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로미오와 로미오 2/2
a 2015. 9. 26. 02:12 |1. 고 퀄리티 매거진 월간뉴민 8월호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저 빼고 모두 고 퀄리티! 존잘밭!
2. 원고하는 내내 느꼈던 교훈: 자신없는 장르는 소비만 하도록 하자
3-2.
점심 시간대를 넘긴 오후의 길거리는 한산했다. 꼭대기에 기업 로고를 큼지막하게 단 회사 건물들로 둘러싸인 동네라 더 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어 커피를 사러 나온 회사원들과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동양인 관광객들만이 뜨겁게 달궈진 보도블록 위를 메웠다. 자신들의 일상 속에 머무르며 일탈을 찾는 그들을 눈으로 쫓다가 팔월의 불볕에도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풀어헤친 어느 아가씨의 목덜미에서 더위를 느낀 민호는 가장 가까운 카페의 노천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근처 테이블에서는 근처 사옥의 경비로 보이는 남자가 때늦은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런 파라솔로 캘리포니아의 살인적인 일광을 가리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알지만 당장 머리 위에 그늘막이 지니 녹아내릴 것 같던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것 같았다.
어제는 아주 오래간만에 형에게 연락이 왔다. 거기 폭염 장난 아니라던데 버틸 만해? 여기야 항상 그래왔지 새삼스레 뭘. 어린 애들도 아는 사실을 서두로 말문을 여는 걸 보니 몇 달 만의 통화가 어지간히도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10년 전쯤에는 지금보다 더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마치 매일 아침에 보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어색함이나 스스럼없이 전화를 했는데, 어른이 되니 점점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꼭 어디 못 할 데에 전화 건 사람처럼 자꾸만 쓸데없는 핑계를 앞에다 자꾸만 붙이고, 붙이고, 붙이고.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뻔한 이유를 들어 전화 하는 것도, 제겐 씨알도 안 먹힐 걸 알면서도 자꾸만 힘들면 고향으로 내려오란 말을 되풀이 하는 것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제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실은 모두 하나뿐인 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향 땅을 떠나올 때도 민호는 결코 아버지나 두 형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린 적이 없었다. 그냥 그는 센티넬의 능력이 감퇴되었다고 삶의 이유를 잃은 것처럼 방황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거였다. 애초부터 그 능력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데 자신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그 능력이 없었다면 생존도 못했을 나약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그걸 이겨내고 싶었다. 텍사스를 떠나온 건 보다 확실한 동기부여를 위해서였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주체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차에 인기척과 함께 옅은 향수 냄새가 와 닿았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시트러스 향이었다. 고개를 들자 마른 체구의 종업원이 영업용 스마일을 그리며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허리에 두른 유니폼 위로 포개어진 손을 보던 민호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친절하게 응대하는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애초부터 자신은 이 테이블에서 잠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할 생각이었다. “이거 제가 시킨 거 아닌데. 그리고 전 이따가 일행 오면 주문할게요.” 자리를 잘못 찾았음을 알리고 테이블을 비워놓기 적당한 구색을 고르자 그녀는 갸웃거리며 어느 한 쪽을 가리켰다. 저 분이 여기로 주문하셨는데….
공손한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기도 전에 빠앙-! 정적을 찢는 클락션 소리에 카페에 앉아 있던 손님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비상등을 켠 페라리가 인도 옆 갓길에 몸을 바짝 붙인 채로 서 있었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채도 높은 빨강으로 날렵하게 빠진 차체가 인상적이었다.
Shock is all in your head! Your sex and your dope is all that were fed!
저거 인근소란 죄로 처벌 될 텐데. 한적한 오후의 도심에 울려 퍼지는 난잡한 가사에 인상을 찡그린 민호가 저거 어디서 많이 본 차 같은데, 데자뷰를 느낄 때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하얀 발을 감싼 버켄스탁이 튀어나왔다.
“일행 왔잖아.”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그래피티 프린팅이 그려진 티셔츠와 사정없이 찢어진 데미지 진. 마릴린 맨슨을 어설프게 따라하다 만 10대 같은 모양새였지만 얼굴이 곧 모든 차림새의 완성이라고, 흡사 유니온 제이의 새 멤버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모의 그가 입으니 난해한 옷도 그런대로 봐줄만한 패션이 되었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차의 주인이 내림과 동시에 옆 테이블에서 불만 어린 시선을 주고받던 아가씨들은 입을 뾰족하게 모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도 세모꼴로 치켜뜨던 눈매는 오간 데 없었다.
“뭐, 드디어 나랑 데이트 할 마음이 생긴 거야?”
고개를 숙여 민호가 앉은 파라솔 안으로 들어온 뉴트는 자연스럽게 커피를 집어 들고 빨대를 물었다. 그제야 민호는 직원이 제게 가져다준 음료가 두 잔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강렬한 등장에, 젊은 남자 둘 사이에서 나오기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할 단어들이 오가자 자신들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좀 더 짙어졌다. 결국 민망함을 느끼며 민호는 고개를 숙였다. …제발 좀 평범하게 나타날 수 없냐.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별 기대 없이 시킨 게 의외로 입에 맞았던 모양인지 한 모금을 빨던 뉴트는 선글라스를 반 내리고 종이 홀더의 로고를 확인하며 의자를 빼어 앉았다.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상반신을 드러눕듯 젖히며 커피를 마시는 얼굴에서는 태생적으로 배어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미소 띤 저 얼굴 뒤에 정말로 괴수를 만들어 낸 잔인함이 있을까?
“요즘 뉴스에서 떠드는 거, 너랑 관련 없는 거지?”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바로 돌직구였다. 가타부타 설명도 않고 던진 민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뉴트는 이내 아…, 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빙그레 웃었다. 분명 제 의도를 깨달은 모양새였다. 선글라스 아래로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 이마 근육을 좁히며, 민호는 뉴트의 다음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민호 네가 과격한 거 좋다며?”
“미친! 진짜 너야?”
“하하…농담이지. 나일까봐 걱정했구나, 민호?”
“뭔 개소리야.”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의 부정을 듣고 나니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걱정은 무슨, 그냥 내 직감이 얼마만큼 잘 들어맞나 시험해 본 거지. 괜스레 눈앞의 컵이나 흔들며 녹아내리는 얼음들을 지켜보던 민호는 으레 따라붙어야 할 대꾸가 없자 고개를 올렸다. 입술 끝에 빨대를 걸치고 있던 뉴트의 시선이 제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콧대가 시작되는 미간 아래가 옴폭하게 패이고 무언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약사시의 눈매가 답지 않게 서늘했다. 뭐야? 등받이에 한쪽 팔꿈치를 걸치고 뒤를 돌아본 민호는 예상 밖의 풍경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의 등 뒤에는 놀랍게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얼굴에 점이 몇 개인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면식이 있는 사이인 그들은 PMC와의 공동 수사 사건이 생길 때마다 머리를 맞대는 S시의 경찰이었다. 사이렌 소리를 끈 경광등이 요란하게 빛나며 주변의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장 가운데에 서 있고 키가 큰 남자는 수사국의 국장 프레드였다. 그는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뉴트에게 경찰 배지를 보여 주었다. 알아서 협조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뉴트는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두 무릎을 포갠 채로, 경찰이 내게 무슨 볼일이냐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프레드를 올려다보았다.
“뉴트 오스본 씨, 괴수 살인 사건에 관련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
“서에 가서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너 범인 아니라며?! 짤막한 눈썹까지 치켜 올려가며 손짓 발짓으로 눈치를 주는 민호에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뉴트는 순순히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플라스틱 컵 옆에 벗어 둔 선글라스를 티셔츠의 목 부근에 꽂고 담담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민호는 당황했다. 이 많은 인원들이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의문이었다.
일말의 부정이나 자기변호도 없이 체념한 태도로 청바지에 손을 꽂는 그의 좌우로 연행하듯 남자 둘이 따라붙었다. 아직 본인의 입으로 밝힌 것 하나 없거늘 꼭 현행범을 체포해가는 태도였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묘하게 말이 없어진 뉴트와 제복 차림의 남자들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설명해줄 것을 바라는 민호에게 프레드의 시선이 닿았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감사의 손길이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민호 씨. 덕분에 우리가 무척 편했어요.”
“예?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현장에서의 활약이 뛰어난 거야 두 말 할 것 없이 잘 알지만 이런 면에서도 눈치가 빠를 줄이야.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그 쪽 사무실에는 언질조차 준 적이 없는데.”
“…지금 저를 미행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오늘은 제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낸 휴가였고 이런 식으로 뒤를 밟는 건 분명 규정위반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민호를 향한 주변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흩어졌다. 민호는 그제야 뉴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분명 입술은 웃고 있지만 눈은 차가웠다. 정말로, 그가 뭐라고 생각을 하든 간에 이건 다 오해였다. 그를 의도적으로 유인해 경찰 조사에 임하게 할 계획 따윈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뉴트를 개인적으로 불러내어 얘기를 하려던 것 뿐이었고, 예상대로 뉴트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 말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떳떳한 인생을 살고 있는 그이기에 저 역시 뉴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민호 씨의 도움으로 쉽게 데리고 갈 수 있었다고 꼭 전하겠습니다.”
가시죠. 프레드의 고갯짓과 함께 뉴트는 경찰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지할 수 있는 권한 따위, 제게는 없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 복잡한 이마를 매만지며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는 민호를 툭, 떠밀듯 남자 두 명이 스쳐 지나가고, 그 뒤를 얌전한 태도로 조용히 따르던 뉴트가 별안간 민호의 옆을 지나다 말고 작게 속삭였다. 가라앉은 톤의 목소리가 마치 포자처럼 귓가의 솜털을 간질였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용하는 것만큼 비겁한 일은 없어, 민호.”
웃고 있었지만, 분명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자신에게 한 마디를 남긴, 그 짧은 찰나에서 민호는 뉴트의 상처를 발견했다. 뒤늦게나마 저는 이 상황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억울함을 피력하려 했지만 이미 모든 일행들이 연달아 도착한 차량 속으로 몸을 실은 후였다. 뉴트와 프레드의 직원들을 태운 경찰차가 도로 끝으로 사라지자 잠시 소란스러운 해프닝이 있었던 노천 테라스에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이 찾아들었다. 급물살에 휩쓸린 민호는 천천히 주저앉듯 몸을 내려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테이블에는 갈증에 깔끔하게 비워진 제 몫의 컵과, 내용물이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또 다른 컵 한 잔만이 남아 있었다.
벤, 그리고 에이바와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데이트라 이름 붙일 수도 있었던 둘의 식사자리에 제가 불청객처럼 낀 거였지만. 구내식당을 오가던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셋의 조합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민호는 식사 내내 어색하게 웃으며 뻣뻣한 수저질을 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그녀에게 먼저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온 절호의 찬스였는데 금쪽같은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린 동료를 보며 그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잘 해보고 싶다고 노래 부를 땐 언제고 정작 둘이 만날 상황이 되니 쑥스러웠던 모양이지? …뭐 어찌됐든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 같진 않지만. 다이어트를 한다며 스시 위의 생선만 홀랑 빼먹고 밥은 모조리 남겨둔 새침한 인상의 그녀를 보며 민호는 직감했다. 이 아가씨는 벤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 동료는 잘 먹고 잘 웃고 잘 말하는 수더분한 사람을 좋아했다. 자신이 50점짜리 남자라면 그녀 또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똑같이 50점인 그런 여자를.
불편한 점심 식사에 불편한 커피까지 마시고 더 이상 물도 음식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빵빵해진 배를 문지르며 민호는 사무실 의자에 드러눕듯 앉았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 타일의 무늬 수나 헤아리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활개를 치던 놈들이 단체로 여름휴가라도 간 모양인지, 들어오는 신고도 출동도 줄어들어 정말이지 살 것 같은 요즘이었다. 휴가라기보다는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을 즐겨야지. 부디 앞으로도 쭉 이렇게 별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쉬는 건 좋았지만 긴 휴식은 좋지 않은 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남아도는 잉여시간에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들을 늘어놓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결국 뉴트 오스본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이후 민호는 예전보다 곱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매일 가볍고 장난스러운 일면만 보여주던 그에게서 발견한 진중하고 상처받은 눈빛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증거도 갖추지 않은 채 그를 잡아들였다며 오스본 가의 법률 팀에서는 소송을 걸겠다고 날뛰었지만, 사건의 진범이 뉴트 오스본이라는 경찰 쪽의 주장은 굳건했다. 어쩌면 이 골치 아픈 사건을 더 파헤치지 않고 얼른 수사를 종결짓고 싶어 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망가진 괴수의 사체에서 나온 부품이 오스코프 사의 제품이라는 사실 외에 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경찰 쪽과 PMC 양쪽에서 회의를 거듭하고 하루에 몇 번이나 공문이 오가는 이 상황에서도 민호는 자꾸만 그 날의 뉴트를 회상했다. 기대를 보상받지 못한 얼굴. 딱 그 모양새였다. 섭섭하고, 억울하고, 유감스러운 감정들이 뒤엉킨 그 표정은 잊을만하면 떠올라 민호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물론 자신이 그의 모든 면을 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로 그날 내가 자기를 의도적으로 불러낸 거라 오해하고 있으면 어쩌지?
생각들은 마치 널뛰듯 극과 극을 오갔다. 그가 제게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어차피 이대로 내 앞에 나타나 귀찮게 하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편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화가 죄책감을 가지려는 자신을 변호했다. 왜 기대를 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고 애초에 좋은 사이가 될 수 없는데. 네 결백을 믿어주는 건 내 자유 아냐?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되는 혼란 속에서 민호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헤매었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짓이기며 민호는 까맣게 죽어 있던 휴대폰 화면을 켰다. 잠금을 해제한 화면을 몇 번 밀고 텍스트 메시지의 수신함을 열었다. 작아지는 스크롤과 함께 아직 읽지 않은 광고며 피트니스 센터의 등록 기간 만료, 카드 사용 내역 등을 알리는 목록들을 지나쳤다. 한참 아래에 위치한 이름을 누르자 둘 중 한 쪽이 보낸 메시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대화창이 떴다. 그렇게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차를 타고 사라진 그 날 이후로 뉴트는 정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평소처럼 시덥잖은 농담을 하는 메시지나 전화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특별히 이렇다 할 말썽으로 사고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만나자고?」
「진짜로 보는 거야?」
「그래, 이럴 줄 알았어. 민호 너도 결국 나한테 마음이 생긴 거지.」
「근사한 거 먹으러 가자.」
텍스트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들떠 보이는 그 날의 메시지들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든 민호는 괜스레 화면을 톡, 톡, 건드렸다. 이거 뭔가 자꾸 손이 가는 어린 애 같기도 하고. 이게 진짜 벤이 말하던 미운 정인가? 가만히 생각하며 구르던 눈동자가 내선전화 아래에 깔려 있는 수배지—정확히 말하자면 뉴트의 얼굴에 닿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민호는 입술을 감쳐물며 종이를 홱 뒤집어엎었다. 도대체가 눈에 안 띄는 데가 없구만. 이러니 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만 보면 연인도 이 정도로 하루 종일 오매불망 상대를 생각하진 않을 텐데.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늦잠을 자 왁스 바르지 않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던 그는 문득, 또 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기억에 머리칼을 들쑤시던 손놀림을 천천히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이 매번 좋아한다느니 만나자느니 했던 그 말들은 다 뭐였을까. …놀려먹기 좋은 저를 겨냥한 장난이었을까? 하지만 종종, 사람의 눈빛이나 표정은 말보다 더 솔직한 뜻을 전하는 법이었다. 그래. 적어도 그가 그렇게 가버린 날,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말했던 그 때의 그 표정만은….
진짜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고? 대체 왜?
생각해야 할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민호는 머리칼을 못 살게 굴던 손바닥을 힘없이 미끄러뜨려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4.
사건과 사고는 늘 언제나 그렇듯,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연속에 모두가 주의를 돌린 사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마치 영화처럼.
우측 하단의 시계를 확인한 민호는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쪽 손으로 주무르듯 꾹 누르고 빙글빙글 돌린 어깨도, 좌우 한 번씩 고개를 꺾어 잠든 근육을 깨운 목도 당기는 곳 없이 쾌적했다. 잠을 잘못 잔 탓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뻐근하던 곳이 이제 나은 모양이었다. 이른 시간에 맞춰 둔 알람을 듣고 단번에 일어난 것도 아마 컨디션이 정상적인 궤도를 되찾았기 때문일 테지.
현장 출동 때 갖는 작전 회의를 제외하고 무언가 머리를 굴려 의논을 하는 역할은 죄 알비의 몫이었으므로, 아침 회의가 없는 그에게는 약 삼십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무거운 짐이 얹힌 것처럼 결렸던 어깨도 나은 것 같으니 아침엔 사격 연습을 할까, 생각하는 민호였다. 조준선을 정렬하고 숨을 죽인 채 눈앞의 과녁을 맞히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잡념은 어느새 사라지곤 했다. 요즘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잡념을 떨쳐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 아침부터 가볍게 몸을 풀어두면 일도 훨씬 능률이 오르겠지. 서랍을 당겨 직원증을 챙기며 민호는 사무실 밖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대원들의 훈련을 위한 사격장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까 주차하면서 사격장을 관리하는 헤이든의 차가 들어와 있는 걸 봤으니까, 한 이십분 쯤 연습을 하다가, 간단하게 씻고 올라오면 딱 아홉시가 될 것 같은데. 설령 조금 늦어진다고 해도, 뭐. 설마 그 때까지 별일이야 있겠어?
때마침 민호가 있는 층으로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는 안내 음과 동시에 숫자 위에 들어와 있던 불이 꺼졌다. 승강기의 문이 갈라지고 민호는 옆으로 비켜섰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캐주얼한 차림으로 출근한 동료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모두 이번 층에서 내려야 할 얼굴이었다. 어쩐지 묘한 인상을 쓰고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치자 민호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웃음 지었다. 안녕 갤리, 좋은 아침.
“안녕할 때가 아냐 지금!”
“어?”
망할, 뉴스도 안 보냐 너는?! 윽박지르는 갤리에 의해 강제로 어깨 돌려진 민호는 그대로 제가 나왔던 사무실 앞까지 떠밀려 갔다. 뭐, 뭐! 왜 이러는데!! 서두르는 건 갤리 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뭘 본 것인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동료들 모두가 다급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치며 의아한 얼굴로 문가를 돌아보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누가 빨리 TV좀 켜봐!
「……이후의 뉴스는 속보가 끝난 후에 방송됩니다. 시청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남자 앵커의 엔딩 멘트와 함께 한창 방영 중이어야 할 아침 뉴스가 종료되고, 화면이 바뀌며 모니터 하단에 크고 굵은 글씨가 떴다. 실로 눈을 의심케 할 소식이었다.「뉴트 오스본 씨 납치」
뭐야 저거? 잔뜩 당황한 얼굴로 묻자 갤리는 대답 대신 링크를 띄운 휴대폰을 내밀었다. 커질 대로 커진 눈이 기사를 빠르게 훑었다.
이번 괴수 살인 사건의 배후라고 자신들의 정체를 밝힌 ‘WCKD’ 라는 테러 단체가 지난 X일 뉴트 오스본을 납치해 갔고, 그를 인질로 잡은 채 유투브 채널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오스본 가에- 전달하겠다고 통보했다. 기사의 내용을 축약하자면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 새끼들 뭐하는 놈들인데?! 민호가 고개를 쳐듦과 동시에 빠르게 소식을 전하던 앵커의 모습에서 신호가 바뀌었다. 치지직, 잠깐의 노이즈 후 폐공장이나 쓰지 않는 창고 따위를 비추고 있는 화면이 출력되었다. 시멘트를 치덕치덕 덧바른 회색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과 그래피티들이 그려져 있었고, 바닥엔 오래 된 먼지와 주인을 잃은 거미줄들이 한데 엉겨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저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폐공장이 몇 군데나 될까, 제가 이전에 가본 곳들을 머릿속으로 꼽아 보는 민호였지만 이런 대도시에서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잠시 후 카메라에 담긴 것은 캠의 조정을 마친 후 뒤로 물러서는 남자였다. 남자를 포함해 신원을 알 수 없도록 까만 복면을 쓴 그들의 일행은 총 세 사람이었고, 그중 AK47을 맨 두 명의 사이에는 의자에 묶인 남자 하나가 눈이 가려진 채로 앉아 있었다. 코의 끝자락까지 덮는 널찍한 안대를 써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목구비의 반절을 가렸다고 해서 지겹도록 보던 얼굴을 어찌 못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마른 체구에 더티 블론드를 가진 남자는 누가 봐도 뉴트였다. 민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그의 뛰어난 감이 알려주었다. 이건 장난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자신들의 ‘물건’ 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데 쓰일 1억 달러와 그에 상응하는 오스코프 사의 산업 기밀을 넘기는 것. 조건의 내용 중 그들이 말한 ‘물건’ 의 정체에 대해 모두가 마약이라도 만드는 건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TV를 주시하고 있던 대원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야, 혹시 아프간에 불법으로 무기 개조해서 대량으로 넘긴다는 거 저 새끼들 아냐? 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 미 연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아프간 쪽의 테러 조직들과 교전 후 수거한 무기들은 모두 하나같이 불법으로 개조 된 것들이었고, 개조된 무기류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생산된 공산품들이었다. 아무리 뒤를 캐내도 정말 놀랍도록 이렇다 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그동안 배후를 알아내기까지 지난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는데, 괴수를 만들어 낸 기술력 하며, 저 정도로 천문학적 단위의 금액을 요구하는 거라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튼 괴수 살인 사건을 주도하고, 뉴트 오스본을 납치했으며, 아마도 추측이 맞다면, 불법으로 무기를 개조하고 밀수출까지 해 점점 죄질이 추가되고 있는 저들은 뉴트가 자신들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며 일방적으로 녹화 버튼을 종료했다. 화면은 방금 전 소식을 다룬 속보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범죄심리학을 포함한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의 전화 연결이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활동을 이어오던 저들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해 아마 집단 내의 내분이나 혹은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들이 정한 협상 날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아 있었다. 민호는 무엇에 씌인 사람처럼 자리로 돌아와 풀썩, 무너지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손바닥으로 까칠한 거죽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뭐야, 그럼 뉴트 오스본이 범인이 아니었단 말야? 온통 술렁이기 시작한 사무실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폭풍에 휘말렸다.
달콤했던 휴식은 과연 거센 폭풍우가 불어 닥치기 전의 적요함이었다. 살 만하다, 고 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여유와는 거리가 먼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터지고 깨지고 무너지는 사건들과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오더가 민호와 대원들을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새벽같이 출근을 해서 잠시 대기하고 있다 보면 곧 상황이 걸렸고 복귀할 틈도 없이 사건, 사건, 사건, 그리고 근무 조를 교대하고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머리를 댐과 동시에 기절하듯이 취침. 눈을 뜨면 마치 지난날의 고생들을 포맷한 것처럼 다음날의 해가 밝았고 또 다시 같은 루틴의 반복. 쭉 그런 식이었다. 분명 경찰과 PMC는 공동 수사권을 가짐과 동시에 업무 분담을 정확히 5:5로 맡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새에 법안이 개정되기라도 한 걸까. 사건들은 PMC에 다 떠넘겨 놓고 정작 경찰 쪽은 속 좋게 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일이 넘쳐났다.
3번가에서 일어난 은행 강도 사건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 안은 정의를 되찾고 수십 명의 인질을 구한 이들의 땀 냄새로 가득했다. 방탄조끼를 벗고 어깨를 번갈아 으쓱이며 관자놀이의 땀을 찍어낸 민호는 시트에 던져둔 물을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와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복귀하는 길에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돌아가 퇴근을 할 수 있겠지. 폭풍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의 평온한, 영원히 남의 일일 것 같은 사연들 속에서 방금 전 자신들이 활약한 이야기가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위험한 순간을 몇 번이나 넘기며 필사적으로 싸우는 그들의 고군분투도 다른 이들에겐 미약한 바람 한 줄기처럼 세상사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었으므로.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고 덕분에 소중한 이들이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민호는 그랬다.
“?”
별안간 팔꿈치로 팔뚝을 툭 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벤이었다. 볼 한가득 빵빵하게 물고 있던 한 모금을 삼키며 민호가 물병을 내밀자 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냐? 요즘 왜 그래, 넋 빠진 사람처럼.”
“아, 아니. 그냥 좀……피곤해서.”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혼자 담아두지 말고 나한테라도 말해, 리더가 흐트러지면 뒤에 따르는 대원들도 다 위험해.”
리더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게 더 어울렸을 법 한데. 염려 가득한 눈으로 저를 들여다보는 벤의 얼굴을 마주하며 민호는 생각했다. 막 민호가 팀의 리더가 되었을 때, 그보다 앞서 들어와 선배 격이었던 벤은 민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햇병아리 같은 민호가 리더의 포지션을 맡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몇몇이 항의할 때도 ‘무능한 놈 앞에 세워서 다 같이 뒤지는 게 낫냐, 아님 유능한 놈 앞에 세워서 모두 사는 게 낫냐?’ 하고 대변을 해 준 게 그였다. 민호가 이곳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벤과 알비의 도움이 컸다. 사람이란 절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에. 여기까지 오기에는 두 사람이 정말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고맙다, 나중에라도 생기면 꼭 말할게. 진심어린 감사를 전하며 민호는 웃음기 잔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원들을 실은 버스는 신호를 받아 교차로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잠시 멈추어 있는 풍경들 중 민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금발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한참을 뜯어보다가 저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누구의 모습을 찾으려 했는지 깨달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늘 이런 식이었다.
사실 요 근래 들어 민호는 시시때때로 드는 잡생각에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원흉은 당연히 뉴트였다. 뉴트를 신경 쓰게 된 것은 그를 따로 만났던 그 날 이후부터였으니, 새삼 ‘요 근래 들어’ 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호의 막내아들이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사건은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정체를 드러낸 테러 조직에 대한 과거의 자료며 분석 같은 것들이 매일 아침 언론 매체의 기사마다 갱신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뉴트의 납치가 ‘메시가 해트트릭을 했다며?’ 수준의 술안주 거리가 되었지만, 민호만은 그럴 수 없었다.
이건 평소 안면을 튼 누군가가 잡혀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놀라움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가 민호의 앞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귓가에서 속삭이듯 남겼던 말이 좀처럼 무뎌지지 않은 채 가슴을 쿡쿡 찔렀던 것이다. 아직 뉴트는 제가 경찰과 협력해 저를 고의적으로 꾀어낸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오해받는 게 신경 쓰일까. 사실 그가 자신에 대해 오해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해받곤 못 사는 강박증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이 신경쓰임의 감정을 ‘죄책감’ 이라 이름 붙여야 할까. 뉴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민호는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날로부터 비롯된 콤플렉스인건가. …하지만 그가 납치당한 것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거늘.
그러니까 너 같으면 스스로도 정리 불가능한 이런 생각을 말할 수 있냐고, 벤?
뉴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버스 뒷좌석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대원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오스본에서도 포기한 자식이라면서. 노만이 선뜻 그만큼이나 되는 돈을 내놓을까?”
“돈 안줄 것 같지 않아? 솔직히 속만 썩이는데. 오스본 이미지에 먹칠은 그 자식이 다 하고 있다고”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던데. 그런 것 치고는 형제 셋 다 엄청 닮았더라.”
“이러나저러나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긴 해도 제 피 섞인 아들인데? 걱정이 안 될 순 없을 거야.”
체한 것처럼 불쾌한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저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삶이란 유복해도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닐 것 같았다. 동시에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호는 얼른 고개를 털고 쓸데없는 연민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백만 가지의 사연이 있다 한들 그 어떤 이유로도 범죄를 정당화할 순 없고, 이러나저러나 그는 질 나쁜 장난들로 다수에게 폐를 끼치는 놈이다. 물론 이번 사건에서는 범인이 아니라 납치당한 피해자였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민호는 새삼,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고선 깜짝 놀랐다. 마치 제 것이 아닌 남의 것처럼 낯선 조각들 속에는 절대 뉴트가 범인이 아니라고, 동료들과 돈 내기까지 걸며 자신의 감을 확신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범인들에게 붙잡혀 인질이 된 뉴트를 보는 순간 그런 것 따위 모두 잊었다. 그 모든 생각을 앞지른 채 뉴트는 괜찮을까, 그 자식 죽진 않겠지? 하고,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우선한 것이다.
뒤늦게 눈을 떠 세상을 접한 이처럼 그가 놀라고 있을 때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시트에 다시 부딪혔다. 가벼운 접촉사고인 모양이었다. 젠장,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애셔가 차에서 내려 짜증스럽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 뭐야?”
“뒤에서 갖다 박은 거 아냐?”
“아이고, 일찍 퇴근하나 싶었는데 또 이런 식으로 발이 묶이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통증은 아니었고, 교통사고 이후로 비범한 능력을 얻게 되는 영화 속 주인공마냥, 많은 감각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둑 터진 듯 갈래갈래 퍼져 나가던 그것은 모이고 모여 큰 줄기가 되었다. 눈앞에 두고도 먼 곳을 더듬으며 깨닫지 못한 무언가를 깨친 것이었다. 너네 괜찮냐?! 보험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뒤차의 운전자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애셔가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지만, 민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마치 이 교통사고처럼. 우연히 햇볕이 내려앉은 누군가의 속눈썹을 보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듣다가. 아주 사소하고 뜬금없는 계기로도 시작될 수 있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 인지하는 순간 너무 늦어버린. 다 그런 거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이 감정은 사고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인질은 무사한 건가?”
누군가가 여태껏 깨닫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댈 동안,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PMC의 대원들은 정확히 일주일 전 폐 공장을 비추던 화면 앞에 다시 모여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작전 지휘권은 전적으로 PMC 쪽에 있었다. WCKD가 결코 규모가 작지 않은 테러 조직임을 감안해, 경찰들보다는 테러범들과의 교전 경험이 많은 PMC쪽이 사건을 담당하는 게 좀 더 적합하리라는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적극적 협조를 약속했다. 그것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기는 결과로 이어질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협상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황이 PMC쪽에 유리하게 굴러가고 있단 뜻이었다. 다년간의 숱한 경험으로 이런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들을 다루는 데 도가 튼 알비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X일 X시에 11번가에 있는 조선소 주차장에서 인질과 돈을 바꾸자며, 접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범인들로부터 적당히 대화를 끌어가고 있을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동영상을 게시할 때 이용한 인터넷의 아이피를 파악해내고 있었다. 흡사 신작 게임을 실행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척은 이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동그란 뺨이 오르내리며 콜라 컵에 담겨 있던 얼음을 씹었다.
“아이피 떴어요. 무기 개조씩이나 한다는 놈들이 왜 이렇게 허술해요? 이거 김 빠지네.”
위치 검출해 볼게요. 오래는 안 걸려요~. 뿔테 안경을 추켜올린 그는 다시 허리를 당기고 키보드를 뺐다. 시간을 더 끌어달란 말이지. 암묵적인 주문에 크흠, 하고 목을 울린 알비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기 전에 우선 데리고 있는 인질이 진짜 뉴트 오스본이 맞는지 얼굴을 확인해야겠는데.”
알비의 말에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자는 나머지 일당들에게 다가갔다. 무언가를 의논하는 모양새로 모니터 건너편에서는 알아보지 못할 손짓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소총을 매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의자 뒤로 돌아가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겼다. 조금 숙이고 있던 얼굴 위로 헝클어진 앞머리가 흘러내렸다. 의자에 묶여 있던 인질이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시야로 쏟아진 빛에 눈을 좁혔지만 대체적으로 매우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의 뉴트 오스본이었다.
잘 흘러가고 있던 상황에 결코 끼어들 의도는 없었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뉴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민호는 저도 모르게 알비에게서 수화기를 뺏어들었다. 다수의 놀란 눈이 민호를 향했다.
“야 이 꼴통아, 우리 엿 먹일 때 굴리던 대가리는 어따 팔아먹고 멍청하게 잡혀 있냐!!! 그리고 대체 너네 집 경호원들은 뭐 하는 병신들이야?”
범인을 자극시키면 안 돼 뭐하는 거야! 누군가가 말리려 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비는 이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척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했다.
으레 위기에 처한 인질이 할 법한 살려달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양쪽에서 저를 구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그는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번쩍 들고, 머릿속을 더듬는 모양새로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민호?” 급박하고 격양된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내고는 약간 얼떨떨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뉴트는 무엇을 찾는 듯 시선을 두리번거리다 전면에 있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 구하러 올 거야?” 어느 새 그는 완전히 웃음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그럼 구하러 가야지, 너 뒤지게 내버려 둘까? 엉!”
당장 저들이 매고 있는 소총으로 쏴 갈기면 죽을 목숨인데 저렇게 태연자약한 반응이라니. 민호는 기가 찼다. 동시에 안대 밖으로 드러난 얼굴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어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느끼며 민호는 다시 한 번 제 감정을 인정했다. 빠른 인정은 여태껏 그가 했던 모든 행동과 생각에 개연성을 부여했다.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앞선 몇 주 간의 마음고생 같은 건 필요 없었을 텐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워 하는 범인들을 올려다본 뉴트가 아랫입술을 축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말하는 틈을 타 성큼성큼, 다리를 딛고 의자를 끌어 카메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민호는 예리한 눈썹이 솟고 입가의 주름이 짙어지는, 뉴트의 저 표정을 잘 알았다. 사고를 치고 달아나는 그의 뒤꽁무니를 쫓던 시절, 지겹도록 보았던 얼굴이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저지르기 일보직전의 눈빛.
그리고 민호의 불안한 예상은 적중했다.
“꼭 구하러 와 줄 거지? 내 히어로.”
찡긋, 카메라를 향해 윙크한 뉴트가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모니터 속의 시야가 뒤집히고 끝내는 퍽, 무언가가 곤두박질치는 소리와 함께 신호가 끊겼다. 야 이 똘추 새꺄 꺼버리면 어떡해!!! 당황한 민호가 버럭 소리쳤지만 이미 묵묵부답. 화면은 이미 암전이었다.
…그렇게 민호가 사라진 그의 넉 자 이름 뒤에 자신이 형용할 수 있는 욕은 다 붙여서 짜증을 내고 있을 동안, 모니터 너머의 뉴트는 제가 망가뜨린 카메라를 만족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민호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 줄곧 웃음기가 서려 있는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정말 드물게 방심했던 날이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자택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는 쭉 저기압이었다. 아무리 감정기복에 무딘 그라도 좋아하는 상대가 어떠한 의도를 품고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게 된 건 꽤나 상처였던 것이다. 마치 S시로 돌아와 모든 의욕을 잃고 삶에 권태를 느낀 몇 년 전처럼 불유쾌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낮엔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최소한의 먹을 것을 취하다 밤이 되면 기어 나가 술을 마시는 일상이 반복되고, 여느 때처럼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기분을 술로 해결하다 따로 조사를 부탁한 사람들로부터 그 날의 일은 경찰 쪽에서 단독으로 강행한 것이며 그 계획에 민호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바에서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고, 조쉬인 줄 알았던 운전기사는 예상 밖에도 총구를 들이미는 납치범이었다. 내리려 했지만 이미 차는 속력을 높여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bar가 위치한 건물 옆에 편의점 같은 게 있었으니, 분명 조쉬는 자다 말고 고용인에게 불려나온 제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에게 줄 숙취 해소제 같은 걸 사러 자리를 비운 것이었겠지. 가게에서 나와 보니 차가 없어져 사색이 되었을 조쉬의 얼굴을 생각하니 좀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야산 근처의 공터에 위치한 그들의 건물에 처음 끌려왔을 때, 뉴트는 이 단체의 창립자가 아버지로부터 어렴풋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당신의 옛 동료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벤치마킹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님 기술력을 몰래 빼온 것인지는 제가 회사 쪽 일에 관심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건물 곳곳에는 오스코프 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당해왔던 납치의 위협 같은 기억들을 떠올리던 뉴트는 지금이 그 때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돈 많은 부호의 자식이라 납치한 게 아니라 오스코프 사의 뉴트 오스본이라서 납치한 거였구만.
아무튼 이곳에 머무르게 된 며칠 동안 뉴트가 파악한 위키드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집단이었다. 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이미 자신이 오기 전에 쿠데타와 같은 내분으로 모든 체제가 뒤집어진 상태였다. 물 밑에서 조용히 정체를 숨기고 기존에 거래해 오던 최소한의 국가에만 무기를 수출하려 하는 보수 온건파와 거래 루트를 늘리고 조직의 덩치를 불려 조직원 모두가 골고루 돈을 만져보자는 급진파가 엇갈렸고, 젊고 행동력 높은 이들이 많은 급진파의 조직원들이 내분을 꾀했다. 집단의 몰락이란 으레 다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능력 있는 통치자라도 오래 권력을 잡으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민호. 사춘기도 오기 전의 아주 어렸던 유년 시절, 아버지와 계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눈치를 보고 살았던 그 때의 영향으로 뉴트는 입에서 다듬어져 나오는 말보다는 그 외의 것들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의 떨림과 높낮이, 눈빛과 입가의 움직임, 그런 것들. 곱지 않은 말버릇은 여전했지만, 민호는 확실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잔뜩 흥분하고 다급한 목소리에서 염려와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온전히 나를 생각하면서 나를 위해, 나를 구하러 온다니. 뭐, 밑지는 장사는 아니네. 어차피 저들은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뉴트는 고개를 돌렸다. 의견이 도통 통일되지 않는지 한참동안 논쟁을 벌이던 범인들 중 하나가 시선을 돌리다 화들짝 놀랐다. 아마 박살난 카메라와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겨누어진 총구에 그는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오, 죽이려고?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쏴 봐, 이 새끼야.”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부러 총구에 이마를 대주듯 들이밀며 한 쪽 입 꼬리만 당겨 씩 웃었다. 처음엔 잘 모르고 납치했지만 오스본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인간들인지 알고 나선 마음대로 죽일 수 없겠지.
그의 예상대로였다. 충동적으로 뉴트에게 총을 겨눈 남자의 팔뚝을 잡아채며 그의 동료들이 남자를 말렸다. 그들의 만류에 색이 희게 빠지도록 감쳐 문 입술이 탁, 떨어짐과 동시에 남자는 총구를 내렸다. 욕설을 뱉고 코끝까지 내려오는 복면을 벗어던지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뉴트는 과장스럽게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소심하구만.” 팔에 비해 자유로운 두 다리는 거만하게 두 무릎을 포갠 채였다. 당최 누가 범인이고 인질인지 분간하기 힘든 태도였다.
더 내버려 뒀다간 쓸데없는 말만 주고받을 게 뻔해 카메라는 없앴고, 민호와 제가 이래저래 시간을 끌 동안 이미 위치 추적은 끝났을 테다. …자, 그럼 이제 또 어떤 식으로 도와줘 볼까.
“그래서, 몸값과 바꿀 연구비로 얼마가 필요하다고?”
장난스러운 눈빛은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그들을 탐색하듯 살피며 뉴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민호에게야 희대의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는 뉴트였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오스본의 피가 흐르는 남자이기에.
5.
“입구는 서쪽을 제외한 이 세 곳이니까 알파, 브라보, 찰리. 입구를 봉쇄하고 델타, 에코, 폭스트롯. 각자 입구로 진입한다. 인질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되 구출과 범인들의 진압이 완료되면 무기를 회수하고, 마지막으로….”
조심하도록.
건물 도면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일사분란하게 지시를 내리던 알비가 양 쪽에 둘러앉은 대원들의 얼굴을 결연한 표정으로 훑었다. 과거 수 십, 수 백 번의 교전 도중에 용맹한 동료들을 이미 여러 차례 잃어왔던 그였다. 두 번 다시 그런 상실의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필드에 투입될 대원들의 작전 지휘를 할 때마다 알비는 입버릇처럼 마지막 명령을 덧붙였다. 전원 무사 귀환한다. 이후에 주어지는 명예도, 정의 구현도 모두 살아 돌아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버스는 어느새 인적이 드문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인지, 교섭 날짜가 다가오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연락을 해왔다. 거물급의 인질을 붙잡아 둔 것까지 모자라, 이제는 폭발물 설치였다. 그들은 S시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쇼핑센터의 어딘가에 가동이 시작된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으며 세 시간 안에 요구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쇼핑센터가 폭발함과 동시에 뉴트 오스본의 목숨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연락을 전해 받은 경찰은 수색대와 폭발물 처리반을 데리고 쇼핑센터로 향했고, PMC는 교전 가능성이 높은 위키드의 건물로 잠입해 인질을 구출하는 방향으로 합동 작전을 개시했다.
외부로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버스는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아무렇게나 우거져 키가 큰 수풀 너머로 보이는 위키드의 건물은 일견 오래된 것처럼 보였지만 규모가 꽤 컸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몸을 반만 내밀어 건물의 외관을 살핀 민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도면 보고 크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이런 곳에 저렇게 멀쩡한 건물이 두 동이나 있지? 허가가 나오긴 한 거야?”
“지금 쓰는 건 한 동 뿐이야. 원랜 요양원이랑 리조트가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도중에 건설 업체가 부도난 모양이더라고. 위치가 이 모양이니 매물로 내놔도 안 팔리고, 건물을 허무는 것도 결국은 돈이 드니까 그냥 손 놓고 도망간 모양이야. 이후 저렇게 버려져 있지.”
“…그런 건물을 저 놈들이 점거했다 이거로군.”
불법 점거도 오늘로 끝이겠네. 홀스터 안에 넣어 둔 탄창을 확인하고, 전원을 켜 리시버와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을 마친 민호는 천천히 버스의 계단을 내려갔다. 방탄복이며 어깨와 다리에 매달려 있는 화기들이 철컥, 철컥, 책임감처럼 그의 사지를 짓눌렀다. 별안간 힘을 실어주듯 어깨를 꾹 잡아 누르는 손에 민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진중한 눈빛의 알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는 그 말에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 주변을 한번 살피고, 어깨의 끈을 매만지며 바로 선 민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내가 언제, 작전 실패한 적 있던가?” 동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리더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난 꼭 저 안에 있는 자식을 구해야 하거든. 내 손으로. 속으로만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가자.” 언제 봐도 듬직한 입꼬리가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셋, 둘, 하나. 정적 속의 수신호 후 선두에 선 민호와 윈스턴이 먼저 무장 상태로 건물의 문턱을 살피듯 넘었고, 뒤따라 둘, 그리고 백업을 맡은 벤이 엄호하듯 뒤쪽과 건물 입구의 경보장치를 살피며 건물에 진입했다. 숲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건물 내부는 무척 서늘했다. 리조트를 운영할 목적으로 지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바닥에 깔린 대리석이며 벽지가 무척 고급스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펐다. 원래라면 반듯하게 쌓아놓았어야 할 나무 궤짝들이 열린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천장 곳곳의 전선들이 볼썽사납게 튀어나와 치지직, 수명 다한 로봇처럼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전진하던 팀원들은 반대편의 은폐물 앞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소형 컨테이너 박스 뒤로 몸을 숨긴 민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암기한 건물의 구조를 떠올렸다. 이 통로를 따라 끝까지 향하면 오른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다 타깃에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상황실 모니터를 통해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지켜보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꼼짝없이 승강기 안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필히 반대편 끝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은폐물로부터 계단까지의 거리를 짐작하며 민호는 리시버의 버튼을 눌렀다.
“당소 델타, 진입 완료. 이상 없음.”
남쪽과 북쪽 입구로 향한 에코와 폭스트롯 역시 무탈하게 진입에 성공했음을 전해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세 팀이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 조력자의 앳된 목소리가 리시버 너머로 들렸다.
-일단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쪽만 봤을 땐 2층까진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요.
“확인.”
-아, 민호. 예전에 케밥 먹기로 한 거, 오늘 작전 끝나면 가시죠.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놈의 케밥 타령이냐? 하지만 그는 장난스러운 척의 말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만 해도 선배들이랑 눈도 못 맞추던 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더니 벌써 저렇게 컸다. 무사히 복귀하십쇼~.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옅게 미소 지으며 민호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컨테이너 박스로 가려진 모퉁이를 앉은걸음으로 돌아 총을 겨누고, 좌우측 모두 타겟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윈스턴의 엄호를 받아 반대편의 계단까지 뛰었다. 벽에 붙어 서서 위를 올려다 본다. 역시 아무도 없다. 고개를 내려 정면을 응시하자 좁은 로비 너머에서 제 지시를 기다리는 팀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 민호는 까딱까딱, 손을 움직였다. 대열에 합류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예상과 달리 상황은 빠르게 종료되었다.
건물에 남아 있던 몇몇의 타깃과 교전이 있었기에 결코 쉬웠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알비의 부탁대로 대원들은 모두 부상 하나 없이 무사했다. 아무래도 집단 내의 내분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괴수까지 만들어낸 그들이 이렇게 허술하게 당할 리가 없을 테니까.
다섯 명이 채 안 되는 타깃들을 제외하고 건물 내에 남아있던 놈들은 모두 낌새를 알아채고 달아난 것 같았다. 쿠데타를 일으켜 운 좋게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쳐 놓고 대책이 없으니 도망친 거겠지. 원래 리더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법이다. 누가 됐든 간에 조직의 새 우두머리에 오른 놈들은 멀리까지 내다보진 못한 것이었다.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개발 중인 것들까지 가지고 갈 순 없었던 모양인지, 지하에 위치한 실험실에는 죄다 망가진 괴수들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빠진 마이크로칩 같은 것들은 어차피 생포한 타깃들을 잡아 족치면 될 일이었다. 와중에 쇼핑센터로 향한 경찰 쪽 역시 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폭발물을 찾아 제거했다고 보고했다. 참으로 순조로웠다.
…문제는, 달아난 그들과 함께 뉴트의 흔적 또한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까맣고 투박한 워커가 철문을 툭, 건드리듯 밀었다. 이로서 6층의 마지막 방이었다. 이미 확인했지만 이 방에도 뉴트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경찰로부터 자신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위키드의 간부들을 태운 차가 도망치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다. 이곳에 없다면, 아마 뉴트 역시 그들과 함께 있을 터였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방의 벽면 한 쪽을 가득 채운 무기들을 체크하면서도 민호의 의식은 철저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경찰이 바로 뒤쫓는다고 했는데 경찰 쪽에 넘겨놔도 될까……그 인간들 일처리 못 미더운데. 아냐, 그래도 오스본 가의 사람이니까 필사적으로 구하겠지…. 매우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민호는 뉴트가 무사할 것이라 믿었다. 어차피 그 쪽에서도 뉴트를 함부로 어찌 하지 못 할 것이다.
인질을 구하는 건 경찰 쪽으로 이관되었으니 위키드의 건물에 있는 대원들은 무기 회수 후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민호는 가늘게 한숨을 뱉으며 제가 들어온 방안을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놈들은 일반 크기의 방을 세 개쯤 터서 큰 규모로 만든 이 공간을 무기고로 사용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전에서 한참 구르고 뛴 민호도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무기들이 세 면 가득 걸려 있었다.
많기도 하지…. 여전히 못마땅한 모양으로 민호는 리시버 대신 무전기를 켰다. 짜증스럽게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삐딱하게 섰다. 회수해야 할 무기 리스트를 보고하고 운반을 위해 차량 지원을 부탁한다는 무전을 막 보내려던 참이었다.
“씨이발, 움직이지 마!”
외마디 외침에 반사적으로 글록을 뽑아들며 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 빠짐없이 진압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 숨어있다 나타난 것인지 모를 타깃 하나가 뉴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민 채로 민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뭐야, 분명 아까까진 없었잖아?!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시선 끝에 프로젝트 빔 뒤로 가려져 작게 나 있는 문이 보였다. 수색 중엔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실수였다. 급한 마음에 철저하게 수색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민호가 입을 열었다.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총 내려 놔. 진정해.”
“닥쳐! 너네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들어줄 줄 알아?!”
“…….”
“일단 무전기부터 버려!”
민호는 총을 고쳐 쥐며 타깃의 상태를 살폈다. 무전기를 버리라고 위협하는 목청만 클 뿐 사실 목소리와 눈빛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그는 타깃이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마 숨어서도 교전하는 소리는 들었을 테니,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분위기가 기울 대로 기울었기 때문에 저렇게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타깃들은 제법 다루기가 쉬웠지만, 반면에 상대방이 자신의 두려움을 알아차렸다는 걸 인지했을 땐 두 배로 위험해지기도 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처지에서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저 놈들의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웬만하면 저들에게 맞추어 주며 진정을 시키는 게 상책이었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무전기의 버튼을 누르려던 민호는 그대로 무전기를 땅에 내려놓고 발로 밀었다. 총은 여전히 겨눈 채였다.
“그 새끼 털끝 하나라도 잘못되면 생포고 뭐고 대가리에 바람구멍 나. 어? 지금 누굴 납치한 건지 알고 있잖아?”
달래듯 말했지만 패닉에 빠진 타깃의 귀에 그런 게 들릴 리가 없었다. 말이 안 통하는데 이거 타이밍 봐가면서 손목이라도 맞춰야 하나. 쯧. 혀를 차고 타깃과 대치하듯 서서 낫과 망치 문양의 타투가 새겨진 오른팔을 훑던 민호의 눈이 문득, 타깃이 쥐고 있던 총에 닿았다. 순간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
음…. 민호는 타깃과 자신의 거리를 짐작했다. 볼 안 쪽 살을 혀로 훑으며 가만히 계획을 세운 그는 눈길을 돌려 차가운 총구를 관자놀이에 붙인 채 타깃에게 잡혀 있는 뉴트를 보았다. 시선이 부딪히고,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 민호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결연한 표정에 뉴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잃을 게 없는 난 뒤져도 상관없지만, 이 새끼는 다르겠지! 동료들을 부를 수 있는 무전기도 없고, 인질로 잡혀있는 뉴트 때문에 민호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고전을 겪고 있자 타깃은 굳어 있던 입 꼬리를 씰룩였다. 이제 좀 상황이 제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땀이 나 축축해진 총을 바투 잡고 고개를 든 그의 정면에 민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눈을 돌리자 왼쪽 구석에 서서 총을 겨누는 민호가 보였다.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뜨자 이번엔 오른쪽 구석에 서 있는 민호가 보였다. 세 개의 방을 터서 만든 무기창고의 규모는 꽤 넓은 편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반대편 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절대 아니란 뜻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마치 뱀처럼, 그의 발끝을 타고 온몸으로 기어올랐다.
“씨발, 허튼 짓거리 하지 마! 뒤지는 수가 있어!”
다시 한 번 뉴트의 머리에 총구를 짓누르듯 밀어붙이자 다시 그의 맞은편으로 돌아온 민호가 진정시키듯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워워. 알겠어, 알겠어. 진정해. 네 엿같은 얘기 들어 줄 테니까, 원하는 걸 얘기해 봐.”
“…여기서 내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남쪽 입구를 열어 놔.”
“그렇게 못하겠다면?”
동시에 민호가 켜놓은 무전기에서 상황 보고를 알리는 무전이 울렸다.
[전원 진압 완료! 교전 중 타깃 3명 사살, 2명 생포. 무기 회수를 위해 6층으로 이동함.]
비뚜름한 미소가 타깃의 입가를 가로질렀다. 어차피 도주하다 사살당하거나 붙잡혀 무기징역으로 썩거나 개죽음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손도 못 써보고 굴복하느니 엿이라도 먹일 생각이었다.
“좆 까 개새끼야!”
안 돼, 뉴트!!! 커지는 민호의 눈을 보며 타깃이 트리거를 당겼다.
철컥, 철컥.
그러나 제 눈앞에서 화려하고 끔찍하게 터져야 할 인질의 머리는 멀쩡했다. 으레 격발되어야 할 탄환을 뱉어내지 않는 총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민호가 한심스러운 얼굴로 한 마디 했다. “…넌 잔탄 확인도 안 하냐?” 다급하게 뉴트의 이름을 외치던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표정과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묵직해야 할 총의 무게가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이 가벼웠다. 타깃은 떨리는 눈으로 총의 슬라이드를 확인했다. 조직의 각인이 새겨져 있어야 할 곳에 PWR629, 총번이 적혀 있었다.
“—!!”
총이 바뀐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총성과 함께 탄환이 타깃의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무기를 진열해 놓은 진열대의 유리덮개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며 타깃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의 민호가 제 손에 쥔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와. 너네 이거 얼마에 팔았냐? 자루 당 한 3만 달러정도는 받았겠다?”
그리고 총구는 다시 타깃을 향했다. 자신들의 손으로 개조한 베레타의 위력을 모를 리가 없다. 무기고의 강화유리도 박살내는 성능의 총으로 사람의 머리를 맞췄을 때에는…….
그것 역시, 그간의 실험들로 숱하게 봐 왔던 경험이다. 뉴트의 목을 옥죄듯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타깃이 두 손을 들었다. 툭, 탄환 없는 글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총성이 꽤나 컸던 탓에 무기 회수를 위해 6층으로 올라오고 있던 대원들은 손쉽게 사건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똑바로 서, 이 새끼야. 벤에게 결박당하고 있는 타깃에게 들으라는 듯 홀스터에 글록을 챙겨 넣으며 민호가 충고했다. “총기는 내 몸처럼 여겨야지. 손에 익을 정도로 말야.”
결국 타깃이 대원들에게 연행되어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민호의 어깨가 크게 내려앉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고 장갑을 벗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낯의 뉴트가 보였다. 타깃이 크게 불안해하는 걸 틈타 총을 바꿔두긴 했지만 이후에 칼이나 다른 무기를 꺼내 들까봐 얼마나 진땀을 뺐는데, 저건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자 좋게 웃고 있는 걸 보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어휴 씨발 진짜…. 표정을 구기며 민호는 뉴트에게 다가가 그의 상박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풀어 주었다. 아마 저는 한 달 월급을 다 털어야 겨우 살 수 있을 법한 셔츠에 가무잡잡하게 남은 자국을 보니 아주 고생을 안 한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야, 너는 무슨 죽다 살아난 놈이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네가 구해줄 줄 알았으니까.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나한테 괴물 같은 총 있는 거 봤지? 다물어라 좀.”
퉁명스러운 협박에도 개의치 않고 뉴트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말투였다. 근데 있잖아, 물어볼 게 있는데.
“왜 날 구해줬어?”
“뭐?”
“날 구해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말이라고 하냐? 이게 내 할 일이니까 그렇지.”
“단지, 그것 뿐이야? 개인적인 이유는 없어? …뭐, 내가 걱정됐다든지.”
한동안 묶여 있어 굳어 있던 관절을 풀듯 천천히 손목을 돌리며 민호를 살피던 뉴트가 이내 전투복 차림의 어깨를 움켜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응? 민호.
비단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골머리를 썩게 만들던 놈이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하게 될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올곧이 저만을 담고 있는, 크고 투명한 눈동자. 제 것보다 농도가 옅은 동공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민호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으…. 망설이던 그는 결국 머쓱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꺼져 임마. 밀어내는 대로 휙, 가볍게 떠밀렸음에도 뉴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정 안하네? 뭐 좋아, 대답을 받아낼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그런데 말야, 민호……네가 예전에 영화도 안 보냐고 구박해서 영화를 좀 봤거든. 근데 영화에서는 이런 때가 딱 키스할 타이밍이더라고.”
“뭐?”
“키스할까?”
말랐지만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아채고, 서늘한 손바닥이 땀으로 젖은 뒷목을 꾹 눌러 끌어당겼다. 다시 한 번 코앞까지 다가온, 미소가 해사한 얼굴. 손가락이 닿은 뒷목의 열기가 귓불로, 얼굴로 서서히 번져나갔다.
“미녀 히로인은 아니지만 그 못잖은 미남을 구출해낸 보상이라고 쳐.”
그리고 대답할 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몸을 엉거주춤하게 뒤로 뺐지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양 그가 물러난 만큼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몸을 붙이는 뉴트를 감각하며 민호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골 때리는 새끼네. 적어도 이런 걸 할 때 상대방의 의견 정도는 들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입맞춤에 집중하라며 더 더욱 허리를 옭아매는 몸짓과 얌전히 내리 깐 속눈썹, 기울어진 눈매. 열 오른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는 손.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이고…… 소중하다 생각했기에, 뜨거운 숨결이 입 안으로 섞이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눈을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가만히 잡아 쥔 뉴트의 손목에서 쿵, 쿵. 제 것과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6.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일이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느라 이렇게 푹 자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막 욕실에서 나온 박민호는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 꺼내 마시고 목에 수건을 걸친 채 옷장 문을 열었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물기가 뚝뚝 떨어져 러그를 짙게 물들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뭘 입어야 되나. 면봉으로 귀를 닦으며 옷장 안을 열심히 들여다보던 그의 시선은 옷장 밖으로 움직였다. 어제 엎어둔 스도쿠 잡지 옆에 놓인 휴대폰이 울린 탓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까치발을 들고 눈매를 좁혀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고개 돌려 다시 옷장을 살폈다. 제 키만한 붙박이장 안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그리 종류가 많지 않았다. 몇 벌의 바람막이와 청바지, 반바지, 후드 티셔츠, 그리고 죄 패턴이 고만고만한 체크 셔츠가 여섯 장…. 아, 왜 제대로 된 옷을 살 생각을 안 했지? 면접용으로 구매해 다섯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정장 앞에서 잠깐 망설이던 민호는 결국 무난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아무래도 이게 최선책일 것 같다.
드르륵, 드르륵. 두 번 털은 티셔츠를 막 머리 위로 끼워 넣는 동안에도 진동은 계속되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아직 이십 분이나 여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팔을 마저 집어넣으며 짜증을 냈다. 아, 거 성질 급하긴! 아까부터 저렇게 계속 쪼아대는 통에 아침 식사고 뭐고 그냥 나가야 할 판이었다.
청바지의 버클을 꿰고 수건을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거울 앞에 선 민호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매일 아침, 아무리 바빠도 앞머리를 손질해 세우는 것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인상을 교정하기 위한 일종의 습관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버릇처럼 선반에 놓인 왁스를 집어 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래, 신경 좀 덜 쓰고 나가면 어때서? 뭐 그리 잘 보일 자리라고. 그러나 시계를 차고, 샤워코롱을 뿌린 후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다시 서랍장 위에 세워진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불과 오 분 전만 해도 대충 옷만 입고 나가면 그만이라고 선언한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왁스를 든 박민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화는 신발장에서 스니커즈를 구겨 신을 때쯤에서야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 목록을 채운 이름 중 가장 위의 것을 꾹 눌렀다. 운동화 앞 코를 바닥에 두드리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댐과 동시에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도, 제 현관문 앞에서도 들렸다.
문을 열자 그를 반기고 있는 것은 흰 오픈카였다. 저번의 새빨간 페라리와는 다른, 애스턴 마틴. 한정판으로 나왔다던 저 모델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니 존나 저 새끼 차고에는 저런 슈퍼카가 몇 대나 있는 거야……? 민호가 궁시렁대며 제 차의 남은 할부를 꼽아보고 있는 동안 창틀에 팔을 걸친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고 손을 흔들었다.
“일찍 일어났네? 왜 전화를 안 받고 그래.”
그리고 그는 민호가 계단을 막 내려오기도 전에 차문을 열고 나와 반대편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역시 매일 보던 난해한 패션 대신 반듯한 수트를 차려 입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사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타고 온 스완 윙의 오픈 카와 청바지, 티셔츠. 발을 들이기도 황송한 조수석과 어울리지 않는 제 차림새를 번갈아 살피던 민호는 잠시 떨떠름하게 뒷머리를 매만졌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올라타 문을 닫았다. 남자 자존심에 이런 일로 기죽는 모습을 보이는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S시를 한바탕 들었다 놓은 납치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민호는 뉴트에게서 메시지 한 통을 받았었다. 그로부터 받은 연락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새 메시지 위로 줄줄이 뜨는 옛 기록들에 민호는 뉴트로부터 상처받은 눈빛을 받았던 그 날을 회상했다. 어찌됐든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이었다.
‘주말에 같이 식사 한끼 해. 시간 있지?’
있어? 가 아니라, 있지? 다 알고 묻는 느낌이 강한 메시지에 민호는 입술을 감쳐물며 뒷목을 문질렀다. 환하게 빛을 발하는 액정이 꺼질 때까지 망설이다 결국 몇 자를 써 넣었다. 알고 물었든, 모르고 물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제안에 거절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선 별 말 없디?”
구역이 잘 정리된 주택단지에서 빠져나와 5분쯤 달렸을까, 신호가 긴 교차로에서 차가 멈춰 섰을 때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저도 멀쩡하게 손발 다 있고, 비싼 차라고 안전벨트 매는 게 별다른 것도 없는데 뉴트는 기어이 제 손으로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꼭 새 차를 뽑고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애처럼. 그리고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수다쟁이답지 않게 여태 쭉 묵묵부답이었다. 민호는 이 어색한 정적을 깨고 무슨 말이든 내어놓아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음….”
핸들을 가만히 쥔 뉴트는 민호의 쪽을 보지도 않고 여전히 정면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솔직히 뺨 한 대 정도는 얻어맞을 각오하고 있었거든. 이런 일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해서 좋을 게 없잖아. 집안의 이미지만 깎아먹는 셈인데.”
“…근데?”
“집에 돌아가자마자 좀 놀랐어.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더라. 다친 덴 없냐고 물었고, 괜찮다고 말했더니……나만 무사하면 아무래도 좋다고. 나는…, 아버지의 그런 표정을 처음 봤어.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람일지도 몰라.”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 잘 알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은 거야.
민호는 문득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서먹서먹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틈 날 때마다 안부전화도 한 번씩 하고 그런다. 여전히 아버지는 제게 살갑지 않은 분이시지만 무뚝뚝한 목소리 너머에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이따금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 없이도 올곧게 홀로 선 아들에 대한 대견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등 돌려도 끝끝내 변함없이 제 손을 잡아주는 것 역시 가족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뉴트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호는 저와 나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어려 보였던 뉴트가 훌쩍 자란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제 동생이었다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 없어 그가 틀어둔 노래 가사에나 집중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레스토랑 예약해뒀는데, 어때. 니글거리는 거 별로야?”
이게 아마, V12엔진이었지? 끝내주는구만. 자존심 상해할 땐 언제고 혀를 내두르며 차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손등 위로 뜨끈한 손바닥이 덮이는 게 느껴졌다. 은근슬쩍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려는 뉴트로부터 손을 홱 빼내자 의아함이 서린 얼굴이 그를 응시했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더욱 더 말끔해 보이는 그 낯짝에 대고 민호가 삿대질을 했다.
“야, 잠깐만. 우리 확실하게 하자.”
“척 하면 척 아냐? 계집애들처럼 확인하고 싶은 거야?”
아니 계집애라니 나 지금 되게 남자 마음 다 알면서 ‘우린 무슨 사이야?’ 뭐 이딴 답답한 대사를 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동급이 된 듯한 기분인데 음 나 얘 한대 치면 고소당할까…. 카오디오의 노래에 맞춰 가볍게 까딱이는 뒤통수를 보며 민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뉴트가 선심 쓰듯 고개를 돌렸다. ‘뭐, 좋아.’ 그리고 표정이 구겨진 얼굴을 붙잡아 제 쪽으로 보게 했다. 무척 귀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뺨을 감싸는 손은 부드러웠다.
“나랑 만나. 사고 안 치고 다닐게.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한다는 짓 고집 부려가며 하는 악취미 없어.”
예전의 일들은 다 네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제 예전과 같은 의심은 필요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관심이 필요했다니. 철부지 같지만 이 남자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들 중 이보다 진심 어린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관심을 갈구하게 만든 그의 지난날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내가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제 뺨을 감싼 손등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앞으로 넘치는 관심 줄 테니까, 이제 그딴 짓 하고 다니지 마.”
내가 걱정해 이 자식아.
그를 향해 처음으로 지은 미소에 뉴트는 대답 대신 눈 꼬리를 휘어트리며 반대쪽 뺨에 입 맞췄다. ‘너 웃을 때, 이렇게 보조개 들어가네. 알고 있어?’ 그리고는 감격한 표정으로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다시, 바뀐 신호에 운전대를 잡았다.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는 귓불이 찻잔에 담근 것처럼 붉어졌다.
“저기, 민호. 나 오늘 할 말이 좀 많을 것 같은데……집에 내일 들어가면 안 될까?”
골칫덩어리에서 근사한 연인으로 변한 제 옆의 남자를 보며, 민호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시트에 등을 파묻었다.
“하는 거 봐서.”
그래,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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