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 Time is running out
뉴트민호 내맘대로 부루마블 시리즈
01. Prague : Time is running out
-어느 인스타에서 같은 풍경은 두번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을 보고 꽂혀서 나 혼자 전력 60분
-뉴트 유부남 아님
-뒤에 둘이 원ㄴ나잇하는 것까지 쓰려다 그냥 밍숭맹숭하게 끝냈는데 캬 역시 답없는 취향
이 도시의 어느 방향에 있어도 볼 수 있는 성의 꼭대기는 지면보다 하늘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높게 솟아 있었다. 높고, 견고하며, 예리한.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이異세계에 온 것과도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풍경.
프라하 성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던 도영은 셔터를 막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칫했다. 완벽하다 생각한 구도에 웬 남자가 갑작스레 끼어든 탓이었다. 지평선과도 같은 지붕들 사이로 우뚝 솟아 석양에 물든 첨탑. 이걸 담아내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기다리고 엄청나게 많은 돌계단까지 오르내렸다. 후우,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오고 고생을 보상받지 못한 미간이 불만스럽게 찌푸려졌다. 아 뭐야 정말….
간간히 바람이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앵글 속의 불청객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노을 지는 프라하 성의 풍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한데, 등 뒤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가 좀처럼 쉽게 자리를 비켜줄 것 같지 않자 도영은 결국 렌즈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한번 보자.
물론 프라하에서의 일정은 앞으로 이 주나 더 남아 있었기에 오늘만이 날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같은 풍경은 두 번 돌아오지 않는다.
비록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같다고 말할 순 없다. 분명 오늘은 어제와 다른 바람이 불고 있고, 저 황금융단 같은 강물이 끌어안고 있는 햇빛의 함유량도 다르며, 노을의 색과 구름의 모양도 매번 바뀐다. 심지어는 5분 전에 찍은 사진과 5분 후에 찍은 사진도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다. 사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포커스 안에 드는 피사체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시 담을 수 없다고. 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기,” 소리 내어 불렀지만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동안 프라하에서는 체코어를 하지 못해도 영어만으로 그럭저럭 괜찮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는데, 설마 영어를 한 토막도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아님, 풍경에 매료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가. 잘츠부르크에서 프라하로 넘어오는 비행기에서 잠시 읽었던 체코어 회화책 속 적당한 표현이 있었나, 잠시 기억을 더듬던 도영은 이내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카메라를 들어 올려 각도를 맞춰보았다. 불청객이 끼었지만, 어쩔 수 없지. 내일 이 곳에 다시 오면 오늘만큼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썩 불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사각의 프레임을 들여다본 도영은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과연 카메라 안에 담긴 세계는 아까 전 그가 본 결과물과 달랐다. 달랐지만, 오히려 훨씬 좋았다. 아까 전에는 왜 그렇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나 싶을 정도로. 마치 물감을 풀어둔 것처럼, 반듯한 지붕 너머에서부터 스며 나와 아래에서부터 위로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하늘을 덮는 보라색, 산호색, 노란색 빛의 향연과 노을을 품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고고하게 솟은 첨탑. 그리고 그 모든 풍경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남자.
생각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를 원망하던 도영은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순간을 사진 안에 담았다.
* * *
여름철, 동유럽의 해는 유독 길다. 햇빛 역시 살인적이지만 습기는 없어 그늘 안으로 들어가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도영은 그늘과 양지의 경계에 걸쳐진 어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딱 한 입 베어 물고 너무 뜨거워 내려놓은 뜨레들로와 어느덧 녹아서 표면에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아이스커피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인화한 사진들 중 출판사에 보낼 것을 고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장소별로 정리하는 데 정신이 팔린 도영은 문득 갈증을 느낀 후에야 뒤늦게 음료의 존재를 떠올린 듯,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플라스틱 컵을 끌어당겼다. 빨대를 입에 물고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 당기자 바닥에 괴여 컵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허벅지로 굴러 떨어졌다. 시나몬 가루와 누텔라 잼을 잔뜩 발라둔 뜨레들로는 더위에 녹아 눅눅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도영은 그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동유럽의 내로라하는 비경들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 두브로브니크의 터키석 빛 바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찍은 프라하의 사진들. 두 다리만 있으면 하루 만에 시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아 다니기도 편하고, 치안도 나쁘지 않으며, 물가도 싼 도시였다. 역시, 이 근방에 집을 구하는 게 좋을까? 한국에 두고 온 몇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사진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도영은 사진관의 상호명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봉투를 거꾸로 엎었다. 입구를 동그랗게 벌려 손바닥에 두드리자 홀쭉해진 봉투는 하마터면 그가 지나칠 뻔 한 사진 한 장을 뱉어냈다. 어, 눈썹을 치켜 올린 도영은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래, 프라하 성과 함께 찍었던 이 남자. 백 장이 넘는 사진들을 추리느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분명 만족스럽다 여겼던 그 날의 순간들, 정확히 말하자면 앵글 속 ‘불청객’ 없이 성공적으로 촬영했던 사진에서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으레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여태껏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었는데. 그러니까 인덱스까지 붙여가며 따로 갈무리를 해 둔 거겠지. 도영은 턱을 집어넣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림자의 꼬리가 길어지는 시간대에 찍은, 노을이 감싼 프라하성의 풍경을 세 장쯤 늘어놓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실 남자와 함께 그 날의 풍경을 담아낸 그 날 이후로도 도영은 종종 그 시간대에 같은 곳을 지나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었다.
왜 이 한 장만 유독 느낌이 이렇게 다른가. 역시 그 날의 분위기가 다른 날과 비할 수 없게 좋아서 그랬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약한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서 있는 뒷모습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답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로맨틱하다, 는 감상이 다였던 풍경에 기묘한 느낌을 불어넣은 건 이 남자였다.
음…출판사에 보내는 것과는 별개로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찍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하지만 매번 그래왔듯, 같은 풍경은 두 번 돌아오지 않겠지. 아쉬운 대로 팔을 쭉 뻗어 귀퉁이에 찍힌 남자의 모습을 제가 앉아 있는 구시가지의 이런저런 풍경에 맞춰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던 도영의 머리 위로 문득 그늘이 졌다.
“내 사진이네.”
어? 도영은 고개를 올렸다. 낮게 긁히는 소년의 그것과도 같은 목소리.
그 남자였다.
결국 그날 먼저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난 것은 도영이었기에 남자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일단 그 스스로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다 왠지 모르게 눈앞의 남자에게서 읽히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그 때와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어 남자의 표정은 알기가 힘들었다. 화가 났을까? 관광객들이 더 많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에게 사진 찍히는 것에 관대한 편인데다, 그렇게 누군가의 추억이 된 풍경 속에 남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면 종종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보내 달라 부탁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끔 그와는 정 반대로 민감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영 역시 그 점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역만리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방 어딘가에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을 생각을 하고 있자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지.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그는 호쾌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요? 여기 지나다니면서 하루에 몇 번도 더 찍혔을 텐데. …잘 찍었네. 저는 사진에 소질이 없어서.
"한국에서 왔죠?"
"어, 맞아요. 그쪽도?"
"태어나긴 서울에서 태어났죠. 걸음마도 떼기 전에 한국 땅을 떠서 그렇지."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어 린넨 셔츠의 포켓에 쑤셔 넣었고, 덕분에 도영은 남자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기 위해 원형 테이블을 반 바퀴 돌아와 도영의 옆에 선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빛과 더위에 약간 찡그린 낯을 하고 있음에도, 반듯하게 늘어난 양쪽 입 꼬리가 동그랗게 들어가고 뺨은 볼록하게 부풀었다.
가지실래요? 무척 아까웠지만, 도영은 사진을 내밀었다. 음…너무 멋진 작품인데, 이거 받아도 되나. 사진을 받아든 그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 앉아 담배를 피웠다.
“사실 그 때, 풍경사진 찍으려 했거든요. 비켜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까 잘 어울리길래 그냥 찍었어요.”
도영은 이실직고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미약한 바람 한 줄기가 노천카페의 테이블들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남자의 머리칼이 실처럼 반짝였다. 도영은 또 다시, 지금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순간을 앵글 속에 담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근질근질한 손을 꼭 주먹 쥐며 배터리가 바닥난 채 헤링본 케이스 안에 잠든 카메라와 남자만 번갈아 살필 뿐이었다. 말없이 한참을 보던 남자는 여전히 사진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남이 찍어준 사진은 아주 오랜만이에요.”
“혼자 지내요?”
“네. 뉴욕에서 왔거든요. 가족들도 다 그 쪽에 있고.”
“어쩐지….”
“왜요?”
묻는 어투가 무척 상냥했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도영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턱을 괴고 남자의 얼굴을 감상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제풀에 놀라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담아내거든요.”
뭐든지 다? 도영은 남자의 질문에서 말끝만 내려 되풀이했다. 뭐든지 다. 어쩌면 사람의 감정도요.
“재밌네.” 남자는 더 해보라는 듯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고, 한쪽 팔을 걸친 채 담배를 물며 도영을 쳐다보았다. 본인은 못 보잖아요, 본인이 어떤지. 도영은 기대에 부응하듯 말을 이었고, 남자는 몸을 돌리고 급기야 의자를 앞으로 바짝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소매를 걷어 올린 두 팔꿈치가 테이블에 닿고 절반 녹은 얼음 컵의 커피가 찰랑거렸다.
내가 어때 보이는데요?
흥미에 찬 흰 손이 사진을 내밀었다. 음…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시선만 흘끗, 올려 눈치 보듯 남자를 살핀 도영은 사진에 시선을 주고 다시 말했다. 그렇게 밝게 웃고 있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일견 유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니, 프라하 성을 보고 있던 뒷모습을 볼 때부터 느꼈던 건데….
“…외로워 보여요.”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도영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남자의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가라앉은 입매와 눈이 인파로 북적이는 광장 어딘가로 향하고, 노랗게 익은 햇빛과 함께 당황이 내려앉은 속눈썹은 불규칙하게 깜빡깜빡, 눈동자를 덮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눈썹과 이마를 지나쳐 옆으로 치우친 앞머리를 빗듯이 쓸어 올렸다. “어….” 애매하게 고개를 뉘인 표정과 몇 번 벙긋거리다 이내 입술이나 축이고 마는 반응을 보며 역시 실례였나, 머쓱하게 뒷목을 긁고 경솔함을 사과하려 했지만 남자가 한 발 빨랐다. 심지어 그는 예상외의 말을 꺼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한숨처럼 뱉으면서 고개 돌린 얼굴이 도영을 향했다.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저기. 괜찮으면, 술 마실래요?”
도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프라하에서의 일정 중 네 번째 날의, 오후 여섯 시 정각. 천문시계의 종이 울리고 해골과 열두 개의 조각들이 움직이며, 시계탑 앞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오늘은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시간 역시 많이 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 놓치고 싶지 않다면, 지금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같은 풍경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눈을 마주 보며, 도영이 느릿느릿 입을 떼었다. 왠지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근사한 사진을 몇 번이고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