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Fix you
a 2015. 10. 3. 00:38 |1. 월간뉴민 5월호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존잘님들과 멋진 프로젝트 할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고 즐거웠습니다 ㅠㅠ
2. 캐붕으로 인한 부끄러움 저으 몫이조
한낮의 스트라둔 대로는 그늘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작열하는 햇빛이 비처럼 쏟아지고 일광을 머금은 호박색의 지붕들은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마께로 손을 올려 차양을 만들고 거리를 오가는 저 인파 속에 섞여 있었던 뉴트는 연거푸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습기가 배어 찝찝해진 티셔츠 자락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켜 보았지만 머리꼭지 위로 올라 뒷덜미를 벌겋게 물들이는 태양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말이지, 런던에 있을 땐 생전 잘 흘리지도 않던 땀을 여기 와서 다 흘리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쾌청하다 생각했던 아드리아 해의 기후가 바람 한 점 없는 사막의 폭염 같은 날씨라고 여겨지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뉴트는 콧등 아래로 줄줄 미끄러지기만 하고 제 기능을 상실한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포켓에 짜증스럽게 걸어두었다. 한 꺼풀 밝아진 시야로 세월에 쓸려 반질하게 빛나는 돌길이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대로 전체가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거울을 연상케 했으나 지금은 그 풍경조차도 뉴트에게는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후우…….
갈증과 더위에 메마른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낮은 숨이 빠져나왔다. 토해내는 한숨마저 뜨거운 날씨였다.
태양의 자취를 맹목적으로 쫓아 이리저리 휩쓸리며 성장하는 식물들처럼,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바라는 게 많았던 부모님의 요구를 불만 없이 따르며 자라난 뉴트 아이작은 당신이 기대하는, 얌전하고 번듯한 아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주었다. 열아홉, 그는 부모님이 희망하는 학교에 진학했고, 스물 셋, 그들이 강요한 전공에서 학사 과정을 이수한 후 지난한 기다림 없이 그들이 원하는 직장에 입사했다. 아침마다 웰링턴 장군 동상 앞을 지나는 시티의 증권맨이 된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기뻐했다. 그 때 만큼은 뉴트 역시 튜브를 타며 어렸을 적 막연히 동경만 했던 넥타이 부대의 거리에 섞여들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어 했음을 인정했다. 거의 졸업과 동시에 회사 생활을 하게 된 뉴트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아침의 문을 열고, 업무를 처리하고, 폐장 1분 전까지도 한 벽면 빼곡히 적힌 숫자와 그래프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스트레스가 누적된 몸으로 귀가해 쓰러지듯 잠드는 매일을 맞이했다. 그렇게 반복된 일상을 보내기를 사 년째, 마지막 귀퉁이가 남은 토스트를 마저 구겨넣고 덜 채운 셔츠 단추를 잠그며 출근하던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던 일이었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유년시절의 성장 속에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은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던 그는 당신이 낳은 자식을 전리품처럼 취급하는 부모님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렸을 뿐이다. 갑작스런 회의감이 일 분 일 초가 급한 출근길의 그를 엄습했다. 그것도, 27년 만에.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희망을 어깨에 얹은 거울 속의 빈껍데기를 마주한 이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아주 바쁜 시기를 두어 번 넘기고 사직서를 냈다. 부모님도, 친구도, 직장 상사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판단 내려 결정한 최초의 일이었다. 좀 더 좋은 조건의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 이직을 할 것 같다고 부모님께 그럴싸한 핑계를 둘러 대었을 땐 기분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마치 큰 일탈을 꾀한 것 같은 느낌. 감회가 새로웠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커다란 박스에 물건들을 담아 회사를 나온 날, 제게 책엔 없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 그러나 이젠 의미 없는 직함과 내용들이 적힌 그것들을 발치에 내려 두고 뉴트는 소파에 기절하듯 누워 넥타이를 흔들었다. 멍한 눈으로 천장의 줄무늬나 세며 생각했다. 전부터 바래왔지만 숨 돌릴 틈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하지만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판타지 같은 것. 그리고 때마침 이렇게 찾아온 기회에 제일 하고 싶었던 것. …그게 뭐였지? 몇 가지의 선택지를 거치지 않아 해답은 금방 머릿속에 떠올랐다.
낯선 곳으로의 발걸음, 현실로부터의 완벽한 일탈.
여행이 하고 싶었다.
그는 그 길로 계획을 꾸리고 자신의 앞으로 나온 퇴직금 중 일부를 쪼개어 일찍이 비행기에 올랐다. 행선지는 크로아티아였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부다페스트, 프라하, 잘츠부르크와 같은 동유럽의 도시들을 생각하던 그는 처음 이 집으로 이사를 왔던 대학교 신입생 시절, 잡지에 우연히 함께 딸려온 엽서 속의 풍경을 보고 첫사랑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일을 기억해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물살을 쪼개어 달리는 바람에 스카프처럼 너울대는 터키색의 바다, 옅고 짙은 감색 지붕의 집들과 그들을 감싸 안고 있는 성벽. 책상 앞에 몇 년째 붙여 두는 것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던 미지의 그 곳이 크로아티아의 남쪽 끝에 있는 두브로브니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망설임 없이 런던에서 칠리피 공항까지 가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뉴트가 여행을 떠나리라 마음먹은 기간이 때마침 두브로브니크의 여름 축제 시즌이라는 점 또한 그가 선택한 행선지에 대한 생각을 굳히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예상대로 국경을 넘고 공항에 내려 아틀라스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쯤, 선배 여행자들의 조언대로 버스의 왼쪽 좌석에 앉아 창밖의 해안도로를 내려다본 그는 쪽빛의 물결과 그 위 뿌려진 보석처럼 흩어진 섬들, 고고히 떠 있는 성채와도 같은 도시의 고색창연함을 보며 벅찬 감동과 설렘을 느꼈다. 아드리아 해의 진주, 진정한 지상 낙원. 모국의 시인과 극작가가 남긴 찬사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을 보며 뉴트는 손가락을 꼽았다. 앞으로 삼 주. 길다고 할 순 없지만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여기에 머물며 그동안 시달렸던 복잡한 생각들을 그림 같은 이곳에 모두 내려두고 가기로 했다. 낯선 곳으로의 첫 걸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뉴트는 황망한 얼굴로 옆구리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현지인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아 소매치기가 성행하는 런던에서도 한 번 당한 적 없었기에 치안이 좋은 편이라는 이 곳 역시 괜찮으리라, 안일하게 여겼던 것이 화근이었다. 한밤중에 젊은 여자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한 곳이라며 가이드북과 다녀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해도 결국 이곳은 제 고향에서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타국이었다. 눈뜨고도 코 베어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수면 아래의 자갈들과 물고기 떼가 비쳐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와 쾌청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런 걱정들은 생각도 안 났던 것이다. 뉴트는 문득,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이 야속해졌다.
여행을 오기 직전에 들뜬 마음으로 구매한 카메라며 지갑, 휴대폰, 여권이 담겨 있어야 할 백팩에는 먼지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다. 숙소에 둘 캐리어와 매고 다닐 백팩에 돈을 나눠 넣어두어야 한다는 걸 깜빡하고 지갑이니 여권이니 하는 중요한 소지품들을 죄다 한 쪽에 넣고 다녔는데 그걸 털어간 것이었다. 여행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삭막한 현실에서의 도피에 들떠 제법 묵직했던 가방이 깃털마냥 가벼워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손금을 따라 땀이 축축하게 고인 손바닥을 눈가에 덮으며 뉴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정시마다 울리는 청동 종을 품은 채로 우뚝 솟아 고고한 꼭대기가 하늘에 걸린 시계탑과 도시를 수호하듯 아래를 굽어보는 성 블라시오 상, 세월을 머금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빨갛고 하얀 의상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로 중세의 어느 시절에서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의 모습이 무척 멋졌지만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없어진 휴대폰과 카메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여권과 지갑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공항에서 구시가지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여권을 검사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없어졌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예약해둔 호텔을 찾다가 견딜 수 없는 더위에 눈에 보이는 대로 카페에 들어가 목이나 축일 생각으로 앉지 않았더라면 정말 호텔에 갈 때까지 영영 모를 뻔 했다. 카드를 잃어버린 게 제일 중요한데 어서 빨리 신고를, 아니, 그보다는 여권이 우선인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온통 엉킨 실타래처럼 꼬였다. 흰 색의 차양이 덮인 테라스에 앉아 더위 머금은 얼굴을 쓸어내리는 뉴트를 발견한 직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지만, 그는 조금 이따 다시 주문하겠다는 손짓을 해 직원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금 패닉에 빠져들었다. 전망도 훌륭하고, 필레 게이트와의 위치도 가까워 관광에 유리한 제 숙소는 체크인과 동시에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예약 메일의 내용을 상기했다. 이대로라면 돈이 없어 예약해 둔 숙소에 가지도 못한다.
…이제 어떻게 한다. 혹시 몰라 두브로브니크에 영사관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숙지하고 왔다. 그럼 일단 영사관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그러나 그의 아이폰은 다른 물건들과 함께 부지불식간에 그의 손을 떠났고 뉴트는 현지의 언어를 할 줄 몰랐다. 크로아티아, 그것도 관광업으로 지역 경제의 수익을 창출하는 두브로브니크의 사람들은 열 두 살만 되어도 영어를 곧잘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드북과 인터넷을 기십 번은 더 뒤적거려 마치 제 집처럼 익숙해졌다 생각한, 런던의 절반도 안 될 이 작은 도시가 갑자기 아스라이 멀고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더위와 당황에 벌겋게 익은 얼굴로 침착하려 애쓰며 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 테이블에 간단한 탄산음료를 시켜 놓고 책을 읽는 남자가 보였다. 가까운 곳에서 잠시 외출을 나온 것 같은 편안한 차림으로 독서에 골몰하고 있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표지만 보았을 땐 일견 산문집 같은 책으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책이 영어로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동양인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뉴트는 초조한 상황과 건조한 날씨에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생면부지의 남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무섭도록 낯선 곳에서 직면한 위기 상황은 그간 차려왔던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다.
“저기.”
그러나 남자는 뉴트가 제 앞에 선 사실도 모른 채 완벽하게 책에 빠져 있었다. 책장 사이로 거의 고개를 처박듯이 시선을 파묻고 이어폰을 낀 그의 모습을 보며 뉴트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여태껏 살아오며 남에게 무엇을 묻기보단 가르쳐 주었던 일이 많은 입장인지라 이렇게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은 영 어색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한번 무시를 당하자 자신감이 떨어졌으나 작금의 사태는 그런 것들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무엇을 찾는 것인지 여전히 책에 눈을 고정한 채로 앞에 놓인 탄산음료 병과 선글라스 사이를 더듬거리던 그는 헛손질 끝에 제 앞에 드리워진 그늘의 존재를 인지하고 고개를 올렸다. 짧게 친 머리를 단정하게 세워 올린 그는 뉴트와 비슷한 동년배로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고저가 낮은 악센트였지만, 분명 완벽한 영어였다. 생각해 보면 오며가며 계속 영어를 사용했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 멀리 떠나온 타지에서 들은 모국의 언어는 또 다른 느낌으로 혼란스러운 심정을 어루만져 주는 힘이 있었다. 감개무량한 마음에 문득 콧날이 시큰해졌지만 울컥한 심정을 억누르고,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미간을 좁힌 낯으로 뉴트는 입을 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입 꼬리가 어설프게 둥글었다.
“저, 정말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빌릴 수 있을까요?”
“예?”
“어, 그리고 혹시 이 근처에 영국 영사관이…… 아, 아니, 이건 모르시겠죠.”
횡설수설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곳 사람이 아님이 분명한 동양인 남자에게 영사관의 주소를 물어본다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한 손에 쥐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이 억겁처럼 길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전화를 빌려달라는 낯선 이를 살피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남자의 눈이 뉴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 큼지막한 캐리어와 청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 반절 넘게 튀어나온 관광 지도, 구멍이 뻥 뚫린 걸레짝이 되어 한 쪽 팔에 걸린 백팩에 순차적으로 닿았다. 짧은 시간 안에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것 같은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을 몇 번 밀고 액정을 두드렸다. 그리고 곧 뉴트에게 그것을 선뜻 건네주었다. 다이얼을 미리 불러내어 수고로움을 덜은 화면에는 몇 자리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멀뚱하니 그것을 들여다보는 뉴트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영사관 번호에요, 영국 영사관은 라파드 쪽에 있고요. 거기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 놓은 거 있으니까 위치 한번 확인해 보세요.’ 절반 쯤 읽은 책을 테이블 위에 엎고 느릿하게 팔짱을 끼는 남자에게 한번 눈길을 주며 뉴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행정 업무 때문에 자칫 수도인 자그레브까지 이동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컸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절차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여권은 재발급 신청을 하면 되고, 빈 털털이가 된 주머니 사정은 긴급 송금제도를 이용해 영사관에서 경비를 지원 받기로 했다. 물론 경찰서에 가서 도난 신고를 하고 여러 가지의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귀찮은 일들이 생기겠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기에 이 정도의 고충은 마땅히 감수해내야 했다. 그냥 해결방법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감사했다. 마치 ARS 서비스처럼, 분실물들에 관련된 안내 사항과 영사관의 주소를 물 흐르듯 설명해주는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뉴트는 여태껏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저와 같은 문제로 영사관에 문의를 했던 것인지를 가늠했다. 하긴, 이곳의 풍경이 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멋지긴 하지.
내일 오전 중으로 영사관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잡고 통화를 종료한 뉴트는 티셔츠 자락에 번들거리는 액정을 문질러 닦고 다시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 두었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급작스럽게 피로가 몰려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그는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내어 탈력한 듯이 걸터앉았다. 유순한 눈매를 흘끔 올려 뉴트를 빤히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높이가 낮아졌다. 테라스에서 카페 내부로 이어지는 입구에 서서 뉴트의 주문을 기다리던 직원은 그가 이미 메뉴를 주문한 남자의 일행이라 여긴 모양인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뉴트는 편하게 기대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걸친 몸을 앞으로 숙여 무릎에 팔꿈치를 괴었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갔지만 사실 아직도 제게 닥친 청천 벽력같은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찾아온 여행지에서 닥친 끔찍한 현실에 그는 패닉과 무의식의 경계를 헤매다 제게 전화를 빌려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티셔츠 위에 걸쳐 이미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체크 셔츠를 벗어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마른세수를 하고 나서야 그것을 기억해낸 뉴트가 감사를 표하자 남자는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며 심드렁하게 무릎을 포개었다.
“원래 소매치기 많고 그런 동네는 아닌데… 운이 나빴네요.”
딱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오지랖에 마음을 위로받았기 때문일까, 남자가 꺼내놓은 말 한 마디에 봇물이 터진 것처럼 뉴트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자그레브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라 아직 일정도 많이 남았고 이제 시작인데 여행의 첫 머리부터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며, 본인에게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끔찍한 경험이지만 듣는 사람 -그것도 초면의- 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담에 불과할, 어느 가엾은 여행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밥은 차치하고 예약한 호텔도 돈이 없어 갈 수 없다는 눈물겨운 대목을 늘어놓고 있을 때,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의 읍소를 들어 주고 있던 남자가 입을 떼었다.
“그럼 잠은요?”
“뭐, 게스트 하우스에 묵어야겠죠.”
그러니까, 현금이 아예 한 푼도 없는 건 아니고 아까 공항에서 버스 티켓 살 때 받은 거스름돈이 있는데…. 뉴트는 상체를 뒤로 젖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허리에 묶어둔 셔츠 자락을 제치고 꾸역꾸역 꺼낸 그의 손바닥에는 뉴트의 전 재산이 놓여 있었다. 꾸깃꾸깃 구겨진 요셉 옐라치치의 얼굴 위에 십 쿠나짜리 지폐가 두 장 더. 그는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매만졌다. ‘어, 그래도 영국보단 물가가 싸겠죠……?’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물론 그가 말한 것처럼 크로아티아는 영국보다 물가가 높지 않았다. 그 사실만큼은 자명했다. 그러나 수도인 자그레브보다 더 물가가 비싼 성수기의 관광지에서 50쿠나도 되지 않는 돈으로 숙소를 구하겠다 결심하는 것은 객기에 가까웠고,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은 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현금을 다시 주머니에 주섬주섬 밀어 넣는 뉴트를 보던 남자는 가만히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무언가를 재듯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다시 뉴트를 응시했다.
“청소 잘 해요?”
무심하게 툭 뱉는 얼굴에서 어쩐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 * *
열쇠는 여기 있고, 난 맨 안쪽 방 쓰고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 냉장고에 보면 식빵이랑 달걀이랑 우유… 뭐 다른 것들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먹어도 좋아요. 깨끗하게 설거지 하고 엎어두기만 한다면. 아, 그리고 아까 올라오면서 봤던 3인실. 다섯 시에 온다고 했거든요? 옥상에 널어놓은 시트 가져와서 정리하고 바닥 좀 닦아 줘요.
정돈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이 생긴 첫인상과는 달리 남자는 정리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도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내내 공용 거실-겸 주방-의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차곡차곡 겹쳐 모서리에 맞추어 밀어 두었다. 모서리가 너덜너덜해 코팅을 씌워 둔 관광 책자, 색연필로 곳곳에 체크가 되어 있는 버스 노선도… 마지막으로 타일 바닥 위에 굴러다니던 냉방기 리모컨을 그 위에 올림으로서 완벽한 정리를 마무리한 그는 뉴트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한다고, 도와 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건네려던 감사의 말은 1층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꺼내지 못한 채 혀끝에서 뭉그러졌다. 어 잠시만요, 좁고 나무로 된 층계를 다급히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뉴트는 그가 건네주고 간 열쇠를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에 다녀간 걸까. 방 번호가 적혀 열쇠에 붙어 있는 견출지가 낡아 있었다.
청소 잘 해요?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니 눈을 꿈뻑이고 있자 남자는 빨대를 뽑고 몇 모금 남지 않았던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보기 좋게 그을린 목울대가 여러 번 오르내렸다. 얼음을 와득와득 씹으며, 결국 그는 읽다 만 책을 덮고 테이블 위에 뒹굴던 선글라스를 갈무리해 티셔츠의 목 부근에 꽂았다. 옷깃이 늘어나며 드러난 살갗에 뉴트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따라와요.”
“어딜요?”
“우리 집이요. 길바닥에서 노숙하는 것보다 일을 돕고 안전한 곳에서 묵는 게 낫지 않겠어요?”
“…….”
“어느 숙소든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러니까,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소매치기를 당한 뉴트에게 선뜻 휴대폰을 빌려준 남자는 구시가지 안에서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을 구멍은 있었다.
두브로브니크의 골목은 마치 돌벽으로 만들어진 미로 같았다. 그 풍경은 유년시절에 자주 꾸었던 흑백의 세계를 회상케 만들었다.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미로 속 막다른 골목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만 같은 두근거림. 돌로 만들어진 계단은 그 개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고 또 높았다. 그 높이에 집채만한 캐리어를 들고 한참을 올라가고 있자니 전신에 땀이 흘렀지만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형편이라 집 가는 길이 뭐 이렇게 험하냐는 불평불만은 곧 죽어도 하지 못했다. 뉴트는 눈썹께로 흘러 내려 시야를 방해하는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집에서 나설 때 왁스로 모양을 낸 앞머리가 젖어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단장 따위는 모두 내려 두었다. 이렇게 땀을 흘리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세계적 체인의 이름을 단 호텔과 고급 풀 빌라를 두어 개쯤 지나치고, 파란 바탕에 흰 침대가 그려진 돌벽 위 간판을 열 개도 넘게 지나쳤다고 생각했을 때, 제법 아득한 높이를 앓는 소리 한번 없이 올라간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는 무심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계단이 좀 많죠?’ …저기, 좀 많은 정도가 아니거든요. 대답을 삼키며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계단 위로 캐리어를 힘겹게 올린 뉴트는 벌겋게 익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
잠시 잠깐, 넋을 놓았다.
성벽 안에 둘러싸인 구시가지의 가장 안쪽, 녹음이 우거진 산과 등을 붙이고 있어 계단도 많고 지대도 높았던 남자의 집 아래로 푸른 바다와 두브로브니크의 성곽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장난감처럼 선명한 오렌지 빛으로 들어 찬 지붕들 사이로 미색의 돌계단들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처럼 제 발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담벼락 아래로 만개한 능소화와 라벤더 꽃무리가 담장을 덮은 채 음영을 드리우고, 주인 모를 어느 집의 발코니엔 곱게 꽃을 피운 선인장 화분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으며, 좁은 돌담길을 따라 고양이가 나른한 산책을 하는 풍경은 방금 전까지 제가 지나쳐 온 길이 맞나 자문해볼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호텔 못지않은 전망이라고 자신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감상은 그쯤 하고 와요. 마치 자신의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발길을 재촉하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뉴트는 그 곳에서 한동안 계속 서 있을 뻔 했다. 고생이 아주 눈 녹듯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허투루 이 계단을 오른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민호였고, 한국인이었다. 그의 민박은 산 쪽에 있어 아래쪽보다는 확실히 시원한 미풍이 불었다. 감빛 지붕에, 사 층까지 창문이 달리고 가로 폭이 좁은 집. 바람에 춤추듯 흔들리는 옷가지가 널린 빨랫줄 아래에는 낡고 빛바랜 서핑보드들이 벽에 기대어 몸을 말리고 있었다. 민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우둘투둘한 길 위로 캐리어를 끌던 뉴트는 문득 끔찍스러운 계단을 올라오며 보았던 기억들을 더듬었다. Sobe. 민호의 집 대문 앞에는 이 골목의 여타 숙소들처럼 숙박객을 받는다는 의미의 팻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여긴 간판이 없네요. 아까 올라오면서 보니까 호객 행위도 엄청 하던데. 민박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얼마 안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래된 건물의 외관을 감상하듯 훑는 뉴트에게 향해 있던 눈길을 거두며, 현관에 들어가기에 앞서 민호는 잘 마른 빨래들을 걷었다. 포근한 햇볕 냄새가 내려앉은 베개 커버와 수건, 티셔츠 같은 것들이 건강한 팔뚝 위로 차례차례 걸렸다. 이건 아직 덜 말랐나, 두터운 침대 시트를 매만져 건조 상태를 가늠하며 민호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불법이라서 그래요.”
아, 다 말랐네. 남아 있던 시트까지 모두 걷어 어깨에 걸고 현관문 열쇠를 찾아 돌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뉴트는 그나마 남아 있는 짐이 든 캐리어의 손잡이를 소중하게 그러쥐었다. 뭔가 꺼림칙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집을 고치기가 힘들었다. 특히 구시가지의 성벽 안에 위치하고 있는 집들은 더 더욱 그랬다. 온수가 나오지 않거나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도 쉽게 개보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본의 아니게 낙후된 시설을 방치해둔 채로 손님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들에 비하면 민호가 운영하고 있는 민박은 무척 현대식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몇 년 전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애초부터 손님을 받을 작정으로 1층에서 4층까지 이어지는 좁고 오래된 나무 계단을 제외하고는 내부 인테리어를 모두 조금씩 뜯어 고쳤다고 말했다. 허가되지 않은 영업이었기에 홍보는 블로그로 이루어졌다. 처음 온 여행자가 대문 옆에 안내판이 붙어 있지 않은 집을 두드릴 리는 만무했고, 알음알음 다리를 건너 아는 사람만 이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벌써 운영한 지 몇 년이 지나도 민호의 민박은 별 일 없이 무탈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성수기가 되면 담합이라도 하듯 가격을 올리는 여타 민박들에 비해 숙박료가 절반이나 저렴한 이곳에 묵는 손님들은 고맙게도 모두 비밀을 지켜 주었다.
호실 수가 그리 많다고 할 순 없지만 매일같이 집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좋은 추억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고, 아무리 체력이 좋은 성인 남자라 하더라도 민호 혼자 4층짜리 민박의 살림을 떠맡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민호가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할 때면 그 대신 집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민호는 용돈을 벌기 위해 민박의 소일거리를 도와줄 수 있는 학생을 구했고, 마침 시험 기간을 맞이해 민호의 일을 도울 여유가 없는 학생 덕에 뉴트는 이곳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소매치기를? 와, 진짜 의외네요.”
자그레브에 있는 대학교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척은 올해로 열일곱이었다. 커피포트를 찾지 못한 뉴트가 물 끓는 속도가 느린 인덕션과 한참 씨름을 하고 있을 때 ‘3층 2인실 쓰는 형이세요? 저 대신 일 도와주러 오셨다면서요?’ 하고 얼굴도장을 찍은 그는 주방으로 들어와 커피포트를 찾아 건네고 냉장고에 넣어 둔 빵과 잼을 꺼내 긴 탁자에 앉았다.
민호 형은 뭐든지 두 번 손 안 가게 자기가 직접 하기 때문에 크게 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냥 간단한 침구 정리랑 쓰레기 나오면 내다 버리고, 바닥 청소만 해 주시면 될 것 같고요… 아, 여기요. 여기서만 나는 잼이에요. 먹어 보면 기절할 걸요?
아직은 순수해서 겁이 없는, 어린애 특유의 천진함으로 뉴트의 경계심을 허물은 척은 저 나름의 조언과 함께 귀퉁이가 노릇하게 그을린 토스트 접시를 밀어 주었다. 뭘 그렇게 잔뜩 퍼서 열심히 바르나 했더니 저 줄 것이었던 모양이다. 크게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기대감에 차 재촉하듯 턱짓을 하는 저 어린 얼굴에 못 이겨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맛있네. 지나치게 달지 않고 부드러운 맛에 그는 몇 번을 더 우물거렸다.
“소매치기를 당한 것도 드문 일이긴 한데… 사실 저는 형이 민호 형의 도움을 받았다는 게 더 의외처럼 느껴지네요. 뭐 물론 그런 상황이라면 저라도 흔쾌히 도와줬을 것 같지만 말이에요.”
“…….”
“정말 무슨 바람이 불었대, 남의 인생에 관심 끄고 사는 그 형이.”
방실방실 웃던 척은 벌써 두 개째의 빵을 먹어치웠다. 혈색을 띄고 통통하게 올라붙은 뺨이 연신 실룩였다. 남녀를 불문하고 잘 먹는 애들은 보기가 좋았다. 무화과 잼이 발린 토스트를 신나게 씹으며, 주방 가득 향을 메운 홍차를 이따금씩 들이키던 그는 빵 부스러기가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 형이 원래 좀 그래요. 무뚝뚝하고 정 없어 보이지만, 착해 빠져가지고. 그냥 좀 즐기면서 살아도 될 텐데 쓸데없이 책임감 같은 것도 너무 많이 짊어진 것 같고. 본인에게 너무 관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가끔 보면 좀……,”
“좀? 좀 뭐?”
“……아녜요, 아무 것도. 그 어… 삼 층 제일 바깥쪽 방이라니 뷰는 좋겠네요. TV 옆에 있는 창문 꼭 열어보세요.”
아, 그리고 그 방 에어컨 리모컨 고장 났어요.
뭐라고 더 벙긋거리다 말허리를 자른 척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괜한 말을 했다, 싶은 표정으로 뉴트의 눈치를 슬쩍 보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접시를 차곡차곡 포개어 싱크대로 가져간 그가 뉴트 몫의 접시까지 씻어 건조대 위에 얹어두고, 다시 공부를 하러 가야 한다며 잰걸음으로 주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뉴트는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머쓱히 뒷목을 긁었다. 무뚝뚝하지만 난처한 상황의 저를 도와준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 어린애에게 안타까움을 살 정도로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건가.
* * *
키가 큰 야자수들이 우거진 도로 위에 집결한 버스들은 이곳의 지붕들과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육면체의 공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로마 신화 속 자유의 여신의 이름이 새겨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르르 버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덥고, 좁고, 라파드에서 구시가지까지 오는 내내 시끄럽게 떠들던 뒷자리의 덩치 큰 남자들에게 떠밀리듯이 내린 뉴트였지만 그의 얼굴에 불쾌하다거나 언짢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침 이곳 버스 터미널에 왔을 때 유독 크다 생각하며 넘겼던 건물이 힐튼 임페리얼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성벽 너머의 돌길과는 다르게 잘 닦인 포장도로와 구획별로 정리된 건물들, 일조량이 많은 도시에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마치 저 입구를 지나는 순간 시공간을 뛰어넘을 것처럼, 현재와 과거를 경계 짓는 관문과도 같은 필레 게이트가 저 만치에 보였다. 햇빛을 피하기 위해 착용한 모자를 고쳐 쓰며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의 허리춤 언저리를 재차 확인했다. 너덜거리는 백팩이 아닌, 잘 여며진 크로스백 주머니 안에 갓 발급받은 여권과 두툼한 현금 봉투가 들어 있었다.
급하게 찍은 사진이라 표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쨌건 여권도 재발급 받았고, 친구가 대신 보내준 돈 또한 영사관을 통해 받았다. 국제 전화라 길게 늘어지는 번호가 낯설 법 한데도 선뜻 전화를 받아 준 친구는 생명의 은인을 운운하는 뉴트에게 돌아오는 대로 맥주나 사달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한 시간 반, 광활하게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로크룸 섬의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걷고 싶은 사람일지라도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성벽 투어였지만 절벽 부근을 지날 때쯤 나오는 두어 개의 카페를 제외하고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성벽 위는 햇볕을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홍보 책자와 관광 지도를 꺼내 표시까지 해 주며 친절한 안내를 마친 영사관 직원은 기왕 일찍 걸음하신 거 오후 햇살이 더 따가워지기 전에 성벽을 돌아보시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뉴트는 남은 일정 중에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 성벽을 한 번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결코 넉넉하다 말할 순 없지만 아직 일정은 며칠이나 더 남아 있었고, 자꾸만 곱씹어 보고 싶은 이 작은 도시는 하루면 거의 웬만한 관광지를 다 둘러 볼 수 있으니까.
성벽을 걸으며 마실 물을 사고, 지도를 확인하며 길을 건너려던 뉴트는 인도 끝에 위치한 정류장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커다란 캐리어를 솜씨 좋게 들어 버스에 실어 주고 있는 민호였다. 한 발 물러서 버스의 문이 닫힐 때까지 그와 손 인사를 나누고 있던 유리창 안의 얼굴들을 확인했다. 아, 아래층 2인실을 썼던 여자 둘. 뉴트는 휴게실의 청소를 하느라 오며 가며, 그녀들이 무뚝뚝한 민박집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잘 웃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귀여울 것 같아. 몸도 좋고. 어쩌면 민호가 그녀들의 짐을 들어주러 터미널까지 배웅을 나온 데에는 다 그녀들의 치밀하고 교묘한 모의가 있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묵게 된 숙소였지만 뉴트는 민호가 운영하는 그 사 층짜리 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물론 방이 3층이라 가파르고 오래된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귀찮았지만 남자 혼자 묵기에 적당한 방의 창문을 열면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그가 넋을 놓고 보았던 예의 그 풍경이 그러한 불평을 모두 불식시켜 주었다. 어디에 셔터를 갖다 대도 작품이 될 이 도시의 풍경은 매일 아침 일어나 창을 열 때마다 그를 감탄케 했다. 민호의 집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비단 그 뿐이 아니었다. 가끔 각국 각지에서 온 손님들이 모여 맥주 파티를 즐길 때 김이 오르는 프라이팬을 슬쩍 내미는 민호의 음식 솜씨도 맛있었고, 매일같이 바뀌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제법 재미있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성벽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대로 민호를 찾아가 돈을 지불하고 제대로 방을 예약할 계획이었다. 정말 짐을 들어줄 목적으로만 나온 건지, 샌들에 통이 넓은 반바지 차림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돌아가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은 뉴트는 그의 다부진 어깨를 잡아 눌렀다. 민호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 일찍 나가시더니.”
“라파드 다녀오는 길이에요. 이제 여권도 새로 발급받았고 돈도 생겼어요. 오늘 저기 한 바퀴 돌 건데, 돌아가는 대로 계산할게요. 그 방 계속 제가 쓰게 해줘요.”
“그러세요.”
어차피 트윈 룸이라 손님을 더 받을 법도 한데, 민호는 뉴트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의 방은 예약을 받지 않았다. 무언의 배려였다. 어려울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던 민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저기, 바빠요?”
“왜요?”
“안 바쁘면 오늘 하루만, 나랑 같이 다닐래요? 내가 밥 살게요.”
사실은 민호를 만났을 때부터 이게 묻고 싶었다. 그리워서 떠나는 게 여행이라지만, 언제나 제일 그리운 건 역시 사람이었다. 저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는 것과 둘이 함께 나누는 것은 분명 느낌이 다를 테다. 비록 그 상대가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예상대로 민호는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전하며 핑계를 늘어놓았다. 전 됐어요, 그냥 혼자 보고 와요. 보시다시피 아주 잠깐 짐 들어 드리려고 나온 거라 한참 걸어 다니기엔 차림도 딱히…….
그러나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는 왁스 바르지 않은 머리 위로 덮이는 온기를 느꼈다. 뉴트가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민호에게 그대로 씌워준 탓이었다. 그는 제 집업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씨익 웃었다. 이제 됐죠? 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아마 민호는 보지 못할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는 당황스러워 하는 민호가 자신과 꼭 같이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 엄청 길치거든요. 길 잃어버리면 민호 씨네 집에 못 돌아갈 수도 있다고요.”
“아니 그거야 길에 널린 게 인포메이션 센터…,”
“집을 관리하는 게 민호 씨 일인 건 알지만, 하루 종일 그렇게 처박혀 있는 거 안 지겨워요? 아니 사람이 가끔 바람도 쐬고 해야지.”
아, 뭐, 그리고 오늘은 척도 집에 있잖아요 그렇게 쫓기듯이 집에 안 돌아가도 되면서……. 억지스럽고 막무가내로 시작한 설득이 결국 투정 비슷한 것으로 마무리되자 까만 유리알 위로 드러난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뉴트를 마주하고 있던 민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또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민호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뉴트가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 흥얼거렸다. 자, 갑시다. 이곳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버린 마음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자그마한 액정 속에 그것들을 가두는데 몰두하느라 생생하게 펼쳐진 풍경을 놓치는 것보다야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일상으로 회귀한 후 언젠간 휘발되어 희미해지게 내버려 두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순간들이었다. 통로의 폭이 좁은 성벽 위를 걷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짙푸른 아드리아 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렌지 빛의 지붕들과 간간히 보이는 종탑이 고즈넉한 느낌을 더하는 올드타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담아내는 곳마다 엽서로 만들어도 손색없을 풍경들에 필레 게이트로 들어선 이후 뉴트는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부지런히, 제게 주어진 순간들을 눈에 담았다.
“원래 사람이 그렇게 무감해요?”
양 손에 들린 젤라또 중 하나를 건네고 민호의 옆에 걸터앉으며 뉴트가 물었다. 골목의 입구에 세워둔 노란 입간판을 보아하니 처음 그를 만났던 게 아마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았다. 물론 책자에서 보던 관광 명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스트라둔 대로 역시 두 말 할 것 없이 멋졌지만, 두브로브니크의 숨은 대미는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골목 투어였다. 골목 안에 자리 잡은 미니 카페와 젤라또 가게들은 상점 앞 계단에 방석을 내어 놓았다.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목을 축이고 있으면 그곳이 곧 노천카페의 역할을 했다. 계단 아래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노랫소리를 잠시 귀 기울여 듣던 민호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뉴트가 관심을 기울여 본 것은 비단 여행지의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스폰자 궁과 오노프리오 분수,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처럼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관광지의 모습에 경탄할 때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늘 그래왔듯 자신과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저와 같은 감정을 나눠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뉴트는 그 때마다 감흥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유적들을 바라보거나, 아예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관광객의 행렬에 눈길을 주는 민호의 옆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결코 크지 않은 눈매가 더욱 더 좁다랗게 좁혀질 때면, 피곤한데 내가 괜히 데리고 온 건가, 하는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서운한 감정이 교차했다. 척이라든지 다른 손님들과 다함께 있을 때 보면 얘기도 곧잘 하더니 나랑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은 내내 하품이나 하고 말이야. 자신이 그 집에 묵으며 딱히 민호에게 미운 털이 박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보던 뉴트는 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오래 봐야 얼마나 본다고, 왜 이 남자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순간 그는 내면의 어느 깊은 곳에서 안개처럼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타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하는 인간의 당연한 본능보다는…… 뭐랄까, 스물 하고도 일곱 해를 사는 동안 몇 번쯤 겪은 적이 있는 어떠한 기시감이었다. 눈치 없이 고개를 드는 그 기시감에 뉴트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나는 앞으로 일 주일 후면 떠날 사람이라고.
“저 시계탑도 그렇고 분수대도 그렇고, 절벽에서 봤던 경치도 그렇고. 멋지지 않아요? 아니 계속 봤는데 영 감흥 없어 보이길래, 혹시 민호 씨 로봇 아닌가 하고.”
빈정거림인지 농담인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웃겼던 모양인지 길게 줄을 선 젤라또 가게 앞의 손님들을 구경하며 콘을 베어 물던 민호가 픽 웃었다. 어, 웃을 때 보조개 파이네. 크림이 묻은 걸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슥 문질러 깨끗해진 입가가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며 뉴트가 생각했다.
“런던에서 왔다고 했죠. 빅벤이랑 타워 브릿지 보면 어때요, 매일 봐도 멋지고 설레요?”
…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 뉴트는 멍하게 입을 벌린 채 뒷머리를 매만졌다. 한 해에 삼천만명 이상이 다녀가며 사랑에 빠지는 런던의 야경은 뉴트에겐 그저 피곤에 절은 퇴근길에 지나다니며 보는 흔한 풍경이었다. 줄곧 30년 가까이를 런던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좀 더 어렸던 시절에는 빅벤과 런던아이를 관람하기 위해 몰리는 외국인들을 보며 저걸 보러 런던까지 왜 오지? 하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그래, 누군가가 감탄하는 런던의 야경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자신에게는 무미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신이 감탄한 오늘의 풍경 역시 민호에게는 평소 때와 다름없는 일상인 것이다. 뉴트는 자신의 부탁 때문에 거의 한 나절을 땡볕에서 끌려 다닌 민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나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손님 맞을 준비나 했을 텐데. 생각이 짧았던 자신의 실수였다.
“아, 생각해 보니 민호 씨는 여기 자주 와 봤을 텐데 그걸 생각 못 하고… 미안해요.”
“아뇨 뭐 좋았어요. 오랜만에 바람도 쐬었고. 이렇게 골목골목 다니면서 군것질 한 것도 오랜만이고. 여기 있으면, 가끔 정신을 빼먹거나 한 박자 더디게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경치에 매료되어서.”
회상하듯 말하며, 민호는 어느새 다 먹고 껍데기만 남은 젤라또의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포개어 접었다. 뉴트는 민호가 처음 이곳에 와서 제가 오늘 본 아름다움을 처음 접했을 때 지었을 표정을 잠시 상상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아드리아 해를 보면서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웅장하고 엄숙한 대성당을 보았을 땐 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멍하니 입을 벌리면서, 역시 다른 이들처럼 경외감을 느꼈을까.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빛나는 이 도시를 보면서 감탄했을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보지 못해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이 다음엔 어디 갈 거예요?”
뉴트는 크로스백 주머니에 꽂아 놓은 관광지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달짝지근한 과육으로 갈증을 해소한 입가를 매만지면서, 종이 위 형광펜과 메모의 흔적을 명민하게 훑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우리가 지금 여기 이 부근쯤에 있으니까요, 민체타 탑을 가기 전에….
“스르지 산? 여기서 보는 석양이 예쁘대요. 엽서로도 본 적 있어요.”
“거기 갈 거면 저는 빼놓고 가요.”
“왜요?”
“…….”
“아, 고소공포증 있어요? 케이블카 못 타나?”
“그런 게 아니라….”
뭐라 설명하려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 뭐요? 놓치지 않고 되물으려던 뉴트는 대답을 잇지 않고 애꿎은 젤라또 껍데기만 못살게 굴고 있는 민호의 표정을 보았다. 제가 씌워 준 모자 챙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하관에 힘이 꾹 들어가 말아 물고 있는 입술과 내리깐 눈에서는 그와 상반된, 무언의 감정들이 비쳐졌다. 그리움, 회상, 그리고 아주 약간의, 상처. 좁은 골목의 유리창에 부딪혀 파편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이채로운 감정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조금만 더 해가 기울었다면 그늘에 가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것들이다. 그 장소에 얽힌 무언가라도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말하기 원치 않아하는 사연을 굳이 캐내고 싶진 않았다. 그를 따라 침묵을 지키며, 뉴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개를 올렸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던 해가 어느덧 시계탑의 꼭대기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럼 스르지 산 말고, 다른 데 갑시다. 책엔 없지만, 민호 씨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했던 곳. 거기로 안내해 줘요.”
* * *
“거 봐요, 개인적인 생각이라니까.”
테라스에 나란히 서 있는 뉴트의 어깨를 툭 치며, 민호는 멋쩍게 코끝을 훔쳤다.
햇빛을 등지고 선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민호의 팔목을 끌어당겨 일으킨 뉴트는 다짜고짜 민호에게 그만이 아는 명소로 저를 데려가 달라 부탁했다. 자신은 무언가를 추천해주는 데 소질이 없다며 극구 거절하는 민호였지만 결의에 찬 뉴트는 끈질겼다. 집요한 괴롭힘 끝에 그는 민호로부터 ‘자주 가는 데가 있긴 한데….’ 로 시작되는 자신 없는 답변을 받아냈고, 결국 그를 앞장서게 만들었다.
민호가 뉴트를 데리고 간 곳은 남쪽 성벽의 끝에 있는 어느 가게였다.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쯤이면 불이 들어오는 각등과 담장 위로 핀 라일락이 방문자들을 반겨 주는 그 가게는 가정집을 카페 겸 갤러리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었다. 자주 방문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반긴 주인은 민호와 친숙한 인사를 건네고 마치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둘을 테라스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
주문한 요리가 나올 동안 민호는 테이블 바로 옆으로 붙어 있는 테라스 창을 열고 손짓했다. 딱 이 자리에요. 나와서 봐야 해요. 먼저 서비스된 레몬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던 뉴트는 잔뜩 고양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테라스의 문턱을 넘었다. 성벽 투어도 그저 그렇고, 대성당마저도 그냥 성당이구나, 하고 시큰둥하게 넘길 수 있는 현지인이 추천하는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근사한 뷰이기에.
가장 먼저 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지붕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지려면 멀었지만 확실히 꼬리가 길어진 햇빛이 지붕 위로 머물렀고, 제가 딛고 서 있는 발코니 아래로 각자의 사연을 가진 골목들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골목의 사이사이로 자그마한 아이들이 와다다 뛰어놀다 다시 어느 골목으로 사라지고 바로 옆 노천극장에서는 축제 기간을 맞이해 저녁 공연을 준비하느라 스텝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금 더 시야를 멀리 두면 건너편의 돌산과 함께 북쪽에 있는 골목들까지 모두 조망할 수 있었다. 분명 제가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아뇨, 멋져요. 멋진데…… 그냥, 난 민호 씨랑 미묘하게 코드가 다른가 봐요. 음, 그러니까 나는…….”
민호 씨가 추천해준 곳에 오면 뭔가 확, 세상이 밝아지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교훈 같은 장대한 걸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하게 사람들 사는 풍경이니까. 뉴트는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과 함께 뒷말을 삼키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원래 어디든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뭐. 대충 그런 반응 예상하긴 했어요.”
“아뇨 뭘 또 그렇게까지. 멋져요. 앞서서 너무 근사한 풍경들을 많이 봐서 그렇지.”
“말했잖아요, 아무리 멋진 장소라도 그 곳이 일상이고 현실이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요. 나 역시 마찬가지에요. 분명 누군가는 감탄할 풍경인데도 나한테는 무디게 느껴진다고요. 왜냐면 나는 저 풍경 속에 숨어 사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내가 꼭 저 세계에서 배제된 3자가 되어 저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단 말이에요. 마치 연극처럼.”
“…….”
“그러니까 여기 서 있으면 어쩐지, 내가 이곳에 터전을 잡기 전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든다고. 그래서 종종 와요. 오는 건데…….”
당연히 뉴트 씨랑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러게 추천 같은 거 해달라고 하지 말라니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뉴트의 앞으로 김이 오르는 리조또를 밀어 주며 민호는 제 몫의 접시를 챙겼다. 짤막한 눈썹을 한숨 쉬듯 들었다 내리고 곧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드는 그의 얼굴에서 뉴트는 문득,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읽었다.
“그리워요?”
“뭐가요.”
“여기에 정착하기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요.”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다.
“나도, 민호 씨도. 누구나 모두 그리워하는 시절이 있고 소중한 기억들이 있어요. 하지만 기억을 되돌린다고 해서 시간까지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추억은 그 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한 거고요. 몇 안 되는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에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은 너무나도 길어요. 그리움에 과거를 쫓는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잖아요. 이것 또한 과거가 될 텐데,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
“천 피스짜리 퍼즐로 치면, 딱 스무 조각 정도. 평생에 걸쳐 아주 짧은, 한 시절의 추억만을 양분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 아깝고 가여워. 언젠가는 그 한정된 시간의 벽 속에 갇혀서 지쳐 버릴 거예요.”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낸 그 바로 다음 순간, 뉴트는 자신이 이 남자의 개인적인 영역에 대해 지나치게 참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전 저보다 몇 살이나 나이가 많을 법한 제 사장을 안타까워하던 척의 이야기와, 돌아올 수 없는 어떤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젖은 그를 위로해주겠답시고 건넨 말이었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은 위로는 쓸데없는 참견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오지랖을 부리지도 않았을 텐데. 이곳의 로맨틱한 경치가 판단력을 흐려지게 한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크흠, 그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한 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포크로 앞에 놓인 샐러드를 뒤적이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저기, 민호 씬 내가 왜 이 나이에 여행 다니는지 안 궁금해요?”
“몇 살인데요?”
“스물일곱이요.”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차라리 제 과거를 끄집어내는 게 낫겠다 싶었던 뉴트는 민호의 눈치를 흘긋 살피며 물었다. 제발 자연스럽게 넘어가자. 그러나 밥알을 씹으며 생각에 빠진 듯 말을 고르던 민호가 남긴 답은 참으로 담백했다.
“누구나 다 말하기 싫은 일이 있지 않을까요.”
* * *
동유럽의 해는 길었다. 밤 아홉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태양을 삼키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나서도 한동안 지속되던 푸른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골목마다 똑같은 모양을 한 가스등들이 하나 둘씩 불빛을 밝히고 나면 비로소 도시 위로 아늑한 밤이 내렸다. 하루 종일 후덥지근한 거리를 걸어 다녀 피로해진 몸을 씻어내고 적당히 가벼운 책 한 권과 함께 등을 시트 위로 붙일 때쯤, 뉴트는 민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잔 더 할래요?’ 벌어진 문틈 사이로 상체를 들이민 그의 손에는 스크램블 에그와 구운 소시지, 와인 병이 오른 쟁반이 들려 있었다. 벌써 준비까지 다 해두고서 이제 와 의견을 묻는 척이라니. 민호는 웃으며 옥상의 테라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긴, 잠들기엔 아직 이르지. 두브로브니크의 밤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활력이 넘쳤다.
“멋지다, 진짜. 혼자 보기엔 아까운 광경인데. 민호 씨는 저런 풍경을 줄곧 혼자 봤어요? 이렇게 낮도 밤도 로맨틱한 곳인데. 연애 하고 싶단 생각, 안 들었어요? ……연애도 안 하고 혼자 뭐 했대.”
마치 암실의 갈라진 틈으로 햇살이 스며든 것 마냥 성벽을 에워싼 황금빛 물결은 큰 대로와 골목 사이사이를 빠짐없이 휘감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민가의 불빛들은 작은 촛불을 잔뜩 모아 켜둔 것처럼 일렁였다. 낮과는 또 다른 별천지처럼 보이게 하는 야경을 배경으로 농담을 던지며 고개를 돌리다 민호의 얼굴을 본 뉴트는 웃고 있던 입매를 굳혔다. 일견 무표정해 보이지만 담담한 그 얼굴 위로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쓸쓸함. 또다. 예의 그 표정. 몇 번이고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마주하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 표정 뒤로 감추고 있는 사연이 대체 뭔지, 말 못할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구나 다 말하기 싫은 일이 있지 않을까요.
해가 기울어지던 오후, 카페에서 그가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누구나 지난날의 상처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덮어두고 모르는 척 하는 것보단 때론 표면 위로 들춰내어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는 것이 상처를 더 빨리 치유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뉴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처를 그냥 덮어 두고 방치하면 곪고 만다. 그렇게 곪은 상처는 정말로 치료하기가 어려워진다. 높은 확률로, 치료한다손 치더라도 아주 큰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
“내 얘기 해 줄까요?”
달짝지근한 와인이 목구멍 너머로 몇 잔쯤 넘어갔을 때,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뉴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강요에 따라 의지와 선택 없이 살았던 날들, 적성에 맞지 않았던 전공과 직장. 런던에서는 술김에라도 한 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이곳에 있으니 절로 나오게 되었다. 술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괜히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이 작은 도시의 마력인지도 모른다.
“뭐…내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흔하다면 흔한 얘기죠. 그러니까 이제 민호 씨 얘기 해 줘요. 원래 내 얘기 같은 거 귀찮기도 하고 민망해서 잘 안 하는 편인데, 민호 씨 때문에 일부러 한 거예요. 그냥 나는, 민호 씨가 궁금하니까. …말해 봐요, 하필이면 왜 크로아티아에요.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면서요.”
멀리서부터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에서 무슨 공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름기 묻은 손을 휴지에 문질러 닦으며, 민호는 저 너머에 펼쳐진 빛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크고 작은 지붕들의 끄트머리와, 하늘에 걸린 전선 줄 너머로 보이는 구름과 하늘이 복숭아 빛을 띄웠다가 멍든 것처럼 옅은 보랏빛으로 다시 물들고, 점점 어두워져 푸른색이 자취를 감추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불빛들이 켜지면 비로소 볼 수 있는 풍경. 벌써 사 년째 이곳에 살면서 숨을 쉬듯, 정말 지겹게 봐온 모습이었지만 이곳의 야경은 종종 이렇게, 평소와는 다른 생경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이 기기묘묘한 분위기를 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어딘가에 불쑥, 털어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민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언젠가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가볍지만 때로는 진중한 것도 같은, 이 이상한 남자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기에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지금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만 어차피 얼마 후면 떠나고 못 보게 될,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이니까.
“원래 크로아티아에 올 때 혼자서 온 건 아니었어요. 둘이서 왔지.”
“…애인? 어쩌다가 헤어졌어요?”
“헤어졌으면 소식이라도 들었겠죠.”
뉴트는 말없이 와인을 들어 그의 잔에 채워주었다. 사과와 위로가 찰랑이는 그것을 내려놓으며 민호는 말을 이었다.
제법 먼 동유럽에서 건너왔다며, 같은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가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학생이라고 했을 때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로아티아? 아, 축구 잘하는? 거기 동유럽이었어? 그러나 민호는 불과 몇 달 만에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그 나라의 바다가 무척 아름답고, 해가 길어 야경을 보려면 우리나라보다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세세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발전에는 그 남자의 노력이 있었다. 취미가 같아 매번 저와 함께 조깅이나 공을 찼고, 키가 컸었던, 금발의. 해사하게 웃으면 더더욱 빛이 나는 그를 보며 민호는 종종 해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 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자상했던 그에게 끌려 남들 눈에도 유별났던 친구 사이가 지나치게 특별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아 두었던 목돈을 가지고 새로운 터전에 도착했을 땐 스물다섯으로 지금으로부터 딱 사 년 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두브로브니크로 돌아온 지 두 달 정도가 되었던 그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 지도 어느덧 사 년이나 되었다는 뜻이었다.
“처음 한두 달 정도는 집도 구해야 했고, 돈도 조금 더 모아야 했고. 여러 가지로 초석을 다지느라 바빴어요. 그 사람에게는 고향이었지만 어쨌든 나한텐 새로운 곳이니까. 교통사고가 났던 그 날 함께 가기로 했었던 게 아까 낮에 뉴트 씨가 얘기한 스르지 산이었고요. 두브로브니크를 한 손에 담을 수 있다는 그 곳에 올라가서,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미래를 응원하자고. 뭐 결국은 가지 못했지만. 아무튼 사 년 내내 성벽을 오가면서도 케이블카를 타든, 차를 타고 올라가든 그 산의 전망대까지 올라가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그렇게 멋진 풍경을 혼자 보고 있으면 왠지 외로울 것 같으니까. 그 사람 생각이 날 것 같아서요.”
……아, 근데 손님들이 찍어 온 사진은 몇 장 봤어요. 내일도 날씨 좋고, 아마 모레까지 쭉 맑을 테니까 뉴트 씨도 꼭 가 봐요. 성벽 투어랑 스르지 산 정도는 다녀가야 두브로브니크에 와 봤다고 할 수 있죠.
분명 상처가 되었을 일을, 남의 이야기 하듯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뉴트는 일 층 휴게실 벽에 걸어둔 보드 속 방문객들의 폴라로이드를 보았던 기억을 되짚었다. 각국에서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자취 속에 그의 흔적이 있었을까. 뉴트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이 여유롭고 로맨틱한 곳에서 어딘가 결핍이 느껴지는 얼굴을 할 때마다 민호가 안타까웠다. 기회가 생긴다면 제가 그 결핍을 채워 주고 싶을 정도로.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감정이 불어나자 한편으로는 이미 떠난 사람을 미련스레 추억하고 현실을 피하려 드는 민호도 원망스러워졌다. 질투심이 차올랐다. 저도 모르는 속도로 그에 대한 마음이 발전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오늘 하루 종일 그의 얼굴을 살폈던 그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있잖아요, 내가 감이 좀 좋은 편이라 그러는데.”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와인 잔을 괜히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민호가 시선을 흘긋 올렸다. 뉴트는 입술 안쪽 살을 꾹 깨물고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죠, 그 사람.”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트가 자신했듯 그의 뛰어난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분명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침묵이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저도 그 쪽이라.”
그리고 아주 천천히, 중력에 이끌리듯, 뉴트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기울였다. 고개를 비틀고 잔뜩 곪은 상처를 숨긴 채 모든 것을 체념한 척,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하는 입술에 위로하려던 순간 뺨을 붙잡혔다. 점점 벌어지는 시야로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본인의 입으로는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내어 놓기에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술기운에 들뜬 건 저 뿐이었다.
“취하셨네.”
마주친 눈길을 슬쩍 피하고 머쓱한 듯 뉴트가 몸을 주춤 물리자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었다. 제 몫의 접시를 차곡차곡 겹쳐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어쩌면 도망가는 것도 같은 뒷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서,
“이제 그만 본인을 위해 살아가요. 당신 때문이 아니잖아.”
마치 그를 붙잡듯, 걸음을 멈춘 민호의 등에 대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은, 민호 당신이 죽은 자신을 못 잊고 이렇게, 남은 시간 동안 혼자 쓸쓸하고 외롭게 사는 걸 바랄까요? 이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일 마냥, 해탈한 사람처럼 초연한 척 굴면서…… 실은 미련이잖아요.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것도, 이제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계속 남아있는 것도.”
“…….”
“물론 자신과의 추억이 담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어준다면 고맙겠죠.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바라지 않았을 거야. 내가 누리지 못한 만큼 그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걸 빌었겠지.”
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잘 살아가야 해요. 그걸 바라고 있을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를 붙잡듯 다소 급하게 쏟아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뱉은 그 말 중에 진심이 아닌 것은 없었다. 저 남자가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뉴트는 돌아선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재차 곱씹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제 발언은 그저 어떻게든 꼬드겨 보려고 상대방의 상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쿨한 척, 현실적인 척 배려 없이 쏘아붙인 이기주의자의 자기 합리화 같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저 고지식하고 철벽같은 남자에게 좋게 보였을 리는 꿈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이래저래 최악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에게 진 기분이었다.
“……쉬세요.”
그 어떤 답변도 없이, 민호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묵직한 발소리가 철제 계단 위로 길게 이어졌다. 조금의 조급함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발걸음은 제 발언이 그에게 눈곱만큼의 영향도 주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얼굴을 맞대고 지낸 지 고작 얼마 되지 않은, 그저 그의 집에 묵는 수많은 손님들 중 한 명이니까. 그와 자신의 거리를 인지하자 새삼스럽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미친, 대체 내가 뭐라고!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옥상에서, 뉴트는 자책하듯 테이블 위로 머리를 쿵 박았다. 그 반동에 먹다 내려둔 포도 몇 알이 탁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바다 위로 쏟아진 달빛은 마치 숨을 쉬듯 반짝였다.
이게 다 야경 때문이야. 빌어먹게 예쁜 야경.
……역시 혼자 보긴 아까웠다.
* * *
“Z대로 갈 것 같아.”
뭐라고? 정적을 가르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인기척에 분무기를 들고 화분을 살피던 민호는 등을 돌렸다. 동시에 그의 어깨에 무언가가 콕, 부딪히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두세 장으로 묶인 종이 뭉치를 내밀고 있는 척이었다. 제법 세게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코를 움켜잡고 종이를 내민 척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어, 미안. 민호는 종이를 받아들고 문서의 상단에 크고 두꺼운 글씨체로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입학 통지서.
요 근래 들어 그 좋아하던 잠도 줄이고 공부에 몰두하더니 결국 합격한 모양이었다. 분무기를 내려놓고 척의 통지서에 시선을 고정하며, 민호는 소파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대에 찬 얼굴로 옆에 붙어 따라오는 척에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숱 많은 고수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트리며 그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양 뺨에 주근깨가 오르고 동글동글해서 그저 귀엽기만 했던 어린애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이렇게 사회로 발을 내딛게 되는 시기가 다가올 만큼 성숙해졌다. 실제로 키도 많이 자랐고 말이야. 민호는 이어져 있는 문서들을 두어 장 더 넘겨보았다. 등록금 납부처, 입학식, 기숙사 이용과 같은 안내 사항이 적혀 있었지만 커리큘럼이 달라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실질적 조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잘 됐네, 수고했어.’ 하고 노력의 결실에 대한 칭찬만을 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자그레브에 위치한 그 공립 대학교를 꿈꿔왔던 척의 입장에서는 그 멋없는 반응에도 크게 만족한 것 같았지만. 제 앞으로 온 몇 장의 종이를 마치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봉투에 밀어 넣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척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 맞다. 3층 2인실 쓰는 형이랑 무슨 일 있었어?”
“뉴트 씨? …일은 무슨.”
“그래? 아까 아침에 우유 가지고 들어오면서 보니까 오늘은 엄청 일찍 나가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아는 척 하려고 했는데 어딘가 좀 이상한 거야.”
아니 막 형 방문 앞에 서서 막 이렇게, 똑똑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렸다가, 못 두드리고 다시 내렸다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쉬다가, 혼자 막 얼굴을 문지르더니 그냥 내려오더라고. 나는 또 그 형이 지갑이라도 털려서 방값 못 내는 건가 했지.
팔짱을 끼고 짝다리 짚은 발을 달달 떨며 그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는 척을 보며 민호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지 같은 층을 쓰는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선 시각이 되어서야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던 그가 이렇게 해가 오르기 무섭게 도망치듯 집 밖을 나선 이유는… 아마도 제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였을 테다. 민호는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수신이 확인 된 음성 메시지가 한 건. 새벽 네 시를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각에 도착한 것이었다.
「아까 일 미안해요. 내가 주제넘었어요. 민호 씨가 내 말로 인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그, 어…… 음, 그래요. 질투했어요. 그렇게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련을 안고 사는 민호 씨를 보니까 나한테는 기회의 여지조차 없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사실 기억을 안고 살든, 추억을 털어내고 현재를 보든, 중요한 건 민호 씨의 마음이죠. 즐겁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고, 또 때론 아프기도 하고 상처 받기도 했지만 과거의 그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요. 남들은 미련하다고 할 지 몰라도 민호 씨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 선택이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말고…… 뭐 신경도 안 쓰셨겠지만. …아무튼, 나는 민호 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잘 자요.」
어제 새벽 늦게까지 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 너머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기에 이 시간에 통화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메시지가 온 시간을 짐작해 보니 아무래도 이걸 녹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 주저하면서도 주눅이 들어 우물우물,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진중하게 남겨 둔 그의 메시지를 서너 번은 더 돌려 들은 것 같았다. 민호는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침대까지 끌어 와 뺨에 붙인 채 제게 해줄 말을 고르며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었을 뉴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사람을 완벽하게 안다고 자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하나의 사실만큼은 제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질투했어요.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도와준 은인에 대한 호의에서부터 비롯된 감정인지, 혹은 단순한 호기심인지, 제가 생각지 못한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날을 거듭할수록 온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다.
예상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뉴트에게 마음이 끌릴 것을 민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소매치기를 당해 전화를 빌려달라던 그에게 영사관 주소까지 찾아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었던 때부터, 자신의 무의식은 이미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제만 해도 그가 입을 맞추려 제게 얼굴을 기울였을 때 사실 민호는 좀 설레었었다. 인정했다. 술을 더 마셨었거나, 아님 야경에 조금만 더 깊게 취해 있었더라면 아마 그의 입맞춤에 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치듯이 지나가 또 이곳을 떠나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불필요한 감정은 접고 그를 밀어내어야 했다.
아무튼 오늘 아침 제 방문 앞에 서 있었다던 뉴트를 한참 동안 따라하던 척은 그 형의 잘생긴 얼굴만큼은 흉내 낼 수가 없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대로 하체만 빙글 돌려 제법 키가 자란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웠다. 팔걸이에 머리를 뉘인 채 몸을 뒤채어 편안한 자세를 찾고 휴대폰을 가로로 넓게 잡은 척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그 형. …닮았더라.’ 발랄한 게임 오프닝 음악 위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닮았더라.
주어가 없어도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기억. 그를 잃어버린 이후로 자신은 그 한정된 시절의 기억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남의 일이라고는 관심도 없던 제가 뉴트를 선뜻 먼저 도와준 것도 그의 생각이 나서였다. 여행지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잔뜩 당황한 얼굴을 한 뉴트의 모습에서 민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처럼 어벙벙하기 짝이 없던 유학생 시절의 그 남자를 떠올렸다.
물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리 닮은 것 같지도 않지만.
“이제 나까지 자그레브로 떠나면 형의 발목을 붙잡고 과거를 생각나게 만드는 일들은 정말로 없을 거야.”
“…….”
“나는 형이 행복했음 좋겠어. 진짜야. 그리고…….”
퐁, 퐁. 아, 죽었다. 기계적인 효과음 뒤에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고 일어나 척은 민호를 응시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의 눈이었다.
“우리 형도 그걸 바랄 거야.”
* * *
동유럽을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여름 축제 시즌이다 보니 이 자그마한 민박집도 방이 비는 날이 없었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물론 한국어로 쓴 블로그를 굴리고 있긴 하지만 크게 접점이 없는 동유럽의 먼 나라를 어떻게 알고들 찾아오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얼마 전에 크로아티아를 배경으로 한 인기 예능이 방영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이번 달에는 부모님께 전화도 한 통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프로필 사진을 확인한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던 동생의 SNS 계정을 들어가 보니 다들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오전에 걸려온 문의 전화들을 모두 받고 예약 리스트를 체크하고 있자니 어느덧 숙박한 지 삼 주가 다 되어가고 있는 3층의 2인실이 눈에 들어왔다. 옥상에서의 그 날 이후로 벌써 삼일 째, 민호는 뉴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오늘 아침엔 모처럼 다 같이 먹을 식사를 만들어 그를 깨우러 갔지만 몇 번의 노크 후 열어 본 뉴트의 방에서는 쓰지 않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옷가지 두어 개와 캐리어, 다 마신 캔 맥주만이 민호를 맞이하고 있었다. 척이나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새벽같이 집을 나선 후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 제보들을 들으며 민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두브로브니크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관광지를 모두 돌아볼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기에 벌써 묵은 지 이 주가 넘은 뉴트가 관광지를 둘러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는 것은 굉장히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아마 관광이 아닌 다른 이유, 그러니까 저와 마주칠 일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도망치듯 다닌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았다.
…그렇게 미안했나?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제대로 붙잡고 얘기를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런 식으로 거리를 좁혀 봤자 피차 좋을 게 없다. 민호는 그의 체크아웃까지 남은 일수를 확인했다. 이틀. 그래, 이런 어색한 관계도 이틀만 더 버티면 된다. 어차피 그는 곧 떠날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치 주문이라도 건 것처럼,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그에 대한 생각은 민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성가시게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땅히 들어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 어둠이 내리고, 상하이에서 왔다는 대학생 손님들이 맥주 파티를 함께 하자 권유했을 때까지도 의자에 몸만 앉힌 채 민호의 정신은 딴 곳을 향해 있었다.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왜 안 오지. 혹시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소매치기라도 털린 게 아닐까. 생긴 거랑은 다르게 허술한 면이 있던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을 때 현관의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1층으로 뛰어 내려간 민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척이었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놀란 민호는 자문했다. 뭐가 아쉬워?
“어…… 왔어.”
“응, 맛있는 냄새 나네. 야식 했나봐?”
척의 팔에는 아침에 널어 두었던 베개 커버며 티셔츠들이 걸려 있었다. 아 씨, 다 젖었네. 척은 그것들의 귀퉁이를 잡고 탈탈 털어 작동하지 않는 라디에이터 위에다 걸쳐 두었다. 카펫에 물이 떨어져 바닥을 짙게 물들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민호가 물었다.
“밖에 비 와?”
“엄청 와. 아마 새벽까진 안 그칠 것 같은ㄷ…… 형 어디 가?!”
흠뻑 젖은 스냅백을 벗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 놀란 듯 묻는 척에게 운동화를 꺾어 신고 벌써 저만치에 달려가며, 민호가 대답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비 내리는 두브로브니크의 거리는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민호는 젖은 돌길 위로 가스등의 불빛이 비쳐 온통 반들거리는 대로 위를 달렸다. 아마 멀리 간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뉴트는 커녕 뉴트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색이 짙어질수록 마음이 급해져 몇 번은 아예 우산을 쓰는 것을 포기하고 뛰기도 했다. 어디 간 거야, 대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몇 안 되는 행인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눈으로 쫓았다. 역시나 그 속에 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꺼풀 안으로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스며들어 따가웠다. 그것을 어깨 죽지로 문질러 닦으며 민호는 머릿속을 더듬었다. 스트라둔 대로, 루자 광장, 수도원, 또……. 하루에 두어 번도 넘게 마주하는 관광지들을 줄줄이 열거하다 잠시 생각이 멈췄다. 제가 들리지 않은 곳 중 관광객들이 자주 갈 만한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택시를 잡아탔다.
예상대로 제가 찾던 뒷모습은 그 곳에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후드 하나만을 뒤집어 쓴 채 전망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뉴트를 보자 안도와 동시에 왈칵, 이유 모를 짜증이 솟구쳤다.
“미쳤어요? 비 오는데 뭐하는 거야?”
…민호? 돌아보는 얼굴이 놀랍도록 침착해서 기가 막혔다. 뉴트는 완전히 몸을 틀어 민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걸까. 민호는 반사적으로 제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우산을 기울였다. 색깔이 짙게 변할 정도로 축축해진 후드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뉴트는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 등 뒤로 고갯짓을 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내려가려고 했는데 경치가 너무 좋아서. 비오는 날도 멋지네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비 오면 내려왔다가 나중에 보면 되지, 미련스럽게 뭐 하는 짓이야? 눈매를 뾰족하게 치켜세우고 뉴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민호는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이틀. 이곳이 현실이 아닌 남자에게 나중은 없겠구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런데 민호…, 여기 올라올 일 없을 거라면서요.”
“…?”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 이제야 생각났다. 떨쳐내기 힘든 기억이 묻어 있어 감히 올 엄두도 내지 못했던, 누군가와 함께 미래를 꿈꾸자고 약속을 했던 곳. 언젠가는 버려야 할 그 기억들이 떠오를 것만 같아 죽어도 오지 않겠다 다짐한 이곳으로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달려온 자신은 바로 지금, 눈앞의 남자와 마주보고 그 공간에 서 있다. 택시를 타고 전망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지키지 못했던 과거의 약속들이나 그리운 얼굴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말로 생각도 안 났다. 그냥 이곳에 뉴트가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를 걱정했어요?”
한 발짝 더, 우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며 뉴트가 우산대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여러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아직 그 마음을 전하기에는 정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단어들이었다. 민호는 제 모습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래, 딱 저 색깔의, 짙고 정직한 눈동자를 가진 누군가를 털어내기 위해 혼자서 계속 애쓰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부단한 노력도 기울였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민호는 늘 엷은 기억을 안은 채 허우적거리며 생각했다. 이건 아직 다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나의, 너에 대한 예의라고.
하지만 그건 핑계였다. 학습된 전례로 인해 누군가에게 또 마음을 주었다 크게 다칠까봐 겁을 먹고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근, 일종의 자기 방어였다. 자신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모름지기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가장 기저에 깔려 있다. 민호라고 예외가 있겠는가.
그래, 그러니까,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민호는 점점 고형화 된 형태를 이루어 가는 어떤 것을 느꼈다.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자. 민호의 머릿속에 오늘 하루 내내 그가 겪었던 감정과 느낌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시간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줄곧 기다렸던 이유, 비가 내리고 있다는 척의 말에 두 말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뛰어나와 그를 찾았던 이유, 절대 올라오지 않겠다 다짐했던 전망대를 올라오며 옛 애인의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이유, 비 맞고 있는 그를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련스럽게 비를 맞고 있는 것에 대해 열 받은 감정이 교차한 이유. 모두 답이 나와 있는 질문들이었다.
그랬다. 결국 자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눈앞의 이 남자였다. 뉴트는 여전히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견뎌내고 있다. 민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젠장, 그래요. 걱정했어요.”
신경 쓰여. 그쪽이 신경 쓰여서 미치겠다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뉴트는 민호의 단단한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온도가 다른 두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민호 역시 피하지 않았다. 비에 젖어 차가운 남자의 입술에 제 체온을 옮기고, 그것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그로부터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위로를 받았다. 긴 입맞춤 끝에 다시 한 번, 콧대가 뭉그러지도록 짧고 짙게 입술을 붙이며 뉴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 꼬리와 입매가 그림 같았다.
“그래서, 4년 만에 처음 와본 소감이 어때요?”
자리를 옮겨 민호의 옆으로 나란히 서며, 펼쳐진 풍경을 향해 뉴트가 물었다. 우산대를 붙잡고 있는 두 손은 겹쳐진 채였다. 민호는 제 발치에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세월을 머금은 성벽 안의 집들을 보았다. 4년간 버리지 못한 채 미련처럼 안고 있었던, 하지만 이제 그 위로 소중한 새 기억들을 쌓아올릴 이곳.
“……멋져요.”
민호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 * *
바람이 한 차례 헹구어 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풍경인데도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드는 날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꽃봉오리만 봉긋하게 솟아 있던 능소화는 못 보던 새 빨갛게 꽃을 피워내 돌담 위를 흐르고 있었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활짝 열어 둔 창가에 팔꿈치를 기댄 채 그것을 한참동안 보고 있던 민호는 능소화와 맞은편에 심긴 오렌지 묘목, 두 담장의 사이를 가르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두 인영을 발견했다. 제법 가파른 골목의 계단은 언제나, 오를 땐 힘들어도 다 오른 뒤 뒤를 돌아 힘겹게 지나 온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걸 보상받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짐을 들어 줄 생각에 1층으로 내려가자 아니나 다를까, 경치에 대한 수다스러운 감상과 각종 발랄한 호들갑을 늘어놓으며 숙박객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예약을 할 때 이름이 눈에 익다 싶었는데 작년 6월 즈음, 2층의 2인실을 쓰던 여대생 둘이었다.
픽업 못 해드려서 죄송해요. 눈썹을 뉘인 민호는 사과와 함께 그녀들의 캐리어를 끌어 휴게실 소파 앞으로 대신 옮겨주고 얼음이 가득 담긴 물을 내밀었다.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 바 아래로 키가 수도 없이 매달린 열쇠꾸러미에서 그녀들에게 건넬 열쇠를 찾는 동안, 물 한 잔을 단번에 들이키고 익숙한 소파와 주방이 딸린 휴게실을 둘러보던 A가 일 년 만의 방문 소감을 전했다. 그래도 구면이라고 말을 붙여 오는 어투가 무척 친근했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요.’
그랬다. 유독 해가 늦게 지는, 백야 같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 우기와 함께 음습한 겨울이 다가왔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활기와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이 왔다. 세 번의 계절을 지나보낸 두브로브니크는 또 다시 봄과 여름의 문턱에 걸쳐 있었다. 날을 거듭할수록 점점 길어지는 해를 실감했다. 변함없이 다가온 이 계절처럼, 매일같이 누군가가 찾아오고 또 떠나는 민호의 집 또한 변한 곳이 없었다. 집 앞에 널려 고만고만하게 흔들리는 빨래들도, 타진 않지만 일층 창문 아래에 세워진 서핑 보드들도, 설렘을 안고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손길에 색이 닳은 현관 문고리도.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앗, 취소. 방금 한 말 취소. 엄청나게 큰 변화가 있었네요.”
무슨 변화? 이거? 몇 장이 더 늘어난 것 같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A의 친구가 모두의 추억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코르크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A는 고개를 젓고 턱짓을 했다. 그녀의 갸름한 턱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건 공용 컴퓨터 앞에 앉아 사방으로 어지럽게 널브러진 usb 케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민호였다. ‘사장님?’ 그녀의 친구가 의아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까만 선들을 반듯하게 포개어 케이블 타이로 묶고 있던 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애인 생겼죠. 작년에 왔을 때랑 얼굴이 다른데.”
계획했던 삼 주 간의 일정이 모두 끝난 날, 민호의 방 침대에서 눈을 뜬 뉴트는 평소처럼 느즈막히 일어나 캐리어를 챙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아침처럼,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3주간 묵었던 방을 정리했다. 떠나는 사람치고는 지극히 무덤덤해 보이는 태도에 척은 외려 제가 ‘아니, 진짜 오늘 비행기 맞아요?’ 하고 몇 번이나 물어 보았다.
요란스러운 작별 인사 같은 것은 없었다. 공항버스를 타기 전, 뉴트는 민호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안았다 물러나며 웃음 지었다. “갔다 올게.” 잘 지내라는 섭섭한 말도, 보고 싶을 거라는 로맨틱한 말도 아니었다.
갔다 올게.
먼 길을 떠나 이제 두 번은 만나기도 힘들 사이가 아닌, 잠시 외출을 나갔다 다시 돌아와 제 곁을 지킬 사람과도 같은 한 마디만을 남긴 채, 그를 실은 버스는 도로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게 뉴트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 후, 익숙하고 아늑한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른 민호는 4년간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미련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이 집은 이제 과거의 어느 시간에 얽매여 멈춰 버린 고인 물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자신을 있게 해줄 과거의, 어떤 조력자 같은 존재였다. 때론 아프고, 그리워 섧기도 했던 추억의 조각들이 모이고 모이면 그것들은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더 큰 아픔을 이겨내게 해줄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민호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민호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남자는 갔다 올게, 라는 기약 없는 말과 함께 이곳을 떠나갔다.
그 때의 표정을 떠올려 보건데 뉴트의 얼굴엔 분명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건넨 것도 벌써 일 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뎠던 자신의 마음도 결국은 움직였듯, 일상으로 돌아간 그 역시 자신을 잊고 살지도 모른다. 사람의 앞날이란, 또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 역시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 묻고, 그 과거의 빛나는 조각들을 양분 삼아 그 위로 또 다시 새로 다가올 일상을 쌓아 올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실 아쉬웠다.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었다. 민호는 종종 또 자주,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미래를 기약했던, 그 해사한 얼굴을 떠올렸다.
전화가 온 것은 그 때였다. 코르크 보드를 에워 싸고 추억을 회상하는 그녀들을 뒤로 한 채, 상념에서 빠져나온 민호는 나른한 오후의 적막을 깨고 시끄럽게 울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다페스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넘어온다던 손님들이 오늘 이 맘 때쯤 도착한다고 언질을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여자 네 명이었던가. 도미토리 룸.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척 낯익고 그리운 남자의 것이었다.
-점심 먹었어?
일 년 만에 전화해놓고서 꺼낸 첫 마디가 고작 밥 먹었냐는 얘기라니. 누가 보면 꼭 어제 본 사람인 줄 알겠다. 예약 리스트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화기를 들어 어깨에 끼운 채 막 볼펜을 손에 쥐던 민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나도 그다워 웃음이 났다.
“어. 너는?”
-아침 일찍 먹은 기내식이 다야. 진짜 배고파.
“…어딘데?”
-올드타운 가는 버스 안. 근데 있잖아, 집까지 어떻게 가는지 기억이 안 나. 까먹었어. 짐도 엄청나게 많은데… 좀 데리러 나오면 안 돼?
“…….”
-오기 전까지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여기 있는다?
“멍청하게 소매치기나 당하지 마.”
일 년 만임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통화는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편안했다. 그리고 장난스러웠던 방금 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진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알겠으니까 얼른 와. 보고 싶다.
역시 여자들의 직감이란 예리했다. 뉴트의 마지막 말에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벅벅 문지르며 뒤를 돌자, A가 보란 듯이 팔꿈치로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봐, 사장님 만나는 사람 있다니까. 방금 전화, 애인이죠?’ 그와 자신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잠시 말을 고르며 고민하던 민호였지만 벌써 일 년 전에 인정한,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기에, 용기를 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지금 이 쪽으로 오고 있는데 데리러 나오라고…….’ 민망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두 사람은 꼭 걸음마를 처음 뗀 아이를 본 것처럼 축하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저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갔다 와요! 저보다 더 성화를 부리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그녀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유리창 너머 저만치에 높은 종탑이 보였다. 시간이 멈춘 도시. 한때는 저 풍경들에 설레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그저 단조롭고 무미한 일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러나 수 십, 수 백 번도 넘게 봐 지루해진 저 풍경들도 그 남자와 함께라면 새로운 시선으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이곳의 경치만큼 그림 같은 그 남자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가슴이 새삼 두근거리고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그녀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민호는 차키를 집어 들었다. 눈을 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눈을 감으며 하루를 마무리 할 때까지, 곧 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와 앞으로 저와 함께 모든 일상을 공유할 남자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견고하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비로소 한 발짝을 내딛는 그의 머리 위로 아드리아 해의 태양이 내려앉았다.
숨결 같은 바람이 부는 5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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