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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민호] We're On Fire
-ro
2015. 3. 20. 22:54
1. 이 글 제목이야말로 진짜 오해와 오해가 되어야 하는게 아닐찌
2. 나는 그냥 패기쩌는 뉴트가 민호 회사동료한테 오해해서 차 박살내는게 보고싶었는데
“이게 대체….”
퇴근 시간 너머까지 골머리를 썩게 만든 업무를 끝마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그야말로 참사의 현장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 층짜리 빌라, 적은 세대 수만큼 몇 칸 되지 않는 현관 앞의 주차장에는 할부가 아직 일 년도 넘게 남은 신형 BMW의 사이드미러가 처참하게 박살난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먼저 본 것은 차주인 토마스였고, 그를 배웅하기 위해 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뒤에서 걸어 나오던 민호는 갑자기 잘 가다 말고 급브레이크를 잡은 차 마냥 멈춰선 동료를 의아하게 여기다 한 발 늦게, 절망과 탄식이 내려앉은 어깨 너머로 펼쳐진 사태를 목격했다.
민호는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일례들을 통해 토마스가 평소 얼마나 이 차를 애지중지 여기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다른 어떤 것과 굳이 비교를 해 가늠하자면… 어, 그의 여자 친구 정도? 외근을 나가다 차가 긁혔을 때 차라리 제 얼굴이 긁히는 게 나았겠다는 오싹한 발언을 한 걸 생각해 보자면, 실은 여자 친구 이상? 여자 친구가 다쳐도 그 정도 심장이 내려앉는 표정을 짓진 않을 것 같은데. 을인 주제에 갑처럼 패악을 부리는 거래처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매 주마다 사직서 봉투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토마스였지만 새로 뽑은 차 얘기만 하면 그는 심호흡을 하며 그것을 도로 품 속 깊숙이 밀어 넣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차 때문에 내가 참는 거지.’ 그래, 어쨌거나 그 정도로 차를 소중히 여기는 그였기에.
심각성을 인지한 민호는 여유롭게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손을 빼고 다가가 토마스의 표정을 흘긋 살폈다. 퍽 낯간지러운 애칭까지 붙여줄 정도로 차를 사랑하는 그인지라 왠지 슬픔과 눈물에 잠긴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그의 눈가는 무척 깨끗했다. 다물지 못하고 벌어진 입과, 생기가 빠져나가 이따금씩 속눈썹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눈을 보아하니 그냥,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물론 그의 반응이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 누구나 그렇듯, 전자산업의 산물인 각종 오락 기기들과 무선 조종 카 따위를 가지고 놀며 스피드가 주는 쾌감을 사랑했던 소년들이 가진 로망의 끝판왕은 역시 근사한 차 아니겠는가. 차를 가진 남자가 자신이 적금 부어 구입한 차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온, 비싼 드림카라면 더욱이 그렇겠지. 때문에 민호는 토마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간 큰 자식이 이 비싼 차에다 이런 짓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문했지만 사실 그는 토마스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왔을 때부터,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을 뿐. 석고상처럼 굳은 두 사람의 앞에 익숙한 인영이 독이 바짝 오른 낯으로 서 있었다.
토마스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고 거칠게 오르내리는 마른 어깨로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 얼굴, 하루에 몇 번이나 마주치는 뾰족한 눈매를 확인하자마자 민호는 그만 낭패감 짙은 얼굴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아이고…… 두야.
그리고 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기 딱 십분 전.
뉴트는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귀가 중이었다. 왠지 맥주가 마시고 싶은데. 오늘만큼은 안주도 민호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만들어야겠다. 그때 보니까 소고기랑, 그, 냉장고에 있던 소스만 넣고 볶으면 되는 것 같았는데. 아, 담배. 담배도 같이 사야지. 늘 그래왔듯 밖에서 겪었던 일은 그냥 밖에서 털고 잊어버려야 한다며 저만치에 보이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볍고 쓸데없는 상념들을 떠올리는 그였으나, 머릿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점심시간 카페에서 들었던 친구들의 대화가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지만 존재감은 강렬해 언제나 신경 쓰이게 만드는 손거스러미처럼 그것은 뉴트의 마음을 줄곧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발단은 헤어진 지 딱 두 달 만에 연락 온 A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완연한 봄. 꽃향기가 뒤섞인 공기가 달콤하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갓 뽑아낸 커피처럼 따뜻했다. 도서관에서 팀플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던 뉴트와 세 명의 여자 동기들은 답답한 실내에 처박혀 있기에 민망할 정도로 화창한 날씨를 핑계 삼아 교내 카페테리아의 노천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얼어붙은 대지에 숨결을 불어넣는 봄이라는 계절은 마치 동물들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듯, 마음 깊숙한 곳에 잠겨 있던 간질간질한 감정들을 끌어내고 죽어 있던 연애 세포를 기지개 켜게 만들었다. 산뜻하고 설레는 기운을 발산하는 캠퍼스의 분위기에 과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세 명의 친구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치감치 랩톱을 덮고 그 위에 자신의 팔꿈치와 테이크아웃 라떼를 얹었다. 여자들의 대화에 크게 공감할 순 없었지만 뉴트는 일단 웃으며 이 분위기에 동조했다. 지나간 연애든, 혹은 새로이 찾아올 연애든, 아무튼 남의 연애사는 만국 공통의 흥밋거리 아니겠는가.
“왜, 받아주지 그래. 귀여워서 좋다고 하지 않았어?”
액정 너머로까지 술기운이 느껴지는 텍스트 메시지를 받았다는 A의 말에 첨예한 토론의 서장을 연 것은 B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애 잘생겼었잖아.’
뉴트는 세 친구 모두와 친분이 두터웠으나 그녀들의 남자친구까지 한 자리에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실연을 당해 위로의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던 것 같은데, 지금 A가 말하고 있는 전 남자친구라면 아마도 끝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두 달 전, 그녀가 이별을 맞이하고 난 다음 날 친구들과 함께 했던 자리에서 뉴트가 나초 세트를 시켰을 때 A가 ‘그 애가 좋아하던 나초 세트까지 꼴 보기 싫다’ 며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음, 저렇게 전 남자친구에 대한 칭찬 해봤자 좋은 꼴 못 볼 텐데…. 그러나 직설적인 B의 화법에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길 것 같던 A는 의외로 고개를 흔들며 담담하게, 그러나 완전히 질린 투로 말했다.
“그래, 귀엽고 잘생겼지. 인정해. 하지만 몇 달 만나면서 깨달은 건데 그 앤 정말 귀엽고 잘생겼고… 단지 그 뿐이야. 성격적인 면에서 나랑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구. 일단 걘 생각하는 게 너무 어려. 내가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제가 보고 싶으면 고집을 피워서라도 봐야 하고, 아주 막무가내야.”
그냥 걔 머릿속엔 뉴욕 자이언츠랑 섹스밖에 없는 것 같다고!
이 대목에서 A는 슬쩍 뉴트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애 앞에서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님 제 또래의 남자애를 폄하하고 있지만 일반화 하는 건 아니야, 라는 식의 미안한 감정인 건지. 어느 쪽도 자신은 상관없었기에 뉴트는 어깨를 가뿐하게 으쓱였다. 괜찮으니까 계속 얘기 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는 크흠, 헛기침을 쏟으며 전 애인에 대한 평을 마감했다. ‘아무튼, 연하라 그런가 도무지 나를 배려해주질 않았어. 오로지 자기 위주로만 생각한다고. 내가 대체 애를 키운 건지 연애를 한 건지.’
그런 A의 말에 변호하듯 이 남자 저 남자 좀 많이 만나봤다던 C가 한 마디 거들었다.
“확실히 그런 면에선 연하보단 연상이 좋지. 능력이야 물론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뭣보다 너그럽고, 어른의 여유도 있고, 가끔 학교 앞에 태우러 올 때 수트 입은 모습도 섹시하고.”
“어머… 그건 좀 좋겠다.”
B가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여자들의 대화란 정말 광범위하지, 수트라는 새로운 화두가 나오자 그녀들의 토론은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NBC에 새로 방영하는 법정 드라마가 어쩌고, 그 드라마에 수트를 멋들어지게 입고 등장하는 남자 배우의 스캔들이 어쩌고, 간혹 까르르 깔깔, 20대 초반 어린 여자애들의 쾌활한 웃음소리를 덧붙이며 전방위하게 뻗어 나가던 그녀들이 별안간 대화의 화살촉을 돌린 곳은 멀뚱하니 앉아 있던 뉴트였다. C가 뉴트에게 물었다. 짓궂음과 장난기 어린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우리 연하남의 변명을 좀 들어볼까. 어떻게 생각해, 뉴트? 너 만나고 있다는 애인 말이야. 너보다 나이 많다고 하지 않았어?”
“어머, 얘는. 뉴트가 그런 천둥벌거숭이들이랑 같은 줄 알아?”
“하긴, 그렇지. 누군진 몰라도 참 부럽다? 얼마나 예쁘길래 꽁꽁 숨겨두고 보여 주지도 않고!”
언제 한번 인사 좀 시켜줘! 뉴트의 팔뚝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찰싹 때리며 다시 쾌활하게 웃는 그녀들이었지만 세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뉴트는 어색하게 뺨의 근육을 당기기만 했다. 여태껏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정말로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정도의 충격이었다.
2월 말까지만 해도 여섯 시면 인공적인 불을 밝히지 않고는 집안의 물건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위가 컴컴했는데 고 며칠 새에 해가 제법 길어졌다. 뉘엿뉘엿 넘어갈듯 하면서도 미련스럽게 아직 머물러 있는 석양. 그 끝자락에 적셔진 길이 온통 붉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거리를 걷고 24시간 마트와 몇 개의 주택을 지나치며, 뉴트는 귀갓길 내내 자신의 동거인-이자 애인에 대해 생각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뉴트보다 다섯 살 가량 많았던 민호는 스물 둘,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생활비 벌이를 위해 유독 이과 과목이 약한 뉴트의 수학 공부를 지도해 주었고, 약 2년간 책상 앞에서 머리를 맞대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과 정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사사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손도 잡고 입도 맞추며 한 침대에 누워 결국은 아침이 되면 하나는 직장으로, 다른 하나는 학교로 각자의 발걸음을 옮기며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당시 두 사람의 시작은 얼마나 과격하고 당돌한 일방통행이었던가.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끝마쳤던 과거의 어느 날, 교재를 정리하며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민호의 손목을 끌어당겨 대뜸 입술을 밀어붙였었지. 마치 아직 건너면 안 되는 빨간 불인데도 막무가내로 훌쩍, 건널목을 뛰어넘어 신호를 위반한 무뢰한처럼. 물론 그 당시엔 자신의 고백에 쑥스럽게 눈 꼬리를 휘며 그러자 고개를 끄덕여 지금까지 무탈한 연애를 이어 오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사실 그 때의 민호는 그다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무단횡단을 했을지언정 이미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건너온 어린 애를 차가 달리는 도로 속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절을 못하는 우유부단함의 발현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함께 해온 시간만큼 뉴트는 민호를 알았다. 몇 년간 지켜봐온 그는 좋고 싫음에 대한 구분이 분명했다. 그 고지식한 관념에 마음에도 없는 자신과 섹스를 할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을 향한 그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사이가 좋은데도 이럴 때가 되면 뉴트는 괜히 우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들었던 친구들의 말대로 자신은 내세울 게 없으니까.
나 어리잖아. 백 번 천 번 써먹어요.
연애 초기, 그에게 찡긋 윙크하며 자신감 넘치고 패기롭게 말했었지만 오늘 C가 말했듯 이해심 넓고 너그러운 성격도 아니고, 여유도 없고, 멋진 수트는 커녕 사시사철 티셔츠에 스포츠 점퍼나 입고 다니는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어린 나이와 신체 건강한 몸뚱이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하는 어린 나이 또한 민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조건인지도 모른다. 책임감 막중하고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는 그 고집스런 성격에 회사라든가 집안에 힘든 일이 생겨도 다섯 살이나 어린 연인에게는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뉴트는 그와 함께 있을 때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달라고, 제법 의젓하게 굴며 민호에게 걸 맞는 어른이 되려고 매번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냥 걔 머릿속엔 뉴욕 자이언츠랑 섹스밖에 없는 것 같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말하기가 무색하게, 바로 지난주 금요일에도 잔업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에 절은 민호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점잖은 포옹을 해주진 못할망정 어떻게 펠라라도 해 달라 조른 적이 있지 않은가! 결국 그날 민호는 무거운 눈꺼풀을 반 쯤 뜬 채로 자신의 것을 입에 담았었지. 물론 사람의 생각이란 모두 제각각이고, 하물며 민호는 민호일 뿐. 남자친구가 아니라 아들을 돌보는 기분이라며 연하는 싫다 입 모아 말한 여자애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며칠 전의 그 행동은 정말 자신이 돌이켜 봐도 최악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좋아하진 않았을 거야.
어느덧 두 사람이 짐을 합친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뉴트는 고개를 올려 5층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집의 창문을 살폈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온 모양인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오늘부턴 정말로 잘 해야지. 마음속으로의 다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기합 들어간 것처럼 굳건하게 한 발을 내딛던 뉴트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흰 페인트의 칠이 벗겨져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주차 칸 안에 보란 듯이 대어 놓은 낯익은 차. 최근의 기억들을 되짚다 이 낡은 아파트와 어울리지 않는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어느 새 그의 엷은 입가에서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뉴트는 반질거리는 눈앞의 세단을 노려보았다.
뉴트는 일전에도 이 차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수업 마치고 찾아간 민호의 회사 앞에서.
친구들이 섹시하다며 찬미한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나운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저와는 달리 깊은 눈매가 유순하게 처져 선한 인상을 주는 남자. 이름은 모른다. 사실,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 궁금하지도 않다. 옆통수만 얼핏 보이는 그를 처음 보았던 날, 남자는 저 번쩍거리는 차에 시동만 걸어두고 밖으로 나와 퇴근 중이던 민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은 사옥에서 조금 떨어진 화단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기에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와 말을 섞는 내내 민호의 표정이 퍽 즐거워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무거운 돌을 얹어둔 것처럼 가슴께가 답답해지는 동시에 내면의 심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분명 여섯시까지 회사 앞으로 와 있겠다고 했는데, 안 보이면 전화를 해주진 못할망정 딴 새끼랑 시덥잖은 얘기나 떠들고 있고. 사실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알진 못한다.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밀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추측을 할 뿐이지. 그는 언제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민호의 모든 순간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나오면서 휴대폰을 켜지 않은 모양인지 텍스트 메시지는 아직 답장도 없고. 전화를 해볼까, 다이얼을 불러냈다가 뉴트는 미간을 좁히고 뾰족한 입매를 비틀며 다시 액정을 껐다. 우리는 상호적이어야 하는 관계니까. 여기까지 찾아온 자신이 직접 전화까지 해 민호를 찾는 것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찾길 바랐다. 얄팍한 자존심을 챙기며 까맣게 꺼진 휴대폰만 바라보다 괜히 아무런 변화도 없는 액정을 껐다, 다시 켰다를 반복한지 몇 번이 되지 않았을 때 멀리서 자신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뉴트!
회사 앞을 지나던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크게 제 이름을 부르며 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약간 입 꼬리만 올려 옅게 미소 짓던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웃음이었다. 애정과 반가움을 감출 수 없는 그의 표정에 만족감과 우쭐함이 차올랐다. 압박감이 느껴지던 흉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뉴트는 패딩 조끼에 집어넣고 있던 손으로 객쩍게 코끝을 훔쳤다. 빨리 와, 목소리 높여 대답하는 대신 턱짓으로 이야기했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민호의 시선이 어깨 너머 허공을 향하고, 급기야 아주 드물게 방긋, 웃기까지 하자 그와 마주 서 있던 남자도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드는 거부감에 저도 모르게 눈매를 굳혔다. 뭘 봐 시발. 괜히 지기 싫은 오기에 턱을 쳐들고 동공에 힘을 주었다. 또래 남자애들에 비해 확실히 성숙하고 점잖은 구석이 있는 뉴트였지만, 민호가 관련된 일만큼은 논외였다. 좀 더 의연하게 굴어야 한다는 이성과 행동이 반비례했다. 담백하던 언행도 한없이 유치해졌다. 그런 자신을 향해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은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민호는 뭐라 말하고 있었다. 무성영화처럼 벙긋거리는 모습이 다였지만 분위기상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짧은 찰나동안 자신을 살피던 남자의 고개는 다시 돌아가고, 민호는 곧장 주차장에서 제 차를 빼 정문 앞 화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뉴트의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래. 그렇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와 인사하고 자신에게 온 민호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재수 없는 BMW의 까만 보닛을 보고 있자니 그 날 아주 짧은 찰나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한참 모자라 경쟁조차 되지 않는 어린애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우위에 선 너그럽고 여유로운 어른의 눈.
그리고 그 눈동자가 담아내는 피사체가 민호가 되었을 때, 남자의 눈빛은 사뭇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제가 민호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의 시선이라 여겨졌으므로, 그 진득하고 끈질긴 시선이 내포하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친한가봐?’
‘누구, 아아~ 토마스?’
토마스, 하고 낯선 이름을 입에 올리는 말투가 무척 친근하고 자연스러워 짜증이 났다. 토마스인지 뭔지 내가 알 게 뭐람. 시위하듯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있자니 기어를 바꾸고 오른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 민호가 말했다. 뉴트, 안전벨트 매. 그리고 부드럽게 핸들을 돌린 차는 그대로 회사의 정문을 통과했다. 하루 온종일 붙잡혀 있던 회사에서 나오자 숨통이 트이는 모양인지 그는 목까지 채워두었던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카오디오를 켰다. 라디오를 켜자마자 퇴근길의 차 안을 메우는 저스틴 비버의 목소리에 슬쩍 주파수를 돌리며 민호가 토마스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지사로 발령받은 사람인데,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됐어. 예전에 오렌지카운티에 있었대. 신기하지?’
‘뉴욕으로 건너온 캘리포니아 사람이 한 둘이냐. 별게 다 반갑네.’
‘…뭐야. 오늘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어.’
그리 담백하지 않은 시선으로 민호를 훑어본 것만으로도 남자는 뉴트에게 충분히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기분이 나빴던 진짜 이유는 그날 이후로도 민호와 조우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지었던, 그, 표정.
너는 민호에게 어울리는 짝이 아냐.
너같이 철부지에, 속 좁고, 연인에게 의지도 되어주지 못하는 어린애에게 민호는 너무 과분하다고.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깊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해도 뉴트에게 반박의 여지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은 오늘 친구들이 했던 말처럼, 그렇게 믿고 날뛰던 외모 하나 말고는 잘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것은 없다. 인간의 껍데기 또한 그렇겠지. 나이도 어리고, 따라서 민호에게 의지도 되어주지 못하고, 능력은 더 더욱 없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비싼 차를 가지고, 민호와 사회적으로도 대등한 위치를 가진 토마스에 비해 자신은 현실적으로 민호에게 훌륭한 연인이 되어주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친구들의 생생한 증언과 민호를 넘보던 남자의 잊혀지지 않는, 업신여기던 그 눈빛. 그리고 기회를 노리던 그가 끝내 자신과 민호의 공간에 끼어들어 낯선 발자국을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눈빛이나 본의 아니게 밥상머리에서 듣는 그의 이름보다 더 강렬한 흔적인, 그의 차. 원치 않게 자신의 앞에 들이닥친 이 모든 것들이 뉴트로 하여금 여유와 능력 대신 초조함과 불안을 품게 만들었다. 차마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현관 앞의 주차장에 멈춰 서서 뉴트는 생각했다.
내가 돌아올 시간임을 뻔히 알면서, 퇴근을 하고도 남았을 이 사적인 시간에 둘이 그 위에서 뭘 하고 있어? 그것도 너와 나의 공간에서. 열등감과 분노에 상상은 자꾸만 좋지 못한 쪽으로 흐른다. 함께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함께 눈을 감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그 침대 위에서 낯선 남자와 입을 맞추고, 몸을 부닥치는 너. 그리고 욕실 두 번째 찬장에 있는 바디소프로 샤워해 네 몸에서 나는 향과 같은 냄새를 공유할 낯선 남자.
진심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살의가 차올랐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좋지 못한 느낌으로 맥박이 거세게 뛰었다. 아닐 거야, 내 민호가, 그럴 리가. 그러나 방금 전까지 켜져 있던 불이 꺼진 순간, 줄곧 떠올리고 있던 나쁜 상상은 엎어진 와인병처럼 울컥울컥 불안감을 뱉어내 새하얗던 머릿속을 순식간에 적셨다. 정말로, 자신의 불안이 현실로 이어진 것만 같은 기분. 달칵, 소리를 내며 꺼졌을 거실의 일자 형광등처럼, 뉴트는 일순 제 내면의 퓨즈가 파지직, 수명 다한 형광등처럼 나가는 기분을 경험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번쩍이는 차의 사이드미러를 걷어찼다.
‘거 되게 쓸데없이 자주 붙어 다니는 것 같다?’
그래. 언젠가 그렇게 말하며 지었던, 못마땅해 보이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다. 너는 내가 토마스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그렇게, 눈을 밉게 홉뜨며 날을 세웠지. ‘그냥 회사 동료라니까?’ 그 때마다 결백을 주장하며 해명을 한 횟수가 어느덧 두 손에 다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할 말이라면 민호 역시 없지 않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제 옆에 달고 다니는 여자애들이 대체 몇 명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정시 퇴근을 하고 외식을 하려는 심산으로 뉴트의 학교 앞에서 그의 하굣길을 기다리고 있자면, 민호는 꼭 옆에 고만고만한 여자애들을 두세명 쯤 붙인 채 정문을 나서는 뉴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십대 초반, 생기발랄한 그 나이대의 여자애들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작고, 하얗고, 귀여운 그녀들은 제가 생각해도 뉴트와 꽤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그에 비해 덩치도 뉴트와 엇비슷하고, 까무잡잡하고, 결코 귀여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어떻게 봐도 귀엽다는 단어와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없는 자신은…. 마치 한 폭의 완성된 그림과도 같은 그들의 모습에 민호는 감히 자신을 그들의 세계 한 구석에 끼워 넣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위축감에 차마 문을 열고 내려 당당하게 연인을 맞지 못하고, 그저 창틀에 팔만 얹은 채, 창문 너머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을 관찰자의 눈으로 종종 지켜보았다. 이거 보라고, 뉴트. 네가 질투하는 토마스는 한 명인데, 네 곁에 매일매일 바뀌는 그 여자애들은 여러 명…….
하지만 민호는 우울함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어떻게든 낙천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지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책을 하고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고, 제 정신만 소모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른의 처세술이었다. 어쩌면 꼴사나운 감정을 솜씨 좋게 감추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마음이 편치 못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그녀들의 워너비가 되는 저 남자애의 관심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게 기분 좋았다. 정말 동료사이일뿐인 토마스에게 질투하는 것도 사랑스럽고. 삐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어찌 됐든 질투는 애정에서 기인한 방도이니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며 겁만 늘어 좋아도 좋다고 말할 수 없고, 싫어도 싫다 말할 수 없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함께 그냥 모두를 위해 속으로 억눌러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 만큼 자기감정에 솔직할 수 있고, 여과 없이 표현을 할 수 있는 그가 부럽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토마스는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날카롭게 여기저기 튄 거울의 파편을 피해 땅바닥을 구르는 사이드미러의 잔재들을 모두 주워들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그것을 양 손에 곱게 감싸 쥐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폼이 꼭 연약한 아기를 다루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앞에 서 있는 뉴트의 얼굴을 한 번, 이후 다시 제 얼굴을 돌아보는 토마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민호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이 상황을 유연하게 수습해 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같은 팀이다 보니 최근 자신과 함께 회사 건물을 나선 적이 잦았던 토마스는 종종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뉴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할부가 일 년 넘게 남은, 그래서 주차도 무조건 CCTV가 붙어 있는 구역에만 할 정도로 애지중지하던 제 차의 사이드미러가 박살난 원인이 뉴트라는 것 또한 파악한 눈치였다. 사실 모르기가 더 어렵겠다. 저렇게 살의 담긴 맹수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는 제가 대관절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게 되었는지 지금 당장 설명을 부탁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민호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골랐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팔짱을 낀 채 마른 입술을 축이고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렸다. 퇴근도 했고 이제 약속도 없겠다, 밖에 외출할 일도 없어 아무래도 상관없는 앞머리를 반복적으로 쓸어 올리며 재차 정돈한다. 무언가 거짓말을 꾸며낼 때마다 행하는 버릇 같은 것이었다. 마치 대답을 종용하듯 여덟 팔八자로 모인 눈썹을 본 순간 민호는 입을 열었다.
“어… 죄송해요. 사촌 동생이 낮부터 술을 마신 것 같은데….”
뉴트는 런던 출신이고 자신은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온 아시안이었다. 생김새부터가 다른데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토마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필터링이고 뭐고, 머릿속에서 짚어볼 새도 없이 되는 대로 뱉었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순간, 허술한 변명을 내어놓고 슬쩍 눈길을 돌려 뉴트의 얼굴을 살피는 동시에 민호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입이 방정이지! 이건 불 난 집에 아예 기름을 궤짝으로 가져다 부은 꼴이었다. 이후 이 웃지 못할 해프닝이 추억의 안주거리가 되고 그가 저보다 다섯 살 어린 연인에게 충분한 사과의 절차와 대가를 치렀을 즈음, 민호는 지금의 뉴트를 ‘눈이 홱 돌았던 순간’ 이라 회상했다.
“사촌 동생?”
5월의 장미처럼 화사한 얼굴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달콤한 향과 수려한 외모를 지닌 장미는 치명적인 가시를 숨기고 있는 법이었다. 일견 근사한 웃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그리며 삐딱하게 올라간 입 꼬리, 치켜든 턱과 이성적인 판단을 포기한 안광 어린 눈동자. 사 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장미에게 물과 영양분을 주고, 섬세하게 다듬고, 꾸준한 손길로 관리를 해온 정원사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색하게 올라간 민호의 입가가 미약하게 움찔, 떨렸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서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지금 위험해. 안 돼. 안 된다고!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위에 시선 둘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전력 질주하는 그를 막긴 어려웠다. 뒷걸음질 치는 보폭을 따라잡아 성큼성큼 다가온 뉴트가 민호의 셔츠 앞깃을 끌어당겼다. 뉴, 뉴트? 당황한 낯으로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이 민호의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가시에 찔린 것 같은 통증.
“…사촌 동생이랑은 이런 거 안 해.”
멀어지는 얼굴과 함께 털썩, 토마스가 떨어트린 서류 소리가 늦은 오후의 주택가를 울렸다.
민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야구 중계를 보기도 하고, 혹은 그와 함께 맨 몸으로 자주 뒹굴기도 하는 침대 위에서, 뉴트는 고개를 숙이고 양 손을 모은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정말로 그 순간에는, 마음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끈 같은 것이 뚝 끊기는 기분이었다. 충동적으로 달려들어 입술을 물어뜯고 떨어질 때까지 어느 아득한 곳에 가 있던 뉴트의 정신은 등 뒤에서 모든 것을 목격한 토마스가 서류철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돌아오게 되었다. 망연하던 동공에 초점이 잡히고, 그제야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상황을 인지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부풀어 피가 맺힌 입술, 흡사 컬처 쇼크를 겪은 것 같은 등 뒤의 토마스, 깨진 거울 조각들과 널브러진 서류 봉투, 그리고,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는 민호의 얼굴.
분노를 덜어내기 위해 꾹 감은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고, 그 너머로 깊게 자리 잡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뉴트는 곧장 자신의 팔뚝을 잡아끄는 민호에게 이끌려 빌라 현관의 계단을 올랐다. 회사 동료라는 남자에게는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은 채 두 말 않고 올라가는 것을 보니 아마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자신의 팔을 감싸쥐고 있는 악력과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에서 그의 진지함을 읽은 뉴트는 조용히 입을 닫고 그의 걸음을 쫓았다.
그 찰나의 성질을 못 이겨 차를 박살내 놨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비싼, 신형 BMW를. 게다가 그 차의 주인은 그저 안 보면 그만인 관계의 사람이 아닌, 민호의 직장 동료였다. 방금 자신의 지나친 질투와 열등감, 소유욕이 야기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민호는 다음 주면 다시 사무실에서 마주쳐야 하는 회사 동료 앞에서 아웃팅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다. 사촌 동생. 그 호칭은 아직도 열 받는 것이지만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다수의 시선과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한 민호의 사려 깊은 방패막인 셈이었는데. 생각이 짧았던 제가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그것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민호를 난처하게 만들었단 생각에 큰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격지심을 지닌 철부지는 결국 스스로의 생각을 합리화하기에 이르렀다. 시발, 맞아. 그 새끼 눈빛은 평범한 동료로서의 시선이 아니었다고. 그 쌍꺼풀 짙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음험하게 민호의 얼굴을 훑는 꼴이란!
“야 이 자식아, 내가 너를 진짜…….”
그러나 당당한 태도로 턱을 치켜들던 뉴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씩씩대던 민호가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침묵을 깸과 동시에 도로 고개를 숙였다. 눈치가 보여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는 눈동자가 바닥을 이리저리 방황했다. 침대 위에서도 그렇고, 그 때를 제외한 평소에도 언제나 관계의 우위에 서 있는 자신이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연상의 애인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섭다. 뉴트는 섹스를 할 때마다 자신의 목에 감겼던 민호의 근육 붙은 팔을 생각했다. 둘의 사이가 좋을 때 자신은 땀에 젖어 소금기 배인 그 피부 위에 입술을 몇 번이나 내리며 말했었다. ‘이렇게까지 관리 안 해도 충분히 보기 좋은데.’
그랬다. 보기 좋게 근육이 붙었다며 제가 좋아했던 민호의 그 육감적인 체격은 사실 복싱, 유도 등 각종 투기를 비롯한 다년간의 트레이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나를 때릴까? 너 때문에 이제 회사에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일자리를 잃게 생겼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덜컥 겁부터 난다. 언제나 어른스럽게 굴려 노력하지만, 이런 면에서 자신은 영락없이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뉴트는 씁쓸했다. 벌어진 오 년이라는 시간을 따라잡고 싶어 애쓰지만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저만치 앞서 달려 나가 자꾸만 힘 빠지게 만드는, 그 빛나는 뒷모습.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호가 직장을 그만 두면 그 토마슨가 하는 놈이랑 더 이상 만날 명목이 없으니 나에겐 외려 좋은 건가, 싶기도 하고. 양가감정이 대립한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 안다면 민호는 뭐라고 생각할까. 한심스럽게 생각할까. 자괴감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그를 괴롭혔다. 뭐 물론 민호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감정의 함유량이 다를 것이라는 그 생각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애초부터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자격이나 기준이 있다면 이런 감정소비를 할 일도 없고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제 모습이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호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까.
“안 아프냐?”
“…어?”
죽어도 하기 싫지만, 이대로 이별 통보를 듣는다면 미안하다고, 연애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사과까지 하려 단단히 각오를 한 뉴트에게 민호가 건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뉴트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길게 뱉은 민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 아래로 내려와 있는 뉴트의 발목을 그러쥐었다. 색이 짙은 청바지를 종아리 위로 걷고 양말을 벗겼다. …어라. 그제야 뉴트는 자신의 오른발이 벌겋게 부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분명 사와서 어디다 둔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발목을 내려 두고 민호는 넓지 않은 방 안을 맴돌았다. 뉴트의 전공 서적과 유인물이 아무렇게나 꽂힌 책꽂이, 창고가 되어가는 베란다, 심지어 주방까지 거치며 마침내 그가 TV 아래 서랍장에서 찾아낸 것은 스프레이 제형의 파스였다. 피부에 즉각적으로 와 닿는 시원함과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찾아왔다. 고개를 뒤로 빼 파스 냄새를 휘저어 없앤 민호는 입술을 질끈 깨문 뉴트보다 곱절은 아파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파?”
“엉.”
뉴트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민호의 미간이 한심스럽게 구겨졌다. 시발,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래? 이 꼴통아.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복사뼈를 찰싹 내리쳤다.
“악!”
“자업자득이다.”
발목을 붙들고 죽을상을 하고 있지만 학습된 전례로 인해 이제 곧 죽어도 아프다는 말은 안 했다. 뭐라고 잔소리를 몇 마디 더 할까, 입을 달싹이다 민호는 그냥 혀를 쯧, 차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쪽을 택했다. 스프레이를 원래 자리에 넣어 두고 수트 재킷을 벗어 의자 등에 걸쳐 두었다. 그리 덥지도 않은 날씨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땀이 다 났다.
뼈에 금이 가거나 그런 정도로 심한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오늘은 저대로 파스만 뿌려둬도 되려나. 예전에 운동하다 다쳤을 때 대충 응급처치 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어떻게 하더라. 보기와 달리 꼼꼼한 편인 민호였지만, 아무래도 남자 둘 사는 집이다 보니 여자의 손길이 닿은 집만큼 만약을 대비한 이것저것을 준비해둔 섬세함은 결여되어 있었다. 판자를 대고 붕대라도 감아 둬야 하나, 그거 응급 상자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온 서랍장을 여닫으며 거실을 들쑤시는 민호의 등에 대고 뉴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민호 넌 가끔 그렇게 못 알아듣는 말 하더라. 다 알아. 그거 욕이지.”
“욕은 무슨. 주인 잘못 만난 네 다리한테 사과나 해. 대체 너는, 어? 니 발목이 강철이라도 되는 줄 아냐?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없네, 없어. 이사 올 때 분명 사다놓은 것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베란다의 수납장까지 뒤져 보았지만 찾는 것이 보이지 않자 민호는 넥타이 매듭을 느슨히 흔들며 뉴트의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주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멀쩡한 쪽과 선명하게 비교될 정도로 부어오른 발목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던 그는 유난히 말이 없는 뉴트의 눈치를 흘긋 살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지만, 수틀리면 반항과 삐뚤어짐이 예삿일로 사납게 치켜 올라가는 눈매가 오늘따라 유순하게 내리깔렸다. 너 인마 진짜 반칙이야. 이러니 화를 낼 수가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민호는 늘 이 얼굴에 약했다. 한 송이 꽃도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랑스러움.
“왜 그러고 봐.”
“내가 그런 짓 해서, 화난 거 아냐? 나 때문에 난감해졌잖아. 아까 그 남자, 회사 사람이지.”
“알면서 그런 짓을 해?”
“그래서 싫어졌구나. 정 떨어진 거야.”
“뭐? …야, 넌 그렇게 뭐든지 앞서가는 버릇 좀 고쳐라. 아주 머리 굴러가는 게 그냥, 아우토반을 달리는 스포츠카세요. 어? 네가 람보르기니냐? 그리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형광등 불 껐다 켜듯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안 싫어해.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하냐, 똘추야. 그 쬐끄만 머리통으로 뭐 자꾸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해.”
“시발 자꾸 쬐끄만하니 어쩌니 애 취급 하지 말라고.”
애 취급 안 하는데. 애 데리고 이런 짓을 어떻게 하냐?
문득 내려다보던 눈높이가 같아진 것을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입술 위로 따끈한 감촉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허리를 곧추세워 짧게 입 맞춘 민호가 눈썹께에 드리운 뉴트의 앞머리 위로 반듯하게 드러난 제 이마를 장난스럽게 쿵, 들이밀며 웃었다. 미적지근한 날숨이 얼굴을 간질였다. 온기 도는 이마를 붙인 채로, 화가 누그러들었음을 증명하는 입술 끝을 잠시 보고 있던 뉴트는 그대로 민호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다시 입을 맞대었다. 온전히 제게만 보여주는 이 진심 어린 미소가, 가슴을 맞대지 않아도 들리는 박동 소리가, 피어오르던 의심과 불안을 불식시켰다.
뜨겁고 축축한 뺨 안쪽을 훑고 입천장을 긁으며 뉴트는 혀를 섞는 데 열중하고 있는 민호의 어깨 아래에 손을 넣어 그를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등을 끌어안으며 허벅지 위로 올라탄 민호의 접은 무릎이 모두 침대 시트에 닿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뉴트는 그대로 엉킨 상체를 비틀어 그를 시트 위로 눕혔다. 방금 전까지 제 허벅지를 올라타고 있던 하체를 두 다리 사이에 가두고 상체를 숙여 다시 입술을 찾았다. 제 뒷목에 팔을 감고 어깻죽지와 날개 뼈로 손을 미끄러뜨리는 민호의 적극적인 반응에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그래, 싸웠을 땐 역시 몸으로 부대끼며 화해하는 게 최고지. 슬쩍 웃고 귓가를 지분대던 입술을 목으로 옮기며 단추를 풀려던 그의 성급한 손등 위로 열기 오른 손바닥이 덮였다. 솟아오른 목울대를 집요하게 핥고 있던 뉴트가 고개를 올리자 지척에 엄한 표정을 한 그의 연인이 보였다.
“그 발로 뭘 하려고.”
“…….”
“다 나으면. 나으면 하자.”
어찌나 단호한지 반대도 못 하겠다. 나 어디 안 가잖아. 마른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는 민호의 제안에 뉴트는 별 수 없이 무릎을 넘겨 그의 허리 위에서 내려왔다. 그래, 함께 있는 시간은 많으니까. 하지만 언제고 그가 알아둬야 할 게 있었다.
“좋아해.”
“…….”
“진짜야. 나만큼 널 좋아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걸.”
잊지 마, 나는 하루에 눈을 깜빡이는 횟수만큼 널 생각해.
어, 마지막 말은 좀 감동인데. 장난감 뺏긴 애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로맨틱한 말을 하다니. 넥타이를 풀어 머리맡에 던져두고, 몸을 일으킨 민호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뉴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쑥스러워 언제나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저녁은 카레가 좋겠다.”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침대에서 내려온 민호는 소매를 걷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앞서 간, 하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따라잡아 함께 걷게 될 뒷모습을 보며 뉴트는 가만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내일은 꼭 병원에 들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