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SIDEMIRROR BOY
a 2015. 10. 1. 22:34 |1. 월간뉴민 6월호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2. 소재 때문에 미성년자 분들에게도 공개해도 되는 것인가 그 당시 (지금도) 무척 염려가 되었지만
3. Side Mirror: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학생이야?”
좁은 방 안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온통 축축하고 뜨거웠다.
이 위로 몇 명이나 뒹굴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싸구려 침대 시트와 셔츠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손이 어깻죽지에서 허리께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제 위에 올라탄 남자의 넥타이 매듭을 끌렀다. 검지를 걸어 그대로 끌어당기자 손가락 사이로 뱀처럼 빠져나가는 실크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무난한 취향을 가진 남자라면 좀처럼 고르지 않을 법한 오렌지 색 천 조각 뒷면에 붙어있는 로고가, 에르메스? 구찌? 제 한달 식비는 훌쩍 넘기고도 남을 법한 이것들의 로고는 매일 봐도 눈에 익질 않았다. 애초부터 저와는 인연이 없을 법한 물건이기에 공들여서 살피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예사 가격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평생 한번 목에 대어볼까 말까 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그것을 침대 옆으로 휙 던지고 이미 버튼 하나가 풀린 셔츠 깃을 개방하는 동안,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건장한 상체를 탐닉하듯 매만지던 남자는 등허리에 머물던 손을 내려 정리된 윗옷을 벨트 밖으로 꺼내며 물었다. 운동하는구나? 응, 미식축구. 러닝백. 민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잠시 들어 남자의 손길을 돕자 열기 띈 손가락이 곧장 옷 아래로 파고들어 살갗에 닿았다.
“빨리 보고 싶네.”
어디서 미리 한잔 꺾고 온 것인지 게게해진 눈동자 너머의 열기를 읽은 그는 옷자락을 밀어 올리고 드러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려 드는 남자의 뺨을 감싸 쥐고 끌어올렸다. 객실 문을 닫자마자 엉겨 붙은 남자 탓에 부풀어 오른 입술이 반들거렸다. 크지 않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한층 더 발긋한 표정을 짓는 상대에게 나지막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럼 얼른 씻고 와. 와인도 따라 놓고, 저것도 좀 정리해 놓을게. 싱긋 보기 좋게 눈웃음을 치는 시선의 끝에는 발꿈치에 죽죽 밀려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이불이 구겨져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타이르듯 어깨를 감싸 쥐고 밀어내는 민호를 보며 남자는 순순히 몸을 물리고 민호의 위에서 내려왔다. 단추를 풀어내는 손이 어설프게 더뎠다. 술이 들어간 게 확실했다.
“하여간 엄청 깔끔 떤다니까. ……뭐, 사실 그런 단정한 면에 반했지만.”
번데기를 벗은 나비, 아니, 어쩌면 음침한 나방 같은 모양새로 느릿하게 걸어간 그는 마지막으로 시계를 벗어 던지며 빛이 새어 나오는 욕실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가 줄줄이 늘어놓은 허물들을 보며 민호는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샤워가운 문 앞에 둘게! 일관된 상냥함에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남자는 문을 닫았고 민호는 몸을 일으켜 미니바 옆에 놓인 바구니 안 가운을 집어 들었다. 좁은 모텔 룸을 가로질러 욕실 앞으로 향하던 그의 걸음은 벽에 부착된 옷걸이 앞에서 서서히 멈추었다. 쏴아아, 타일 바닥으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는 입 꼬리는 여전히 둥글었다.
날이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지글지글 끓는 아스팔트 옆 인도에는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모여 길 한복판을 점거하고 있었다. 성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정신만은 다 자라지 못한, 그래서 아직은 두려울 게 없는 그들은 웃음소리 사이에 비속어를 적절히 섞으며 그 나이대의 혈기왕성함을 뽐내고 있었고, 그 무리에 하나뿐인 스케이트보드를 두고 누가 먼저 탈 것인가 순서를 정하느라 왁자지껄한 그들과 조금 떨어진 벤치에는 운동복 차림의 부부가 앉아 버스킹 중인 거리의 뮤지션을 구경하고 있었다. 곧 뉘엿뉘엿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별세계 같아 보이는 그 풍경들을 가르고 자전거를 탄 경찰이 지나갔다. 보드를 타고 무단횡단을 하려던 학생들은 줄행랑을 쳤고 뉴트는 모자의 챙을 조금 더 깊게 눌러썼다. 낡은 청바지 뒤춤에서 세 대 째의 담배를 꺼내어 물고 불을 붙였다. 훅, 뱉어내는 숨이 연기와 섞여 막 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뿌옇게 물들였다.
넓지 않은 도로의 양 옆으로 키 큰 야자수들이 기둥처럼 늘어서 있고 그보다 훨씬 낮게 지어진 건물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솔직히 말해 살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벤츠, 아우디와 같은 값비싼 차들이 다운타운의 도로를 가로지를 때 바람 잘날 없는 이 동네에는 사건 사고를 접수받은 경찰차들이 랜드 마크처럼 사이렌을 울리며 돌아다녔다. 200억 달러의 개발자금이 투입되어 스테이플스 센터를 중심으로 다운타운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동안에도 이곳은 꼭 80년대의 어느 시절에 멈춘 것처럼 침체된 모습을 띄고 있었다. 중심가에서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도 금방 풍경이 달라졌다. 바람 잘날 없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평불만도 많았다. 어제 뉴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척 역시 이 작은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냉장고가 형편없을 정도로 비었거나 담배가 떨어졌을 때마다 들리는 집 근처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는 그는 뉴트보다 두세 살 정도 어려 보이는 또래로 인사성이 밝았다. 값싼 레토르트 음식과 과일 몇 개를 내려놓은 뉴트가 고생이 많네, 하고 적당히 인사를 받기가 무섭게 척은 기다렸다는 듯 바코드 스캐너를 찍으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하소연의 내용이란 것들은 딱 그 나이대의 남자애가 할 법한 고민이었다.
야간수당 붙여서 급여 올려준다고 말한 지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에요. 가뜩이나 용돈 끊겨서 이제 정말 스스로 벌지 않으면 안 되는데 월급은 안 오르고…… 자랑은 아닌데 최근에 여자 친구도 생겼거든요. 부모님은 밥 한번 먹자고 성화시고 여자 친구도 은근 좋아하는 눈치인데 집으로 데리고 오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솔직히 자랑할 만한 동네도 아니고, 까지 말을 꺼냈을 때 제가 갈 길 바쁜 손님을 붙들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이곳에 사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척은 입을 합 다물고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줄곧 이 동네에만 살아서… 근데 제가 또 거짓말은 못해가지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 빠닥빠닥 편 지폐를 카운터에 내려놓고 종이봉투를 안아들었던 것 같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그리고 거짓말을 못한다는 거 그거 꽤 좋은 건데. 적어도 거짓말이 필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단 거니까.
게다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뉴트는 척이 부러웠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이 본인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이겠지만, 줄어든 용돈과 여자 친구에게 보여주기에 초라한 집 같은 것을 가장 큰 고민으로 안고 있는 생활이란 적어도 제 인생보다는 훨씬 평온한 삶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그런 일상을 누려볼까. 나도, 그리고….
“뉴트!”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뉴트는 땀이 비치는 콧잔등을 슥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왔네, 거짓말 잘하는 애.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온 민호가 무릎에 손을 얹고 컥컥, 호흡을 터뜨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안 뉴트는 털지 않아 재가 뚝뚝 떨어지던 담배를 미련 없이 버리고 운동화 끝으로 비벼 껐다. 흐르지 않던 시간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의미 없는 것들.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앞코에 담뱃재와 젖은 흙이 달라붙었다. 잠시 멈추어 있던 흑백의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얼핏 봤는데 이번엔 진짜 기대해도 돼. 저번엔 순 카드밖에 안 들어있어서 얼마나 짜증났는지, 시발. 알았으면 그 고생 안 했을 텐데.”
두둑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재킷 주머니를 뿌듯한 표정으로 툭툭, 두드리며 모텔 입구의 낮은 계단을 내려와 키가 꽂힌 스쿠터로 향하던 민호는 그대로 손목을 붙잡혔다. 왜? 고개를 세워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그의 목덜미에 와 닿은 것은 희고 길지만 굳은살이 박혀 투박한 손가락이었다. 뉴트는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나는 그 손으로 미처 채우지 못한 단추를 목 끝까지 여며 주었다. 정갈하고 꼼꼼한 손길로 헝클어진 옷깃을 고쳐 주는, 묘하게 가라앉은 온도의 눈과 굳게 깨문 입술을 확인한 민호는 뉴트 나 더운데, 와 같은 사소한 항의의 말을 슬그머니 삼키고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처럼 단호한 표정을 지을 때면 절대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는데다가 고요한 눈빛 너머에 숨겨져 있는 그의 감정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는 탓이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민호의 단추를 모두 채워준 뉴트는 마지막으로 옆구리에 끼고 있던 헬멧을 그의 머리에 푹 씌우고 그제야 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스쿠터의 시동을 걸었다.
“가자, 뉴트.”
낡고 꺼진 안장은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곧이어 뉴트의 뒤에 올라탄 민호가 마르고 벌어진 어깨를 두드렸다. 헬멧에 가로막혀 희미하지만 경쾌함을 감출 수 없는 등 뒤의 목소리를 들으며 뉴트는 머릿속으로 남은 일수를 세어 보았다.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덜컹, 낡은 스쿠터는 주차장의 문턱을 넘고 모텔을 빠져나갔다.
이제 몇 번이나 더 이런 짓을, 나는 몇 번이나 더 너를 험한 곳으로 내몰아야 하나.
* * *
모두들 이곳을 출구 없는 미로라 불렀다.
좁고, 깊고, 어두운. 낮과 밤을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곳. 시계가 없었더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몰랐을 테다.
이곳에 갇혀 길을 잃은 지 삼 년 정도가 된 뉴트는 약쟁이의 아들이었다. 법적으로 의무화 되어 있는 교육과정도 채 마치지 못했던 뉴트가 ‘아버지’ 라는 단어를 인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부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마 뉴트의 어머니 역시 모를 것이다. 그의 얼굴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그저 그가 모래바람과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국도 옆 어느 허름한 모텔의 카운터를 지키며 소일하던, 여전히 약에 절어 살던 시절, 마치 공공재처럼 그녀를 다루고 스쳐 지나간 남자들 중 하나일 것이라 말했다. 그 이야기를 당사자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을 때 뉴트의 나이는 고작 열 두 살이었다.
제가 낳은 자식이지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를 길러내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어린 뉴트의 손을 잠시 놓았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면 그 때 찾아갈 테니까, 약속과 함께 보내진 곳이 지금의 「미로」였다. 숙식을 제공하는 이곳에서 일을 배우고 제 몫을 하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동안 어머니라고 이름 붙일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그를 대했는지는 지켜보던 제 3자가 없어 알 수 없었다. 세상은 두 모자에게 무관심했다.
어쨌든 세상에서 유일한 혈육, 그러니까 가족, 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뜻이었으므로 뉴트는 그 의견을 순순히 따랐다. 그는 그 나이대의 소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가슴팍엔 제 것이 아닌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수많은 접시들과 글라스, 술병을 나르고 또 부적절하고 불법적인 모든 것들이 오고 간 테이블을 치웠다. 본 것이 있어도 보지 못한 척, 들은 것이 있어도 듣지 못한 척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리고 헐벗고 눈에 초점이 없는 여자들의 젖가슴에 지폐다발을 꽂는 남자들과 남녀 할 것 없이 팔뚝에 주사기를 찔러 넣는 사람들을 포함해 온갖 추잡한 일들이 행해지는 풍경에 무감해지고, 진창처럼 썩은 이곳의 생태계에 적응하게 될 때쯤, 뉴트는 벌써 몇 년째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저를 맡긴 게 아니라 영영 버리고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측이 확신 쪽으로 흘러가자 그녀를 기다리며 버텨 왔던 음습하고, 우울하고, 한없이 침잠된 이곳의 공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는 몇 번의 탈출을 감행했고 번번이 실패했으며, 마지막 번에는 실패와 함께 부러진 발목을 얻고 기회의 싹을 송두리째 뽑히게 되었다.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 뼈가 어긋나게 붙고 간헐적으로 통증을 유발하는 상처를 입었던 그 날, 그는 모든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의 모친이 약을 구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배 아파 낳은 당신의 자식을 팔아넘겼다는, 결국 자신은 약과 맞바꾸어도 될 정도로 그녀에게선 얼굴 모를 제 아버지만큼이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걸.
그러니까, 버려졌다는 사실을.
짐작은 하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제 3자의 입을 통해 확인사살 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충격이 상당해서,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그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나간다 한들 제가 돌아갈 곳은 없어졌다. 고장 난 다리와 함께 그는 체념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처음부터 그러했던 사람처럼, 각자의 사정으로 끌려온 다수의 이들과 함께 어두운 음지 속으로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일 년 후에, 뉴트는 지금의 민호를 만나게 되었다.
열일곱? 열여덟? 나이는 저와 비슷해 보였다. 그동안 밖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 지금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살이 붙고 어렸던 그를, 흉포한 그들은 곰팡내 나고 빛이 들지 않는 뉴트의 방에 집어던지듯 넣었다. 여기서 쓸 수 있게 알아서 가르쳐 놔, 그야말로 무생물 내지 물건을 대하는 태도였다. 기절 상태로 미동 없이 쓰러져 있는 그를 두고 여러 개의 구둣발이 다시 뉴트의 방 밖을 빠져나갔다. 쾅, 다시 제 세계는 단절되었다. 마치 죄수를 수감하듯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등 뒤로 한 채 뉴트는 민호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거의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또래였다. 죽은 듯 누워 있지만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몸을 살핀 그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연고와 바닥을 드러낸 소독약병 같은 것들을 품에 안고 와 민호의 옆에 앉았다. 찌푸려 꿈틀대는 미간 아래로 터진 입가와 시퍼렇게 멍든 광대뼈, 까진 손등과 팔꿈치 등에서 반항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제 의지로 걸어 들어왔다는 뜻은 아닐 테다. 뉴트는 땀에 젖은 이마를 편하게 쓸어 넘겨주고 흉 난 얼굴에 소독약을 발랐다. 하긴, 그 누구도 좋아서 이곳에 들어온 이는 없을 테다.
멍도 빠지고 터진 상처들도 나아 멀끔해지면 제법 귀여운 얼굴일 것 같은데, 몇 날 며칠 공들여 치료한 보람도 없게 민호는 몸을 털고 일어난 지 이틀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
너무 크고 복잡해 출구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미궁 같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를 달고 와 매일 죽을상으로 골골대는 민호를 치료해주는 게 또 하나의 일과로 자리 잡을 무렵, 뉴트는 어느 날 담배와 술 냄새에 찌든 유니폼을 벗으며 한 마디 했다. …그냥 포기 해. 순간 그는 싸늘한 자신의 것과 다르게 민호의 눈동자에서 화르륵,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
“포기? 야, 지금 네 일 아니라고 막 지껄이는 것 같은데 난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 새끼들이 일방적으로 끌고 온 거라고.”
“너야말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마. 그럼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어?”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뉴트의 멱살을 틀어쥘 것 같던 민호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내 말이 틀린 것 같아? 그래, 억울하겠지. 알아. 운이 나빴던 거야. 나도, 너도, 어쩌면 저 밖에서 싸구려 마약을 빨고 몸을 대주는 여자들도. 애초부터 죄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모두 영문도 모르고 붙잡히듯 끌려오거나 팔려 와서 여기에 있는 거라고.
도망갈 생각. 그것도 너만 해본 줄 알아? 다들 안 해봤을 것 같아? 나도, 다른 사람들도 다 해 봤어. 근데 어쩌라고, 방법 없잖아.
풀썩, 제 발치로 집어 던지듯 날아든 옷가지에 민호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베스트와 셔츠가 붙어 있고 가슴팍의 주머니엔 보타이가 들어 있는 유니폼이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우자 무언가를 갈망하던, 그러나 한계를 깨달은 이후 그것을 감춤과 동시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것 같은 공허한 눈으로 뉴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했다.
저 밖에서의 너는 잊어 버려. 여기선 그동안 네가 누구였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관심 없어.
“그러니까 매 벌지 말고 접시나 닦아.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살라고.”
그럼 적어도 죽이진 않아.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고, 팔다리가 잘리거나 혹은 하루아침에 장기가 적출된 시체로 내다 버려지느니 이렇게라도 사는 게 낫지.
유니폼의 가슴팍에는 제 이름이 아닌,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불리게 될 이름의 명찰이 달려 있었다. 가짜 이름과 가짜 웃음, 가짜 삶, 그러나 이 시간 이후로는 모두 눈앞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들.
민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유독 바빴던 하루였다. 폐점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노동을 착취당하고 나니 온 몸이 피곤해 씻을 기운도 없었다. 적막한 통로의 카펫 위를 걸으며 뉴트는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에 제 손바닥을 비추어 보았다. 아까 깨진 병을 치우다가 손에 유리가 박힌 것인지 손바닥 안쪽의 어느 부분이 쓸릴 때마다 따가웠다. 소독약이 남아 있었던가.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곪을지도 모른다. 다리에 이어 손마저 병신이 되면 안 될텐데….
방전된 몸을 이끌고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여 그는 익숙한 방문 앞에 섰다. 길을 잃은 누군가라도 쉽게 발견하지 못할 법한, 미로 속에서 가장 깊고 음침함이 내리깔린 곳. 끼이익, 문을 열고 불유쾌한 소리를 지나 백열등을 켠 뉴트는 좁고 어두운 방 한 구석에 봉분처럼 솟아 있는 형체를 보고 입매를 굳혔다.
벌써 삼 일 째였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살라고, 어설프게 밖을 갈망하던 날개를 꺾어 버렸던 그 날 이후로 민호는 탈출을 시도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뉴트의 조언대로 바깥에서의 제 이름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나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의 탈출을 시도하진 않았지만 그는 대신 자리에 드러누워 꼼짝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후 늦게 방을 나서며 제가 놓고 간 샌드위치도 그대로였다. 뭘 챙겨먹는 모습도 못 본 것 같은데, 죽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계획인가. 하지만 일견 파리 목숨과도 같이 유약해 보이는 사람의 생명력이란 것은 끈질겨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머릿속의 이성이고 뭐고 간에 생존 본능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곧 새로 데리고 온 놈이 제 몫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민호에게 좋을 게 없을 것이다. 물론 떠맡기듯 그의 교육을 일임하게 된 뉴트 자신에게도. 익숙하고 그리운 모든 것들과의 생이별을 하게 된 민호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여러 모로 지금은 현실을 순응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목숨 하나라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일 정도에는 정말 일어나서 일을 배워야 할 텐데. 답답함과 착잡함, 그 외 다른 감정들로 어지럽게 뒤범벅 된 한숨을 소리 나지 않게 쉬었다.
지금이야 자그마한 옷장이라든지, 서랍장, 거울 같은 것들이 걸려 있어 방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원래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기에 뉴트의 공간은 다 큰 남자애 둘이 사용하기엔 성냥갑처럼 작았다. 그나마 몇 없는 물건들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 발밑으로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럴 때면 뉴트는 이곳이 꼭 관 같다, 고 생각했다. 관처럼 밖과 통하는 문을 닫으면 햇빛 하나 들지 않고 온통 컴컴한, 아무도 찾지 않는, 세상에서 잊혀진 우리들.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자신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약쟁이의 아들이었던 그 꼬마 아마도 죽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미로 밖의 자신이란 없지 않은가. 부실한 벽 틈 사이로, 또 등을 붙인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스며들어 몸을 시리게 했다. 밖은 이곳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은 겨울일까, 아님 태양의 열기가 뜨거운 여름일까. 어쩌면 꽃이 피는 봄일지도. …뭐가 되었든 자신과는 관계없는 단어들이다.
애초에 그들이 인심 쓰듯 던져준 모포는 한 장 뿐이었다. 당분간 민호가 일어날 때까지는 양보해야 할 것 같았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불을 끈 뉴트는 민호의 옆에 누웠다. 모로 누워 머리 아래로 팔을 받친 채 습기 빠지지 않아 눅눅한 방 안의 냄새와 세탁대신 유니폼에 뿌린 싸구려 탈취제의 냄새를 감각하고 있을 때 문득,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 일 만이었다.
“너도……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라고 했지.”
삼 일 만에 한다는 말이 고작 저딴 거라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대화에 짜증이 났지만 오늘은 대거리를 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뉴트는 말을 골랐다. 어찌 됐든 이곳에 온 건 제 의사가 아니었다. ……그래. 피곤에 잠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럼 같이 나가자.”
“뭐?”
얼마 전처럼 막무가내로 탈출 하겠다 객기 부리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목소리였다. 게다가 나갈 거야, 가 아닌 나가자, 라니. 행위의 주체가, 둘. 너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명백한 청유에 놀란 뉴트는 등을 돌려 민호를 보았다. 누워 있으리라 생각한 민호는 어느새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뉴트 역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밖으로의 탈출.
자신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사지가 멀쩡하고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때는 실제로 시도하기도 했었다. 결국은 제 행동이 무모한 것이었으며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깨달음이 평생 그의 다리 한 쪽에 대가처럼 남아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모두가 바라지만, 결코 이룰 수 없어 밤하늘의 별처럼, 팔을 뻗으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아도 결국은 가질 수 없는 그걸 네가 하겠다고?
“말도 안 돼.”
말이 쉽지. 고작 이 가게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네가 뭘 알아? 나갈 수 있음 진작에 나갔어. 몇 년 째 여기에 머물러 있는 우리는 뭐 멍청해서 계속 일하는 줄 알아? 용기 없는 자신에 대한 비난인지, 무모한 그에 대한 비난인지. 폭우처럼 말이 쏟아졌다.
“여태껏 여기서 도망치려다 실패한 사람들을 두 손에 다 못 꼽을 정도로 많이 봤어.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그 이후로 영영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얼굴들이 절반이지. 과연 그 사람들이 탈출에 성공한 거라 생각해?”
“…….”
“게다가 넌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됐고 매일같이 탈출을 시도했어. 다들 널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지금 당장 나간다는 얘기가 아니야.”
과연 민호는 결연해 보였다. 그는 뉴트와 시선을 맞추며 밖으로 나가기 위한 계획들을 이야기했다. 침착하고 신중한 계획은 민호의 말대로 당장 이루기엔 무리이지만 영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을 들이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뉴트는 며칠 동안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걸 보고 저대로 모든 걸 포기한 채 죽으려고 하나, 고개를 저었던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민호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소년이었다. 절망적인 생각을 피해 희망을 계획하고 있었던 그를 염려했던 일은 어쩌면 자신의 쓸데없는 어깃장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같이, 나가자. 다시 한 번 벼랑에 매달린 제게 손을 내밀듯 민호가 물었다. 유혹은 달콤했다. 이곳을 벗어나는 건 어쩌면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일 때부터 바라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가는 건 좋아. 하지만……. 결국 뉴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면 그 다음은?”
“뭐?”
뉴트는 이곳을 나간다 한들 돌아갈 곳이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어디 하나 마음 붙일 곳 없이 저 혼자 오롯이 남겨진, 이 어두운 벽 너머의 넓고 밝은 세상은 어쩌면 제게 더 가혹하고 힘든 곳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형제의 정다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애초부터 자신은 모르고 살았다. 늘 외로웠고 늘 혼자였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는 민호에 비해 비교적 빨리 체념을 했던 과거의 자신도, 어쩌면 미련이 남을 만큼 그리운 곳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둡고, 축축하고,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는 이곳이 원래 제가 있어야 할 곳 같기도 했다. 썩어 문드러진 이곳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결국 민호는 먼저 손을 뻗어 벼랑 끝에 매달린 뉴트를 끌어올렸다. 그럼 이건 어때?
“내가 가족이 되어 줄게. 필요하다면 형제도 되어주고, 친구도 되어 줄게. 돌아갈 곳이 없으면 같이 만들자. 그러면 되잖아.”
몇 년 동안 갇혀 있었던 방처럼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던 가슴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란 것은 어쩐지 부드럽고 미지근해,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분을 들게 했다. 따뜻함과 희망을 동반한 이채로운 감정들은 무풍지대와도 같은 제 세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고목처럼 생기를 잃은 채 작은 웅덩이에 괴여 있던 물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물살에 휩쓸려 서서히 흘러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벽 너머의 바깥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비관과 부정, 냉소로 일관하던 그는 이곳에 머무른 이래 처음으로, 어떠한 기대에 사로잡혔다. 나가고 싶다. 일순 그런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동안 구실을 다 하지 못하는 제 한쪽 다리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돌아갈 곳 없는 미래처럼 그의 체념에 일조하던 생각들은 더 이상 뉴트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다. 이제야 알았다. 스스로 현실적이라 여기며 나갈 수 없는 이유라 손꼽았던 그것들은 모두 핑계였다.
내가, 저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일조량이 많아 머리맡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집에서 눈을 뜨고, 더 이상 차갑거나 딱딱하지 않은 밥을 먹으며, 성실하게 제 몫의 삶을 사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어 근사하진 못하지만 떳떳한 일을 하고,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로 돌아가 일과를 끝내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사람과 함께. 상상하자 문득 가슴이 뛰었다.
민호는 재차 힘주어 말했다. 나가게 되는 날이 오면, 같이 나가자. 알겠지?
할 수 있어.
불 켜지 않아 칠흑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도 민호의 눈동자만큼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한 밤하늘. 그 넓은 곳 어디엔가에서 빛나고 있을 외행성과도 같은 눈동자를 보자, 어쩌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르지만, 뉴트는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함께라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 이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민호는 뉴트에게 가게의 일을 배웠다. 뉴트처럼 제게 어울리지 않는 옷과 자신의 것이 아닌 이름을 단 채로 제 몫으로 주어진 일을 조용히 소화해냈지만 특별히 잘 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부유하는 공기처럼 생활하며 진흙탕 같은 그 곳에 녹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아들어 완벽한 그 곳의 사람이 된 척을 했다.
탈출을 하려 몇 번이나 악다구니를 쓰다 결국은 다른 이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제게 닥친 현실에 순응한 태도의 민호를 보며 그를 끌고 왔던 직원들은 역시 오기도 한 때라며 낄낄 비웃었다. 그러나 몇 달 전 끌려온 동양인 소년이 더 이상 신경을 거스르거나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갈 동안, 실은 그가 보다 편리한 범법을 위해 깊고 길게 설계된 이 미궁의 구조를 외우고 출구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갈수록 옅어지는 존재감과 반비례하게 그의 눈은 날을 거듭할수록 명민하게 빛났다.
그리고 마침내 두 소년에게 조금이나마 닿아 있던 시선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어둠 속의 그늘로 몸을 숨겨 자신들을 감춘 지 딱 삼 년째 되는 날, 그들은 탈출에 성공했다.
출구를, 찾은 것이었다.
물론 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잃어버렸던 제 이름을 되찾고 무덤 같은 그 곳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제일 먼저 민호의 친구인 벤을 찾아갔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줄곧 민호와 막역한 사이였다. 분명 몇 년 전 한인 타운에서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민호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그를 대면하기 전 잠시 망설였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벤은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대체 그 동안 어디 갔었어? 몇 년 동안 연락도 없길래 나는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이라도 한 줄 알았지. 어쨌든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었겠냐, 와 같은 말을 웃으며 늘어놓는 벤에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민호의 도움을 받아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며 진심 섞인 너스레를 떤 벤은 대뜸 급전을 꿔 줄 수 있겠냐는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미안함과 난처함으로 얼룩진 친우의 얼굴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선뜻 적지 않은 돈을 빌려 주었다. 최대한 빨리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두 사람은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저층 아파트를 구입했다. 벽에 자잘한 균열이 있는 둘의 아파트는 생각보다 햇빛이 들지 않아 낮에도 전등을 켜야 하고, 꽤 오래되어 종종 단수가 발생했지만, 어찌됐든 ‘집’ 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최초의 보금자리였다. 뉴트는 밖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돌아갈 곳이 있고 함께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일자리도 구했다. 민호는 벤의 소개로 피자 배달을 했고, 뉴트는 근방의 마트에서 카운터를 보는 업무를 맡았다. 그 동안 착취당한 것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일해 왔던 그 곳에서 보낸 과거를 되짚어보면 하루 종일 서서 바코드를 찍고 물건을 진열하거나 피자를 배달하는 일 정도는 어렵지도 않은 것 같았다. 유독 지친 날이 있더라도 차곡차곡 모아 준비해 나갈 앞으로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기운이 났다.
더 넓은 세상에서의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갔고, 두 사람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처음으로 받은 역사적인 날, 약속한 대로 벤에게 나누어 갚기로 한 일부의 돈을 입금한 후 둘은 마트에 가서 맥주며 먹을거리들을 사 왔다.
너 요즘 살 붙어서 보기 좋다.
챙강, 건배하듯 맥주병의 목을 부딪치며 말하는 민호에게 너도 임마, 장난스럽게 응수하며 뉴트는 웃었다. 이 꿈 같은 순간들이 부디 유구한 일상이었으면 했다. 깨지지 않는 행복이길 바랐다.
* * *
그러나 꿈같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은, 정말 간밤의 꿈에 불과했던 것인지. 행복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새어나갔다.
혹시 너희들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거야?
영원하길 바랐던 일상의 내리막을 고한 것은 벤의 전화였다. 벤은 뉴트에게 전화를 걸기 전날 저녁,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 서너 명의 장정들이 찾아와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이들을 본 적 있냐 물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이 쪽 구역에서 보호의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놈들이야. 그런데 너희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매춘에, 마약에…… 총기 밀매 같은 건 안 하나 몰라. 아무튼 진짜 위험한 놈들이라고.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는 벤의 목소리에 둘은 결국 그 동안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벤이 알고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불법적인 일은 죄다 행해지고 있는, 깊은 미로 같은 그 가게와, 그 곳에서 몇 년간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뉴트와 민호의 사연,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 탈출에 성공한 일까지 모두. 아마도 내부의 부패한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놈들이 도망갔으니 가게 입장에서는 발설의 위험이 있는 둘을 찾는 게 시급했을 것이다. 아마 가게의 뒤를 봐주고 있는 조직원들을 푼 것도 그런 목적일 테지.
제가 책임지고 숨겨 주겠으니 걱정 말라며 신뢰와 도움의 손길을 내민 벤이었지만 몇 년 동안 가장 지척에서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잔인함을 보아온 둘이었기에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친구에게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꼬리를 밟혀 자칫 자신들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안다면 벤도, 벤의 부모님도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LA에서 머무르는 한 과거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에게서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그 어떤 때에도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결국 둘은 더 먼 곳으로 달아나야만 했다. 아무도 모르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 새 삶을 살자고, 새로이 약속했다.
* * *
“하…… 눈알 빠질 것 같다.”
여름의 문턱에 진입해 그늘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공원은 한낮보다는 옅은 어스름이 내린 저녁 즈음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벌써 수 십분 째, 깨알만큼 작은 활자들을 보느라 눈을 혹사당한 민호는 피로해진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벤치의 등받이에 드러눕듯 몸을 기대었다. 거꾸로 고개 젖혀 마주한 석양에 윽,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세를 바로 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것을 다시 들여다볼 용의는 없었다. 뒤로 쏠려 흩어진 머리카락을 습기 머금은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한 모금이 남은 캔 커피를 털어 마시고, 민호의 허벅지 위에 놓인 신문을 가져가 보기 편한 크기로 두어 번 접은 것은 뉴트였다. 양쪽 지면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구인란의 표 곳곳에 부지런히 그려 넣은 밑줄과 동그라미, 가위표가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의 아파트는 아직 계약 만료일까지 몇 달인가 더 남아 있었고, 아파트를 사기 위해 벤에게 빌렸던 돈도 절반 이상 갚지 못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최선이지만, 여건상 지금 당장 어디론가 거처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족쇄는 역시 텅 빈 주머니 사정이었다. 좀처럼 쌓일 것 같지 않은 돈을 불리는 길은 역시 잠자고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자리 하나씩을 더 구하거나, 아님 급여가 훨씬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단 인스턴트 커피의 맛에 텁텁해진 입 안을 혀로 헹궈내며, 뉴트는 방금 전까지 민호가 인상까지 써가며 들여다보다 끝내 포기한 구인란의 목록을 차근차근 훑었다.
“좀, 한 번에 많이 벌 수 있는 자리는 없나.”
“당연히 있지. 물론 그 전에 우리는 자격 요건 미달이겠지만.”
“그래…….”
일단 나오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맨몸으로 뛰어들기엔 훨씬 더 넓고 험난한 세상이었다.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근무시간대가 맞고 거리가 가까우면 급여가 형편없이 낮았고, 급여가 높으면 차를 타고 한참 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써먹을만한 기술도 없어 지원할 수 있는 자리가 한정되어 있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뉴트의 말을 들으며, 여전히 늘어진 채로 대충 맞장구나 치고 있던 민호는 길 건너편에서 제게 향하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맞은 편 음식점의 노천 테라스에 앉은 남자였다.
외견상으로 보았을 때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업소의 그들이라 여기기엔 거리가 먼, 저와 또래 즈음으로 보이는 깔끔한 차림의 남자는 민호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했다. 민호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아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눈으로 물었다. 나? 제스처를 알아들은 것인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고 있던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한 잔 하자고?
생긋 휘어지는 눈웃음이 아무래도 사심을 담은 추파에 가깝다고 여길 때, 단단한 손이 제 어깨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구인 광고란에 눈길을 두고 신문을 정독 중인 뉴트가 민호의 어깨를 쥐고 안쪽으로 기울이듯 끌어 당겼다.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둘의 간격이 좁아졌다. 흡사 그의 어깨에 기댄 모양새가 된 민호는 허둥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 뉴트. 뉴트?
부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울타리를 두르듯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은 반듯한 골격을 느릿하게 쓸고 올라가 단단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더위에 약한 민호는 마치 어린애처럼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그렇잖아도 더운 날씨에 달아오른 살갗 위로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 그는 무심결에 부르르, 어깨를 움츠렸다. 생경한 감각에 고개를 반대로 뺀 민호가 몸을 물리려 했지만 그의 목과 어깨, 그 어디쯤에 얹힌 뉴트의 손이 주박처럼 민호를 옭아매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와 이거 술병 나르고 하더니만 팔 힘만 세져가지고…… 더워 인마! 놔 보라고! 생전 그러지도 않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는 동안 그는 아주 잠깐이지만, 고개를 올려 카페의 남자를 향하는 뉴트의 서늘한 시선을 본 기분이 들었다.
민호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머리를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표정에서 옅은 유감이 느껴졌다. 다시금 뉴트, 부르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치자 의외로 구속은 쉽게 해제되었다. 어딘가 불유쾌해 보이는 표정으로 정면을 한 번, 눈동자만 슥 돌려 민호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뉴트는 접은 신문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가자.
미묘한 분위기에 흘긋 눈치를 보며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던 민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엉거주춤하게 세웠던 몸을 다시 벤치 위에 앉혔다. 탐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며 생각에 빠진 듯 느릿하게 입가를 매만졌다. 그래, 어쩜 이거라면…….
“민호.”
당연히 뒤따르고 있을 줄 알았던 발소리와 체온이 느껴지지 않자 뉴트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 갈 거야? 의아해 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민호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웃음 지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 * *
그걸 말이라고 해?
뉴트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애초부터 예상했던 반응이라 크게 실망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내 온 환경 탓일까, 그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창문가에서 담뱃불을 붙이려다 말고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뉴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민호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민호의 기가 막힌 계획이란 건, 휴대폰 앱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나 일회성 만남을 즐겨 하는 게이들을 이용한 일종의 사기였다. 업소에서 일을 할 때부터 소수의 손님들 -남자- 로부터 몸이 잘 빠져 탐스럽다느니, 나중에 할 마음이 생기면 빈 방에서 질펀하게 굴러 보자느니 하는 음담패설과 함께 바지 뒤춤에 찔러주는 팁을 종종 받은 경험이 있었던 민호는 어쩌면 제가 그들의 취향에 꽤 부합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과 약, 섹스에 취한 손님들로부터 받은 지폐를 방 한 쪽에 마련한 티슈 상자에 꾸깃꾸깃 밀어 넣으며 그냥 그렇구나, 무신경하게 넘겼던 과거의 기억들은 제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를 보자 돈이 절실한 현실과 연결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잘못된 일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정 해야 한다면 내가 해.”
“그건 안 돼.”
이번엔 민호도 양보하지 않고 굳건히 고개를 저었다.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뭔데? 시선을 내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는 민호를 보며 뉴트는 담배 연기를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평소 민호가 집 안에 담배 냄새가 배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언제나 끝까지 밀어 올린 창문가에서 피우거나 복도에 나가 흡연을 해결하는 뉴트였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를 할 여유 따위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줄곧 담배를 태우던 그는 연기와 함께 삼켜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아, 내가 다리병신이라서? 도망가다 잡힐까봐 그래?”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그런 거 아냐.”
내가 너를 밖으로 나오게 했잖아. 그러니까….
바란 적 없는 책임감.
제가 그 가게의 밖으로 나온 데에는 물론 민호의 제안과 약속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뉴트 스스로의 의지가 더 큰 이유가 되었다. 만약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의지가 없었다면 계속 그 곳에 머물렀겠지. 그러나 민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저만 믿고 밖으로 나온 뉴트를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감에는 다리 한 쪽을 자유롭게 쓸 수 없어 저보다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좁은 뉴트에 대한 동정심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뉴트는 필시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 좆같은 동정심은 민호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대하는 행동이라든지, 얼굴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와 때때로 뉴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 다리는, 너에게 있어 어깨에 매달린 짐짝 같은 존재일까.
그런 마이너스적인 생각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그를 괴롭혔지만 그럴 때마다 뉴트는 그것을 떨쳐내려는 목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에 더 더욱 매진했다. 민호를 적당히 속이고 휴일 날에도 출근해 급여를 더 받은 적도 많았다. 뭐가 어쨌건 누군가의 짐과 핑계거리가 되는 것은 싫었고 제 다리로 인해 민호에게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하는 존재로 인지되는 건 더 더욱 죽기보다 싫었다.
제 날카로운 지적이 어느 정도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흔들기 전 허를 찔린 것처럼 망설인 민호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뉴트는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괴감과 비참함에 질끈 입술을 감쳐물다 덧붙였다. 아무튼 허튼 생각 마. 다시 한 번 못 박듯 힘주어 말한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민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매달린 민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 했다. 차가운 물에 머리라도 식혀야 했다.
* * *
유난히 손님이 많아 피곤한 날이었다. 마감 후 정산까지 모두 마치고 시계를 보았을 땐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뉴트는 잠든 도시의 밤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의 계단을 올랐다. 혹시라도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깰까,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문고리를 돌리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며 집으로 들어온 뉴트를 반긴 것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현관문 바로 옆에 박힌 못에 열쇠를 걸고 그 아래의 스위치를 습관처럼 더듬거려 켜려던 그는 방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 주방으로 향하는 모퉁이에서 불쑥, 집게를 든 민호가 튀어나와 뉴트를 맞이해 주었다. 그 역시, 퇴근을 하면 불 꺼진 방에서 TV를 보다 까치집 지은 머리로 고개만 빠끔 들어 뉴트의 귀가를 확인하던 평소와는 달리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왔어?”
며칠 전 그렇게 잠깐의 마찰이 있은 후 두 사람은 줄곧 서먹서먹한 분위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로 근무조가 바뀌어 서로를 마주칠 기회가 잘 없었다. 새벽 한 시 정도의 깊은 새벽에 퇴근을 한 뉴트는 풋볼 중계를 틀어놓은 채로 잠에 빠진 민호를 마주했고, 그와 근무 시간이 정반대인 민호는 눈을 뜨자마자 어느새 귀가해 제 옆에 누워 있는 뉴트가 잠결에 걷어찬 이불을 잘 덮어 주는 것으로 아침 출근의 준비를 시작했다. 꼭 지구 정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일단은 다툴 일이 없으니 좋았지만, 결국 둘은 다툰 후에도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이였다. 지난 번 제 눈치를 보던 민호의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려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든 이 냉전을 풀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맥주까지 사들고 온 참이었다. 어찌 됐건 뉴트는 자신이 그러했듯 관계 개선을 위해 한 걸음 내밀어준 민호가 고마웠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주방과 거실이 이어진 집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혹시 오늘 내 생일이야?”
“뭐래 똘추가. 올 초에 롤 케이크 썰어먹은 거 기억 안 나냐?”
“근데 이게 다 뭐야?”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맥주 두 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뉴트는 혀를 내둘렀다. 각종 채소에 베이컨에 소스에, 이것저것 재료를 다 갖추면 비싸기도 하고 설거지도 귀찮아서 만들어 먹은 적이 없던 파스타며 샐러드가 제법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어디에 포크를 대어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메뉴가 많거나 근사한 건 아니었지만 생존을 위해 끼니를 때우는 수준에 그쳤던 그간의 식사에 비하면 호화로운 수준이었다. 그렇잖아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처럼 허기를 느끼고 있던 뉴트는 접시를 받쳐 들고 크게 한번 포크질했다. 맛있어. 다 삼키지도 않고 우물우물 볼을 실룩이며 감상을 전하자 가스레인지 앞에서 베이컨을 굽던 민호는 뿌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야, 내가 한 건데 당연하지.
“그래, 앞으로 나는 설거지만 할 테니까 요리는 네가 다 해라. 근데 이건 웬 돈으로 샀어?”
“어?”
“저금하고 남은 돈 아직 덜 썼던가?”
정신없이 파스타 한 접시를 해치우고 샐러드를 공략하려던 뉴트는 대꾸 없는 민호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민호는 프라이팬을 뒤적이다 뻣뻣한 고개를 움직였다. 어, 아직 조금 남았, 지?
남이 보면 아무 이상 없이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모습이겠지만,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시간동안 민호와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뉴트가 제 동거인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저건 분명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모양새였다. 솜씨 좋게 만들어낸 필라프를 씹고 있던 턱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입을 헹궈낸 물컵을 천천히 내려놓은 뉴트가 가스레인지 앞으로 향했다.
“야, 나 봐.”
“…어?”
“이거 다 무슨 돈으로 샀냐고.”
민호의 손에서 집게를 뺏어 들고 손수 가스 밸브까지 잠그며 제게 시선을 돌린 뉴트는 어디 한번 설명해보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거 아냐 민호? 너는 임마, 예전부터 내 얼굴 보고서는 농담으로라도 거짓말 못 했어. 나를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여.
무슨 돈이긴, 네 말대로 저번에 저금하고 남은 돈이지.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는 그였지만 뉴트는 제 울타리 안의 유일한 존재인 민호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야속하게도 흘러가는 날짜는 어느덧 월말에 가까워져 있었고, 민호가 일하고 있는 가게의 주인이 며칠 영업을 쉬어 이번 달에는 월급도 조금 빠지게 되었다고, 그러니 벤에게 돈을 송금해준 후에는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푸념한 게 몇 주 전이었다.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좁히며 답변을 기다리던 뉴트는 오늘따라 유독 민호의 차림새가 수상쩍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평소답지 않게 멋 내어 손질한 머리와 옷차림, 제 것일 리가 없는 향수 냄새, 그리고 갑자기 생겨난 출처 모를 돈.
“…민호.”
부디 제 생각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길 바라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너 설마…. 웃음기가 증발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암담한 낯으로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는 민호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은 뉴트는 곧장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니라고 말해. 내 생각이 틀렸다고 어서 말해, 민호. 여태껏 시궁창 같이 희망 없는 인생을 살아와서 나도 모르게 쓰레기 같은 생각을 떠올린 거라고 말하라고.
“누가 이딴 식으로 번 돈 필요하대?”
“…….”
“대답해 민호. 말해 봐 이 새끼야!! 씨발, 너 이딴 짓거리 하고 다니게 만들려고 내가 나온 줄 알아?!”
여유가 없으면 잠을 아끼고 일자리를 하나 더 구하면 된다고, 떳떳하고 사람답게 살자고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위험천만한 방법으로 돈을 구해온 민호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 답답함. 아니 그보다는 제 꿈과도 같던 민호를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게 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우선했지만 이미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잘잘못을 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분노의 형태를 띄었다. 앞뒤 상황 잴 것도 없이 울화통이 터졌다.
순순히 멱살을 잡힌 민호 역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꺼풀을 느리게 한 번 여닫았다.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빼 멱살 쥔 채 떨리고 있는 뉴트의 마른 손등을 감싸 제 옷깃을 놓게 했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 됐잖아.”
그건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할 수 있는 소리였다. 운이 좋아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상황이 나빠지기라도 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인데 너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 자칫 잘못하면 네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영문도 모르고 돌아오지 않는 이의 걱정을 하고 있을, 남겨진 사람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투로 남 말하듯 위험천만했던 이야기를 하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하,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뉴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입 꼬리가 삐뚜름하게 기울었다.
“아, 실은 너도 즐기는 건데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가?”
“뭐?”
“좆만한 집구석에, 같이 사는 새끼는 다리병신이라 별 도움도 안 되지. 지갑 털려고 만나보니까, 어? 돈도 존나 많고 껍데기도 반반해. 뭐 다 그런 거 아냐? 너 가게에 있을 때부터 남자새끼들 많이 꼬였잖아.”
오늘 만난 그 새끼랑은 어디까지 갔냐? 지갑 빼온 게 아니라 그냥 돈 받고 대준 거 아ㄴ…….
그러나 잔뜩 날을 세우고 비아냥거리던 뉴트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반동에 밀려난 몸이 싱크대에 부딪혔다. 통증이 느껴지는 입술 끝을 핥았다. 찝찌름한 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입가가 터진 모양이었다. 뜨겁고 얼얼한 뺨을 감쌀 생각도 못한 채 고개를 돌리자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눈을 한 민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걸, 뉴트는 처음 보았다.
“말 가려서 해 이 미친 새끼야.”
“…….”
“아무 일도 없었어. 적당히 받아주는 척 하다가 씻으러 간 사이에 도망쳤다고.”
“…….”
“나도 이렇게 사는 거 좆같아. 근데 어떡해, 그동안 우리가 보고 배운 게 이딴 짓밖에 더 있어?”
빨리 돈 모아서 여기 못 벗어나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다시 붙잡힌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운이 좋아 봐야 반병신이야. 그 자리에서 총 맞고 뒤질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되고 싶어?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돈을 모아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을 위해 하나가 희생해야 하는 이런 방법은 선택지에 없었다. 내가 제 몫을 할 수 있었다면 너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민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뉴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잠 깬 개가 그를 나무라듯 컁컁, 짖었다.
복도로 나갔던 뉴트는 결국 담배 두 대를 채 피우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따뜻한 김이 오르고 있는 식탁 위와는 대조적으로 좁은 방 안은 온통 차갑게 얼어붙어 적요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정성 들여 만들었을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무미하게 느껴졌다. 민호가 어떤 돈으로 마련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생각 없이 맛있다며 먹었던 걸 생각하니 오히려 속이 미식거리는 기분이었다.
민호는 식탁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아직 잠든 것 같진 않았다. 위험천만한 일을 멋대로 저지른 것에 대한 화는 풀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민호에게 심한 말을 한 것을 합리화할 수도 없었다. 그건 정말로 온전히 제 잘못이었다. 사실 상처 주는 말을 했던 그 역시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냉장고에 바로 넣어두지 않은 탓에 어느새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인 채 영수증과 뒹구는 맥주 캔을 보며 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 풀어보려고 했는데 더 엉망이 되었다. 이마에 맺힌 땀으로 근질근질해진 앞머리 새로 손을 넣어 아무렇게나 넘기며 침대로 향한 그는 누워 있는 민호를 등진 채 조금 망설이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한 사람 분의 무게를 더 지탱하게 된 매트리스가 끼익, 낡은 스프링 소리를 냈다.
“미안. 내가 말이 심했어.”
“…….”
“네가 미워서 일부러 그런 건 진짜 아닌데….”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던 뉴트는 몸을 틀어 묵묵부답인 등을 바라보았다. 얼룩진 벽을 마주하고 있는 민호의 표정을 상상했다. 좁혀진 미간과 고요하게 내리감긴 눈꺼풀.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뉴트는 민호가 그런 얼굴을 내보이는 순간들을 알고 있었다. 답답하거나 화가 나지만 차마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때, 그래서 더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그는 지금처럼 가만히 누워 몇 시간이고 벽을 바라보곤 했다.
적막이 내려앉은 집에는 탁상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벌써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대치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뉴트였다. 한 쪽 무릎을 접어 올린 채 미동 없는 민호의 뒷모습을 보는 데에 인내심을 모두 할애한 그는 결국 푹 한숨을 쉬며 보풀이 잔뜩 일은 이불보를 반 걷어냈다. 꾸물꾸물, 느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이불 속에 파고들어 옆자리에 몸을 뉘였다. 날개 뼈가 유독 도드라진 등짝에 가슴팍을 붙이고 말랐지만 단단한 팔로 허리를 옭아매었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퍼즐 맞추는 것처럼 구부린 다리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은 뉴트가 민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마치 어미의 품을 찾아드는 새끼짐승 같은 몸짓이었다.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나한테는 네가 부모님이고, 형제이고, 친구이고…… 전부인데.”
자신의 전부이자 유일함을 속삭이는 목소리는 축축했다. 평소 팔다리가 얽힌 채로 뒤엉켜 자면서 익숙해진 민호의 체향 너머로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아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무사히 귀가해 제 품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외출 후 돌아와 옷을 갈아입지 않은 어깨 위로 이마를 문지르며 뉴트가 말을 이었다.
있잖아, 아까 일이 잘못돼서 너를 잃어버리는 상상을 했어.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더라. 근데 너는 스스로를 소중하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 말을 했지. …화가 났어. 그래서 마음에도 없던 말을 한 거야.
“알어 임마.”
뉴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민호가 대답했다. 네 맘 다 안다고. 그는 픽 웃으며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뉴트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아니까 그렇게 죄인 고해성사하듯이 말하지 말라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한 거 하나 없으니까.”
“…….”
“맞은 데는 괜찮냐?”
아까 완전 힘 실어서 때렸는데 내일 너 얼굴보고 마트 손님들 다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디 봐봐, 딱 저만한 덩치와 벽 사이에 갇힌 몸을 돌려 뉴트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민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티셔츠 자락에 코를 박은 채로 뉴트가 중얼거렸다. 됐어 새꺄 신경 꺼…. 목소리를 듣자 하니 안 봐도 무슨 상태인지 알겠다. 대신 민호는 제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등에 달라붙은 뉴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얇고 폭신폭신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에서 굽이쳤다.
“얼른 떠나서 두 다리 쭉 뻗고 편하게 자고 싶지.”
“…응.”
“나도 그래.”
그러니까 뉴트, 나 한 번만 믿어 주라.
결국 제 뜻을 굽히진 않겠다는 말에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뭐라 항변하려던 뉴트였지만 민호가 한발 더 빨랐다. 손바닥으로 뉴트의 뒤통수를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로 그를 진정시켰다. 아, 일단 들어 봐 좀.
“네가 뭘 걱정하는 지 알아. 그런 일 없도록 무리하지 않을게. 낌새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쳐 나오면 되잖아.”
약속할게, 뉴트. 우리한테는 시간도 없고 다른 방법도 없어.
그리고…… 어차피 이미 예전부터 더럽혀진 손이잖아.
이렇게까지 말해오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뉴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네 등을 떠민 건 내가 아닐까. 민호에 비하면 무력하기만 한 자신과 지긋지긋한 금전고. 나아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상황들이 진절머리 나게 원망스러웠다.
결국 둘은 민호가 남자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뉴트가 멀리서 동행을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와 연인 사이처럼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동무를 하며 연습한 미소를 짓는 민호의 모습을 저 만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제법 분위기가 유해진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가고 나면 뉴트는 낡은 스쿠터를 몰아 모텔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동이 꺼진 그것과 함께 후드를 덮어 쓴 차림으로 담배를 세 대쯤 피우고, 근처의 상점에서 틀어 놓은 최신 곡이 세 트랙정도 지날 때면 스냅백의 챙을 앞으로 눌러 쓴 민호가 헐레벌떡 뛰어 나와 낯선 지갑을 흔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헬멧을 민호의 머리에 씌우고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낡고 작은 그들의 아파트로 돌아오면, 일주일에 두 번, 가장 위험천만하고 위태로운 날의 일과는 비로소 종료되었다. 양심을 팔고 죄책감과 함께 손아귀에 거머쥔 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착실히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민호가 만나는 이들은 때때로 그보다 체격이 작고 말라 가냘픈 인상을 주는 남자가 되기도 했고, 반대로 어디 풋볼 선수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큰 덩치에 근육이 건장한 남자가 되기도 했다. 저만 알고 있던 민호의 해사한, 그 여름의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매일같이 바뀌는 남자들과 공유하는 것. 그건 정말로 봐도 봐도 무뎌지지 않고 매번 새롭게 기분이 더러워지는 경험이었다. 가끔 제가 봐도 멋지다고 생각될 정도로 근사한 남자가 민호의 파트너가 되는 날이면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 친밀한 척 하는 민호의 행동이 실은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면 어쩌나, 불안함에 민호가 안다면 예전처럼 한 대 얻어맞을 확률이 높은 생각도 하곤 했다. 통통한 애굣살이 올라붙으며 휘어지는 눈매도, 옴폭옴폭 파이는 보조개들도, 민호의 전부가 되어주겠다 약속한 저 혼자만 아는 순간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여 반 쯤 태웠을 때쯤 어김없이 문 밖으로 뛰어나오는 민호가 다급히 안장에 올라타 제 어깨를 붙잡을 때면, 뉴트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잘난 그들로부터 이긴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신승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시작과 중간이 어떠하다 한들, 결국 마지막으로 민호가 돌아와 지친 몸을 기대는 종착지는 자신이었다. 그 사실은 이런 삐뚤어지고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그를 견뎌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 * *
“우리 오늘 이거 끝나면 집에서 피자 시켜 먹을까? 아님 뭐, 바비큐 같은 거?”
드물게 흐린 날씨였다. 그러고 보니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한 것도 같은데. 1층의 주인모를 집에 널린 런닝이며 늘어난 티셔츠들이 후덥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는 걸 지켜보던 뉴트는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올라갔다 한발 늦게 내려온 민호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두드려 신발을 고쳐 신은 민호는 아파트 입구의 낮은 계단을 가볍게 뛰어내려와 뉴트의 앞에 섰다.
왜? 뉴트는 잇새로 자근자근 씹고 있던 담배를 옮겨들고 반쯤 기대 걸터앉은 스쿠터의 안장을 짚었다. 중고인 것을 사들일 때부터 쿠션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탑승감이 좋지 못했다. 물론 다른 모델보다 가격이 훨씬 싸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왁스로 머리를 만지고 평범한 대학생처럼 멋을 부린 민호는 오늘따라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 이제 거의 다 모았어. 오늘 정확히 얼마가 생길 진 모르겠지만, 목표한 금액에서 딱 50달러 정도밖에 안 비니까 이번이 마지막인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이제 오늘만 지나면 더 이상 이런 짓 안 해도 돼. 팔짱을 끼고 선 민호가 씩 웃었다. 슈거 코팅과 함께 남자들의 등허리를 감싸며 짓는 목적 다분한 표정이 아닌, 그토록 원하던 일을 이뤄냈다는 사실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미소였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길 바라는 이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절이 바뀌었고, 달력이 몇 장인가 넘어갔다. 하루 중 반을 갈라 낮과 밤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두 사람은 떳떳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 벤은 친절하게도 오스틴에 살고 있는 사촌을 통해 임대주택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텍사스 정도면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니까 안전하게 새 터전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그에게 민호는 이 주 전, 빌렸던 목돈의 마지막 차액을 보내 주었다.
물론 여기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의 진짜 자유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은 기뻤지만 마냥 즐거워 할 수만은 없었다. 모든 자유에는 희생과 책임이 동반되는 법이었다. 그래, 민호. 이 큰 돈을 다 모을 수 있을 만큼 네가 고생을 했지. 하지만 소리 내어 말로 꺼내진 않았다. 그건 그의 비틀린 일상이 모두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살이 내린 민호의 뺨을 쓰다듬을 뻔 한 뉴트는 허공에서 잠시 방황하던 손을 충동과 함께 제 무릎에 내리눌렀다. 후두둑, 털지 않은 담뱃재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다시 물거나 끌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지저분해진 바닥을 응시하는 그에게서 민호는 담배를 빼앗아 대신 밟았다. 먼저 스쿠터의 안장 끝에 올라타며 턱짓했다. 뭐해? 가자. 그것이 마치 자신을 움직이는 주문이라도 되는 양, 끝없이 이어지던 생각을 접으며 뉴트는 앞자리에 앉아 키를 꽂았다.
“오늘 나 기다리면서 심심하면 앞으로 뭐 하고 싶은지 생각이나 해 놔.”
생각해둔 거 있어?
마른기침처럼 탁한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음…. 오른손으로 엑셀을 몇 번 돌리며 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와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자신들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 이후로, 훗날을 대비한 돈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그의 희망도 점점 자라났다. 과연 그런 시기가 올까, 반신반의 하면서도 갈망했던 그 날은 어느새 다가와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었다. 이젠 곧 현실이 될 그 시간들을 뉴트는 매일 밤 생각해왔다. 꿈속에서는 밥 먹듯이 보았던 풍경들이라 이제 눈을 감아도 선연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일단 우리 둘의 새 보금자리가 될 집을 사고, 일자리를 구하고.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생활이 자리 잡히고 적응이 될 때쯤이면 말이야, 민호. 그동안 여유가 없어서,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어, 빨리 가자 뉴트. 이 자식 벌써 나왔나봐.”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 것인지 민호가 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속으로도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뉴트는 설핏 웃으며 브레이크를 놓았다. 그래, 이따 집에 가서 얘기하자.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 하루만 더.
불과 한 시간 사이에 하늘의 색이 더욱 더 짙어졌다. 이제 곧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유독 저기압인 것은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잠을 잘못 잤는지 몸도 뻐근하고 뭐 좀 안 좋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거, LA 날씨가 이렇게 안 좋기도 힘든데…. 근육이 뭉친 목을 뚜둑뚜둑 소리 나게 꺾어도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에 뉴트는 뒷목을 쥐고 고개를 젖혔다. 비구름이 몰린 하늘을 보며 인상을 찡그린 그였지만 곧 평온하게 돌아온 얼굴로 턱을 내렸다. 모자에 가려 그늘진 콧대 아래로 드러난 입술은 약간 웃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이제 다 끝났는데. 마음 같아선 비가 아니라 지금 당장 태풍이 불어 닥쳐도 상관없을 것 같다.
구겨진 담뱃갑을 손바닥 위에 툭툭, 두드려 몇 개 남지 않은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길게 한번 연기를 뿜으며 뉴트는 민호와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또 잊혀진 채 이름을 잃었던 시절. 분명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우고 싶진 않았다. 그 기억의 모든 순간들에 민호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민호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직도,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외로운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테지.
고장 난 것인지 한 쪽이 꺼져 불완전한 형태로 위태롭게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건물. 저 아래에서 네가 내려온 이후 달라질 우리의 일상. 길 건너 맥도널드의 유리벽 너머 밝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뉴트는 그런 것을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지금 묵고 있는 아파트도 그리 시설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600스퀘어피트도 안 되는 그 집보다 낡고 후진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둘이서 안전하게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음 좋겠다. 아마 계약이 다음 달까지였던가. 계약이 끝나는 대로 오스틴으로 가 민호도, 나도 새 일자리를 구하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함께 눈뜨고, 또 잠들고. 그리고 새로운 곳의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갈 때쯤이 되면…….
“……나 참.”
좋은 날인데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쯧, 허리를 숙여 바짓단 위로 떨어진 재를 털던 뉴트는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한 가지의 사실을 상기해냈다.
민호가, 평소보다 늦고 있었다.
딱딱한 챙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앞머리를 가지런히 넘긴 그는 모자를 고쳐 썼다. 고개를 갸웃대며 찜찜한 기분으로 담배를 물었다. 이거 뭐……진짜 한판 구르고 오는 건 아니겠지. 제가 보지 못하는 민호의 시간을 의심하는 것은 이제 둘 사이에서 금기처럼 굳어지고 있었지만, 밑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니다. 애초부터 감정의 함유량이 다른 사이였다.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부정적인 상상들은 한계를 모르고 자꾸만 멀리 또 빨리 달려 나갔다. 입맛이 썼다.
점점 크기가 줄어들고 있는 담배와는 다르게 뉴트의 불안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홍수처럼 불어났다. 초조한 기색으로 그는 초침이 다음 숫자에 닿기도 전에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을 반복했다.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들을 몰아내기 위해 건물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사에 집중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민호가 남자와 들어간 지 어느덧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태껏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순한 질투에서 기인한 불안이 아닌, 아주 위험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짝바짝 입이 말랐다. 안의 상황을 알 수 없어 그저 출입문 앞에서 서성대던 뉴트는 문 너머에서 나오는 커플 한 쌍과 마주치고 옆으로 비켜섰다. 날씨가 왜 이래? 어휴, 우산 안 가져왔는데. 주차장으로 향하며 애인에게 팔짱을 끼던 여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근데 아까 옆방 말야. 진짜 괜찮을까? 싸우는 것 같았는데. 신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물건 부서지는 소리 나는 거, 자기도 들었지?”
“아, 됐어. 뭐 그런 것까지 다 신경을 쓰고 그래.”
어스름이 내리는 평일의 늦은 오후, 주변이 한산한 모텔의 앞마당에서 수군대는 여자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톤을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불현듯 촉이 왔다.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이 깊고 어두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뉴트는 멀어지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평소엔 스쿠터를 탈 때도, 걸어 다닐 때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멀쩡해 보이는 다리는 꼭 마음이 급해질 때만 반 박자 느리게 몸을 따라왔다.
저기!
결국 절뚝거리며 그들의 걸음을 쫓은 뉴트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함께 뒤 돌아보는 남자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밭은 숨을 쉬는 뉴트를 발견한 여자가 어머, 놀라며 본능적으로 제 애인에게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 저기서 나왔죠. 몇 호에서 묵으셨어요?”
다소 무례한 질문을 건넨 뉴트의 팔을 걷어낸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듯 등 뒤로 세우며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남자가 그보다 당신 누구야, 하고 날 선 질문을 잇기도 전에 멋대로 말허리를 자른 뉴트가 재차 물었다.
“그 싸움 난 것 같다는 옆방, 몇 호냐고요.”
아주 다급하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 * *
곧 만끽할 자유에 들떠 위험의 냄새를 감지하지 못해서일까. 방심은 결국 사고를 낳았다.
민호와 체격이 엇비슷해 보이는 남자는 이른 시간부터 얼큰하게 취한 채였다. 요 근처에서 술을 마셨거나 약을 했거나, 셔츠에 기름진 음식 냄새와 알코올 냄새를 묻혀온 걸로 봐선 전자인 것 같은데. 그래서 언제나 그렇듯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오는,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뉴트에게 오늘은 더 빨리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자신만만한 답변까지 보내 놓았던 것이다.
결코 자랑스러운 경험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놈 저런 놈 다 겪어본 민호의 경험 상 이런 식으로 해롱대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 쉬운 편이었다. 인지능력도 느리고 다리도 굼떠 달아나기가 수월했다. 특히나 사람이 술을 마신 건지 술이 사람을 잡아먹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주망태가 된 이런 상태라면 금상첨화였다. 비틀거리는 남자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며 그를 방까지 부축해온 민호는 젖은 입술을 몇 번 부대끼고 치미는 구역질을 참으며 웃었다. 누워 있으면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무게가 실리지 않게 무릎을 세우고 올라타 셔츠의 단추를 느릿하게 풀어헤치는 동안,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잠이 들었다. 민호는 눈감은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 남자를 확인했다. 손바닥 위로 알코올 냄새 섞인 숨이 닿고 종내에는 코까지 고롱거렸다. 이 정도면 금방 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여유 있는 움직임으로 남자의 위에서 내려와 지갑을 벌려 보니 현금도 꽤 많았다. 돈에 쫓기는 삶은 저절로 자신을 셈에 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목표한 금액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 그런가 일이 쉽게 풀리네, 주머니에 무거운 지갑을 넣고 다시 한 번 잠든 남자를 확인한 민호는 뒤를 돌아 문으로 향했다. 뉴트한테 뭐 먹자고 하지. 저금하고 남은 돈으로 밥을 사먹고, 며칠 후에 월급이 들어오면. 음. 그건 그 자식 스쿠터 고치는 데 보태줘야겠다. 웃음이 새어나오는 입술을 꾹 말아 물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는 찰나, 강한 손아귀가 민호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너무 놀라 비명 지를 틈도 없었다. 엄청난 악력에 질질 끌려간 그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이후로는 계속 폭력의 연속이었다. 씨발 내가, 너네 같이 몸 굴리는, 더러운 년, 들한테, 두 번, 속을 줄, 알아? 쏟아지는 발길질에 민호는 등을 말고 몸을 웅크려 팔로 얼굴을 막았다. 술 취해 자빠져 있던 새끼가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나 싶을 정도의 무지막지함이었다. 제 머리 옆으로 비껴간 수면 램프가 박살나고 등으로, 배로, 허벅지 위로, 구둣발이 날아들 때마다 느껴지는 섬뜩한 통증에 민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걷어차이다간 죽을 것 같았다. 폭력을 견뎌내고 있던 몸을 바로 돌렸다. 저 역시 어디 가서 뒤쳐질 체격은 아니니 그를 세게 걷어차고 넘어진 틈을 타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워내 남자를 보는 순간, 계획을 세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채로 민호는 모든 반항을 멈추었다.
남자의 손에는 뒤춤에서 꺼낸 칼이 들려 있었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든 생각에 민호는 몸에 힘을 빼고 순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더 이상 저항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겁에 질린 표정에 만족한 건지 허리 위로 올라앉은 남자는 옆에서 엉망진창으로 구르던 넥타이를 집어 민호의 손목을 묶었다. 앞깃이 훤하게 벌어진 남자의 몸에는 목덜미부터 흉곽까지 이어지는 문신이며 흉터가 있었다. 평범한 일반인의 신분으로는 지니기 힘든 흔적들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민호는 본능적으로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인지 깨달았다. 오늘 너랑 만난 새끼, 느낌이 안 좋아. 그렇게 말했던 뉴트의 메시지도 떠올랐다. 젠장, 이런 새낀 줄 나도 알았겠냐고…….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목 부근까지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남자는 입술을 묻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 몸을 관통했다. 혀를 내어 유두를 핥던 그가 목덜미와 복근이 도드라진 옆구리 어디쯤을 물어뜯듯이 이 세울 때면 민호는 고개를 젖히고 고통에 찬 신음을 삼켰다.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쾌락이나 흥분은 없었다.
온 몸을 집요하게 지분대며 배꼽 아래까지 기어 내려온 남자는 이윽고 버클에 손을 뻗었다. 순간 기겁을 하며 버둥거렸지만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허벅지를 깔고 앉은 통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르렁거리는 숨에 섞여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이발, 결국 이렇게 되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또 어딘가에 끌려가기라도 한다면, 그 땐 어떡하지? 그 자식, 걱정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속한 거, 지킬 수 있을까? 뉴트.
민호는 질끈 눈을 감았다.
“…?”
일순 강한 파열음과 함께 바지 속을 헤집을 것 같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제 가슴팍 위로 무게를 실으며 풀썩 쓰러진 남자의 몸뚱이였다. 의식을 잃은 것 같은 상태에 히익, 숨을 들이쉬고 팔꿈치로 남자의 몸을 굴려 밀어낸 민호는 어찌 된 영문인가 살피기 위해 경악에 물든 고개를 들다 깜짝 놀랐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뉴트가 접이식 의자를 든 채 씨근덕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뉴트?”
가쁘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의 움직임이 점차 일정해졌다.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어리둥절한 민호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의자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스르륵,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덮은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딴 짓 하지 말랬잖아…….”
잔뜩 지친 목소리에 민호는 상체를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고개 숙인 그의 앞에 마주앉아 어설프게 몸을 기울였다. 괜찮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이 뻗어져 나와 민호의 앞깃을 홱 끌어당겼다.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아 예전처럼 떼어낼 수도 없었다.
“괜찮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지금 어떤 꼴이 될 뻔했는지 봐!!”
그제야 민호는 뉴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손으로 거칠게 문지른 얼굴은 눈가며 코끝이 벌겋게 달아올라 뺨이 눈물범벅으로 축축했다. 저와 뉴트가 갇혀 있던 밀폐된 세계에서도, 그 곳을 나와서도 민호는 그가 눈물 흘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간혹 새벽에 텔레비전에서 하는 슬픈 영화나 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자신이 티셔츠 자락에 눈물을 찍을 때도 덩치에 안 맞게 질질 짜긴, 하고 픽 웃으며 티슈곽이나 던져주고 말았던 뉴트였다. 어쩌면 아직 제가 뉴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지도. 난장판이 된 그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입만 뻥긋거리며 당황스러워 하는 민호의 반응에 뉴트는 탈력한 듯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다시 눈가를 가린 손바닥 안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괴어 뚝뚝 떨어졌다.
“다 나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라고…….”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해 민호는 그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깜빡, 애타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꼭지만 응시할 뿐이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뉴트가 말을 이었다.
“…너 이러고 있을 때마다 내가 저 밑에서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 1분이 한 시간처럼 길고 네가 올라갔다가 그 길로 두 번 다시 못 내려오는 거 아닐까, 이딴 새끼들은 너한테 어디까지 손댈까…… 그런 좆같은 생각만 든다고. 그러니까 나만… 나만 네 인생에서 꺼져 주면 되는데, 어? 너는 네 몸 하나정도는 알아서 챙기는 새끼니까 이런 짓 안 하고도 멀쩡히 잘 살 거 아냐. …그래, 알아. 나도 안다고. 기생충처럼 너한테 들러붙어서 너 좀먹고 있는 것도 다 아는데… 맘대로 안 돼. 네 옆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고…….”
얼마나 세게 묶어놓은 건지, 넥타이의 매듭을 풀기 위해 손목에 묶인 천 조각을 물어뜯고 있던 민호는 울컥, 마음속에서 치솟는 감정에 고개를 들었다.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너 때문? 착각하지 마 이 새끼야, 누가 너보고 그 딴 생각하래? 이 시발 병신 같은…!
소리치듯 말을 쏟아내던 민호의 시선에 문득 뉴트의 발목이 걸렸다. 나를 위험으로 내모는 너의 죄책감이자, 끝없는 자기비하에 빠트려 너를 갉아먹는 독. 하지만 나는 비오는 새벽마다 통증에 시달려 끙끙대는 네 발목을 주물러 주면서 아주 가끔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이 다리가 멀쩡했더라면 너는 별 볼일 없는 나를 떠나 더 먼 곳으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나 스스로가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생각을 했어. 물론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이니 너는 영영 모르겠지.
‘내가 다리병신이라서?’ 기꺼이 제가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던 날 저를 속상하게 만들었던 목소리가 떠오른 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푹 쉬고 흘긋 눈을 돌려 미안. 하고 무뚝뚝하게 사과했다. 저라고 뉴트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간헐적으로 울음을 삼키는 어깨를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답답했다. 최대한 부드럽게 들리길 바라며, 윽박지르듯 소리친 방금 전보다 훨씬 진정된 어조로 가만가만 말을 골랐다. 너 탓 아니라고 임마.
“나만 힘들고 너는 팔자 편하게 놀았냐? 너도 고생했잖아. 여태껏 우리 둘이서 잘 노력해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이건 내가 선택한 거고 나 좋자고 한 일인데,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해. 어? 왜 네 맘대로 나 버리고 갈 생각을 하냐고.”
진짜로, 걱정 시켜서 미안.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서로 가족도 친구도 되어 주겠다고, 우리 약속했잖아. 너까지 없으면 내 편은 누가 들어 주냐, 엉? 나 혼자 둘 거야?
대답은 없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긴 시간들은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었다. 민호는 뉴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안아주지 못하는 대신, 자유롭지 못한 손으로 무릎 위 엎드린 팔을 잡고 가만히 이마를 갖다 대었다. 곧 고개 들지 않고 더듬더듬 움직여 제 손을 찾아 쥐는 뉴트를 느끼며 민호는 눈을 내리감았다.
어디 가지 마. 옆에 있어, 뉴트.
* * *
1층에서 카운터를 보는 중년의 여자는 유리창이 작게 뚫려 있는 부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낡아서 제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인 방범 카메라를 피해 모자를 눌러 쓴 뉴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유유히 그 앞을 지났다. 곧 속도가 엇비슷한 걸음의 민호가 그의 옆으로 나란히 붙어 섰다. 여름의 초입임에도 두꺼운 후드에 덮인 그의 얼굴엔 눈썹 위 긁힌 상처와 광대에 시퍼렇게 든 멍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출입문을 밀고 먼저 밖으로 나서며 뉴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죽었을까?’ 아직 방 안에 남겨져 있을 남자의 이야기였다.
“아니, 숨 쉬고 있던데. 그냥 기절한 거겠지.”
“…….”
“왜, 겁나냐?”
겁은 무슨. 일갈하며 민호와 시선을 마주하던 뉴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건지 속없는 바보인 건지. 방금 전까지 제가 어떻게 될 뻔 했던 것은 잊은 사람처럼 허허실실 웃고 있는 민호의 얼굴을 수놓은 훈장 같은 흔적들에 시선이 닿은 탓이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만지기도 아까워, 아니, 닿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불어날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될까봐, 손대는 순간 이 모든 게 환상이었던 양 사라져 버릴까봐 한번 쓸어보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뉴트에게는 그랬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면 고단하게 잠든 뺨을 만져볼까, 말까, 망설이며 트는 동을 맞이했던 날이 두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그래, 그렇게 아깝고 소중한 너인데…. 다시금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뉴트는 고개를 돌렸다. 탁, 앞니로 비껴 물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저 딴엔 진심을 담아 결연한 목소리였으나 듣는 쪽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모양인지 옆에서 픽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터져서 피가 비치는 입가를 핥고 약지로 꾹꾹 누르며 민호가 웃었다. 장난스럽게 뉴트의 어깨를 푹 떠미는 눈매 끝이 좁게 모여들었다.
“그런 독한 놈 아닌 거 다 안다.”
그렇게 말하고 민호는 가볍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스쿠터를 대어 놓았을 주차장 쪽으로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뉴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인에 대해 다 안다, 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언제나 그러했듯, 뉴트에 관한 한 민호는 저 스스로의 일보다 예민하게 굴었다. 지금 기분이 어떻다는 것부터 그의 사소한 생활 습관, 버릇들까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라와 인간관계에 대해 미련이 없는 뉴트였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은 종종 감기처럼 찾아들어 그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간파당하는 것은 싫지만 가끔은 이런 나를 누가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민호는 제게 더욱 더 특별한 존재였다.
모두가 제게 시선주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만은 달랐다. 자신을 배려한 표정과 행동, 마치 제가 깨닫기 이전부터 자신을 지켜봐 온 사람처럼. 눈빛만 봐도 제 생각을 다 읽는 것만 같았다. …아, 물론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민호 역시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의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걸 지금 당장 전할 수는 없어도,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고 부탁하는 너, 너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나,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우리. 그래, 그 사실 하나면 된다.
“아까 얘기한 거 생각해 봤어?”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에 대한 계획 말이야.
엎어진 스쿠터를 일으켜 세워 민호의 앞까지 끌고 온 뉴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는 민호를 흘긋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민호의 짤막한 눈썹이 구겨지든 말든 그는 태연했다. 키를 꽂고 오른 손목을 두세 번 돌렸다. 또 다시 메마른 기침소리와 같은 소음과 함께 시동이 걸리고 두 개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뭐해, 타. 턱짓을 하는 얼굴은 불퉁해보였다.
“너 같으면, 내가 그 위에 올라가서 안 내려오는데 여유작작 딴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 있겠냐?”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그의 말에 민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비록 날 세운 어투라 하더라도 걱정과 염려는 모두 상대를 아끼고 친애하는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문득 생각하고 보니 낯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머쓱한 얼굴로 눈동자를 슬쩍 굴리며 민호는 뒷목을 긁었다. 음 그래 뭐……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긴 다리를 넘겨 안장에 올랐다. 차가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온 사람처럼 간질간질하게 풀어지는 뺨과 마음을 뉴트의 너른 등 뒤로 숨겼다.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 다행이야.
긴 하루였다, 그치.
피곤함과 노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 언젠가 민호가 그랬던 것처럼, 뉴트는 어깨 뒤로 손을 뻗었다. 머리에 덮어 쓴 후드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닳을까 두려워 그동안 한번 손대보지 못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너도 임마. 서툰 손길에 민호는 코로만 웃으며 가만히 뺨을 내맡겼다. 마치 그의 뒤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더 이상 서늘하지 않은 손가락이 몇 번이고 자신의 눈 밑이며 뺨을 손끝에 새기듯 쓸었다.
“이제 집에 가자, 뉴트.”
뺨이 닿았던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마치 신기한 거 보듯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뉴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민호가 웃었다. 여기서 날 샐래? 타박하는 목소리에 어, 어?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뉴트는 핸들을 고쳐 잡았다. 곧 허리와 등에 와 닿는 익숙하고 따뜻한 온기에 안도를 느끼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 돌아가자, 우리들의 집으로.
낡고 성한 곳이 없는, 그러나 아직 두 사람을 태울 정도로 쓸 만한 스쿠터는 느리고 천천히, 어느덧 밤이 내린 도시의 거리 위로 섞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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