, 손가락 끝에서 불을 피워내는 둘째 형. 세 사람 모두 다른 속성의 능력을 가졌지만 센티넬이라는 점은 같았다. 부친을 이어 두 형은 센티넬들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국가기관에 차출되어 일찌감치 제 몫을 해내고 있었으며 피는 속일 수 없다고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민호에게도 어김없이 그만의 능력이 주어졌다. 테스트, 교육, 훈련, 컨트롤 등의 단어를 들으며 자라온 그는 자신이 동경하는 두 형이 다져놓은 탄탄대로를 보았다. 이제 나도 어른이 되면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는 건가? 그 생각만 하면 어린 민호는 가슴이 뛰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도 더 된 옛날의 일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사춘기 때 부터였다. 그는 주변의 사물이 느려지고 잔상이 남아 흐트러지고 어그러지는 공간을 가르고 달려 빛과 견주어야 할 정도로 빨랐던 몸이 점점 둔해지고, 종내에는 능력을 사용할 때에도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자신과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초월적인 시공간은 이제 민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사람이야 병원에 가 의사의 진단을 받으면 된다지만 센티넬의 감퇴하고 있는 능력은 원인과 처방을 내려줄 사람이 없었다. 별 다른 스트레스도 없고, 심한 성장통도 없었으며, 몸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평균보다 어린 나이에 능력이 발현되었으니 성장판 닫히듯 능력도 일찍 퇴화한 게 아니겠느냐, 고 센티넬을 연구하는 부친의 지인만이 그에게 확실치 않은 추측을 전달했을 뿐이다. 덧붙여 그는 재활도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거라 말했다. 정말로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급하게 타오른 모닥불이 빨리 꺼지듯, 제 또래의 미숙한 센티넬들이 전문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이미 제 능력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었던 민호는 이제 아주 한정된 공간 내에서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다리를 움직여 최대한 멀리 그리고 빨리 움직여 봤자 전방 50m 내외가 한계였다.
이제 한물 간 히어로. 아니, 전성기도 없었고 활약도 못 해봤으니 히어로라고 칭할 순 없겠지. 오랜 기간 동안 가뭄으로 골머리를 썩던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꽤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일이었는지 TV에서는 센티넬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가 연신 보도되고 있었다.
스피드스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고 되어 있으면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센티넬이 국가 기관에 스카우트 될 리가 만무했다. 순식간의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민호는 매일 저녁 식사시간에 저를 못 마땅해 하는 아버지의 눈칫밥을 견뎌내야만 했다. 정말이지 반찬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래도 자식이라고 미운 털만 박힌 저를 감싸고도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는 더 죄송스러웠다. 결국 고민 끝에 민호는 짐을 쌌다. 그리고 발길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 아파트를 구하고 그 이후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택배 상하차, 공사판 막노동, 고층 빌딩 닦이 등등등 등등등등. 어렸을 때부터 형제들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센티넬 기관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진로를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당연히 따로 배운 공부도 기술도 없었던 그였지만 넓고 큰 도시이다 보니 자리는 많았다. 그러나 남들보다 뛰어난 피지컬을 십분 활용해 몸 쓰는 일을 하던 민호는 매일 아침 인력시장에 나간 지 딱 한 달 만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병원비로 돈이 다 나가고 있잖아?
그는 텍사스를 떠나오던 날까지도 아침밥은 들고 가라던 어머니의 상냥함과 눈물 짓던 얼굴을 회상했다.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이 멀어진 아버지와 두 형의 모습도 떠올렸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야만 했다.
그가 정신 팔고 있는 사이 집안 구석을 이 잡듯 뒤져 찾아낸 동전으로 마련한 햄버거 소스가 뚝뚝 떨어져 읽고 있던 구인지를 물들였다. 아 진짜…. 손날에 묻은 소스를 혀로 훔치며 민호는 마지막 한 입을 처리하듯 구겨 넣고 남은 포장지를 집어 들었다. 물휴지가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닦으려는 요량이었다.
“어?”
그러나 그 순간, 민호는 그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을 글귀를 보게 된다. 종이 위로 번진 소스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민호는 벌겋게 물든 부분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번지수와 연락처, 근무 조건들이 빼곡하게 적힌 박스들로 쉽게 발견하지 못할 구석진 부분에 맹수의 발톱을 연상케 하는 로고와 함께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 써져 있었다.
「OUTLAW 대원 모집」
상주인구 3000만, GRDP 8000억 달러. 1960년대 이후로 급속도의 발전을 이룩한 기회의 도시.
매 해마다 ‘스코치 드림’ 을 꿈꾸며 도시를 찾는 타지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발전한 도시라는 평가가 마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뜻과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 늘 어디나 좋은 점이 있으면 어두운 이면도 있기 마련이다.
그 일례로, S시의 가장 취약점은 구멍이 뚫린 치안이었다. 그 원인에는 부패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찰의 수뇌부가 있다. 주둔하고 있는 군 병력도 인프라가 영 형편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범죄가 발생했지만 시 의원들은 조용했다. 선거철 지나고 제 배만 부르면 제가 맡은 도시야 어떻게 되든 나 몰라라 하는 기득권층의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새삼스러워 놀랄 것도 없었다.
아가씨를 끼고 골프 접대나 하러 다니며 사태를 방관하던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시 의회 앞에서 큰 폭동이 일어난 직후부터였다. 화염병이 날아들고 주차장에 대어놓은 차들이 줄줄이 폭발하는 지옥도를 앞마당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그들은 때늦은 비상 대책 위원회를 소집했다. 저를 뽑아준 시민들보다는 제 집 문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의도는 달랐으나 어쨌든 부지런히 뒤로 빼돌리는데 힘쓰던 시 예산을 올바른 곳에 쓰게 된 최초의 일이었다.
여러 논의 끝에 약화될 대로 약화된 정규군을 키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민간군사기업 -이하 PMC(Private Military Company)- 을 고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수가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PMC 대원들의 대부분에게는 특수부대를 전역한 이력이 있었다. 검증된 실력을 갖춘 그들에게 공동 수사권을 비롯한 일부의 권한을 주고 도시의 치안을 맡기자는 법안이 발의가 되었고 그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간군사기업들 중 여러 조건을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S시가 손을 잡은 곳이 지금의 민호가 소속된 OUTLAW였다. 규모는 가장 크지만 신념도 없이 돈에 따라 이쪽에 붙기도 했다가 저 쪽에 붙기도 하는, 그래서 임무 수행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테러도 불사하는. 그야말로 이름 값 하는 놈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기업이었다.
법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는 무법자들이라. 업계의 비웃음이 덤으로 따라왔지만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시의 치안과 경비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S시와의 계약 이후 자신의 회사가 더 이상 지폐 쪼가리에 놀아나는 단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네이비 씰 출신이지만 이미 전쟁 장사꾼이 된지 오래인 그가 결여되었던 도덕성이 갑자기 생겨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평범한 청년들처럼 구직난에 뛰어든 민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뛰어난 피지컬이 유일한 자산으로 몸을 쓰는 일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그는 그 길로 OUTLAW에 지원을 했다. 그날의 판단은 밑져봐야 본전인 것 치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서류심사와 체력검정, 사격테스트까지 통과한 그는 회사의 최종 면접까지 갔다. 할 일 없는 퇴역 군인들이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지원하는 곳이 PMC라더니, 과연 어디 격투기 선수처럼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다 모인 면접 대기실에서 아직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한 민호의 모습은 마치 허약한 초식동물 같았다. 어이, 피자 배달 알바 면접 보러 왔냐? 딱 제 세 배쯤 되는 팔뚝을 가진 남자가 어깨를 툭 쳤을 때 바람 앞 낙엽처럼 떠밀리며 민호는 그저 웃었다.
머리가 훌렁 벗겨지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면접관은 민호가 써 놓은 특이이력에 코끝까지 내려왔던 안경을 추켜올리며 잠시 흥미를 보였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죠? 스피드스터요. 그, 옛날 코믹스에 나왔던 플래시, 아니 요즘으로 치면 퀵 실버처럼 순간 이동 같은 거거든요……그러니까 어……어벤져스 보셨나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서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민호였지만 미련 없이 서류를 넘겨보는 면접관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크게 쓸모는 없네요.” 그랬다. 시속 300 이상의 고속열차와 비행기로 마음만 먹으면 지구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있는 지금은 21세기였다.
그러나 마뜩찮았던 반응과는 다르게 민호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고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이후 민호의 생활은 순풍을 타고 돛을 펼친 배 같았다. 그의 능력을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새 직장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고 민호는 충분히 활약했다. 그는 한 건 한 건 현장에 나가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나날이 달라지는 동료들과 사수들의 시선을 실감했다. 입사한지 일 년이 좀 지났을 때는 수색조의 리더로 현장에 투입되는 팀원들을 이끌었다. 관계자들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은 대원이 리더가 되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며 민호의 능력을 칭찬했다.
이게 진짜 내 길이었구나. 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가족들과 같은 센티넬 이외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이 감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민호의 나약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많으며, 자신의 그런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저는 더 이상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터지는 대도시의 사건 사고에,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위기에 빠진 도시와 사람들을 구하고 영광의 흉터와 파스로 뒤덮인 등짝을 침대 위로 붙이며 밤하늘의 별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뿌듯함과 보람됨에 미소 지었다.
바야흐로 그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 언제나 그렇듯 히어로에게 평탄한 날은 지속되지 않았다.
민호에게는 그의 활약을 더욱 더 빛나게 해 주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뉴트 오스본.
저명한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미국 부호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스본 가의 막내. 그의 위로는 형제가 둘로, 아버지인 노만 오스본으로부터 물려받은 세계적인 대기업 오스코프 사와 그의 자회사들을 꾸려 나가고 있다. 젊은 나이에 대기업을 이끄는 재목들로 시사지나 경제지에서 간혹 얼굴을 볼 수 있는 그의 형제들과 다르게 뉴트 오스본은 회사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본인의 형제들처럼 널리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단지 매스컴에 본인을 어필하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첫째인 레오 오스본이 정계에서 탐내하는 인물로 종종 거론되고 둘째 해리 오스본이 신약을 개발해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름을 알릴 때 뉴트의 이름은 그의 끼를 숨기지 못하는 파파라치 사진과 함께 뉴스의 사건 사고 란에 실렸다. 본가 쪽에서는 두 형의 명성에 먹칠하듯 사고를 치고 다니는 그를 반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냥 내다놓은 취급이었다. 애초에 노만 오스본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 중 정확한 것은 없었다.
민호가 강제 전성기를 누리게 해준 그와 처음 만난 건 뉴트가 라디오의 주파수를 교란시켜 전쟁이 발발했다는 장난을 쳤을 때였다.
유배 보내지듯 떠난 유학 생활이었던가. 독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는 새로운 장난으로 자신의 복귀를 알렸다. 한동안 잠잠하기에 이젠 철 좀 들었나 싶었는데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한결같은 뉴트의 행보에 그를 담당하는 경찰이고 PMC 쪽이고 모두 이골이 난 상태였다. 지금은 은퇴하고 없는 민호의 사수마저도 민호에게 그 애새끼와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조언을 일러 주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그러나 민호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오스본의 법률 팀이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염세와 냉소에 찌든 표정으로 유치장 밖 의자에 앉아있는 뉴트에게서 질풍노도의 감정을 겪던 시절 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건 텍사스 출신으로 S시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민호가 그를 전적으로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민호는 자신과 동갑인 뉴트가 저보다 족히 다섯 살은 어린 줄 알았다며 그 날을 회상했다.
장난을 칠 때의 반짝이는 눈빛은 오간 데 없고,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인형 같은 얼굴로 무미하게 본가의 고용인들을 따라 나서는 뉴트를 불러 세운 민호는 막 제가 마시려고 뽑아 온 탄산음료를 건넸다.
“어이 친구, 사는 게 재미없냐? 음…어릴 땐 나도 이런 일탈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이제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지. 곧 운전도 할 수 있는 나이잖아. 이런 장난은 그만 졸업하도록 해. 가봐.”
그리고 무려 그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활짝. 뜨악한 얼굴로 저를 가리키며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팀원들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 “한 번 혼났다고 사내자식이 소심하게 말야. 어깨 피고!” 등짝까지 쳤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해도 오스본 가의 막내아들을. 어깨가 떠밀릴 정도로. 짝!
그 모습을 목격한 신참 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사수에게 질문했다. 혹시 내일이라든지 모레라든지 민호 선배님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면 그거… 산재 처리 돼요?
같은 시각, 뉴트 오스본은 어이가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건물 밖까지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드는 모습은 제가 겪은 사람들 중 가장 대담하고 멍청해 웃기기까지 했다. 실제로 본가의 법률 팀이자 이제는 뉴트의 사고 처리 담당이라 불리는 조쉬가 잔소리와 함께 직접 몰고 온 세단에 올라탈 때는 큰 소리로 웃었다. 도련님 미친 거 아닙니까? 아주 옛날부터 제 뒤처리를 맡아 와 이제는 막말도 서슴치 않고 하게 된 조쉬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뉴트는 앞으로 구부린 몸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배 근육이 당기고 목구멍이 조여들 정도로 진지하게 웃은 것은.
벌써 몇 년 째.
어느 날 부친이라며 나타나 단란하게 잘 살고 있던 모자를 생이별시킨 노만 오스본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 취급했고, 어린 자신이 유모의 손에서 키워질 때 이미 본가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있던 두 형은 쫓아가기에는 이제 별처럼 먼 존재였다.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었다고, 관계의 결핍 대신 마음껏 먹고 입을 수 있는 재력이 주어졌지만 물질적인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절실한 나이였다. 애정. 끈기 있는 관심.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사람의 진심 같은 것. 애정결핍을 앓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경우라 여겨질 정도였다. 타고난 머리가 좋았고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칭찬, 친구들의 동경어린 시선을 즐겨 공부도 곧잘 했지만 그것으로도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대한 만큼 보답 받지 못한 감정은 결국 그를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뉴트가 잔뜩 곪아 비정상적으로 틀어진 시선을 집 밖으로 돌리게 된 계기였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에 약간의 폐를 끼치는 장난들을 벌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너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그 한마디와 함께 자신을 말려 주기만 해도 좋았을 텐데. 날이 더해갈수록 이게 관심을 얻기 위한 저 나름의 신호인지, 그저 나쁜 짓을 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해져 가는 자신을, 아무도 구제해주지 않았다. 바란 적 없지만 저절로 등에 올라탄 오스본과 오스코프와도 같은 이름들에 그들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마땅히 해야 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없는 사람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삼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도무지 흥미를 붙일 만한 구석이 없었다. 사는 게 다 뭐야. 삶에 권태를 느끼고 있을 때 자신의 앞에 보란 듯 나타난 게 민호였다. 이제 곧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라니, 대체 자신을 몇 살이나 어리게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대하는 민호의 태도는 여태껏 뉴트를 스치고 지나간 시선들과 확실히 달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골칫덩이 혹은 투명인간. 그의 것은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거라고는 더 더욱.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래, 사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이라는 게 별 거 없다. 바란 적 없는 응원과 어줍잖은 동정이 아니라 그거 참 좆같은 일이지, 하며 공감을 해주는 것. 아무리 잘나고 제 멋에 사는 사람이라도 이해와 공감을 받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고, 뉴트에게는 딱 그게 필요했다. 적어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그에게는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웃는 모습. 자신을 보며 진심 어린 웃음을 보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었나. 거짓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휘어지는 눈 꼬리와 깊게 패이는 몇 갈래의 보조개가, 마치 한여름에 부는 바람처럼 그의 마음속에 파동을 일으켰다. 첫눈에 반해 짝사랑을 앓는 십대 소녀 같은 표현이었지만 이런 간지러운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설레었냐는 표현으로 묻는다면, 그런 것도 같았다.
뉴트는 청량감이 느껴지는 그 미소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훗날 거듭된 회상 속에서 뉴트는 그 미소를 마주한 것이 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된 시작점인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그 이후 민호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은 평소와도 같은 장난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했다.
그의 미소를 보고 싶다는 단편적인 마음은 그를 좀 더 알고 싶다는 관심으로 발전했다. 발전한 마음은 상대방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욕심을 키웠다. 오스본이니 돈이니 하는 자질구레한 껍데기들을 내려놓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그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딱 제가 그에게 관심을 쏟은 만큼. 원래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동시에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후 민호의 관심을 받기 위해 뉴트가 그동안의 악동 같았던 행실들을 모두 반성하고 뉘우쳤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정말로 민호의 희망사항이었다. 이미 삐뚤어진 어린애의 심성이 어디 가겠는가. 그를 모르는 사람은 백이면 백 사랑스럽다고 탄복할 외모와는 달리 뉴트는 다소 사랑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관심을 갈구했다. 민호의 관할 구역만 골라가며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대사관에 테러를 예고하는 장난 전화를 치질 않나, 공무원 시험 답안지를 실은 차량을 훔쳐 달아나다 중간에 버려두질 않나. 어찌나 머리가 비상하고 아이디어가 넘쳐나는지 그는 매일 다른 형식의 장난으로 민호와 대원들을 낚았다. 어째 반복되는 패턴이 단 한 번도 없냐. 얘 실은 천재 아닐까요? 어느 날 눈치 없는 신참이 던진 질문에 민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그러게 이 좋은 머리를 딴 데다 좀 쓰라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반박도 못 했다.
커피숍 포인트 적립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아가다가는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나날이 말라가던 그는 하다못해 이직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날의 민호는 약간 긴장한 상태였다. 지인이 추천해준 회사의 서류 면접에 기적적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민호가 지원한 곳은 무역회사였고 PMC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관계가 먼 직업군이었다. 왠지 인사부의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는 지인의 말에 민호는 좀 설렜다. 그래 사실 그동안 보람되는 일을 많이 했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이렇게 몸 쓰는 걸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실제로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위험한 적도 몇 번 있었고 결정적으로 뉴트 오스본이랑 더 이상 엮이기도 싫고……. 사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그를 혹하게 했지만.
며칠 전부터 오늘을 위해 알비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오후 반차를 빼둔 참이었다. 저 대신 근무를 바꿔 주기로 한 벤에게는 술을 사기로 했다. 민호는 그동안 절대로 꺼내 입을 일이 없었던 정장의 옷매무새를 고치며 건물을 나섰다. 긴장하지 말자. 나만 잘하면 땀내 나는 전투복도 위험천만한 임무들도 이 지긋지긋한 사옥도 다 끝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언제나 모든 것이 마음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점심시간을 막 지나 누군가는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법한 오후, 좁은 쉐보레 안에 갇힌 민호는 벌써 몇 번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하자 이제 번호판을 거의 외울 정도로 눈에 익은 앞 차의 꽁무니가 보였다.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인수인계를 하느라 좀 빠듯하게 나왔더니 꼼짝 없이 대교 위에서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이다.
도로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와 별 차이 없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차량의 행렬에 브레이크를 꾹 밟고 있는 민호는 한숨을 쉬었다.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는 소요 시간은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대로라면 이 길이 단번에 뚫리고 신호도 한번 안 걸린 채로 엄청나게 밟아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은데. 대체 주말도 아니고, 딱히 러시아워라고 볼 수도 없는 지금 이 방향으로 길이 이렇게 밀릴 일이 뭐가 있지?
답답한 마음에 결국 그는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 냉방 중이었던 차 안으로 여름철의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후덥지근해진 공기에 꽉 졸라맸던 넥타이 매듭을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창틀에 팔을 얹었다. 짜증스럽게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고라도 났나? 턱을 들고 저 멀리 시선을 두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체길의 머리가 보였다. 대교 한 가운데 엄청나게 큰 트레일러 차량이 모로 세워진 채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몇몇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뭐라 말하듯 수군거리는 가운데 멀리서 봐도 화가 난 남자 하나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전화를 거는 것을 보니 아마도 운전석이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저런 미친놈이……? 대체 어떤 상황이어야 저 큰 트레일러를 옆으로 세워 놓고 자리를 비울 수가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미 수 십 통의 민원으로 전화통에 불이 나고 있겠지만, 빠른 조치를 위해 저 역시 그 흐름에 편승 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교통안전과에 전화를 할 것을 결심하고 있을 때, 애물단지 같은 트레일러를 보던 민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가물거리지만 훨씬 선명해진 시야 끝, 까만 트레일러의 몸통에 대문짝만하게 찍힌 회사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OSCORP Industries」
아, 설마. 아닐 거야. 뜨겁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입술 끝을 자근자근 깨물던 민호는 창틀에 걸치지 않은 손으로 콘솔 위를 더듬었다. 진동으로 설정해 둔 전화벨이 울린 탓이었다. 내가, 여기, 어디, 둔 것 같은데. 콘솔 위와 비어 있는 컵 홀더,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도 민호의 의식은 철저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우연이겠지. 그림처럼 잘 생긴 형제들이 운영하고 있는 그 회사는 매우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야. 의약품이니, 전자니, 최근에는 유통까지. 생활의 전반에 오스코프가 스쳐가지 않는 곳은 없다고. 아, 하다못해 우리 상황실 모니터도 오스코프 제품이잖아? 그러니까 하필이면 이 시간대에 저 회사의 차량이 도로 위에 세워져 있는 건 정말로 우연의 일치인 거야. 뭐, 평소에 이 길 왔다갔다 하면서 저런 화물 차량 같은 거 많이 봤었고. 그래. 그럴 리가 있나. 제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탓이라 치부하며 석연치 않은 느낌을 떨쳐내는 동안 어느새 진동은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잉-. 짧게 울리다 멈춘 것으로 보아 아마도 텍스트 메시지인 것 같았다. 마침내 핸즈프리 거치대에 휴대폰을 꽂아둔 사실을 기억해낸 민호는 다시 고개를 집어넣고 자세를 바로 했다. 거치대에 꽂아둔 휴대폰을 뽑아들고 팝업창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사진을 첨부한 메시지가 와 있다는 알림이었다. 스팸은 아닌 것 같은데?
수신 버튼을 누르자 뱅글뱅글 돌던 톱니바퀴가 사라지고 점점 픽셀이 선명해졌다. 액정 속 사진은 차의 사이드미러를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으로, 거울의 반절은 길게 늘어진 대교 위의 차량들을 실시간으로 비추고 있었다. 이게 뭐야? 민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막만한 사이드미러에 비친 휴대폰 너머로 사진을 촬영한 남자의 얼굴이 자그맣게 실려 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벌린 그는 화면 위 확대되어 흐릿하게 뭉개진 얼굴을 확인했다.
「면접은 잘 가셨나?」
뉴트 오스본 이 씨발 새끼!!!!
고함과 함께 민호는 쾅, 내리친 핸들 위로 이마를 처박았다. 빠앙- 클락션이 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앞 차의 운전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빼어 뒤를 돌아보았다. 지각 확정이었다.
지각이고 나발이고 이 면접은 애초부터 망한 거였다. 사옥 1층에 입점해 있는 테이크아웃 가게에서 커피를 사고 있던 벤은 ID카드를 포켓에 쑤셔 넣으며 성큼성큼 옮기는 민호를 발견했다. 그는 이틀 전 답지 않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근무를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던 동료의 얼굴을 기억했다. 이번 주 근무가 모두 끝나면 술을 사겠다는 제안에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지만 굳이 그런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아도 벤은 흔쾌히 근무를 바꾸어 줄 생각이었다. 그 관대함에는 평소 조퇴나 병가도 한번 내지 않고 꼬박꼬박 출근한 민호의 성실한 태도가 일조했다.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친한 동료 근무 한번 바꿔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냐만은.
아무튼 오후 동안 반차를 내겠다는 말에 좋은 마음으로 근무를 바꿔 주었는데 업무를 인계하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씨근덕거리며 사옥으로 돌아온 폼이 심상치 않았다. 오늘 뭐 중요한 약속 있다며 왜 벌써 왔어? 금세 걸음을 따라잡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그가 물었지만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이직을 준비하려 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욕을 꾹꾹 삼켰다.
언제쯤 이딴 장난 그만 칠래?
매번 속는 제 쪽도 멍청하다 생각했지만 사고는 늘 방심한 사이에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싫든 좋든 신고가 들어온 이상 신고가 들어온 이상 출동을 나갈 수밖에 없는 제게 어찌 뜻이 있겠는가. 귀찮지도 않은지 매번 새로운 방법으로 끈질기게 사고를 치는 뉴트의 성실함에 두 손 두 발 들기 직전의 민호는 어느 날 그렇게 물었다.
정말이지, 아예 큰 죄를 저질렀다면 매번 찾아오는 오스본 가의 법률 팀이 찍소리도 못 하게 잡아넣을 수 있을 텐데. 아는 놈이 더하다고 뉴트가 치는 사고들은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들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 경범죄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들이라 매번 미꾸라지처럼 법의 심판을 피해 갔다.
벌써 열 번도 넘게 물어본 질문에, 뉴트는 알듯 말듯 자그맣게 미소를 덧붙이며 열 번도 넘게 대답한 말을 되풀이했다. 음, 네가 나랑 만나주면?
“농담도 상황 봐가면서 해라.”
“진짠데? 나 그쪽한테 되게 관심 많아.”
“알아. 너 지금 되게 새 장난감 찾은 애새끼 눈빛 하고 있거든?”
“그런 관심 말고.”
일순 그의 표정에서 평소의 장난스러움과 다른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지만,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24시간도 모자라고 피곤한 제 하루의 1분이라도 그의 생각으로 시간을 쓴다는 것은 스트레스이자 상당한 감정소모였다. 개과천선하란 소리 안 할 테니까, 좀 가. 가라고. 어? 민호는 이내 눈매 끝과 입 꼬리로 웃음기가 번지는 뉴트의 면전에 대고 손을 내저었다.
3-1.
“보안 1팀 에이바 만났다며?”
“어떻게 알았어?”
“뭘,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잤어?”
“잤…!! 너 임마 목소리 좀! ……잘 될 리가 있나. 남자친구 있대.”
근데 문제는 그게 같은 팀의 T씨라는 거야. 씨발 나 앞으로 3층 어떻게 내려가지? 어? 네 귀에 들어갔을 정도면 T씨 귀에도 분명 들어갔을 텐데 아…. 아침부터 머리를 감싸 쥐고 자학하는 벤을 보며 헹, 코웃음을 친 민호는 들고 있던 아이스커피를 쭉 빨았다.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피곤을 쫓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잠이 부족했지만 어제는 충분히 밤을 샐 가치가 있었다. 바르샤의 우승이라니. 네이마르의 결승골 장면을 회상하고 있자니 그 감동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몽롱했던 정신이 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적어도 현장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저렇게 쭉 좌절상태일 벤을 지나쳐 제 자리를 찾아간 민호는 다시 한 번 끝이 납작해진 빨대를 물었다. 커피를 모두 마셔 요란한 소리와 얼음만 남은 컵을 내려놓았다. …어? 순간 위화감을 느낀 그는 시선을 거두다 다시 눈동자를 내려 제 책상을 응시했다.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플라스틱 컵 옆으로 못 보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수사에 협력을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흑백으로 출력해도 섬세하기만 한 이목구비에 미간을 찡그리며 민호는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내가 이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뭔데 이게?”
아무렇게나 컵을 올려둔 탓에 동그랗게 물 자국이 남은 종이를 흔들며 민호가 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의욕 없는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나 짤깍대고 있던 벤이 허리를 젖히며 답했다. 아, 경찰 쪽에서 팩스 보내온 거야. 그 사건 용의자래.
언제 찍은 것인지, 분위기가 지금보다 앳되어 보이는 뉴트 오스본의 모습에 민호는 픽 웃으며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이 자식이 저지른 사건이 어디 한 두 개인가. 저번처럼 연막탄 터뜨리고 여러 사람 뺑이치게 만드는 그런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이번엔 또 어떤 미친 짓을 하셨나? 이젠 제법 놀라지도 않고 태연한 어조로 사건의 개요를 확인한 민호의 뺨이 서서히 굳었다. 답지 않게 큰 눈을 하고 다시 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야. 이거 확실해?”
괴수 살인 사건.
일단 수사국에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첫 번째 피해자는 17번가의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40대 남성이었다. 회사에서 퇴근 후 늘 지나다니던 귀가 길에서 살해된 채 그가 발견되자 경찰은 피해자와 채무관계로 얽혀 있던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한 지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세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었다. 첫 번째 피해자와 동일범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범행 현장도 수법도 비슷했다. 범행의 동기가 될 금품 갈취나 장기 적출, 성폭행의 흔적도 없었으며, 범인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증거가 될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단 한 가지. 시체의 머리가 아주 처참하게 부서져 있고 옷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는 사실. 그것만이 발견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었다. 이래서야 상반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알아낼 수 없겠다며 관계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주 작은 단서도 하나 발견되지 않고, 피해자들 간의 공통점도 없어 영 수사 방향을 잡지 못한 경찰이 다섯 번째 피해자가 발생할 때까지 손도 쓰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을 때, 그들은 아주 결정적인 제보 전화를 받았다.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괴수가 벽을 타고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건너편 빌딩에서 그 광경을 본 목격자는 약간의 주취 상태였고, 목격자가 ‘괴수’ 를 보았다 언급한 구역은 CCTV로부터의 사각지대였다.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 신뢰성을 갖추지 못해 다시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까지만 들었었는데, 뜬금없이 이 사건의 용의자가 뉴트 오스본이라니.
자그마치 연쇄 살인.
그동안 그가 치던 간 큰 장난들은 감히 애교라 치부될 정도로 크고 죄질이 무거운 사건이다.
“그 자식이 그동안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심한 장난들을 친 건 맞는데 이건 좀…… 헛다리짚는 거 아냐? 증거 있대?”
“증거가 왜 없어.”
민호는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침부터 정장 차림인 알비가 민호의 책상 뒤에 놓인 복사기의 전원을 켜고 있었다. 아마도 회의가 있는 모양이었다.
몇 번의 조작 후에 덩치 큰 기계가 작동되는 소리가 났다. “자, 봐.” 알비는 출력된 복사 용지들을 민호에게 건넸다. 미미한 복사열이 남은 종이에는 사진과 몇 개의 도표가 기재되어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민호의 옆에 선 그는 여러 장을 뒤적이며 묶음을 뜯은 서류를 페이지 순대로 정리했다.
“수사국에서 보내온 건데, L-30구역에서 괴수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나봐. …뭐, 사체라기보다는 작동을 멈춘 로봇 같은 거지만. 아무튼 그 술주정뱅이 취급당한 남자의 제보가 사실이었던 거지. 감식 결과 괴수의 다리에서 다섯 번째 피해자의 것과 동일한 혈흔이 발견되었고, 기술팀 쪽에서는 이걸 가져다가 뜯어 봤는데,”
툭툭. 어깨 너머로 뻗어져 나온 알비의 손가락이 몇 장의 사진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도시를 들쑤신 연쇄 살인 사건의 실체를 마주한 민호의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마치 전갈의 독침을 연상케 하는 긴 꼬리와 몇 쌍의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예리한 이빨이 박힌 아가리에서는 녹물인지 체액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리고 있는 괴수가 누워 있었다. 해부대 위에 놓인 몸뚱이는 지면상으로 봐도 충분히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완전 리얼하게 생겼네. 이 에일리언 같은 게 진짜 깡통로봇이란 말야? 그는 시선을 굴려 함께 첨부된 사진을 살폈다. 과연 알비의 말처럼 반으로 쪼개진 괴수의 단면이 보였다. 네 쌍의 다리 끝까지 얼키설키 엉켜 있는 회로와 색색의 전선들은 마치 자신이 어렸을 적 가지고 놀다 질려서 분해해버린 장난감을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분해한 이후로 두 번 다시 고치지 못한 그 장난감은 적어도 나를 죽이진 않았지. 로봇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라니.
그리고 이 기계 괴수를 움직이는데 이용되었을 동력기와 여러 개의 칩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영 모르는 분야라 평소 같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민호였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동력기와 마이크로칩을 포함한 부품들의 곳곳에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는, 오스코프의 엠블럼. 그는 끝도 없이 늘어진 차들과 함께 다리 위에서 발목을 잡혔던 어느 더운 날의 데자부를 느꼈다.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만 뻥긋거리는 민호에게서 종이를 낚아채며 알비는 사무실의 제일 안쪽, 창가 옆 가장 크게 들여놓은 책상으로 돌아가 모니터를 끄고 자리를 정돈했다. “설마 증거도 없이 오스본의 막내를 잡아들일까.” 손목을 걷어 시간을 한번 확인했다가 낱낱이 흩어놓은 서류를 다시 파일에 넣고, 생전 제대로 패용한 적 없던 사원증을 반듯하게 건 후 유리창에 옷매무새를 비춰 보며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치는 움직임이 무척 분주했다.
“처음엔 좀 손대기가 껄끄러웠나보더라고. 오스본이잖아. 그래도 어떡해, 지금 벌써 여덟 번째 피해자가 나왔는데. 사람이 자그마치 여덟 명이나 죽은 사건이라고. 그리고 언론 쪽에서도 지금 냄새를 맡은 것 같단 말이야.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게 벌써 두 달 전부터인데 이걸 파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어? 그동안 쉬쉬했던 게 까발려질 테고…더 이상 덮어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커진 거지. 내년에 정부에서 예산 내려오는 거에 문제 생길까봐 시에서 겁내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세한 건 내가 지금 이야기를 들으러 가니까, 이따 보자고. 알비는 두 사람을 가리키듯 두꺼운 파일박스를 들어 보이며 급하게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아침부터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민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다리를 움직여 자리로 돌아갔다. 드르륵, 바퀴를 굴려 의자를 빼내고 천천히 걸터앉아 이마를 짚었다. 책상에 괸 두 팔꿈치 사이에 놓인 종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네온사인이 화려한 건물을 등지고 서 담배를 피우는 뉴트의 무표정 위로 불과 며칠 전까지 보았던 그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겹쳐 보였다.
정말 이 녀석이 범인일까?
알비의 말대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민호는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민호는 뉴트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술래잡기하듯 달아나는 꽁무니를 뒤쫓으며 그와 부대꼈던 지난날들을 돌이키고 있자면 그 생각은 더욱 더 확고해졌다. 그래, 비록 지독하게 애를 먹이는 장난을 치고 다녔지만 이렇게 악질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은 고의적으로도 실수로도 없었다. 늘 뭔가 사고를 저지르면서도 그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지 않는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일전에 본인의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제가 피는 못 본다고.
하지만 그 어떤 구구절절한 이유보다도 벌써 뉴트를 반 년 가까이 쫓아다닌 자신의 감이 가장 먼저 말하고 있었다. 뉴트 오스본은 범인이 아니야.
“왜 그래.”
“…….”
“지긋지긋한 얼굴 한 반 년쯤 보니까 정 들었냐?”
어차피 그 새끼는 범죄자였잖아. 놀랄 것도 없다고.
그렇게 말해놓고도 뜻밖의 용의자에 줄곧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동료의 모습이 걱정되긴 하는 모양이었는지 독수리 타법으로 용케도 메신저를 쓰고 있던 벤이 고개를 돌려 쯧, 혀를 찼다. 하여간, 안 그렇게 생겨서 물러가지고.
“…있잖아. 너무 몰아가는 거 아닐까?”
“뭐? 그럼 뉴트 오스본이 아니란 얘기야?”
“어쩌면.”
“무슨 근거로?”
근거? 화들짝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놀란 듯 벤을 쳐다보던 민호는 당황하며 시선을 내렸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닥을 구르고 목소리가 괴상하게 튀었다. 뭐…뭐 그 새끼 다뤄본 내 감이지 뭐. 그러나 영 시원찮은 대답을 내어 놓는 민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일은 직감이나 예상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잣대로 판단내릴 수 없으며 오로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들을 바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근거도 없었지만. 민호는 확고했다. 모든 정황들이 뉴트를 지목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그의 모든 신경은 뉴트가 범인이 아니라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어떤 시선으로 보아도 민호의 머릿속 용의선상엔 그가 없었다.
그래, 비록 짓궂은 장난이나 치고, 제게 능구렁이 같은 농담이나 하는 놈이지만 이런 일을 꾸밀 정도로 악의를 가진 성격은 아니다. 제가 보장한다.
여기까지 생각을 늘어놓던 민호는 잠시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잠깐, 보장을 해? 보장이란 모름지기 상대에 대한 두터운 신뢰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내가 그 자식에 대해 얼마나 잘 안다고. 애초에 신뢰라는 단어를 운운할 수 있는 관계인가, 우리 사이가?
어쩌면 이 모든 생각들은 그가 배후에 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지도. 민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판단 내리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절대로 연락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번호를 찾았다. 제가 면접을 망쳤던 날 받았던 멀티메일 이후로 들여다본 적 없는 열자리 수의 조합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좀 만나.」
이건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조사 과정의 일부이며 내 감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 뿐이다. 절대 그 녀석의 오명을 벗겨주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입술을 감춰물며 그는 메시지를 전송한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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