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오해와 착각
a 2015. 3. 11. 23:46 |1. 이제 저도 제가 뭘 쓰는지 잘 모르겠다요
2. 원래 홍해님과 게마님의 분위기 쩌는 뉴트 오스본(과 그에게 끌려온 민호) 연성을 보고 ㄱㅑ아악 세상에 존좋;; 이거야;;;; 하면서 썰 풀어놨다가 쓴 건데 결과: 역시 소비가 쵝오 여러분 제 글 말고 두 존잘님의 연성을 보시죠
3. 알오베 주의
“왜 하필이면 나야?”
저번 꺼 마무리 지은 지 이 주도 안 됐다, 엉? 이 정도면 노동 착취 아니냐?
인쇄기 앞에 서 있던 민호는 업무 분배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한 그의 손에는 갓 출력해 복사열이 식지 않은 트레싱 페이퍼가 들려 있었다. 지문 인식 형 개인 금고를 따 달라는 의뢰였다. 이런 건 그냥 척에게 시스템 해킹을 맡기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삼십 분이면 끝날 텐데, 분명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꼭 고전적인 매뉴얼대로 계획을 세웠다. 연수원에서만 해도 최고 괴짜라고 불리던 그가 입사와 동시에 원리 원칙을 지키는 남자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FM스러움에 죽어나는 것은 애꿎은 제 팀원들이었다. 민호는 지문이 인쇄된 페이퍼를 곧장 옆에 있는 회로기판에 옮기고 덮개를 닫았다. 아마 현상하는 데에는 몇 분이 걸릴 것이다. 현상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느릿하게 뒤를 돌아 좁은 사무실의 끝자락, 서너 개의 고만고만한 파티션을 넘어 창문가에 붙어 있는 토마스의 책상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나 이제 휴가 쓰고 싶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기억 안 나?”
앞머리를 세워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 위로 불만스럽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잔뜩 구겨진 미간. 하지만 토마스는 온 몸으로 명백한 거부의 의사를 전하는 그의 동료를 가볍게 무시하며 민호의 책상 앞으로 던져둔 서류 봉투에 턱짓했다. ‘저걸 너 아니면 누구한테 맡기라는 거야? 읽어 봐, 네가 맡을 수밖에 없어.’ 두툼한 두께로 미루어 보아 의뢰 내용과 수행 요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가 이것저것 들어 있는 것 같았지만, 고려해볼 것도 없이 아예 처음부터 제게 떠넘길 작정이었던 듯 책상 위에 올려둔 저 봉투를 굳이 들추어 보지 않아도 그는 토마스가 말하는 이번 건이 무슨 임무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용과 금액, 그 모든 면에서 굉장히 큰 건인 데다가 또한 자신들의 모기업인 위키드 사에서 직접 내려온 의뢰였기 때문이다. 민호는 이 의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냄새를 감지했다. 입사 오 년차 러너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딱히 몸을 사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칼을 맞아도 삼 주면 깔끔하게 아물던 이십 대 초반과는 다르게 회복 속도가 더뎌진 몸은 충분한 휴식을 필요로 했다. 이 주 전의 피로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좀처럼 주장을 굽히지 않는 제 팀장의 집요함에 민호는 질린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억 소리 나는 인쇄기들을 대여섯 대씩 올려 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듯 기대앉았다.
“…뭐, 좋아. 뉴트 오스본이 양성애자인 것도 알겠고, 취향 맞으면 남자랑 붙어먹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겠어. 근데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남자 오메가라는 건 좀…….”
저런 쪽 아냐?
그는 사무실의 벽면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곱상한 외모에 마른 몸매를 가진 아이돌 밴드가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두 무릎을 포개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토마스는 입술을 감쳐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베스트 차림의 가슴팍이 크게 한번 오르내렸다. 제 말에 설득당한 듯, 턱 끝을 긁으며 고민에 빠진 모습에 힘을 얻은 민호는 말을 이었다. 봐, 난 키도 크고 덩치도 있어서 전혀 취향이 아닐 것 같은데. 그러나 토마스는 섣불리 이렇다 할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TV 모니터만을 응시했다. 이따금씩 숱 많은 속눈썹이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리는 걸로 봐선 머릿속으로 또 다른 대안은 없을까 생각중인 것 같았다. 이거 조금만 더 설득하면 넘어 오겠는데?
민호는 속으로 슬쩍 웃으며,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제 동료를 따라 텔레비전 화면으로 느긋한 눈길을 던졌다. 뒤통수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린 것은 엉뚱하게도 척이었다. TV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길게 앉아 이어폰을 꽂고 큐브를 돌리던 곱슬머리가 빼꼼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저 뭐 잘못했어요?”
계정을 만들고 플레이한지 몇 개월이 지나도 갖고 싶은 아이템이 안 나와 게임 회사 서버를 해킹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글레이드로 스카우트 당한 척의 나이는 올해로 열일곱이었다. 여태껏 단 한 명의 이탈도 없이 자리를 지켜 온 토마스나 러너들의 평균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입사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가 오기 전까지 사무실의 막내였던 제프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린 척을 글레이드의 직원들은 퍽 귀여워했다. 그건 보기와는 다르게 동글동글하고 유순한 것에 약한 민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 부른 거 아니니까 일 봐, 인마.’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콧등까지 줄줄 내려온 뿔테를 추켜올린 척이 다시 큐브를 맞추는 데 열중하자 민호의 시선은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토마스에게로 돌아왔다. 이제 쐐기를 박아야겠군.
“나 말고 다른 러너를 보내는 게 어때?”
“저번 의뢰 마무리 지은 지 이 주도 안 지났다고 했나? 그래, 유독 네게 과중되는 업무에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틀린 말 아니야. 인정해. 근데 이번 의뢰가 보통 의뢰가 아니니만큼 위키드에서는 이번 건에 경험 많은 러너를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고. 지금 사무실에서 이 조건에 맞는 러너는 딱 넷인데 벤은 알다시피 모스크바에서 다음 달이나 되어서야 돌아올 거고, 그렇다면 남은 건 민호 널 포함한 셋이지. 하지만 이번 의뢰에 트리사나 브랜다를 보낼 순 없어. 이유는… 너도 잘 알잖아.”
설마 너, 이번에 투입될 장소가 어디인줄 알면서도 걔넬 보내자는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샌디 비치에서의 서핑 보드, 보라카이에서의 스노우 쿨링 따위를 떠올리고 있던 민호는 순식간에 달콤하게 젖어 있던 휴가의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그저 의뢰를 다른 러너에게 떠넘기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이번 의뢰의 장소가 어디였는지를 잠시 잊었던 것이다. 위키드에서도 수행원으로 특별히 A급 러너만을 붙일 것을 요구할 정도로 중요도가 높은 이번 의뢰는 극도로 위험하고 음습한 곳으로 신분을 바꾼 채 침투하는 것으로부터 계획을 시작할 테였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위험함’ 이란 생명을 위협당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래, 아무리 남자 못지않게 능력이 좋고 실전에서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러너들이라 하더라도 그 둘은 여자 요원들이었다. 무슨 짓 당할 줄 어떻게 알고. 민호는 이 사무실 안으로 첫 발을 들이민 이후로 줄곧 여동생처럼 함께 자라온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휴양지의 작열하는 태양이 저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
그는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빼어 팔짱을 끼고 아랫니로 윗입술을 츱, 소리나게 빨았다.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일견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거의 제안을 승낙한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다. 몇 년 동안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지켜봐 왔기에 모를 리가 없는 제 동료의 버릇을 보며 토마스는 민호의 확답을 받아내는 데 착수했다. 기분에 거슬리지 않게 살살 구슬리는 말투가 퍽 얄궂었다.
“어차피 이거 끝나면 영국 떠야 해. 한국 건너가서 좀 쉬어. 쉬고 싶어 했잖아?”
“…….”
“할 거지, 민호?”
“이 시팔… 그래, 해. 한다고! 알겠으니까 그런 토 나오는 표정 좀 집어 치워라, 엉?”
그리고 안 한다고 해도 시킬 거였으면서 할 거지? 는 무슨.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 번지는 토마스를 보며, 와득 인상을 구긴 민호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동선에 따라 철저하게 스케줄을 짠 계획표와 몇 장의 사진이 붙어있는 종이들이 책상 위로 쏟아졌다.
크고 작은 상점들과 함께 소호의 거리 어디쯤엔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 있는 글레이드 사社 는 표면상으로는 위키드의 계열회사 중 하나인 청소 대행업체이지만, 그 내부를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실제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청소’ 가 일반인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청소’ 의 사전적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먼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작게는 도청, 미행, 간단한 시스템 해킹부터 시작해서 불법 거래, 돈세탁 등 대기업인 위키드 사가 물 위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처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민호가 맡은 산업스파이 임무 역시 글레이드가 취급하는 일들의 일환이었다.
위키드와 오스코프 사, 지금이야 둘 다 비등비등하게 의약업계의 투톱을 이루는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딱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위키드 사는 오스코프 사에 비하면 그 매출액이 몇 분의 일도 안 될, 이제 막 업계에서 유망하게 떠오르고 있던 신생 업체였다. 그러나 2006년 마지막 신약을 발표로 오스코프 사는 십 년 동안 새 제품을 내어놓지 않았고, 자금력이 떨어진 것이다, 미국의 N사에서 오스코프 사를 인수했다, 혹은 회장의 건강이 위험하다 등 증권가에 소문만 무수히 나돌며 성장 폭이 주춤하던 동안 위키드 사는 부지런히 매출을 올려 오스코프 사의 절반까지 따라갈 정도로 덩치를 불렸다. 그리고 마침내 작년 가을에 내어놓은 새 접종 백신의 성공적인 출시로 위키드가 올 상반기를 기점으로 같은 해 오스코프 사의 매출액을 뛰어넘지 않을까 기쁜 마음으로 예상하고 있던 그 때, 올 하반기 중으로 오스코프 사의 신약이 출시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말이 소문이었지 거의 기정사실화 된 것에 가까웠다. 10년만의 신약 발표라는 점에도 충분히 주목할 만 했지만, 그보다 이토록 무성한 소문과 함께 업계가 술렁이고 있는 이유는 오스코프 사가 출시할 신약이 오메가로 태어난 사람의 유전자 배열을 베타의 것으로 바꾸는, 이른 바 형질 변형을 가능케 하는 약이라는 관계자의 정보 때문이었다.
사상 최대의 이슈였다. 그동안 의약업계 뿐만 아니라 유전공학 쪽 역시 아무리 날고뛰어도 결국은 성과를 보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이 바로 인공적으로 인간의 형질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마치 창조주가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나누었듯 날 때부터 인간이 지닌 그것을 바꾸는 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금단의 영역과도 가까웠다. 그런데 알파와 오메가, 특이 유전자를 가진 신인류가 등장하고 난 후로부터 수 십, 아니 수백 년 동안 전 인류가 골몰해온 미해결 과제를 런던의 한 제약 회사가 해결한 것이었다. 알게 모르게 오메가들에 대한 편견은 아직까지도 완벽히 뿌리 뽑히지 않은 채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으므로 타고난 형질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던 사회적 약자들에게 오스코프 사의 신약은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분명 오스코프의 신약은 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었다. 그리고 오스코프 사의 독주로 십 년 만에 이룩한 결과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위키드의 경영진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기술을 빼돌리는 거라면 차라리 연구 개발 쪽의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는 게 더 쉽지 않나?”
책상 위에 길게 뻗은 다리를 올리고 허벅지 위에 얹은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고 있던 민호가 물었다. 꼭 이렇게 더러운 방법으로 접근해야 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와 등 뒤에서 함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토마스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라고 그 인간들 생각을 알 리가 있나. 아마 그 방법도 고려 안 해본 건 아닐 텐데 일단 오스코프 사의 연구 개발팀에서는 벌써 몇 년째 외부에서의 인력 충원이 없었고… 아마 이 쪽이 좀 더 쉽고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 안전의 범위에는 수행원의 목숨도 들어가냐?”
“글쎄다.”
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둘둘 말아 그대로 토마스의 복부를 내리쳤다. 야, 네가 맡은 거 아니라고 존나 말 편하게 한다? 읽으라고 준 서류를 가져다가 둔기를 만들었다며 토마스는 앓는 소리를 냈지만 보나마나 엄살일 게 뻔했다. 민호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블루종을 꿰어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머니클립밖에 들어 있지 않은 뒷주머니를 더듬거리는 손이 투박했다. 아, 오늘 아침에 밥 먹고 나오면서 다 피웠나, 체육관 가면서 한 갑 새로 사야겠네. 다 떨어진 담배를 생각하며 사무실의 문을 나서는 민호에게 토마스가 물었다. 어디 가는데?
“몸값 올리러 간다, 왜.”
두 달에 걸친 물밑 작업은 민호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의뢰를 맡겠노라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진행되었다. 서류상으로는 모 대학교의 어느 학부에 재학 중이지만 그 실체는 없는 가짜 신분을 만들고, 대학생으로 위장한 민호가 등록금을 납부할 명목으로 오스본 가 소유의 대부 업체에서 돈을 끌어다 쓴 후 갚지 않게 했다. 그리고 몇 번의 독촉에도 끝끝내 돈을 갚지 않은 그는 결국 수금을 하기 위해 그의 렌트하우스로 찾아온 대부업체의 직원들을 직접 조우하게 되었다. 뻔한 수순이었다. 좁은 방에 들이닥쳐 학교 로고가 박힌 낡은 티셔츠 차림을 한 대학생을 마주하게 된 그들은 다짜고짜 총구를 들이밀며 가족들이 있는 주소를 부르라든가 예리한 날붙이를 휘두르며 신체 포기 각서를 내미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오메가 매춘 업소로 그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여기에는 오스코프 사와 마찬가지로 형질 변형에 대한 연구 개발을 하다 예산에 비해 성과를 내지 못해 중도 포기한 위키드 사의 실패작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아주 일시적이지만 복용을 하면 알파나 베타 유전자의 형질을 오메가의 것으로 변이시키는 약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 또한 형질 변형에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었지만, 위키드는 재화를 팔아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였고, 언제나 그렇듯 시장에 내어 놓아도 수요가 없을 상품은 상업적 가치를 지닌 성공작이라 보기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출시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형질에 따라 신분이 나뉘고 공공연한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자신이 하위 계급인 오메가가 되려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워낙 강한 유전자 탓에 호르몬의 사이클을 거꾸로 돌릴 수가 없어서 우성 알파에게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이 약이 나한테는 먹힌단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열성 알파라서. 본인의 콤플렉스가 뜻밖의 곳에서 장점으로 작용할 줄 몰랐던 민호는 약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쾌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업소에 끌려간 그는 마치 요리에 사용될 가축마냥 등급 판정을 거친 후, 눈을 가리고 알 수 없는 박스에 갇힌 채 오스본 가로 실려 가게 되었다. 각기각색의 사연으로 사창가에 끌려와 성 노예로 전락한 오메가 장사로 수입을 올리는 매춘업소에서는, 오스본 가에서 그들의 뒤를 봐 주는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매달 초 일정한 돈과 함께 높은 등급을 매긴 오메가들을 상납하고 있었다. 일종의 뇌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 눈에 봐도 건장하고 체격이 좋아 우성 오메가로 보이는 민호는 그들의 기준으로부터 높은 등급의 판정을 받았고, 민호가 충분한 상품적 가치를 지녔다고 판단한 그들은 그를 돈과 함께 오스본 가로 보냈다. 모든 것이 위키드의 계산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암막이 걷히자 어둠에 적응되어 있던 시야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어렵게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자신은 오스본 저택의 넓은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응접실의 용도로도 쓰이고 있는 것 같은 로비의 중앙에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카우치가 놓여 있었고, 외부인을 접대할 때 사용될 그 공간의 양 옆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1층의 응접실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2층의 로비가 보였다. 아마 서재라든지, 오스본 가의 두 형제의 개인적인 공간은 2층에 위치해 있겠군. 민호는 짐작했다.
그러나 대리석 -인조가 아닌- 계단과 수천을 호가할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같은 사치스러운 인테리어에 혀를 내두르기에 앞서 그의 시야에 먼저 보인 것은 제가 갇혀 있는 철창의 촘촘한 창살이었다. 민호는 마치 제가 서커스단에서 길러지는 맹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지금으로선 나보단 그 네 발 달린 짐승들의 신세가 낫겠군. 어쨌든 서커스단의 그놈들은 적어도 철창 안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제 팔목과 발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몸을 뒤챌 때마다 잘그락대는 쇳소리가 민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동안 숱한 임무를 맡아 오면서 별 미친 짓을 다 해봤지만 이런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곧 철창의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이 들어와 민호의 팔뚝을 한 쪽씩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 발로 걸어갔다기보다는 질질 끌려가 철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닥마저 대리석이면 턱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바닥은 부드러운 카펫에 덮여 있었다. 누가 봐도 베타인 게 분명한 오스본의 사용인들을 보며 민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두 명이라. 양 손목의 족쇄를 잇는 쇠사슬을 한 놈의 목 뒤로 집어넣어 끌어당긴 후 무릎으로 찍어 올리고, 나머지 한 명 또한 주변 기물과 발을 이용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발을 묶어놓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저 정도는 거뜬히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변태 새끼들 취향 하고는!
계약 위반이고 나발이고, 의뢰를 마치자마자 저 두 놈은 필히 박살을 내 주리라 마음먹으며 민호가 두 직원의 얼굴을 외우려 애쓰고 있을 때 한 층 높은 공간에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넓은 홀의 정적을 메우는 구두 소리와 함께 난간 위로 잘 손질된 금발의 머리가 작게 솟았고, 층계를 따라 내려올 때마다 말랐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 그의 모습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어설프게 흩어져 있던 사용인들이 알맞게 자리로 돌아가 예를 갖추었다. 비서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로비로 내려온 그는 형인 해리 오스본과 함께 오스코프 사를 공동 경영하고 있으며, 또한 이번 의뢰로 민호의 주 타깃이 될 오스본 가의 둘째, 뉴트 오스본이었다.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아님 단순히 우성 알파라는 형질 때문인지 그의 등장만으로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저도 모르게 밭은 숨을 뱉으며 민호는 생각했다. 다르긴 다르구나. 열성이긴 하지만 같은 알파인 저조차도 주눅 들게 하는 분위기였다.
오셨습니까, 깍듯이 인사하는 사용인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는 민호의 앞에 멈춰 섰다. 길고 곧게 뻗은 다리가 천천히 접히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손과 발이 결박당한 채 바닥에 엎어져 있는 민호를 유심히 살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더 좁혀졌다. 희고 길지만 결코 곱지만은 않은 손이 민호의 거친 뺨을 감싸 쥐고 턱을 들어 올렸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했다. 민호는 그제야 뉴트 오스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대로 순순히 몇 대 맞아주느라 피딱지가 앉아 있을 제 얼굴과는 달리 뉴트 오스본의 얼굴은 무척 해끔했다.
반박할 수 없는 우성 알파의 외모.
귀 아래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과 엷은 입술만 보았을 때는 일견 여성스럽다거나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르지만,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나 곧게 뻗은 콧대, 판판한 뺨 등은 그러한 중성적 면모를 상쇄시키고 그의 얼굴을 남자답게 보이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게다가 눈썹 뼈 아래에 자리한 그늘, 그보다 더 짙은 색의 눈동자로 상대를 내려다보는 나른한 시선에는 태생적인 오만함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사진으로 볼 때도 느꼈지만, 잘생겼네. 자신 외의 타인에게 무관심하리만큼 감흥이 없는 민호였지만 그 역시 탄복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한 가지 더, 자신을 살피는 뉴트 오스본의 곁에서는 옅은 콜로뉴와도 같은 향이 풍겼다. 아마 그의 페로몬일 것이리라. 청량한 느낌을 주었지만 결코 같은 형질을 가진 알파의 페로몬이 달가울 리 없었다.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민호는 생각했다. 뭐야, 오메가가 되는 약을 먹었는데 왜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감을 느끼는 거지. 제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약을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은 분명 형질이 변해 있을 테니 이 정도 페로몬을 풍기는 알파에게 환장하고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님, 그냥 상대가 느끼는 페로몬만 오메가의 것처럼 느껴지고 근본적인 형질은 바뀌지 않은 건가. 실패작이라더니, 임상 실험은 거치고 자신에게 넘겨주었는지 의문이었다. 민호의 다부진 턱을 붙들고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몇 번을 돌려 보던 뉴트 오스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데려왔지?”
찌푸려진 미간과 불쾌감 서린 목소리. 옅게 짜증을 드러낸 얼굴을 보며 민호는 속으로 원망했다. 씨발 토미보이 얼간이 자식! 내가 나 같은 덩치는 안 먹힌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제 친구이자 동료의 안목을 탓하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컴컴한 시야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앞으로의 행보를 가늠했다. 처리가 힘들 테니 죽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좆같은 약물 같은 거 투여한 다음에 진짜 매춘 업소 같은 데 다시 팔아넘긴다든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손과 발이 자유로웠다면 이대로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지만 일단 그는 여간해선 풀리지 않을 족쇄에 손발이 구속되어 있었다. 게다가 허리춤이나 등 안쪽에 꽂고 다니는 두 자루의 콜트와 나이프 등을 가려 줄 옷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무장 해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오스본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나 참… 완전 겁먹었잖아. 이런 최상품 오메가를 이딴 식으로 취급하면 어떡해?”
…뭐?
눈을 뜨자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직원들을 책망하는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력을 지닌 오스본의 두어 마디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물쭈물하며 뭐라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만 감히 고용주의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이며 뒷짐을 진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오스본은 다시 시선을 거두고 민호를 보았다. 민호는 다시 고개를 내리깔고 불안한 표정으로 슬쩍 그의 눈길을 피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겁먹은 오메가로 보고 있다니 그렇게 굴어 줘야지. 얇은 브리프만 한 장 남겨두고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모조리 벗겨낸 채로 실려 온 몸의 이곳저곳을 훑어 내리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와 닿았다. 쯧. 혀를 차며 오스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조심히 다루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리고 뜻밖에도, 그는 입고 있던 수트의 겉옷을 벗어 민호의 등에 덮어 주었다. 삼천 달러는 거뜬히 넘길 제냐의 최고급 재킷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민호는 잠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정기 적금도 겨우 넣는 자신이 평생 이런 옷을 사 입을 기회가, 아니, 애초에 입을 일이 있기나 할까. 제법 큰 의뢰 건을 해결할 때마다 들어오는 사례금이 제법 되었지만 돈이란 것은 이상하게도 많이 들어오는 대로 또 많이 빠져나갔다. 각종 공과금과 자동차 할부 등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항목들을 제하고서도 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현실적인 고민을 떠올릴 정도로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그였지만, 오스본의 이러한 호의는 제 계산에도 없던 일이라 민호는 조금 당황했다.
“열쇠 가져와.”
그의 사용인 중 하나가 재빨리 열쇠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민호의 손목과 발목에 잠긴 족쇄를 직접 풀어 주었다. 챙강, 소리를 내며 구속의 기능을 상실한 쇠붙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벼워진 손발에는 땀에 절은 피부와 낡은 금속이 부닥쳐 검게 착색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따라 벌겋게 쓸리고 까진 살갗을 바라보는 오스본의 표정이 퍽 애처로운 색을 띄고 있었다.
“난 이런 주문을 한 적이 없는데… 예쁜 몸에 흉이 졌군.”
오스본은 두어 차례 민호의 몸을 어루만지듯 살피다, 다시 무릎을 펴고 길게 일어났다.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려는 듯 발걸음을 돌리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붙는 비서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명령했다.
“다친 곳 바로 케어 좀 해 줘. 그리고 지낼 방이랑 식사 준비해 주고. 아, 미스터 제이슨 전화 연결 좀 해. 대체 집으로 보낼 상품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 거야?”
그의 말투며 악센트는 단정하고 고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들의 주인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다시 계단 위로 사라지자, 오스본 가로 보내진 오메가에 감히 흠집이 난 것에 대해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 인해 뉴트 오스본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른 것에 대해- 두 명의 베타들은 서로의 책임을 전가했다. 저걸 아무렇게나 던져서 얼굴을 긁히게 한 건 너였어, 아니지, 먼저 손을 댄 건 너라고. 배를 발로 찼잖아! 게다가 저 오메가는 이미 제이슨이 넘겨줄 때부터 상태가 저 모양이었다고! 커다란 덩치들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수군수군 다투는 꼴이 가관이었다.
민호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바닥에 드러누운 자세로 시선만 조금 내린 채 도토리 키재기 같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설마 저런 덜 떨어진 것들이 오스본 가의 경호원들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여태껏 저 허술한 놈들의 경호를 받으며 두 형제의 가슴팍에 총알 한 방 박히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다. 이제 손발도 쓸 수 있는데 그냥 이대로 일어나서 저것들을 해치운 다음에 오스본 가의 경호원으로 취직하는 것은 어떨까?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오스본의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방을 내어 주겠다며 그를 일으켰다. 부축을 해 주려는 듯 보였지만 겁에 질린 오메가 놀음을 하느라 근질근질한 몸을 통 쓸 일이 없었던 민호는 홀가분해진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어렵지 않게 일어났다. 다시 한 번, 어깨 위로 걸쳐진 재킷의 온기가 온 몸에 달라붙는 서늘한 공기를 누그러들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옷감에 옅게 배어 있는 체향이 절로 옷의 주인을 떠오르게 했다. 비서의 뒷모습을 따라 잔뜩 더럽혀진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 위를 타박타박 걸으며 민호는 생각했다. 오메가를 물건 다루듯 여기니 신사답다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저거 생각보다 의외로…… 인간적인 성격이군.
이후 삼 층짜리 대저택의 수많은 빈 방들 중 제 몫의 공간을 얻고 오스본의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된 민호는 글레이드에서 미리 심어둔 수행원에게 주기적으로 약을 전달받으며 쭉 오메가 행세를 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보장되는 시대에 오메가 형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불법이었으나,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막대한 자본은 대중의 눈을 가리고 불법을 묵인해주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아무튼 그들의 세계에서 개별적으로 오메가를 거래한다는 것은 거의 십중팔구의 경우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제 영역에서 그들의 점잖지 못한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겉보기에 온전치 못한 상태로 오스본 가에 끌려온 제 껍데기가 다시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으면 뉴트 역시 자신에게 어떠한 성적 요구를 하는 게 아닐까, 팔뚝이며 얼굴에 즐비하던 상처가 하나씩 아물어 갈 때마다 그는 마음의 준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으나 이마에 찢어진 자국과 등허리에 들었던 시커먼 멍이 빠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민호가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확연한 윤곽은 드러나지 않는, 그런 어슴푸레한 시선으로 종종 자신을 바라볼 때도 있지만… 오스본의 그러한 행동은 섹스어필이라 이름 붙이기엔 지나치게 담백했다. 오히려 사람을 시켜 민호에게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억제제 같은 것을 살뜰히 챙겨 주며, 뉴트는 민호에게 경호의 목적으로 자신의 외부 스케줄에 동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호는 그 언젠가 저택에 처음 왔을 때 자신을 험하게 다뤄 뉴트에게 질책을 당했던 두 경호원을 기억해냈다. 위키드의 밑에서 온갖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 와서 말쑥하게 정장이나 차려입고 두 형제의 경호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결과론적으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아닌가. 어제 저녁 뉴트의 외출을 따라 나서다 정문에서 마주쳤던 두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며 민호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 오기 전의 기록을 좀 봤는데, 경호학과 재학 중이었다고. 맞나?’
모처럼 그가 회사에서 일찍 돌아온 날, 뉴트는 민호를 앉혀 두고 티타임을 가졌다. 밀크티를 마실 때 그는 철저한 MIF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비서들 중 한 명인 여직원이 스콘과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따로 가져다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능숙하게 서비스한 후 사라지는 여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민호는 문득, 주기적으로 오스본 가에 보내진다던 오메가들에 대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방금 두 사람의 앞으로 다녀간 여비서도, 이따금씩 마주치는 저택의 정원사도, 청소를 하는 메이드들도. 자신을 제외한 이 집의 사용인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오메가의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열성이지만 자신 역시 알파였으므로 오메가가 곁에 있다면 향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억제제를 잘 챙겨 먹는 것이거나, 혹은 그들 모두 베타이거나. 잘은 모르지만 오스본 가에 보내진 오메가들 중 꼭 자신만이 드물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을 해온 것은 꽤 예전부터였으나 이곳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집이었다. 이제 오스본의 사람이 된 그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의심을 사는 등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내가 그러했듯, 매달마다 이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으로 보내지는 그들은 대체 모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가느다란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한 모금을 음미한 후, 뉴트는 다시 찻잔을 받침 위에 올려 두었다. 옅은 캐러멜 색의 찻물이 일렁였다. 등받이에 상체를 깊게 파묻으며 느릿하게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그의 동작에는 기품과 여유가 묻어났다.
‘파트타임 일로도 해결되지 않는 등록금 때문에 돈을 빌렸고 말이야.’
‘…예.’
‘참 안타까운 일이야. 교육의 기회는 경제력에 관계없이 주어져야 하는 건데….’
세습된 재산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다소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으나, 어찌됐든 뉴트의 말은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펼치지 못한 민호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자신이 특별히 신경을 기울이겠단 얘기처럼 들렸다. 제가 알파이기에 해당되진 않는 이야기였지만, 민호는 만약 제가 정말로 오메가였다면 어떻게든 뉴트와 하룻밤을 보내 팔자를 역전해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 와서 윤리적 관념과 공명정대함을 내세우기에 그는 이미 너무나 손이 더럽혀진 인생을 살고 있었고 또한 자신은 기회 주의자였으니까.
아무튼 얌전하게 꼬리를 내리고 순종적인 오메가 역할을 자처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적진의 내부로 파고드는 동안, 민호는 자신 본연의 임무에도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회사 쪽이 아닌 오스본의 저택으로 접근을 택한 위키드 사의 예리한 계획은 완벽히 맞아 떨어졌다. 얼마간의 끈질긴 관찰 끝에 민호는 출시될 신약의 연구 데이터 원본이 담긴 저장 매체가 카드 키의 형태로 뉴트의 지갑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연, 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것이니 허투루 보관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금고도 아니고 락이 걸린 랩톱 속도 아니고 품에 넣고 다니는 지갑에 있는 걸 어떻게 빼내나. 그가 즐겨 마시는 커피에 수면제라도 타 넣어야 하는 걸까. 예상치 못한 정보에 난감해 하는 민호였지만, 신사적인 타깃을 만난 것으로 여태까지의 운을 모조리 써버린 것 같은 그에게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이번 주말, 썩 내키진 않았지만 꾸준히 만남을 가져 오던 인사들과의 비즈니스 미팅 겸 식사 자리에 함께 가자는 뉴트의 제안, 아니, 통보였다. 팔려오듯 그에게 귀속된 민호에게 어찌 뜻이 있겠는가. 여태껏 뉴트의 크고 작은 외부 스케줄에 대부분 함께 참석해왔던 그였기에 민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 되돌아오는 뉴트의 피드백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민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제 사무실 안을 활보했다.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발소리가 제 등 뒤에서 멎었다고 생각했을 때, 민호의 어깨에 손바닥을 얹은 뉴트가 다른 한 쪽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어깨를 진득하게 짓누르던 손에서 엄지만 뻗어 볼록한 목뼈가 느껴지는 뒷목을 가만히 쓸었다. 반대편 어깨 위로 고개를 붙이듯 내린 채, 뉴트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그을린 뺨과 귀밑머리 즈음으로 쏟아졌다.
“…근데 약속 장소가 어딘 줄 알아? B호텔. 꼭대기 층의 프레지덴셜 룸에서 보는 런던의 야경이 아주…… 눈부시게 황홀하지.”
열기 섞인 눈빛. 불에 데일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 온 몸을 관통했다. 젠장, 드디어 때가 왔구나. 민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제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동시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래. 절박하게 바라면 어떻게든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 수단이 썩 내키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식사는 메이페어에 위치한 B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뉴트 오스본의 이름을 대자 매니저는 메인 레스토랑의 가장 안 쪽, 귀빈을 접대할 때 이용되는 개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제안한 쪽의 사람들이 먼저 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트는 그럴싸하게 수트를 입힌 민호를 그들에게 인사시킨 후, 민호에게 제 맞은편에 앉아 함께 식사를 들 것을 권했다. 곧 일찍이 주문을 받아 둔 서버들이 끝도 없이 드나들며 요리를 가져다주었다.
뉴트의 차를 대신 몰고 호텔로 오는 길에, 민호는 뉴트에게 오늘 있을 식사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두 사람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은 현재 런던 내에서 많은 점포수로 가장 크게 이름이 알려진 드럭스토어 V사의 대표와 그 임원이었다. 벌써 몇 달째 V사의 대표가 뉴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얼굴 도장을 찍는 이유는 일종의 로비였는데, 현재 약국에서만 판매되고 있는 오스코프의 제품들을 자사의 드럭스토어에도 유통을 해 주십사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V사는 현재 런던에 대거 입점한 외래 브랜드로부터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스코프 사의 제품을 들이면 확실히 드럭스토어로서의 면모와 흔들렸던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유통망이 느는 것은 좋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오스코프의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래였다. 때문에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거의 일방적으로 V사의 직원들이 뉴트의 비위를 맞추는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매스컴에 보도된 오스코프 사의 좋은 점을 한껏 치켜세우고, 전대 회장과 현 경영진인 오스본 형제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속 보이는 멘트에 뉴트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적당히 겸손을 떨었다. 그러나 민호는 호텔에 당도하기 5분 전 차 안에서 태블릿 PC를 흥미 없이 뒤적이며 그가 남겼던 말을 기억했다.
‘다 쓸데없는 짓이야. 물론 실무를 담당하고 컨텍을 하는 건 나지만, 이렇게 입에 갖다 떠 먹여 봤자 결국 결재판에 서명을 하는 사람은 해리 오스본인걸.’
아주 간간히, 식기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사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개중에는 위키드 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좋지 않은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글레이드의 소속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위키드 사는 그저 그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해주는 모기업에 불과했다. 게다가 위키드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 거의 그들의 대화는 민호가 통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프로모션이, ‘그’ 기획서가…… 죄다 꽤 예전부터 의논을 나눠 와 진행이 된 이야기들 같았다. 머리가 좋은 토마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처럼 적당히 웃으며, 이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역시 자신의 포지션은 뉴트 오스본의 동정을 받아 그가 데리고 다니는 경호원일 뿐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윗대가리들의 대화 대신 민호는 서버가 가져다주는 음식에 집중했다. 플레이트의 반에 반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고기 조각을 잘라서 입에 넣자 간장에 졸인 것인지 식감이 부드러운 양고기의 풍미가 입 안으로 퍼졌다. 민호는 감탄했다. 와 진짜…. 혀에 닿자 녹는 것 같은 맛에 절로 눈이 감겼다. 물론 오스본 가에 온 이후로 삼시세끼 줄곧 고급스러운 식단을 받아 왔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사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호텔로 와 테이블에 앉기 전까지 줄곧, 그는 이 식사자리 이후 벌어질 끔찍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곧 호텔의 꼭대기에 있는 고급 객실에서 뉴트 오스본과 자신은 헐벗은 몸으로 뒹굴게 될 것이다. 비록 만나고 있는 애인은 없었지만 어찌 됐든 자신은 알파였으며 또한 스트레이트였다. 아무리 크고 중요한, 천문학적 단위의 영업 이익이 달린 임무라 해도 의뢰 때문에 뒷구멍을 내 줘야 한다니! 충분히 걱정이 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게이 섹스를 할 때는 속을 비워야 한다고 하던데, 아니 그냥 어떻게 펠라티오 같은 걸로 몇 발 빼고 어영부영 끝내버리는 수는… 아 씨발 진짜 의뢰 때문에 이 나이 먹고 같은 알파의 거시기나 빨고 있어야겠냐고! 이렇듯 잔뜩 예민해져 운전대를 잡고 호텔로 오는 내내 걱정이 태산 같았던 그였지만 그런 고민들을 잠시 잊게 해줄 정도로 음식의 맛은 출중했던 것이다.
이건 인간적으로 존나 맛있다. 민호는 뺨을 우물거리며 의욕적으로 음식을 삼켰다. …아, 어쩌면 지금 앞에 진열된 이것들이 가엾은 오메가 생활을 청산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먹는 최후의 만찬이라 더 더욱 맛이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군.
그랬다. 보고를 받은 위키드 쪽에서도 이제 슬슬 마지막 단계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을 지시했고, 그에 따라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거친 그는 제 발로 기회가 굴러 들어온 오늘을 거사일로 정했다. 식사 자리가 끝나면 자신은 뉴트 오스본과 함께 호텔 룸으로 올라가 어떻게든…… 일을 치루고, 결벽적인 구석이 있는 그가 정사 후 몸을 씻으러 자리를 비운 찰나의 순간에 지갑 안의 카드 키를 바꿔치기 한 후 확보해놓은 도주로로 유유히 도망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들도 이미 다 생각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 글레이드의 사무실로 돌아가 무사히 임무가 끝나면, 제법 큰 액수의 사례금과 함께 한국이든 보라카이든 길고 긴 휴가를 떠나는 거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민호는 약 한달 간 오스본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을 반추했다. 그래, 결론적으로 이곳의 생활은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처음이 약간, 아니 좀 많이 문제였지만…… 목을 내어놓고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글레이드 사무실에 있을 때에 비해 오스본의 뒤나 쫓아다니고, 가끔 그가 피로를 호소하면 운전대나 대신 잡아주는 근무 환경은 얼마나 평온했단 말인가. 다소 가학적인 면모가 있진 않을까, 성적인 수치를 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던 타깃 또한 의외로 얌전한 편이었고. 사실 생각해보면 라이벌 회사의 기술력을 몰래 빼오는 짓을 저지른 것은 위키드 사가 먼저 자행한 일이다. 제가 조금만 더 책임감이 낮고, 동료들과의 유대가 두텁지 못한 성격이었다면 벌써 이쪽에 붙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그러한 민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낯설고 생경한 감각이 그의 구두 위에 와 닿았다.
처음엔 그저 실수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종종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 -그것도 장정 둘- 의 무릎이나 신발 코가 부딪히는 일 정도는 식사를 하다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우연한 접촉이 반복되고, 마침내 미미한 온기를 품은 발끝이 바짓단 아래를 파고들어 발목에 진득하게 올라앉은 것을 인지했을 때 민호는 헛숨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곧게 뻗은 발끝은 복사뼈를 매만지고 발목과 종아리를 거쳐 얇은 옷감 위를 일직선으로 느릿하게 타고 올랐다. 그리고 동그란 무릎 위를 구두 벗은 발의 옴폭한 발바닥으로 잠시 머금는가 싶더니, 곧 다시 빳빳하게 세워 무릎을 지나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치 한 마리의 탐욕스런 뱀처럼, 그의 하체를 감아 올라온 발은 끝내 민호의 앞섶을 지분거렸다.
테이블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은밀한 행위에 놀란 민호는 맞은편에 앉은 제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당황한 그의 얼굴과는 달리 뉴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옆 자리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잘라내면서, 테이블 아래의 발은 음란하게 자신의 깊은 곳을 더듬고 있다. 마치 그 모습이 수면 아래의 부산스러움과 수면 위에서의 고고함, 동전의 양면같은 모습을 지닌 백조와 비슷하다 여길지 모르겠으나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뱀 같았다. 발 없이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며, 아주 천천히, 독을 머금은 혓바닥으로 먹잇감을 휘감고 단번에 먹어 치우는 요악함.
이걸 발로 차 버릴 수도 없고 의자를 뒤로 뺄 수도 없고. 무력해진 민호는 연신 물만 들이켰다. 아 씨발, 딴 생각 하자, 딴 생각. 필사적으로 온 몸의 감각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려 노력했으나 혈기 왕성한 몸은 본능에 충실했다. 부드러운 발바닥에 문질러지고 있는 제 앞섶은 열기를 얻어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물컵을 든 손 끝에 피가 몰리고 눈썹이 움찔거렸다. 달아오른 얼굴에서는 이제 땀마저 맺히는 것 같았다. 입술 끝으로 유리잔을 잘근대던 민호는 목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 제발, 제발. 그러나 쾌감이 점점 커지고, 속옷 안에 갇힌 살덩이가 갑갑함을 동반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을 때, 민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컵을 테이블보 위에 올려 두었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빠르게 얼굴을 훔쳤다. 손바닥 안에는 축축한 땀이 배어 있었다. 힘겹게 입술을 떼어 소리를 내었다.
“저….”
순간 하체를 희롱하던 감각이 사라졌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던 V사의 사람들과 뉴트, 여섯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자신을 향했다. 민호는 자신의 웃음이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바라며 입 꼬리를 당기고, 왼쪽 안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급한 전화가 와서… 잠시 받고 오겠습니다.”
식사자리에서 이 무슨. V사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뉴트만이 태연하게 “아, 내가 우리 경호 실장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좀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라며 그를 변호했다. 그것은 아마 전화기도 없는 주제에, 소유한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인 남자가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하며 향할 행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죄송합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호는 차분하게 와인 잔을 들이키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투명한 글라스 위로 드러나 시선이 마주친 눈가가 묘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변기 물을 내리고 화장실 칸을 나서는 민호의 얼굴엔 짙은 짜증이 서려 있었다. 쾅,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힌 탓에 벽에 부딪힌 문이 내는 둔탁한 소리를 들으며 그는 수도꼭지의 레버를 올려 손을 씻었다. 재빠른 뒤처리를 하는 동안 질끈 깨물어 부풀은 입술 새로 소리 없는 욕이 흘러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사출한 욕망의 잔재들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며, 민호는 처음 오스본의 저택에 도착했던 날 자신이 뉴트에게 받았던 긍정적인 첫인상 또한 이 물살에 휩쓸려 함께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크나큰 실수이며 착각이었다. 썩 괜찮았다고? 인간적이라고? 공공장소에서의 뻔뻔한 성추행, 그리고 그 짓거리에 당황하는 반응을 즐기는 변태스러운 성향과 관음증 증세. 욕망에 충실한 짓을 해 놓고서 꼴에 알파라고 허리 위로는 고상한 척 칼질을 하다니, 시발. 그 집에서 제일 미친놈은 다름 아닌 그 자식이잖아?
그래, 생각해 보면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도 있다고. 왜 이렇게 함부로 다루었냐고 점잖은 척 했지만 매달 업소에서 오메가를 홀딱 벗겨가지고 족쇄를 채워서 보냈던 건 애초부터 다 그 새끼가 그런 걸 즐기는 취향이었기 때문이겠지. 마치 밀물이 밀려 들어와 습윤했던 땅 위를 점차 채워나가듯,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금 간 자존심과 약간의 수치심 따위로 켜켜이 쌓여 가는 짜증이 딱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넘실거린다. 금욕적인 척 굴었던 방금 전의 그 얼굴을 재차 떠올리자 민호는 정말로 그 잘난 낯짝을 때려눕히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세히 보면 그거 형질만 우성 알파지, 피죽도 못 얻어먹은 새끼처럼 얼굴도 허여멀건하고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그냥 호텔 방 올라가자마자 그대로 콱 죽여 버리고 그대로 데이터를 훔쳐서 달아나 버릴까보다. 이를 갈고 미간을 모으며 드라이기에 손을 비비는 민호의 귓가에 낯익은 신호음이 들렸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지직거리던 소음은 점차 또렷해져 음성의 형태가 되었다. 토마스였다.
「민호, 민호!」
조금 다급한 듯 들리는 목소리에 민호는 고개를 들고 거울 너머로 비친 화장실을 빠르게 한 번 훑었다. 그리고 한 칸 한 칸, 엿듣는 귀가 없는지 직접 확인한 후에 귀에 착용한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뭐야, 왜 그래?
「혹시 오늘 제이콥 만난 적 있어?」
“그건 왜?”
「일이 틀어진 것 같아. 오후부터 수신이 아예 끊겨서 신호가 가질 않아.」
“…뭐?”
「신변에 문제가 생겼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무튼 오스본에게 보고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얼른 거기서 빠져 나와. 당장!」
아직 나른한 감각이 남아 있는 전신에 짧은 소름이 끼쳤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 건물 구조상 화장실이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복도를 통해 도망친다면 들킬 게 뻔했다. 민호는 잔뜩 커진 동공으로 넓은 화장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씨발, 침착해. 침착하라고. 마른 침을 삼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던 그의 눈에 띄인 것은 환풍기 옆에 뚫린 창문이었다. 높이가 제법 높지만 세면대를 딛고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방금 전에 한 발 뺀 탓일까,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나른해지는 몸뚱이에 완벽하게 마른 손으로 뺨을 짝 치며 민호는 구둣발로 대리석 세면대를 밟았다. 이제 마저 올라가 무릎으로 창틀을 딛고 탈출하면 된다.
상냥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붙잡은 것은 그 때였다.
“30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려고?”
흠칫, 단정하게 올린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민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뉴트 오스본이 여유롭게 화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세면대에 올리고 막 체중을 실었던 다리를 지면 위로 내린 채,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 그를 떨리는 동공 안에 담았다.
“위키드의 개새끼들은 머리도 좋지. 알파에게 약을 먹여 오메가로 속일 생각을 하다니.”
“…….”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어. 아주 중요한 거야. 뭔 줄 알아?”
훈련을 시키다 만 사냥개는 본래의 주인이 있어도 먹이를 더 주는 이가 나타나면 입에 문 토끼를 내려놓고 새 주인에게 등을 돌린다는 사실.
훈련을 시킬 거면 좀 더, 완벽하게 길들였어야지.
분명 입술 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의 눈매는 차가우리만큼 무표정했다. 적막이 흐르는 화장실 안으로 묵직한 시계 추 같은 발소리가 울리고, 그가 한 발짝, 또 한 발짝 거리를 좁혀 올수록 민호는 한 발짝, 또 한 발짝 뒤로 밀려났다. 총 한 자루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그의 태도는 그 어느 무기보다 위협적이었다. 번들거리는 눈빛, 공기 중에 섞이는 고저 없는 목소리. 그를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예리한 흉기가 되어 자신의 목 바로 아래를 겨누고 있었다.
여태껏 느껴본 적 없던 공포가 민호의 발목에서부터 서서히 기어 올라와 그를 잠식한다. 기운에 눌려 뒷걸음질 치던 그의 등에 차가운 타일 벽이 닿았다. 이제 한계다. 벼랑 끝에 내몰린 감각. 도망칠 수 없다. 절망감과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뉴트를 보고 있던 민호는 점점 나른해지는 감각이 제 몸을 먹어치우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다. 힘겹게 고개를 내려 손을 펼치자 손끝에 피가 저릿저릿 몰린 것이 보였다. …뭐, 왜, 왜 이러지. 그는 머리를 흔들며 동공에 힘을 주었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는 그를 보며 뉴트는 입과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흥미로움에서 기인한 보조개가 짙게 파였다.
“…오, 이제 약효가 도는 모양이지?”
“……!”
“제이콥의 활약이 컸어.”
그제야 민호는 오늘 뉴트를 따라 나서기 전 은밀하게 제이콥과 접선했을 때 그가 건네준 약이 매번 제공하던 약과 조금 달랐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 이제 중간 중간 몇 피스가 빠진 퍼즐처럼 어색하던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완벽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위키드의 사냥개와 새로운 그의 주인, 분명 오메가로 형질이 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까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이콥이 제게 전해준 약은 위키드의 실패작이었다는 오메가 형질 변형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삼킨 약은 지금까지의 증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근육 이완제이거나, 신경 안정제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강력한 효과가 있는 어떤 것. 즉각적인 플라시보 효과인지, 그것을 깨닫고 나자 더욱 더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이 멍해졌다. 탁해진 동공을 게슴츠레 내리깔고, 민호는 탈력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굳건하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 새끼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파라는 것도, 끌려 온 오메가처럼 집 안을 파고든 의도도.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뒤로 당겨 최대한 벽과 붙어 보려 했지만 다가오는 그에게서 멀어지기는 역부족이었다. 뉴트는 몸을 굽혀 민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힘없이 늘어지는 다리 사이로 들어가 한 쪽 무릎을 땅에 내리고, 의식이 흐려지는 그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민호? 민호!」
통신기 속 그를 애타게 부르는 동료의 외침은 구둣발에 밟혀 으스러졌다. 초점 잡히지 않는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으며 그는 묘한 온도를 품은 눈동자 한 쌍이 채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 속에 비쳐진 제 모습이, 마치 수렁과도 같은 덫에 빠져든 사냥감 같았다.
“뭐, 나에 대해서 나름 철저하게 조사를 한 것 같은데 하나 틀린 게 있어. 나는 그까짓 페로몬과 본능에 못 이겨 헐떡대는 오메가들보다는….”
매끄러운 넥타이를 만지작대던 뉴트는 확, 그것을 잡아 당겼다. 컥. 옥죄는 감각에 숨을 토해내며 민호는 그대로 그의 악력에 이끌렸다. 안개 낀 듯 흐려지는 시야에 암전이 찾아오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화려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알파를 발밑에 깔아 그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을 짓밟는 걸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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