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주인을 찾습니다
a 2015. 1. 12. 02:53 |1.
이례 없이 성공적인 기말고사였다.
사실 과목당 시험 범위가 책 한 권쯤 되는 전공 공부에 치여 조별 과제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그 조별 과제도 두 학번 아래의 후배가 잘 해주었다. 이름이 소현? 수현? 소…… 아니 수현이가 맞는 것 같다. 아무튼 민호는 교수님이 엮어준 조로 편성되기 전부터 상대 건물을 오가며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상대 앞 노천카페에서 커피 물고 노닥거리거나, 혹은 원룸촌 앞 투다리에서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신나게 소주 일잔을 꺾거나… 아무튼 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이란 죄다 이런 모습이었으므로 민호는 이번 팀플 역시 자신의 하드캐리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자료조사나 좀 더 떠넘기려고 중간점검 차 만났던 중도에서 초안이라고 내놓은 수현의 피피티를 보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교수님도 발라먹을 사학년의 관록이었다.
결국 발표가 끝난 날 그 후배에게 사주었던 감자탕 값이 얼마였더라, 통장 잔고를 확인한 민호는 은행 어플을 종료하고 홈 키를 길게 눌렀다.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 아래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일정들을 주르륵 훑는다. 네 개의 전공심화와 한 개의 필수교양, 기말 대체 전공 발표. 손가락을 밀어 그것들을 모두 지우자 언제 봐도 관능적인 가슴골이 드러났다. 뿌듯한 얼굴로 말끔해진 홈 화면을 얼마간 들여다보고 있던 민호는 제가 서 있는 곳이 유동인구가 꽤 되는 학교 앞 원룸촌 계단이라는 사실도 잊고 소리를 꽥 질렀다.
“시팔 끝났다!”
드디어 종강이었다.
어째 오늘따라 일이 술술 풀린다. 마지막 전공 시험도 잘 본 것 같은데 술값도 안 냈다. 사다리타기 몰빵의 희생자가 된 형민은 불쌍하게도 화난 여친에게 소환까지 당했다. ‘야, 밖에 비 와. 우리도 그만 일어날까?’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온 누군가가 젖은 어깨를 털고, 하이힐 신은 발을 구르며 분노를 발산하던 여자 친구가 주눅이 들어 카드를 긁는 형민을 잡아끌고 나가는 것으로 종강 기념 술자리가 얼추 마무리 되자 민호는 후드를 뒤집어쓰며 밖으로 나왔다. 취객 스텝을 밟는 일행들과 헤어진 후에는 항상 같은 자리에 대어 놓는 트럭에 들러 두 마리에 만원 하는 치킨을 샀다. 그는 취기 오른 얼굴로 잔돈을 거슬러 받으며 생각했다. 가서 한잔 더 해야지. 냉장고에 맥주 남은 게 있었나?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맥주와 함께 구매한 싸구려 우산을 쓰고 우산을 들지 않은 한 손에는 비닐봉투 두 개를 꿰었다. 둘 중 편의점 로고가 찍히지 않은 것에서 훈기와 함께 기름진 냄새가 올라와 코를 찔렀다. 아, 얼른 올라가서 먹어야지. 술을 먹을수록 허기짐을 느끼는 버릇이야 원래부터 있었다지만, 오늘은 제가 돈 내는 거 아니라고 친구들과 일부러 이것저것 더 시켜 잘 먹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 식욕이 남아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영하권으로 떨어진 날씨, 겨울비, 손아래에서 올라오는 튀김 냄새와 같은 주변의 자극에 시린 코끝을 괜스레 한번 훌쩍이며 민호는 발길을 재촉했다.
하필이면 이런 날 메쉬 러닝화를 신었다.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밟지 않게 유의하며 기이한 걸음걸이로 걷다 보니 손에 끼운 비닐봉투의 손잡이가 뱅글뱅글 돌아 손가락을 졸랐다. 팽팽하게 피가 몰린 끝마디가 저릿저릿해지자 민호는 삼천 원짜리 우산대를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 씨 뭔 비가 오고 지랄이야 존나 귀찮게…. 맥주 두 캔을 치킨 봉지에 옮겨 담느라 잠시 걸음을 멈춘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보폭이 큰 누군가가 지나가고 쪼르르, 그 뒤를 작고 재바른 몸이 쫓았다. 기울어진 우산대를 고쳐 잡고, 고개를 바로 든 민호는 소란스럽게 제 앞을 앞질러간 이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커플이었다. 그것도 한 쪽이 삐뚤어진. 남자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묵묵히 걸어가고, 어떻게든 우산을 씌워주며 화를 풀려는 여자가 그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민호는 본의 아니게 어깨 너머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빗소리에 드문드문 두 사람의 말소리가 섞였다. ‘오빠 그러니까 카톡이……무음이라… 내가 진짜 도서관이라서….’ ‘…알겠으니까 가라고.’
저래서야 어디 앉을 수나 있겠나 싶을 정도로 길이가 짧은 스커트 차림의, 그러나 방금 전까지 분명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는 여자는 몇 번이나 교태 섞인 호칭을 연발하며 남자의 팔에 가느다란 제 팔을 얽었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해서 목석같은 태도로 일관하던 남자는 결국 여자의 손에서 우산을 뺏어 들었다. 코트 차림의 얇은 어깨에 투박한 손을 두르고, 한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커플의 기승전결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된 민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시발 그래 결국에 떡치고 풀 거면서 싸우길 왜 싸워. 괜히 짜증이 난다. 그래, 뭐, 요즘 좀 외로운 건 사실이지만 저런 꼴이 부러워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진짜다. 감정 소모하며 기 빨리는 일은 딱 질색이다. 여자애들 떽떽거리고 징징거리는 걸 받아주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그렇게 애써 합리화를 하며 걷던 민호는 살갗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강풍이 불면 단번에 작살날 것 같은 비닐우산의 벌어진 틈에서 물이 새어 이마 위로 툭 떨어졌다. 좋은 구실이었다. 에이 씨, 결국 짜증을 제어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핑계를 돌리며 민호는 발치에 떨어진 음료수 캔을 걷어찼다. 그의 심술이 실린 음료수 캔은 깡,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흙탕물을 튀기며 다 늦은 새벽의, 그러나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대학 원룸촌의 젖은 바닥을 굴렀다.
왼발 스트라이커의 재능이 또 이런 데서 드러나네. 전봇대 옆 의류수거함 쪽으로 굴러간 캔의 자취를 따라 민호는 눈동자를 움직였고, 찌그러진 캔이 멈춘 곳에는 거짓말 같게도 새카만 새끼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기척에 민감해 도망갈 법도 한데 고양이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사람 사는 주택가를 돌아다니는 길고양이야 하루에 몇 번도 더 보는 흔한 풍경이었다. 평소같았다면 그냥 눈길만 주고 지나갔겠지만 반오십의 시간이 열흘정도 남은 스물다섯의 박민호는 오늘 술을 마셨다. 또한 제 앞에 앉은 고양이처럼 네 발로 기는 짐승이 되진 않았으나 꽤 기분 좋게 취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지는 심신 미약의 상태인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근본 없는 용기와 자신감을 만면에 고루 갖춘 민호는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다. 그대로 고양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괴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는 걸 보니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 존나 귀엽네. 비구름을 머금은 밤하늘보다 더 새카맣고 동그란 눈이 가만히 저를 응시하며 깜빡였다. 우쭈쭈. 손을 내어 머리통을 쓰다듬자 고양이는 조금 쉰 목소리로 왜엥, 하고 울었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법한 낡은 의류 수거함과, 수거함 옆 전봇대 아래에 쌓인 쓰레기봉투 더미 근처에 쭈그려 앉아있던 민호의 곁으로 여학생 둘이 눈길을 주며 지나갔다. 제게 떨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려 보니 둘 중 하나는 건너건너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아, 민호는 그제서야 제 상황을 인지했다. 건장한 덩치의 남자가 전봇대 아래에 쭈그려 앉아 새끼 고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폼은 제가 생각해도 좀 언밸런스였다. 남의 시선을 당당하게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던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힐끗, 둘러보며 광대 아래의 옴폭한 볼우물이 사라진 얼굴로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러나 민호는 그의 안락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술에 취해 올라올 때마다 숨을 몰아쉬게 되는 원룸 앞 언덕길을 절반 정도 올랐을 때쯤 제 발치에서 무언가 알짱거리는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 추리닝 바짓단을 물고 늘어지는, 아까 전의 그 고양이가 있었다. 뭐야.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야? 민호는 거의 다 올라온 언덕 끝에서 제가 지나쳐 온 길을 돌아보았다. 지대가 높다 보니 원룸촌이 위치한 S동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대학가답게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은 여러 채의 건물들과 호프집, 그 아래에 위치한 도시락 집, 편의점까지 지나야 비로소 둘이 만났던 전봇대와 의류 수거함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서 이까지 따라왔단 얘기지….
빗물에 잔뜩 젖어 색색 숨소리를 내는 쬐끄만 생명체를 보자 그는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왠지 모르게 제가 책임지지 않으면 얘가 밤새 어떻게 될 것만 같은 의무감마저 든다. 게다가 몇 발짝만 더 걸으면 제가 사는 원룸 앞에 당도하게 된다. …아, 이거 어떡하지 진짜.
끝없는 내적 갈등을 빚으며 허리를 굽혀 한참을 고민하던 중,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민호는 더 이상 재지 않고 우산 손잡이에 비닐 봉투를 걸었다. 잔뜩 젖은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이래도 되나? 사람 손 탄 거 같긴 한데 설마 주인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까지도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패딩 속으로 꼼질꼼질 파고드는 체온을 느끼며 그는 결국 공동 현관문의 패스워드를 눌렀다. 그래, 오빤지 형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랑 가자.
2.
“민호?”
원 플러스 원 증정행사를 하는 컵라면 코너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민호는 한 쪽에 꽂힌 이어폰을 마저 뽑고 고개를 들었다. ‘맞네, bro.' 찾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듯 들여다보며 반갑게 손을 내미는 의외의 얼굴에 민호는 어어, 눈 꼬리를 접고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양키스의 사이즈 캡을 눌러 쓴 토마스였다.
“장 보러 왔냐?”
“엉, 얼추 다 산 것 같아서 이제 집에 가려고.”
“그래, 뭐 나도….”
결국 고민하던 컵라면 묶음을 바구니 안에 던져 넣으며, 민호는 토마스를 따라 카운터가 위치한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고 보니 토마스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일 년이었다. 시간 잘 가네. 민호는 문득 일 년 전의,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토마스와는 2학년 2학기 초에 신청한 교내 버디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당시 민호에게는 몹쓸 수집벽이 있었다. 운동화.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홀린 듯이 운동화를 사들였다. 그것도 하필 N사의 에어 조던 리미티드 시리즈였다. 해외 직구로 살 수 있는 새 상품은 20만원 후반이었고, 이미 단종 된 상품은 중고나라에서 십 만원 안팎의 시세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두 켤레씩 꽂히는 대로 사 모으다 보니 원래부터가 몇 푼 되지 않는 대학생의 한 달 용돈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역 후에 알바를 해서 따로 모아둔 통장의 잔고도 거의 바닥을 쳤다. 결국 편의점에서 산 라면 한 봉지도 두 끼에 나눠 먹어야 할 형편이 되자 민호는 부모님에게 흥청망청 돈을 쓴 것을 들키지 않고 사비를 불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토토, 알바, 여건이 맞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여러 선택지를 재끼며 고민을 하던 중 발견한 게 바로 조교실 앞에 붙어 있던 버디 프로그램의 안내문이었다.
민호는 빠른 속도로 안내문을 훑었다. 버디 프로그램은 교내 유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과 1:1로 팀을 구성하여 학생의 한국생활 적응 및 문화적 언어적 교류 활성화를 위한 사회봉사학점 프로그램으로서……. 아 됐고 결론적으로 장학금 팔십 만원이랑 봉사학점 지급합니다 이 얘기 아냐?
수강 신청 때 넣지 못한 과목을 넣기 위해 조교 선배를 구슬릴 목적으로 들렸던 민호는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써 넣었고 운 좋게도 높은 경쟁률을 뚫은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국제 교류처에 불려가 제 외국인 버디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그게 1년 전의 토마스였다.
다수가 그러하듯, 연락처를 주고받고 차후 형식적인 보고서 작성 때만 만나 대충 말을 맞추려고 했으나 제 버디인 토마스는 의외로 에프엠 근성이 있었다. 어색한 상태로 민호는 토마스와 몇 번 밥을 먹었다. 씹고 있는 밥알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젓가락질을 하며 민호는 제가 메이저리그와 마블 무비를 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둘은 대강당의 교양 수업도 함께 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민호가 알게 된 건 강의 드랍도 못 하는 개강 5주 차였다. 85분동안 잠자코 강의를 듣고 있던 토마스는 강의 시간이 오 분 쯤 남았을 때 갑자기 교수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설픈 한국어로라도 본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학생의 학구열을 높게 산 것인지 교수는 클라우드에 백업해둔 논문까지 뒤적이며 답변을 내어 놓았고, 그 바람에 5분 후면 끝날 예정이었던 강의는 정시에서 십 오 분이나 더 흘러서야 끝나게 되었다. 연강이었던 학생들은 짜증을 내며 강의실 밖을 빠져나갔고, 개운한 표정으로 대강당의 문을 나서던 토마스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민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큰 소리로 민호를 불렀다. MINHOOOO!
쓸데없이 우렁찬 발성 덕에 대강당이 위치한 인문관 3층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의도치 않게 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쟤 아까 걔 아냐? 왜, 아까 방금 수업 마지막에 질문한…외국인…눈새……. 방금 같은 강의를 듣고 나온 학생들의 뾰족한 눈초리가 저와 토마스에게 우르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 음, 안녕…. 민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담배를 든 손을 들어 올려 간신히 인사했다. 내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아는 건 오바마와 영어 CSI 영화 몇 편이 전부긴 한데 그래 뭐가 됐든 너희 나라에서는 존나 눈치 같은 건 안 배우는 거냐 …….
그러나 민호의 얄팍한 고찰처럼 눈치는 없어도 제게 느껴지는 시선에까지 둔감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곱지 않은 주변의 몇몇 얼굴을 둘러보며 토마스는 물었다. ‘나 뭐 잘못했어?’ 쌍꺼풀이 짙고 눈이 맑은, 순진무구한 얼굴이 모로 기울어졌다. 순간 그 모습에서 민호는 지금쯤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있을 백치미 넘치는 남동생의 향수를 느꼈다.
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둥글어진 눈빛으로 담배를 끄며, 그는 제 앞에 파이팅 넘치는 기운을 발산하고 서 있는 외국인 친구에게 친근한 호칭을 붙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똘추야.’
“근데 민호, 집에 안 갔네? 방학이잖아?”
“어… 동생이 입시철이거든. 많이 예민해서. 이번 방학 땐 여기서 알바나 하고 보내게.”
“그래? 음, 일이 많이 힘든가봐. 얼굴이 헬쓱해졌네.”
아 그래…? 회상에서 돌아온 민호는 어설프게 웃으며 괜스레 손등으로 뺨을 한번 쓸었다. 토마스는 장바구니에서 꺼낸 것들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삑, 삑, 바코드 리더기를 거쳐 간 생필품들이 반대편에 쌓였고 그것들을 비닐 봉투에 옮겨담으며 그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뽑아들었다. “어쨌든 여기 있을 거라니까 반갑네, 조만간 맥주나 한 잔 하자.” 이거 원 플러스 원 맞죠? 마지막으로 장바구니에 넣은 컵라면을 재차 직원에게 확인하며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민호.”
“엉.”
“오늘 집에 손님 오셔?”
“……어?”
토마스는 알바생이 착실하게 바코드를 찍고 있는 카운터 위로 턱짓을 했다. 이틀 쯤 면도를 건너뛴 모양인지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돋은 턱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계산을 위해 제가 올려둔 것들이 눈에 걸렸다. 마블링이 선명해 한 눈에 봐도 육질이 좋은 상품임을 알 수 있는 갈빗살이 자그마치 한 팩, 두 팩, 세 팩이었다. 민호는 억지로 뺨의 근육을 당기며 대꾸했다. 아, 어……누가 좀 오기로 해서.
“엄청 귀한 손님 오시나 봐. 그것도 엄청 많이.”
엇, 룸메이트 전화 왔네. 나 간다?
주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재킷 등판의 쾌활한 타이포에 대고 손을 한참동안 흔들던 민호의 입 꼬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육만 팔천 오백 원입니다, 그저 포스기에 찍힌 금액을 앵무새처럼 고할 뿐인 알바생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그 무고하고 반질반질한 얼굴에 대고 차마 낭패감 짙은 한숨을 뱉을 수는 없어 민호는 까칠한 입술을 감쳐물고 지갑을 벌려 안에 든 지폐를 몽땅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잔돈이여~.’ 배춧잎을 일곱 장이나 내어 주었는데 돌려받은 것은 천오백 원 뿐이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사칙연산의 잔인한 결과물을 보자 삼켰던 한숨이 도로 올라왔다. 돈이 없어 담배도 끊고 시발 이게 사람 사는 거냐…. 민호는 알바생이 건네준 비닐 봉투에 무기력한 얼굴로 한우 팩들을 옮겨 담았다. 혀끝에만 대도 녹을 것 같은 이것들이 제 입에 한 점이라도 돌아온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칠만 원이나 지불한 오늘의 구매리스트 중 민호의 몫으로 돌아올 것은 원 플러스 원으로 간신히 하나를 더 확보한 컵라면 세 개 뿐이다.
그럼 저 나머지 사치스러운 한우 팩들은 다 누구의 배로 들어가는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던 민호의 머릿속에 문득, 지금쯤 따뜻한 방에 배를 깔고 누워 한가로이 리모컨이나 돌리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잠시 차올랐다 사라졌다. 토마스가 말한 귀한 손님이 아니라, 귀한 ‘품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호는 다시금 끊었던 담배가 간절해졌다.
3.
그러니까 이 현실성 없는 작금의 사태가 시작된 것은 종강 날-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밀려드는 숙취와 함께 눈을 떠야 했던 종강 다음 날부터였다.
전역한 후에도 몸 관리 소홀히 하지 말라던 모 선배의 말을 피와 살처럼 새겨들었어야 했다. 소맥을 아주 궤짝으로 달리다시피 마셔도 다음 날이면 해장이 다 뭐냐 아침 메뉴로 학식 치즈돈까스를 먹자 패기롭게 외치던 스무 살 때와는 확연히 몸 상태가 달랐다. 원룸 주인아주머니의 미적 센스를 짐작케 하는 시뻘건 꽃무늬 벽지-캐드 키드슨같은 디자인을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를 마주하고 누워 있자니 문득 갈증이 일었다. 민호는 잠시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물병을 꺼내 입에 털어 넣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렸으나 막상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물론 뜨끈뜨끈한 전기장판 위로 제가 몸을 붙이고 누워 있는 이곳은 운동장만한 거실을 갖추고 있는 고급 아파트가 아닌 원룸 자취방이었다. 게다가 남들보다 키가 조금 큰 편인 민호에게 침대에서 냉장고까지는 두 발짝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하지만 이럴 땐 몸을 일으켜 냉장고까지 걸어가는 그 두 발짝도 안 되는 거리마저도 천리 길 같이 느껴졌다. 민호는 알코올 냄새가 섞인 숨을 뱉으며 두터운 이불 속으로 몸을 옹송그렸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따가웠다. 루피처럼 팔이 늘어나서 누워서도 냉장고 문 열고 물가지고 올 수 있으면 존나 좋겠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느냐, 아님 숙취에 절은 육신을 회복하기 위해 갈증을 참고 잠을 더 청하느냐, 거의 감겼다고 봐도 무방할 눈을 찡그리며 생각할 때쯤 너무 많이 들어 외울 지경이 된 허스키한 여자의 음성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Shut up and put your arm around me.」
아, 그러고 보니 어제의 기억이 난다. 치킨을 사 들고 와서 캡틴 아메리카를 돌려 보다가 잠들었지. 그래……. 지난밤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자니 생각하는 것마저도 피곤해져 귀찮았다. 눈꺼풀이 무겁다. 힘겹게 반 쯤 치켜뜬 눈을 다시 감고 어물어물 잠에 빠지려던 민호는 또 다시 그의 청각을 자극하는 소음에 눈썹을 꿈지럭거렸다. 와삭, 와삭, 이번에는 무언가를 씹고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린다. 뭔 소리지. 뭘 먹는 소리 같은데. 모로 누운 자세 그대로 잠시 생각하던 민호는 납득했다. 아, 그래, 스티브 로저스도 식사를 하나 보지. 와삭, 와삭. 그러나 그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내가 저거 열 번은 넘게 돌려본 것 같은데 그런 장면이 있었던가….
생경한 기분에 구닥다리 꽃 패턴의 벽지와 마주하고 있던 몸을 느릿하게 뒤집었다. 렌즈를 빼 흐릿한 시야를 방해하는 눈곱을 훔쳐내고 몇 번 눈을 꿈뻑였다. 역시나 자랑스러운 캡은 열심히 방패를 들고 하이드라의 총알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와삭, 와삭. 그리고 이 정체모를 소리는 사력을 다해 전투중인 캡틴 아메리카의 앞, 앙상한 닭 뼈로 난장판이 된 앉은뱅이 밥상과 마지막 남은 다리 한 짝을 무자비하게 뜯는 흰 등짝에서…….
등짝?
인지하기가 무섭게 낯선 등짝은 홱 방향을 틀어 저를 응시했다. 민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혹여나 꿈인가 싶어 이불 속에서 팔을 내어 뺨을 꼬집었으나, “악!” 아프기만 했다. 현실이었다.
누운 상태 그대로 몸을 굳힌 채 멍청한 비명이나 지르는 민호를 보며, 어떻게 봐도 서양인이 틀림없는 흑발의 남자는 턱에 칠리소스를 범벅한 꼴로 입을 열었다. 잠이 좀 많다?
4.
말했잖아, 반류는 아주 옛날부터 인간들의 곁에 살아왔대도.
그럴 리가!
모든 종은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알맞게 생존에 유리한 형태로 진화하지. 네 발로 기는 포유류도 그렇게 진화를 거친 거야. 아, 원래 인류도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직립 보행하게 된 거라고. 그런 거 학교에서 안 배워?
그러니까 너님과 네 조상님들은 네 발 달린 짐승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겪어 이렇게, 어, 사람과 짐승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단 말씀이세요? 형광등 불 껐다 켜듯이 왔다갔다?
너 시발, 너, 너 뭐야 이 새끼야.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112에 직통으로 연락이 갈 수 있게 휴대폰의 긴급 통화 다이얼을 띄워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앞의 침입자를 때려잡을 야구 배트, 에프킬러 통 따위를 더듬어 찾는 민호를 무시한 채 자신의 이름을 뉴트라 소개한 남자는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네 발, 그 이후에는 다시 두 발의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왔다.
왓 더….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헐벗은 허리 아래로 수건을 두른 그를 보며 민호는 셀프로 제 뺨을 후려쳤다. 속고만 살았나. 한심한 눈으로 저를 훑는 뉴트를 밀치고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으나 성인 남자 한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욕실 그 어디에도 민호가 찾는 까맣고 앙증맞은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 쇼가 아니었다. 이제 저 정신병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의 말을 정말로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한겨울 군대에서의 상 탈의 구보 후에도, 주말 낮 땡볕에서 네버 엔딩으로 이어지던 군대스리가 후에도 멀쩡하기만 하던 정신이 아득해진다. 민호는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힘없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제 모습이 무척 얼뜨기처럼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 저 남자, 아니, 외계인, 아니 아무튼 저 이상한 침입자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 좀 믿지 그래?’ 저를 향한 답답함이 서린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들자 정면으로 보이는 널찍한 주방 창문에 제 모습이 비쳐 보였다. 물론 남자의 마른 몸도 마찬가지. 귀신도 아니었다. 시발 진짜잖아…. 민호는 다시 양 손바닥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니까 그, 네가… 어? 어제 그 전봇대 밑에서 주워 온 고양이…….”
“고양이? 야, 내가 그런 약해빠진 경종으로 보여? 모멸감 느껴지네. 살다살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야.”
시발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머리를 감싸 쥐는 민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뉴트는 책상 위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채 덮여 있는 랩톱을 가리켰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면 켜서 확인해 봐.”
“뭐?”
“노트북 켜서 직접 보라고. 지금쯤 대짝만하게 기사 떴을 테니까.”
결국 뉴트가 시키는대로 노트북을 열었다. 요 근래 들어 계속 피피티며 리포트에 시달려 전원을 제대로 끈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예 꺼놓은 것이 아니라 덮어놓기만 했던 거라 모니터는 금방 밝아졌다. 솔직히 마지막까지도 민호는 이 모든 상황이 친구들이 저를 엿 먹이기 위해 짠 고퀄의 몰카가 아닐까 의심했으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병신아 속았지?’ 등의 짓궂은 문구가 적혀 있으리라 기대한 바탕화면은 바뀐 것 하나 없이 무척 심플했다. 믿기 힘든 현실로 돌아온다. 그래, 아무리 몰카라 해도 어떻게 코앞에서 동물을 사람으로 바꿀 수가 있으랴. 애니마구스도 아니고 말이야.
다분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켠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새롭게 시작한 수목 드라마의 제목이었다. 동생이 좋아하는 아이돌 출신의 배우 X가 나오는데 학원 시간에 겹쳐 못 본다고 개거품을 물은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2위 역시 케이블에서 하는 드라마 제목, 3위, 정우성, 4위, 5위, 6위……죄다 연예인 및 예능 프로그램. 아니 대체 사람들이 말이야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 없고 드라마랑 예능만 보고 사냐? 사돈 남말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혀를 내두르며 평소 스포츠 경기의 스코어를 확인할 때만 들어가 보았던 뉴스 란도 클릭해 보았다. 역시 뉴트의 정체를 추측케 할 만한 이야기는 딱히 없었다.
너 뭐 연예인은 아닐 거잖아. 민호의 말에 남자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토록 자만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제게 보이는 관심이 없자 조금 시무룩한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진짜 별 얘기 없는데 혹시 이렇게 시선 돌려놓고 방심하는 사이에 등 뒤에서 칼로 찌르고 이러는 거 아니겠지 내 자취방에는 딱히 훔쳐갈 것도 없는데…. 아직도 의심의 여지를 거두지 않은 채 뉴트를 슬쩍 곁눈질하며 마우스나 짤깍짤깍 흔들고 있던 민호의 눈에 사회면의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G대공원에서 생후 2개월 된 흑표범 탈출, 인근 야산으로 도주 후 아직까지 생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설마.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리던 민호는 입 꼬리를 굳혔다. 이미 그는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한 차례 목도했으므로 모든 경우의 수를 배제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인 가설은 이미 머릿속에서 기정사실화되어 끝없이 한 쪽으로 뻗어나간다. 그러고 보니 어제 술에 취하고 비도 와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고양이 치고는 좀 덩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무거웠던 것 같기도 하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되짚으며 스크롤을 내리는 민호의 옆으로 왠지 모르게 흐뭇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 진짜 설마?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대신 민호는 남자를 보았다. 이게 너라고? 눈에는 눈. 눈빛으로 묻자 뉴트 역시 똑같이 눈으로 대답한다. 찡긋. 눈동자를 가리운 눈꺼풀이 팔락거렸다.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야, 너 말이야. 이게 진짜 너라면 신고해야 해.”
제법 힘주어 단호하게 말했으나 뉴트는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뭐, 좋아. 신고 해. 근데 과연 누가 네 말을 믿어줄까? 너도 처음엔 내말 안 믿었잖아.”
“…….”
“두 발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너처럼 이렇게 눈, 코, 입, 다리 두 개, 팔 두 개 멀쩡하게 달릴 거 다 달렸지. 이런 나를 누가 우리에서 탈출한 짐승이라 생각하겠냐고. 아까처럼 코 앞에서 모습을 바꾸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럴싸하다.
“아, 배부르네. 좀 잘까?”
낭패감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미동 없이 앉아있던 민호를 지나쳐 뉴트는 침대로 걸어가 구겨진 이불을 걷어내고 길게 엎드렸다. 별 방도 없이 껌뻑이고 있던 민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매트리스가 꺼진 침대로 향했다.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늘씬한 팔다리와 나른한 표정을 보니 사냥을 즐긴 후 포만감에 세렝게티 초원의 석양을 받으며 낮잠을 준비하는 표범의 모습이 언뜻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민호는 고민했다. 이제 뉴트의 말에 수긍하는 제 자신과, 당당하게 무전취식 중인 뉴트 중 누가 더 제정신이 아닌 놈인지 저울질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5.
처음 만났을 때 고양이로 착각할 정도로 작았던 표범은 하루가 다르게 덩치를 불리며 훌륭한 맹수로 성장했다. 어딜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제 침대에 엎드려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표범과 눈이 마주칠 때면 민호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공포와 당혹스러움 사이에서 종종 헤매던 그는 예전에 잠깐 썸을 타던 한 학번 아래의 후배와 에버랜드의 사파리 버스를 탔던 일을 기억해냈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육사의 안내에 따라 안전하게 개조된 버스 철장 너머로 맹수들에게 먹이주기 체험을 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고기가 달린 집게를 밖으로 내밀며 민호는 후배에게 보란 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봐, 하나도 안 무섭잖아. 이 정도면 고양이 대신 애완동물로 키워도 되겠네… 라니 씨발 지금 생각하면 허세도 그런 허세가 없었다.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다고 하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실제로 한 이불을 덮고 살고 있으니 살 떨리게 무서웠다.
민호는 수치심도 잊고 뉴트에게 사정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땐 제발 그 네 발 달린 털북숭이의 모습으로 변하지 말아 줘. 그럴 때마다 뉴트는 픽 웃으며 답했다. 왜,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할까봐? …아, 하긴 뭐 간단히 죽일 수 있기야 하겠다. 앞발로 눌러서 쓰러뜨린 다음에 목덜미를 이렇게 콱….
너는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이 새끼야! 그냥 하지 마, 좆같은 시뮬레이션도 하지 말라고! 생명을 위협하는 짓은 그냥 다 하지 마! 민호는 미물의 생명 하나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는 평화주의자가 된 마음으로 외쳤다. 이제는 정말로 무서워서 뉴트를 함부로 내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민호는 제 명줄의 안위를 담보로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풀은 입에도 대기 싫어하는 식성에 맞추어 토마스를 만났을 때처럼 저는 원 플러스 원 컵라면을 먹을지언정 알바를 두 개나 뛰어가며 한우를 상납했고, 열대 지방 출신답게 추위에 약한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보일러도 아끼지 않고 빵빵하게 돌려 면밀히 신경을 기울였다. 가끔 오가며 만나는 친구들은 민호를 볼 때마다 살이 빠진 것 같다며 어디 좋은 PT라도 받고 있냐고 물었지만, 절대로 좋지 않았다. 정신을 좀먹는 스트레스로 인한 타의적 체중 감소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민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애완동물로 키워도 되겠다니. 그는 과거로 돌아가 그 따위의 망언을 나불거린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제 살벌한 ‘애완동물’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주인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돈이 남아 있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은 걸 떠올릴 때마다 서글펐지만 앞서 말한 고기값이나 초과하는 가스비 등은 그래도 견딜만한 축에 속했다. 아직까지도 민호가 적응하지 못한 문제는 일정하게 찾아오는 뉴트의 발정기였다. 민호는 둘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뉴트에게 찾아온 발정기에 겪었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자다 말고 가위를 눌리는 듯한 갑갑함에 깨어났을 때 허리 위에 올라타 제 바지춤을 끌어내리며 어둠 속에서 희번뜩거리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던 장면은 정말로 충격과 공포가 따로 없었다. 그건 언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뉴트의 발정기. 이 시기가 되면 평소와는 체향이 확실히 달라지기 때문에 사실 오늘 아침 밥상을 들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둔감한 저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달큰한 향이 옅게 풍겼다. 이게 그 동물 대백과 사전에서만 보던 페로몬 발산인지 뭔지 하는 건가….
침대 위에 엎드려 옆 자리를 앞발로 펑펑 차는 흑표를 보며 민호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얌전히 이불 위로 등을 붙였다. 곧 까맣고 커다란 앞발이 아닌 희고 긴 다리가 민호의 허벅지를 감았다. 머리를 비우고 싶은데 자꾸만 잡생각이 든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랬는데 이래서였냐 그래 옛 어른들 말 틀린 것 하나 없네….
잠시 후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질끈 눈을 감는데 문득 침대 아래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고개를 내어 아래를 보자 불투명한 잠금 화면 위로 노랗게 카톡이 떠 있었다. 힘겹게 팔을 뻗어 바닥을 휘젓자 손 끝에 딱딱한 아이폰의 테두리가 닿았다.
「민호, 얘전에 맥주 예기 이번 주 어때?」
이 정도면 알아먹을 수는 있으니 빼먹은 조사야 그렇다 치고, 그만큼 얘기했더니 이거 아직도 예랑 얘 구분을 못 하냐…. 가볍게 혀를 차며 대화창을 누르려던 민호는 순간 턱 끝에 오른 밭은 숨을 뱉어냈다. 보기 좋은 근육으로 늘씬하게 잘 짜인 다리가 아까보다 강하게 옭아매어 판판한 배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야 뉴트, 이거, 숨, 숨 좀…. 늑골을 찌르는 무릎을 치며 컥컥거리자 이내 느슨하게 힘이 풀렸다. 그리고 목덜미에 축축한 온기가 닿았다. 절로 움츠러드는 목을 집요하게 핥으며 뉴트는 경고했다. ‘나랑 있을 땐 나한테만 집중하랬지.’ 그랬다. 제법 살벌한 위협 같긴 하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뉴트가 내걸은 조건이었다. 혀끝의 오돌토돌한 돌기들이 살갗을 여러 번 쓸었다.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걔 만날 거야? 만나서 술 마실 거냐고.”
뉴트는 기어코 매끈한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응, 이라고 대답하면 단번에 숨통을 끊어버릴 것처럼. 그리고 맹수의 송곳니에 목이 뚫린 채로 죽기에 아직 세상에 미련이 많은 민호는 어렵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웃음이 잔류한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잘 생각했어.’ 곧 바지 안으로 뜨거운 손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결국 들고 있던 휴대폰을 머리맡 위로 밀어버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 지랄하지 않아도 정말로 안 마실 거란다. 왜냐면 이 사단이 난 게 다 술 때문이었거든…….
1. 쓰는 내내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지금도 아무 생각이 ㅇ벗읍니다
2. 분명 신나고 싶어서 쓴 것 같은데
3. ....
4. 캐붕 주의 (._.
'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트민호] 오해와 오해 上 (0) | 2015.01.27 |
---|---|
[뉴트민호] Not your fault (0) | 2015.01.20 |
뉴트민호 단문연성 (0) | 2015.01.04 |
[뉴트민호] Cheers darlin' (0) | 2014.12.28 |
[뉴트민호] 우리는 네 다리로 걷지 (0) | 2014.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