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입장정리
a 2015. 3. 31. 22:57 |1. 세상은 넓고 존잘님은 많은데 얘는 왜 이런걸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2. 저는 최애컾이 시궁창에 들어가면 뒷덜미를 끄집고 나와 볕좋고 따뜻한 곳에 데려다 놓는 취미가 있습니다: 현시창인데 얘네라도 행복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뉴트민호 겨론했으면
간밤에 네가 꿈에 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5분 간격으로 맞추어 놓은 자명종의 첫 번째 알람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불을 걷고 일어나 토스트를 몇 번 씹고 치약을 밀어 짠 칫솔을 입에 문 채 욕실 거울 속 나를 응시할 때쯤, 평소보다 조금 더 미묘하게 피곤한 표정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제야 누가 알려주는 것처럼, 문득 생각이 떠오르는 거다. 아, 어제 꿈에 너 나왔었지. 정말로, 네가 헤어진 지 삼 년이나 지난 옛 애인인 내 꿈에 찾아와서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고 싶어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샤워 도중에 발견한 유년 시절 상처의 흔적 같았다. 언제 생긴 것인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무릎에 하얗게 남은 흉터 자국으로 아 예전에 무릎을 다쳤었지, 하고 결과만을 상기하는 것처럼, 그냥 ‘어젯밤 꿈속에 네가 나왔다’ 라는 무겁고 가장 중요한 사실만이 기억에 남았다.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 놀랍지는 않다.
그래. 이런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싱숭생숭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앞서 말했듯 네가 꼭 미련처럼 꿈에 나타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평소처럼 그 사실을 머릿속에 내버려둔 채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서류가방을 챙겨들며 출근 준비를 한다. 지하철을 타고 정신없는 출근길 아침을 보낸 후 회사 정문 앞에서 직원카드를 찍을 때쯤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네 생각은 바쁜 일상에 떠밀려 잠시 잊혀지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냥 네가 나왔다는 사실만 허물처럼 남아 있는, 알맹이도 없는 그 꿈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 후 지하철을 타지 않고 두 다리에 몸을 맡겼다. 제법 거리가 있지만 집까지 걸어갈 작정이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쌀쌀한 밤을 가로지르고, 코트 깃과 얼얼해진 양 뺨에 찬 공기를 묻힌 채 현관문을 열 때면 의식 속의 너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여태껏 살면서 잊고 싶은 무언가를 잊으려 노력한 적은 없다. 노력해 봤자 더욱 선연하게 떠오르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때 되면 자연스레 잊혀지겠거니,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을 종교처럼 믿는 사람이다.
번화가는 입사한 지 딱 일 년 된 회사 사옥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꽤 가까운 거리라 평소 자주 외근을 나가며 지나다닐 땐 생각도 안 나더니, 오늘은 정말 이상하지, 이 길 위로 너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밤거리를 밝힌 불빛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 길의 중간 즈음, 사거리로 갈라지는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골목의 끝에 살던 너는 네 허리까지 오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마중 나왔지. 그리고 한 쪽이 고장 났지만 꾸역꾸역 쓰던 이어폰을 아이팟 위로 아무렇게나 둘둘 감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나를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야, 밥 뭐 먹지?” 안부 인사 대신 그런 걸 묻고 바비큐, 파스타, 아무거나, 그럼 맥도널드… 아 근데 너 어제 다저스 경기 봤냐? 어느새 화제는 클레이튼 커쇼의 슬라이더에 대한 찬양 일색으로 이어지고 서브웨이와 몇 개의 카페, 옷가게를 지난 우리의 발길은 늘 익숙한 부근에 멈추어져 있다. 전 세계에 체인을 두고 있다던 한식당.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내가 만든 엉망진창의 스튜까지 잘 먹는 너였지만 역시 고향이 그리운 유학생이라 그런지 그 가게 앞만 지나면 성큼성큼 잘 걷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지. 몇 번이나 들러 익숙한 곳이면서도 괜히 가게 안을 기웃거리는 널 보면서 나는 여기 갈까? 물어보나 마나인 질문을 했었고.
익숙한 간판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괜히 그 때의 생각이 난다. 야, 뉴트. 저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알파벳으로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읽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글자를 한 자씩 가리키며 어떻게든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게 해 줄 거라고 무진장 노력을 했던, 하지만 네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질 동안 나는 그 한 단어도 소화해내지 못해 결국 완벽하게 발음하는 것을 포기해버린 간판 아래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가랜드가 붙어 있다. 행인들에게 신상 메뉴를 홍보할 목적으로 세워 둔 입간판 옆에는 종업원으로 보이는 유니폼 차림의 남자가 밖에 나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넓은 어깨에서 잘록한 허리로 떨어지는 상체의 선이며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뒷모습이 꼭 너랑 닮아서 더 더욱 네 생각이 났다. 주변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길 가장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격양된 어조로 떠드는 학생들의 음성에 드문드문 섞인 남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영어가 아닌 것 같은 언어로 뭐라고 통화를 하며 검지로 톡, 톡 재를 떨구는 왼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대학생의 쪼들리는 생활비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담배와 술값을 줄이는 방법뿐이라며 함께 금연을 하자 결심해놓고서 결국 우리 둘 다 끊지 못했지. 하지만 그것도 역시 3년 전의 일이라, 의지가 강한 네 성격이라면 어쩜 지금쯤이라면 끊었을지도 모르겠네. 당시 네가 금연을 하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관계 후에 당연한 수순으로 담뱃불을 찾아 붙인 나 때문이었는데, 한 모금만 피우면 되잖아, 하고 마수를 뻗치던 나도 이제 네 곁에 없으니까.
허락된 유학 기간은 총 사 년이었으니까,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SNS 계정을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훑었던 타임라인에서 이민용 가방 사진과 함께 지금 출국장 앞이라던 네 글을 본 것 같기도 한데. 다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꼭 한번 같이 들리자, 미루고 미루다 결국 영영 가지 못하게 된 네 모국의 땅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새롭지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새롭게 형성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을 너를 상상하고 있을 동안 훅, 담배 연기를 바람과 함께 머리 위로 흘려보낸 남자는 뒤를 돌았다.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가 3년 전 내가 너에게 사준 것과 같은 모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이미 놀라서 잔뜩 커진 네 눈동자를 마주하고 난 직후였다.
“…….”
솔직히 말해서 헤어진 후 어디에선가 우연히 너를 다시 만나는,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때에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고 어제 밤 꿈에 네가 나왔던 걸까.
너무나도 예상 밖의 상황에 너 역시 약간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담담한 눈으로 돌아와 코트의 단추를 채워 입고 수트케이스를 든 내 차림을 훑으며 ‘퇴근길이냐?’ 하고 의외로 먼저, 삼 년 만에 재개된 대화의 물꼬를 텄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가 일하는 가게로 들어와 불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육즙을 머금은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갈빛으로 익어갔고 기름진 냄새와 함께 오르는 연기가 환기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빈속엔 술도 잘 못하면서 찰랑거리게 따라놓은 한 잔을 안주도 없이 들이킨 너는 눈 한번 꿈쩍 않고 집게를 들어 고기를 뒤집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가게를 자주 드나들던 손님 중 한 명이었던 네 몫의 의자에는 아까 전까지 입고 있던 직원용 셔츠가 개켜진 채로 놓여 있었다. 너 역시 오늘의 근무를 모두 마감하고 퇴근 준비를 하기 전 잠시 담배 한 대를 피러 나왔다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너나 나나 외견상으로 크게 달라진 모습은 없는 것 같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고,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 하는 서로의 모습이 흘러간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어 많이 늘었네.”
“안 늘면, 여기서 장사 하겠냐?”
“…아주 온 거야?”
“어.”
좀 먹어, 권하는 말도 없이 제가 구운 고기들을 앞 접시에 담아 부지런히 집어 삼키며 대답하는 네 목소리에는 조금의 애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미미하게 남아있던 불씨마저 다 꺼진 것처럼 냉담한 온도가, 마치 새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긴장된 나와는 사뭇 달라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지리멸렬한 싸움과 냉전 끝에 이별을 맞이한 게 어느덧 삼 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아주 무미한 태도와 표정으로 너는 내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곁에 없어 상상으로만 대신하던 내 기억 속 너의 3년을 함께 채워주었다. 뭐… 미뤄놨던 군대 다녀오고, 복학해서 좀 밖으로 돌다가, 정신 차리고 취업 준비하고 그랬어. 이제 여기 매니저야. 한국에서도 대기업 끼고 하는 데라 생각보다 규모가 커.
사귈 때에는 그런 걸 말해주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유독 자주 싸웠다.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했던 말실수가 어쩌고, 그제 토마스와 내기를 걸었던 NFL 경기가 어쩌고 하며 함께 있는 내내 별 시덥잖은 이야기들로 정적을 메웠으면서 정작 무겁고 진지한 네 고민은 말하지도 않고 혼자 속을 삭히고 있었지. 아님 나 말고 네 친구들에게 그것을 털어놓아 제 3자로 하여금 내가 모르는 너의 소식을 듣게 한다든지. 특히 4년 전 이맘 때, 네 부모님께서 이혼하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며, 매일 붙어 다니면서 그런 것도 몰랐냐며 놀람으로 둥그렇게 뜬 토마스의 눈을 마주했던 일. 그건 정말로 좆같은 기분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모르는 토마스는 그저 ‘민호가 정신이 없어서 너에게 말할 겨를이 없었나 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자리에서 차마 내색하지 않았어도 나는 네 연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너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느꼈다.
대체 너한테 있어서 나란 새끼는 뭐야? 그런 고민은 나한테 털어놓고 의지하면 안 돼? 우리가 남보다도 못한 사이야? 좋은 애인이라고 평하기엔 염치없지만, 그래도 난 너와 특별한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니까, 남들보다 너의 하나라도 더 알고 싶었다. 그 정도는 알아도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해도 충분히 네 얘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빌려주는 일 정도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이해 못할 너의 행동과, 어쩌면 양보할 수 없는 너에 관해 남들보다 뒤쳐졌다는 그 사실에 화나 너를 몰아붙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철부지 같았던 그 때보다는 훨씬 성숙하고 안정된 ‘어른’ 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너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지난 삼 년간 만나왔던 너는 가녀린 몸을 내 어깨에 기대고 훌쩍이는 여자애가 아닌, 단단하고 너른 어깨를 내밀고 너도 힘들면 나한테 기대, 인마. 하고 말할 줄 아는 남자애였으니까.
우울함이라든지, 마음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싫어서 속에서 곪아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그냥 우직하게 그것들을 혼자 담아두고 있었던 거다, 너는. 그 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결국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하나 둘씩 추억을 되짚어 볼 때가 되니까 이해가 갔다.
“매니저님!”
사내자식 둘, 그것도 사귀다 헤어져 3년 만에 만난 놈들끼리 앉아 어색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테이블 위의 우중충함을 환기시켜준 것은 포니테일로 발랄하게 머리를 묶어 올린 여자애였다. 아까 전 네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직원 셔츠를 입은 그녀는 김이 오르는 우동 두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네 앞에 내려놓았다. 쌍꺼풀 없이 큰 눈이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방긋방긋 접히는 폼이 꼭 마주 인사를 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이거, 점장님이 가져다주래요. 매니저님 친구 분 데려온 거 처음 본다고.’
친구.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헤어진 연인이 친구의 이름을 빌려 인연을 유지해 나가는 이유는 두 가지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귀고 있을 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거나, 혹은 연애할 당시 다 쓰지 못한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거나. 이것은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비록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긴 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너와 나에게 두 가지 중 하나의 이유를 굳이 적용해 보자면, 우리는 어느 쪽일까.
그러고 보니 우리가 연애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나누던 삼 년 내내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도 잘 알 거 아냐, 남자는 말 안 해 주면 몰라. 언젠가 내 감정의 속살거림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던 너에게 불만을 표했을 때 너는 윗입술을 축이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이마를 꾹 밀었다. ‘이런 건 말 안 해도, 좀 알아들어라. 엉?’ 사실 알고 있다. 너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타입이었지. 굳이 혓바닥 위에 뜨거운 단어들을 올려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난 네 눈빛과 미소, 사소한 행동과 습관에서 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짐짓 모르는 채 한 것도, 실은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부끄러워하는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쪽 눈을 작게 찡그리고, 벌개진 얼굴로 쑥스러워 하는 네 표정은 제법 귀여웠으니까.
“나 참, 뭐 이런 걸 다…… 고마워. 잘 먹겠다고 해.”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게 이유가 아니라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함께 일하는 여자애에게서 트레이를 받아 들며,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웃는 네 얼굴을 보며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둥글게 휘어지는 네 눈빛은 상대의 경계심을 단번에 허물게 했고 입가를 따라 옴폭하게 파이는 볼우물은 절로 손을 가져다대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움을 지녔다. 웃는 네 얼굴은 여전히 정오의 햇살처럼 빛났다. 하지만 그 웃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있는 것을 보는 건 좆같은 기분이었다. 순순히 인정했다. 이제 나는 너에게 뭣도 아닌, 남보다도 못한 사람인데. 잘못도 없는 너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내 자신이 병신 같았다. 그래. 결국은 이런 거였다. 흘러가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고 내버려 두었지만 사실 그건 너에게 건네지 못한 마음이 아직 많아서, 시간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핑계였던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별 수 없이 떠나보냈지만 또 다시 다가오는 현재와 미래의 시간에 꿈속에서 만났던, 머릿속의 너를 쌓아 올리며, 여전히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어떤 식으로라도 너를 추억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너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게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얼굴과 태도를 보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면, 그 때는 정말로, 너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지. 네 것보다 한 박자 느릿하게 돌아가는 나의 시간을, 이제 움직여야겠다. 감정의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둘 다에게 좋을 것이 없다.
그런 생각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너는 내 앞으로 김이 오르는 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 훈기가 오르는 그것과 함께 투박하고 익숙한 손이 내 앞에 다가오는 순간, 나는 과거의 흔적을 발견했다. 왼손 중지와 약지 사이, 손가락의 가장 아랫마디 안쪽에 은밀하게 새겨진 알파벳 N.
그건 내 이름을 뜻하는 타투였다. 남의 이목이 신경 쓰여 다른 연인들처럼 반지를 맞추기가 곤란했던 몇 년 전의 우리는 고민 끝에 왼손 넷째 손가락에 서로의 이름 첫 머리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헤어졌다. 주삿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것 같은 따끔거림이 수 일 내내 지속되었지만 우리는 손깍지를 낄 때마다 서약의 흔적을 보며 바보처럼 히히덕거렸다. 이건 반지처럼 빼놓고 잃어버릴 일도 없어. 영원할 거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닫기에 당시의 우리는 너무 어렸다.
내가 네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너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맞아, 분명 나와 함께 새긴 타투였다. 둘 다 사내놈들인지라 낯간지러운 문구라든지 도안 같은 것을 생각해낼 재주는 없어서, 그냥 무엇보다도 서로를 가장 잘 떠오르게 할 수 있는, 이름을 새겼었는데. 그걸 새기고 나서 되도록이면 물에 닿지 않게 하라던 타투이스트의 말에 가게를 나오며 그럼 세수는 장갑 끼고 해야 하냐? 하고 투덜거렸던 네 모습이 아직 기억 속에 선명했다.
그런데 넌 네 몸에 새겨져 있는 내 이름을 왜 아직도 지우지 않았지?
--귀찮아서? 라고 하기에 요즘 같은 시대에 문신 제거술은 생각보다 간편했고, 헤어진 지 3년이나 지난 연인의 이름을 몸에 새기고 있는 건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일 테다. 물에 씻겨 내려가면 그만인 것도 아니고, 매일 손을 쓸 때마다 눈에 띌 텐데, 민호 씨의 손에 새겨진 N은 무슨 의미에요? 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만큼 가깝게 지낸 사람이 없었을까. 물어봤다면, 너는 내 이름의 앞머리가 새겨진 손가락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을까.
설마 아직도.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쉴 틈 없이 바빴다던 너의 3년에 대해 생각했다. 손가락 사이에 새겨진, 새끼 손톱만한 타투를 지우러 갈 여유도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냈을 거야.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속에 걸어 잠가둔 상자가 덜컹이고 새어 나오는 한 자락의 기대를 억눌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무모하게 덤벼들어 상처를 얻어도 돌아서면 금방 아무는 어렸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 몸과 마음이 자란 만큼 상처를 입으면 쉽게 아물지 않으며 통증은 오래 간다. 나는 어른이 되며 결과가 달랐을 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깨작대지 말고 다 먹어. 신경 써서 갖다 주신 거라고.”
“어, 엉. 그래.”
메시지라도 온 듯, 액정이 밝아지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거꾸로 엎으며 너는 젓가락을 들었고 나 역시 그릇에 코를 박고 기계적으로 면발을 삼켰다. 사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안 보는 줄 알았더니 나를 신경 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괜히 긴장이 되었다. 지이잉, 한 번 울리던 진동이 두 번, 세 번이 되자 묵묵히 밥을 먹던 너는 쯧, 짧게 혀를 차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자연히 신경줄이 그 쪽으로 쏠렸다. 근무도 마친 금요일 저녁에 저렇게 텍스트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며 닦달을 하는 사이라면, 역시 애인일까. 사귈 땐 이렇지 않았는데 별 게 다 신경 쓰였다. 그러나 너와 나의 인연은 3년 전까지 사귀다가 헤어진 사이로 딱 거기까지였다. 옛날에 사귀다 헤어진 애인이 3년의 공백 동안 누굴 만나서 어떤 관계를 이어나가든, 내게는 참견할 권리가 없었다. 네가 여기서 일하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가급적이면 나는 이 거리로 지나다니지 않게 되겠지. 오늘 이렇게 술 한 잔을 걸치고 헤어져 각자의 길로 걸어가게 되면,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마도, 더는 얼굴 볼 일이 없지 않을까.
“일찍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어, 아냐. 그런 거 없어.”
참견할 권리가 없다면서 본능은 이성을 앞질렀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은근슬쩍 돌려 물었고,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넌 조막만한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환해진 액정 위로 비밀번호 입력 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이름이 새겨진 손으로 네가 네 자리의 번호를 두드리는 순간,
“…….”
순간적으로 너 역시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서둘러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렸지만 황망한 시선까지 가려지진 못한 모양이었다. 너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볼 안쪽을 혀로 훑으며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일견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3년을 함께한 나는 알 수 있었다. 내리깔린 눈두덩과 감쳐문 입술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정말로 내가 본 게 맞을까. 나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여 내가 방금 전 본 너의 움직임을 상기했다. 익숙한 기시감을 떨쳐내기 위해 앞에 놓인 잔을 빠르게 비워냈다.
연료를 교체하고 기름칠을 해 다시 천천히, 돌아가고 있던 시계가 다시금 과거의 어느 시간에 멈춰 선 기분이었다.
좀 걸을래?
아직 풀리지 않은 날씨 탓인지, 그리 늦지도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금요일 밤의 번화가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아까보다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거리를 밝히고 있는 것은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음식점과 몇 개의 펍, 24시간 마트 등이 전부였다. 우리는 잠든 도시의 밤을 걸었다. 계산하고 나오면서 테이블을 확인했을 때 분명 둘이서 비운 술병이 제법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술에 달구어진 피부를 식혀주는 찬바람 때문인지, 아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와 함께 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정신이 멀쩡했다. 어젯밤 이래저래 잠을 설친 데다 낮 시간동안 손님이 많아 피곤했기에 평소 이 정도로 마셨으면 꽤 얼큰하게 취해 돌아가는 길이 볼썽사나웠을 텐데…… 다행이라 생각했다.
밥을 먹고 술까지 마셨으니 절로 담배 생각이 났다. 점퍼 주머니를 뒤적이자 딱 세 개피 남은 담뱃갑이 손에 잡혔다. 홀쭉해진 곽 안에 넣어둔 라이터와 함께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건 인도의 바깥쪽으로 걷고 있던 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던힐은 뭐랄까, 연기를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자면 좀 느끼한 맛이 나. 핀 것 같지도 않다고.
그런 이유로 줄곧 말보로를 고집하던 너는 지금도 변함없이 빨갛고 하얀 곽에 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옛날 같았음 잇새에 담배를 끼운 턱을 가만히 들이밀며 빙긋, 보기 좋게 웃었겠지. 나 역시 불붙인 담배를 문 채로 얼굴을 내밀어 점화된 끝에서 끝으로 온기를 전달했을 테고. 이유는 끝끝내 들을 수 없었지만, 너는 담뱃불을 붙여줄 때 눈을 내리까는 내 표정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스스로 불을 붙인다. 부싯돌 굴리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불빛이 거리를 밝혔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훅, 뱉은 두 갈래의 연기가 각기 다른 쪽으로 갈라졌다.
처음엔 한 개피를 다 피울 때까지만 함께 걸을 생각이었다.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오던 열기가 발밑에 뭉그러질 때쯤이면 나타날 갈림길에 서서 이제 가 보겠다고, 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그 때까지 잘 지내라고 말할 작정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담배를 끈 후에도 천천히, 보폭을 맞추며 너와 함께 계속 길을 걷고 있었다. 사실 새로 이사한 내 집은 이미 지나친 지 오래였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개를 끌고 나오거나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마저 없었다. 드문드문 켜져 거리를 적신 가로등만이 외로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크고 낯익은 도시에 너와 나만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란히 서서 묵묵히 걷고 있던 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일은, 할 만해?”
“뭐, 나름.”
“그래….”
“어차피 전공 살릴 생각도 없었고.”
“다시 한국엔 안 가?”
“여기서 일을 구했잖아. 가면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다고 물 건너 외국이라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뒷말을 삼키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지만 결코 화목하지는 않았던 세 식구의 생활은 아버지의 외도로 흩어졌다. 물론 이곳에 나와 있을 때 그 소식을 통보받아 실감이 잘 나지 않기도 했지만,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처럼 위태로웠던 집안의 분위기를 상기해 보자면 그다지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귀국 후 나는 미뤄두었던 군에 입대했고, 막 병장 계급을 달고 전역을 4개월 정도 앞두었던 어느 포상 휴가 때,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한 어머니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는 분을 소개받게 되었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중년 신사의 너그러운 눈빛은 예전 아버지의 싸늘한 그것과는 사뭇 달랐고, 어머니의 미소에 나는 당신만 행복하시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새 아버지가 될 분은 좋은 사람이었다. 새 출발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두 분을 보며, 나는 독립을 결심했다.
내가 두 사람에게 짐이 될 것 같으니 비켜 줘야겠다, 결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영부영 하다 보니 또 뉴욕이었다. 맨해튼에 있는 지점으로 손수 지원서를 써 넣은 건 나였고, 발령을 받아 첫 출근을 한 날 너와의 추억이 묻어있는 거리를 밟으며 언젠가 한번쯤은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사실 네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도시에 돌아와 없어지고 또 새로 생겨난 풍경들을 보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퇴근 후 캔 맥주를 마시며 랩톱을 두드릴 때 종종 SNS에서 네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맨해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이작 뉴트 중 내가 찾는 너는 없었다. 당시 함께 어울려 다니던 토마스나 알비에게 연락을 하면 네 소식을 못 들을 것도 없었겠지만, 삼 년 만에 다시 접할 네 이름에 달갑지 않은 소식이 따라 붙을까 겁이 났다. 너는 궁금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알기 싫은 존재였다.
계속 길을 걷는 동안 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쓸데없는 것들을 물어 왔다. 원래 이렇게 말을 늘어놓던 건 오히려 내 쪽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렇게 쉴 새 없이 떠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수년간 너를 겪어온 경험상 그런 경우는 필시 나에게 큰 잘못을 해 눈치를 보고 있거나, 어색한 정적을 깨고 싶거나, 혹은 지금처럼,
“야, 빙 둘러가지 말고 본론만 말해.”
너 지금 할 말 있잖아.
출근길에 목격했다는 사소한 접촉 사고와 엘리 매닝의 이적설과 같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을 거쳐 날씨 풀리려면 아직 멀었나, 따위의 형편없는 질문까지 늘어놓았을 때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바닥에 진 그림자나 보면서 걷고 있던 나는 끓어오르는 답답함에 확 손을 빼고 말허리를 잘랐다. 고개 돌려 바라본 옆에 너는 없었다. 뭐야,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한 발짝 먼저 멈춰선 너의 시선은 정직하게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모텔.
올곧게 치켜들고 있던 고개를 내리고, 다시 내 얼굴로 돌아오는 네 눈빛은 제안을 담고 있었다.
“…집에 바로 들어갈 거야?”
물론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겠지. 나는 네가 그 말을 하는 저의를 잘 알고 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혹은 너무 더워서. 술에 너무 취해 집까지 걸어갈 기력이 없어서. 손대신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길을 걷다 말고 너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지금처럼, 싸구려 오렌지 주스와 헤로게이트 티백이 비치된 협탁과 유난히 욕조가 컸던 그 모텔의 계단 앞에 서서, 결코 거절할 수 없는 그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 집에 바로 들어갈 거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또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알잖아, 나 꽉 막힌 새끼인 거. 엑스랑 하는 취미 없어. 우정박 타는 건 더 싫다. 그건 친구라는 이름을 쓴 섹스 파트너라고.”
“어차피 너랑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이긴 글렀어.”
“그럼 뭐 어쩌자고?”
“너 원나잇 질색하는 것도 알고, 우정박 타는 것도 싫어하는 거 알아. …그럼 지금 남은 선택지가 뭐겠어. 이거 아직도 이렇게 눈치가 없네.”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나 알고 지껄이냐?”
술 취한 거 아니냐고! 버럭 짜증을 내며 따져 물었지만 사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너는 아무리 고주망태가 되어도 헛소리를 늘어놓는 주사는 없었다. 오히려 솔직해졌다면 더 솔직해졌지. 그러니까 지금 술에 취한 건 네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딱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찰랑거려서, 그래서 오로지 내가 내키는 대로 네 말을 곡해하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취중진담인데. 적어도 술주정은 아냐.”
“…….”
“솔직해져. 너도 나 보고 싶었잖아.”
“…….”
“헤어진 지 삼 년이나 지났는데 내 생일 네 자리로 맞춰 놓은 비밀 번호를 바꾸지도 않고, 낯간지러운 반지 대신 손가락 사이에 새겨놓은 타투도 안 지웠지.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부지런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네가 충분히 바꿀 수 있었던 그것들을 귀찮아서 안 바꿨다고 말할 수 있어?”
그래도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너는 한 발짝 앞으로 성큼 다가와 손목을 그러쥐고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남들보다 서늘한 편이었던 네 살갗에 온기가 도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술이 제법 들어간 것 같은데 확신에 찬 눈동자만은 또렷했다. 새카만 밤하늘을 옮겨 담아 놓은 것 같은 네 눈동자 안에서 나는 지금보다 솔직하고, 겁 없던 시절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예나 지금이나 네 눈을 보면 나는 거짓말을 못하게 돼. 볼 안쪽을 씹으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하지만 삼 년 반이나 내 옆에서 자리를 지킨 너는 알고 있겠지.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진짜 아니야?”
하여간 1부터 99까지의 이야기는 제가 다 이끌어 놓고, 마지막 100을 말해 결과를 도출하는 건 꼭 내 몫으로 돌린다. 저는 책임감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싶단 얘기다. 빌어먹을 새끼.
사실 답은 진즉에 나와 있었다. 그 짧은 한 마디를 입 밖에 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끝없이 도는 회전목마처럼, 내가 너에 대한 대답을 꺼내놓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다시 시작하게 될 테다. 삼 년 반 동안의 수많은 다툼과 주먹다짐, 그로 인한 감정 소모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스스로의 정신을 좀먹는 짓이라는 걸 아는데도,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한 쪽으로 기울었다. 이미 내 시계는 너를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사실은 어쩌면, 너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네게 이런 말을 듣기를, 그래서 다시 한 번 내게 기회가 찾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내리고 땅바닥의 돌멩이나 싱겁게 차는 네 머리꼭지를 보며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 해 익숙하리만큼 느껴지는 말을 뱉어냈다. 느리게 벌어지는 입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래, 보고 싶었다…… 이 새끼야.”
삼년 반 동안 볼 꼴 못 볼 꼴, 그렇게 진절머리 나게 겪었으면서도 결국 다른 사람을 못 찾았던 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 새 걸음마를 뗄 때마다 모든 사람의 기준을 너에 맞추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야. 그래,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내 밑바닥까지 보여줄 수 있는 건 이미 그 꼴을 한 번 보고도 나를 견뎌냈던 너 뿐이라서.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니까, 후회로 남은 옛날의 그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대했음 좋았을 텐데, 몇 번이나 반복했으니 이젠 다르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 대답에 손목을 붙들고 있던 네 손이 새끼손가락부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거칠어진 손등을 지나 빈틈없이 깍지를 꼈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났다가 빈 집에 돌아와 제 자리를 찾은 주인처럼, 원래 있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 마냥 꾸물꾸물, 기어 들어와 공백을 메꾸었다. 맞잡은 손을 슬쩍 비틀어 보니 너 역시 내 이름이 새겨진 타투를 지우지 않았다. …대체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거야.
가자.
고개를 끄덕인 너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모텔의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음과도 같은 손을 내어준 채, 나는 네 뒤를 따랐다. 다시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이어 가게 되어서, 또 다시 그 때처럼 지난한 과정들을 반복할 지도 모르지만, 내 선택이야. 책임은 내 몫이니까. 인정할게, 아직은 네게 쓸 수 있는 마음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는 걸.
너는 모텔의 출입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며 울리는 출입벨 소리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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