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Starry night
글레이드를 발갛게 물들이는 동틀 녘의 태양 대신 먹구름이 가득 낀 잿빛 하늘이 심상치 않다 여겼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쏟아진 비는 고립된 땅을 적셨다. 몇 년을 동고동락해온 아이들이든, 가축들이든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은 모두 그들의 익숙해진 보금자리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거친 장대비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들판을 보고 있자니 꼭 어느 시간에 멈춘 채 그대로 죽어버린 도시 같았다. 움푹 파인 지형에 따라 드문드문 생겨난 웅덩이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으로 보아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은 날씨는 아니었다.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기 위한 대부분의 활동은 야외에서 이루어지므로 비가 오는 날은 모든 일과가 취소된다. 건축, 경작, 도살, 잡무…… 물론 미로를 뛰는 것도. 미로 안을 달리며 구조를 암기하고 모두의 출구를 찾기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러너들은 글레이드의 소년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속했다. 요리나 경작처럼 대체 가능한 인력 자원이 아닌 것이다. 비에 맞아 독한 감기라도 걸려 그 자리가 공백으로 비어버리면 손실이 크기에 비가 오는 날만큼은 미로를 돌지 말자고, 러너 팀의 소년들은 저들만의 규칙을 세웠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끼니를 때운다.’ 는 표현이 좀 더 알맞을 법한 식사를 들고 늦은 오후가 되자 늘 그렇듯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해먹 하나씩을 차지하고 누워 낮잠에 빠져들었다. 땅을 요란스럽게 두들기는 빗소리에 묻혀 드문드문 들리는 제프와 윈스턴의 말소리를 뒤로 한 채 뉴트는 본부 밖 비가 쏟아지는 글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힘으로 일구어둔 토마토며 감자, 옥수수 같은 경작물들이 흠뻑 젖고 있었다. 토지에 스며든 빗물은 땅 속 식물들의 뿌리를 배부르게 하고 그것들은 공급받은 물과 햇빛을 양분삼아 성장하겠지. 때가 되면 수확할 그것들을 먹고 글레이드의 아이들 또한 성장할 테고. 박스에 실려 올라오기 전의 기억이 없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로 몸만 성장하는 것이다. 하늘과도 같은 어두컴컴한 색을 하고 있어 오늘따라 더욱 더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미로의 돌벽을 망연하게 응시하고 있던 그 때 뉴트의 곁으로 차가운 바깥 기운과 함께 인기척이 끼쳤다. 민호였다.
습한 날씨 탓인지 매번 손질하여 세워두던 앞머리가 눈썹께로 착 가라앉은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본부에 들어와 뉴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조심성 없이 걷는 탓에 민호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탕물이 뉴트의 바짓단과 워커 끝에 튀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잇새에 물고 있던 육포 같은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민호가 불평했다. 시발 창조자 새끼들, 기왕 보내줄 거면 여러 가지로 골고루 보내주던가 하지 말야, 또 육포라고. 이 말라비틀어진 걸 먹고 배가 찰 사람이 어디 있냐? 안 그래?
매주 같은 시간에 박스를 통해 올라오는 보급품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는 보급용으로 제공되는 음식들을 그 누구보다도 잘 먹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라이의 형편없는 스튜도 두 접시씩 먹어치우곤 했으니 말이다. 그냥 상념에 젖어 궁상이나 떠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오늘 이거 말고 보급품 뭐뭐 올라왔냐?”
정오 즈음, 그러니까 이제 적응이 된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박스가 올라왔을 때를 되짚어 보니 그 자리에 민호가 없었다. 아침식사를 할 때 제 옆 해먹이 비어있던 것을 확인했고, 늦잠을 잔 건 아니었을 테니 아마 몇 년을 걸쳐 완성시키고 있는 지도 제작실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매번 목숨을 내어놓고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러너들의 노고를 알기에 비가 오는 날 정도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쉬어도 다들 나무라지 않을 텐데, 칼 같이 정확한 바이오리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말이야, 뭐라도 해야 돼. 지도라도 한 번 더 들여다봐야 빨리 여길 나갈 수 있지 않겠어?’ 민호는 그 누구보다도 미로 밖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열망하고 집착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뉴트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로 밖의 세상에 대한 열망은 본인의 희망이 아닌 여기 남은 아이들의 희망이 아닐까? 어느새 묵직한 부담으로 변해버린 그들의 희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달려야 하는 치프 러너라는 소임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이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미로를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뭐랄까, 의무감 같은 게 아니겠냐고.
“뭐 별 거 없었어. 밀가루 세 포대랑 모포 다섯 장, 옷 몇 벌,”
…그리고 이거. 뉴트는 헤진 바지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병을 꺼내었다. 뉴트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병이었다. 코르크마개로 닫혀 있는 투명 유리병 안에는 마치 물처럼 보이는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턱을 쭉 빼어 뉴트가 내민 것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민호의 눈매에서 경계심이 걷혔다. 아, 이거 술이구나! 그렇지! 소년과 성인 남자의 경계에 서 있는 나이 치고는 높은 목소리로 외치며 그는 핑거스냅을 날렸다.
“뭐야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마시더니 역시 뉴트 너도 갤리가 만든 술이 별로였던 거구만. 그래. 어쩔 수 없이 먹긴 하지만, 갤리 그 자식이 만드는 술 정말 맛없단 말이지. 뭘 넣고 만든다더라?”
“삭힌 무화과.”
“-아 그래! 삭힌 무화과. 최악이지. …그래서 이건 애들 주기 싫어서 빼돌렸냐? 차기 리더한테 이런 면이 다 있었네.”
그런 게 아니라, 뉴트는 첨언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평소 그는 식탐이나 제 몫의 물건을 더 가지려 하는 물욕과도 같은 욕구에 매우 담백한 편이었다. 매일 삼시 세끼 배식해주는 대로 식사를 하고 정해진 일과에 따라 제 몫의 일거리를 수행했으며, 글레이드의 다른 아이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곤궁한 차림으로 똑같은 모포를 덮고 잠이 들었다. 정말로 모두를 위해 공평하게 보급되어지는 보급품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은 털끝만큼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나갈 수도 없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더 취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들이 창조자들에게 요구한 품목과 실제 그들이 보내준 물건들을 대조해 보기 위해 매주 같은 시간대에 올라오는 박스 안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W-C-K-D. 아마도 저들을 글레이드로 올려 보낸 ‘창조자들’ 의 정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글귀는 마치 한 공정 안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보급되어 올라온 모든 물건들에 찍혀 있었다. 프라이의 새 메뉴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울 밀가루 세 포대와, 짙은 풀색의 모포, 아마도 러너 전용으로 보이는 티셔츠 몇 장, 그리고, 그리고…… 유일하게 창조자들의 ‘낙인’ 이 찍혀 있지 않은 유리병. 아주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 크기도 아니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사전에 메모해 놓았던 종이를 꺼내들어 보급품 목록을 체크하던 뉴트는 허리를 굽혀 발치에 있던 그것을 집어 들었다. 높은 체온의 손바닥 위로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닿자 일순 생경한 기분이 전신을 감돌았다. 승강기와도 같은 박스가 멈춰 서 있는 어두운 지하통로 안에서 병이 반짝, 빛을 발한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내가 마셔야 해.
부지불식간에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뉴트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내가 이걸 왜…?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은 내면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뉴트, 네가 들고 있는 그걸 모두 마셔버려. 이 정체도 모르는 물을 내가 왜……, 하지만 마시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낯선 느낌은 뉴트를 재촉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야, 뉴트!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아, 아니. 머리 위로 박스 안을 내려다보는 알비의 목소리가 들리자, 뉴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바지주머니 안으로 은근슬쩍 유리병을 밀어 넣었다. 완전 범죄. 이성을 앞지른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다.
“넘겨 봐, 맛 좀 보게. 미로 밖의 술은 대체 무슨 맛이냐?”
“기다려. 반 마시고 나눠줄게.”
어금니로 무른 코르크마개를 물어 당겨 뽑아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무색 무취. 술이라면 무언가를 숙성시켰거나, 또는 증류시키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알싸한 향이라도 있을 것인데 미간을 모으고 온 몸의 세포를 후각에 곤두세워도 알코올 특유의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뭐지, 정말로 그냥 물인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주 잠시간 고개를 갸웃대던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병의 주둥이를 엷은 입술에 붙이고 그것을 기울였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투명한 액체들을 삼켜냈다. 무색 무취, 무미. 술이 아니라 물이었던 모양이다. 야, 남겨준다며 이 자식아! 별로 크지도 않은 병인데 그러다 다 마셔버리겠다며 어깃장을 놓는 민호에게 그냥 물이니까 꿈 깨, 하고 일갈하기 위해 막 병에서 입을 떼어냈을 때, 두 손으로 목을 옥죄는 것보다 더한 감각이 목구멍 안쪽에서 느껴졌다. 짜릿함의 범주를 넘어서, 식도가 타들어갈 것 같은 통증이었다. 뉴트는 찢어질 듯한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컥컥거리는 기침과 함께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액체를 토해내듯 뱉어낸다. 손에서 놓친 유리병 또한 벌써 저만치에 굴러가 남은 내용물을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었다.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민호가 윽박질렀다. 야 이 똘추 새끼야, 그게 뭔 줄 알고 함부로 마셔! 이거 시발 무슨 사람 병신 만드는 이상한 약 아냐?! 미친 창조자 새끼들! 점차 잦아드는 통증에 여유를 되찾은 뉴트는 잔기침을 하고 입가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야, 잠시 잊었나본데 내가 마시기 이전부터 이걸 탐낸 똘추 새끼는 바로 너였거든….
짧고 강렬하게 찾아온 통증이 말끔하게 가시자 뉴트는 흙이 묻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짙은 눈썹을 잔뜩 구기고 무릎에 손을 얹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민호를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시발 새끼니 똘추 새끼니 항상 말은 험하게 하지만 실은 그게 다 걱정과 관심이요 애정표현의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나 아니어도 근심 걱정 많을 치프 러너의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게 내버려둘 순 없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얼굴로 뉴트는 검지를 들어 민호의 이마를 툭 밀었다. 방심하고 있던 유순한 이목구비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냥 존나 독한 술이었던 것 같아. 갤리가 만든 것보다 더 심각한.”
“으 미친…… 세상에 그런 맛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 떠올 테니까 기다려.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고르자 인상을 죽죽 쓰며 몸서리를 치던 민호는 빈 수통을 찾아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저거 봐, 저렇게 걱정하면서 하여간 쌀쌀맞은 척은. 별 노력 없이도 몇 년 동안 미로 안을 달리며 자연스레 가꾸어진 등 근육과 은근하게 비치는 날개뼈,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허리 등을 감상하듯이 지켜보고 있던 뉴트의 신발 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허풍 좀 보태어 저를 저승의 문턱까지 끌려갔다 돌아오게 만든 의문의 그 병이었다. 아까 떨어뜨리면서 바닥에 쏟아버린 탓에 내용물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술도 아닐 테고, 식수용 물은 더더욱 아닐 테고, 대체 이 따위 용도도 모르는 걸 왜 보낸 거야…. 빈 병을 주워들고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던 뉴트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창조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표기가 적혀있지 않았던 병의 납작한 밑바닥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박스에서 건져 올릴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는 오로지 한 문장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뉴트는 무심코 그것을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당신이 보게 될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뉴트는 어느 순간부터 제가 익숙하지 않은 길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계획적으로 잘 정리된 구역 안에 지어진 붉은 지붕의 집들과 포장된 도로, 길의 가장자리에 심겨 녹음을 형성하고 있는 잎이 넓은 가로수들. 턱을 치켜들고 생 장미의 향이 코를 찌르는 화단 너머를 살피면 넓은 정원 안에서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그의 옆으로 샛노란 스쿨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뉴트의 허리춤까지 올 법한 꼬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고, 마중 나와 있던 부모들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여유와 평화로움, 따사로운 감정들. 그제서야 뉴트는 깨달았다. 제가 서 있는 이곳은 글레이드 밖이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미로의 벽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저 혼자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생경한 풍경들. 분명 처음 보는 모습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낯이 익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이곳에서 머물렀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혼란스러운 의식과는 다르게 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남자와 어느 집 앞에 묶여있는 녹색의 자전거를 지나쳐 두 갈래로 찢어지는 갈림길에서 멈춰섰다. 오른쪽이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 모퉁이로 몸을 틀었다. 행선지가 어디인 줄 알고, 이 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색깔이 누렇게 변한 플라타너스 잎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보도를 밟으며 뉴트는 생각했다. 이미 학습된 지식처럼 익숙한 느낌. 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낯선 풍경과 기억들을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것 같았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딱딱한 담벼락 대신 손질이 잘 된 묘목들이 뜰을 둘러싼 가정집이었다. 그리 규모가 크거나 호화로운 대저택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물을 먹여 적당히 자란 잔디와 열을 맞춰 대문 옆으로 가지런히 놓인 화분, 수돗가에 정갈하게 감겨 있는 수도호스 등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에 살고 있는 주인이 무척이나 이 집을 열심히 가꾸고 관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집 주인의 애착이 느껴지는 이 붉은 지붕의 벽돌집에도 익숙함이 느껴진다. 뉴트는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열매가 탐스럽게 맺힌 나무와 낡은 그네,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옆에 놓여 있는 농구공을 지나쳐 뜰을 절반정도 가로질렀을 때, 자그마한 창문이 달린 현관문이 열리며 마른 체구의 중년 여성이 상체를 내밀었다. 자신과 꼭 닮은 밀빛 머리를 가진 그녀는 깜짝 놀라며 아는 체를 했다. 오, 아가! 어디 갔었니? 그렇잖아도 올 시간이 되었는데 오질 않길래 찾으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절 아세요? 소리 내어 말하려 했으나 뉴트의 흰 뺨에 그녀의 입술이 닿은 것이 먼저였다. 분명 열일곱, 열여덟이 되어 키가 성인 남성 못지않게 훌쩍 자랐고, 또한 계속 자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뉴트는 잠시 한 쪽 손을 들어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어른의 것에 가까운 제 손이 아닌 어린아이의 자그마한 오른손이 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맞춤을 자연스럽게 받아내며 뉴트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작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글레이드에 올라왔던 시절보다 더.
얼른 들어와, 소개시켜 줄 친구가 있단다. 저를 집안으로 이끄는 그녀의 커다란 손과 정신은 그대로인 채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몸을 번갈아보며 잠시간을 생각하던 뉴트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 그러니까 박스에 실려 글레이드로 던져지기 전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애정이 넘치는 반응으로 저를 맞아 준 것은 아마 자신의 모친일 것이다. 이미 등을 돌린 채 주방으로 들어간 그녀의 이목구비를 되새기려고 노력했지만, 놀랍게도 방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주방은 향긋한 홍차 향과 달큰한 쿠키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자잘한 꽃병이 놓인 사인용 원탁에는 흑발의 성인 여성과 앉은키가 의자의 등받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어린 아이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뉴트를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뉴트의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웃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도 그녀의 이목구비가 인식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인사하렴, 뉴트. 아이작 씨가 살던 옆집에 새로 이사왔단다.”
어머나! 아드님이 정말 귀엽네요. 우리 아들도 새 친구에게 인사해야지? 조금은 어눌한 발음의 영어가 들리고, 저와 다를 바가 없는 자그마한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고 와작와작 깨물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뺨과 아래로 처져 유순해 보이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눈, 작게 벌린 입술 아래로 드러난 자그마한 치아들.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지닌 그는 분명 뉴트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뉴트가 보고 지나쳤던 수많은 풍경, 그 어느 모습보다도 낯이 익었다. 앞머리를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아이가 Hello, 하고 한 마디를 떼기도 전에 뉴트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흑백으로 멈춘 세상에서 그 혼자 생동한 빛깔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민호?”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마치 스위치 끄듯 단번에 그의 세상이 사라졌다. 암전. 시야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뉴트는 당황한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저와 마주보고 있던 어린 날의 민호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저의 모친도, 홍차 향이 가득했던 주방과 아늑한 거실의 모습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 엄마? 민호? 떠오르는 대로 불러 보았으나 제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부딪혀 돌아올 뿐이었다. 시커먼 어둠이 그들 모두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이게 대체…….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세 번 빠르게 깜빡였을 때, 다시 조명을 켠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와 민호, 그의 모친이 함께 있던 그 주방이 아니었다. 하얀 색으로 칠을 해 놓은 주방 선반에는 어머니의 소녀스러운 취향이 드러나는 들꽃무늬 접시 대신 아무렇게나 쌓인 통조림이, 레이스 조각보 위 화병이 놓여 있던 식탁에는 절반정도 먹어 후레이크가 우유에 불은 시리얼 그릇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전혀 다른 집. 깔끔한 것은 이전과도 같았으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지는 않는 투박한 공간이다. 그 곳에서 그는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던 중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아니, 글레이드에 있던 때보다 몸이 더 자란 것 같다. 그는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와 먹색 티셔츠 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뉴트, 웬일로 일찍 일어났…… 야 이 시발, 너 인마 내가 집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했지!”
도어 락이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목에 커다란 헤드폰을 걸친 남자가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뉴트는 암전이 찾아오기 전 그가 불렀던 남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발음했다. 민호.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피넛 쿠키를 든 채 저를 말갛게 쳐다보던 꼬마가 십 몇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또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다.
민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케이트보드를 내려놓고 하얗고 까만 운동화를 벗어냈다. 슥슥 다리를 밀어 발을 몇 번 움직이자 신발장 타일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신발들이 가지런히 열을 갖추었다.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으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 새끼냐고 욕을 하는 폼이 제가 알고 있는 민호가 맞았다. 옆에 놓여있던 용도모를 종이컵에 담배를 비벼 끈 뉴트는 저도 모르게 그의 뒤로 다가가 민호의 등을 끌어안았다. 매끈한 복근 위로 팔을 감고 민소매를 즐겨 입어 그을린 어깨 위로 뾰족한 턱을 얹었다. 판판한 등짝에 가슴팍을 딱 붙이고 무게를 실어 누르자 온 몸에 힘을 빼고 있던 민호는 밀리는 대로 몸을 움직여 반사적으로 몇 발짝을 걸었다. 아, 무거워 이 새끼야.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가슴팍에 달라붙는 체온을 느끼고 있던 뉴트는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입을 열었다.
“피자 시켜 먹을까? 오늘 너 좋아하는 풋볼 경기 있던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계처럼 입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뉴트의 제안에 민호는 화들짝 놀라는 대단한 반응을 보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 맞아! 레드스킨스랑 이글스! 하마터면 까먹을 뻔 했네.’ 뉴트가 알지 못하는 생소한 이름을 말하며, ‘피자 시켜? 페퍼로니?’ 동글동글한 뺨이 옴폭 패이고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어, 이건 처음 보는 모습이다. 미로를 나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글레이드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활짝 접힌 눈매 아래로 애교 있게 차오르는 살점. 정말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민호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더욱 어리고 귀여웠다.
쿵, 잠버릇이 고약한 누군가가 해먹에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뉴트는 눈을 떴다. 자연에서 구한 재료들로 만들어낸 오두막의 익숙한 천장, 점점 자라는 몸에 맞지 않아 좁게 느껴지는 익숙한 해먹, 자그마한 횃불을 들고 불침번을 서는 동료들의 익숙한 뒷모습. 글레이드였다. 그래, 우리는 갇혀 있었다. 뉴트는 빠르게 돌아오는 현실 감각을 느끼며, 느닷없이 꾸게 된 하룻밤의 달콤한 꿈의 내용을 되짚었다.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고, 지금보다 조금 더 자란 성인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으며……민호. 그래, 민호가 있었지. 몸을 반대로 틀어 묵직하게 내려앉은 옆 해먹을 살피자 양 쪽 팔을 접어 머리 뒤에 받친 채 팔자 좋게 자고 있는 민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과거에 함께한 민호. 하필이면 왜 민호일까. 뉴트는 마치 제 곁에 누워 잠든 민호가 그러하듯 깡마른 팔뚝을 머리 밑으로 집어넣었다. 몸을 뒤채어 오래된 해먹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유의하며 오래된 동료이자 친구의 잠든 얼굴을 살폈다.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진, 무방비한 모습. 지금처럼 매일 밤 들리는 흉악스러운 그리버의 울음소리에도 적응이 된 몸은 일정한 간격으로 고르게 오르내렸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내리고 있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배정받은 일을 해야 한다. 평화로운 글레이드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만들고 동의한 룰이었다. 지금 선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내일 오전이 힘들 텐데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복잡한 머릿속은 수면을 방해했다. 하여간 이게 다 그 이상한 꿈 때문이야, 하고 탓했지만 그 ‘이상한 꿈’이 싫진 않았다. 마치 백지상태와도 같은 그의 과거에 ‘실은 이런 유년시절을 보냈었지.’와 같은 단편적인 기억 한 폭을 그려 넣은 기분이었다. 다정한 어머니의 입맞춤을 받으며 어린 시절의 민호를 만났던, 그 모습이 내 진짜 과거라면 어떨까. 그럼 그 이후에 보았던 성인이 된 내 모습과 민호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놓던 뉴트는 문득,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떠한 것을 떠올렸다. 아까 제가 토해내듯이 뱉어냈지만 결국은 다 삼킨 꼴이었던 유리병의 이상한 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병의 밑바닥에 적혀 있던 글귀.
당신이 보게 될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비약이 과했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그 꿈이 내 미래이자 현실이 될 거라고? 우리가 저 미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설마. 그는 픽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그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꿈을 꾸었다.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진짜인 것처럼 지나치게 생생해졌고, 뉴트는 설마, 하고 어처구니없다 생각했던 제 가설을 더 이상 비웃을 수 없게 되었다. 벌써 오 일째 같은 꿈을 꾸고 이젠 꿈속에서 제게 외치는 민호의 욕지거리를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고민했다. 밤마다 보는 이 모습들이 내 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말어? 이미 생각은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었다.
사실 뉴트라고 글레이드 밖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로 밖을 나가면 그리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어린 척처럼 마냥 희망적인 상상을 하고 있진 않았다. 성숙해진 몸과 마음이 그에게 지나치게 냉철한 사고를 요구한 것인지, 아님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좀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미로 밖의 세계가 글레이드 안의 상황보다 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모험보단 안위만은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차선책을 택했다. 지금 이대로, 무풍지대와도 같은 글레이드의 삶에 안주하는 것.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매일 밤 반복해서 꾸는 그 꿈이 모든 것을 바꾸고 흔들어 놓았다. 마침내 뉴트는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본 그것들이 나의 과거였고, 또 앞으로 내가 누리게 될 미래가 확실하다면, 저 지긋지긋한 미로의 돌벽을 뚫고 지금이라도 글레이드 밖으로 나가고 싶다. 진심으로. 닻을 내리고 아주 오랫동안 정박해 있던 한 척의 돛단배가 순풍을 받아 물결을 헤치고 항해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안자고 뭐하냐?”
망루 꼭대기로 향하는 사다리 위로 얼굴 하나가 쑥 올라왔다. 팔을 뻗어 등 뒤를 짚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그를 발견한 뉴트는 밤에 저 얼굴을 보다니 이것도 꿈인가, 하고 눈을 꿈뻑이다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그와 자신이 나오는 꿈은 언제나 햇살이 쏟아지고 안락한 집 안이지 답답한 글레이드 안이 아니었다. 그러는 너는? 뉴트가 물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역을 돌고, 가능한 한 빨리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새벽 동이 트자마자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러너들이기에 이 늦은 새벽에 깨어 있는 민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읏샤, 민첩한 몸놀림으로 두 무릎을 망루위에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몇 발짝을 옮긴 그는 뉴트의 옆에 풀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목말라서 깼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어떤 새끼가 감쪽같이 없어졌길래 잡으러 왔다, 왜.
걱정했어, 솔직한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민호는 언제나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늘여서 포장하듯 말하는 버릇이 있다. 항상 그랬다. 그래도 혼자 앉아있을 때보단 허전하다거나 쓸쓸하지 않아서 좋다. 비록 말을 예쁘게 하지 않는 민호라 할지라도.
“있잖아, 민호.”
“왜.”
“나가면 뭐 하고 싶어?”
긴 정적을 가르고 뉴트가 불쑥 말을 붙였다. 목적어가 빠졌지만 아마 영리한 그는 단번에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미로 밖을 나가면 뭘 하고 싶어? 그러고 보니 알비, 갤리와 함께 글레이드에 사는 소년들 중 가장 최초로 이곳에 올라와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둘인데도 불구하고 ‘미로 밖’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뉴트는 글레이더의 부대장으로, 또 민호는 치프러너로, 그간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볼 틈도 없이 치열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맡은 직책을 잘 수행해왔다는 뜻이다. 저 미로 밖을 나가기 위해서.
“잠도 늘어지게 실컷 자고, 프라이가 만든 게 아닌 진짜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 몰라, 뭔가를 하고 싶은 감정이 들 수가 있나? 글레이드 오기 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잖냐. 그리운 것도 없고 말이야.”
“…….”
“그럼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아, 어디 내가 한번 맞춰볼까? 음…… 예쁜 여자애랑 손잡는 거? 입 맞추는 거? 그동안 글레이드가 우리 같은 사내새끼들만 우글거려서 여간 삭막한 게 아니었잖아. 야박한 창조자 새끼들.”
물론 식료품 가게에서 구입한 참치 캔에 가공 베이컨, 부실한 시리얼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어쨌든 프라이가 만들어 주는 실험정신 강한 메뉴보단 훨씬 맛있는 편이고, 비가 오는 날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지만 역시나 그렇지 않은 날은 스케이트 보드를 끼고 새벽같이 나가던걸. 몸에 익은 생활 패턴은 밖에 나가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내가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상대는 예쁜 여자애가 아니라 너던데, 민호…. 매일 밤 꿈 속에서 너와 나의 미래를 한 장면씩 엿보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뉴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분명 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 무뚝뚝이는 무슨 소리냐고 비웃을게 뻔하다. 아니, 미친 소리 말라고 주먹부터 날리려나. 어느 쪽이 되었든 오롯이 저 혼자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삼키는 대신 뉴트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했다. 전엔 없던, 아주 확신에 찬 말투였다.
“…나가는 길 말인데,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뭔…. 왜, 이제 여기 지겹냐?”
“그래, 지겹다. 아주 지긋지긋해.”
나 참…. 한숨처럼 뱉어내는 대꾸에 ‘계집애처럼 징징대기는.’ 따위의 답변이 이어질 것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민호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저와 똑같이 두 다리를 쭉 펴고, 팔을 뒤로 젖힌 채 상체를 앞으로 내민 뉴트의 어깨를 툭 쳤다. 두 어깨가 나란히 맞닿았다. 일견 깡마른 것 같아도 미끈한 근육이 붙어있는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해서, 제가 밀어도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랐지만 듬직한 부대장의 어깨는 글레이드의 평화를 유지하고 아이들을 보호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민호 역시 그 강인한 어깨에 기대고 의존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신체적인 접촉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물론 말을 하지 않았으니 본인은 모를 것이다.
맨 살갗이 닿는 감촉에 장막을 두른 듯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뉴트는 민호를 보았다. 꿈속에서처럼 볼에 옴폭 우물이 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가에 미미하게 웃음기가 묻어있는 얼굴로 고개를 젖힌 채 눈만 슬쩍 내려 뉴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걱정 마 인마, 내가 꼭 찾을 거니까.’ 그 또한 전엔 없던, 아주 확신에 찬 말투였다.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분위기에 뉴트는 망루의 통나무 바닥을 짚은 손을 옆으로 슬금슬금 밀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이제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짧은 거리에 매일같이 미로 안을 달리는 치프러너의 손이 있다. 뒤통수를 맞대고 발꿈치를 딱 붙인 채 키를 쟀던 것도 몇 년 전이라 이젠 서로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 손은 제 것이 더 크다. 마음 같아선 저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얽어 빈틈없이 맞물리게 하고 싶은데, 대담함은 매년 자라는 몸과는 달리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손바닥은 넓지만 아직 손가락은 뭉뚝하고 짧아 어린 그 손 위로 몇 번을 헛돌던 뉴트의 손은 결국 민호의 어깨를 짚었다. 찬 공기에 옅게 소름이 돋아난 맨살 위로 손끝의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이제 제법 골격이 모양새를 갖추어 단단하고 넓어졌지만 뉴트도, 민호도 아직은 성장하고 있는 소년들이다.
덜 여문 몸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을 때까지 완벽하게 자란 너와 내가 함께 잠들고, 함께 눈뜨던 그 꿈이 정말 우리의 미래인지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민호. 꼭 찾아, 출구를.
“내일 늦잠 자기는 글러 먹었구만. 미로 뛰기 딱 좋은 날씨겠어.”
아쉬운 척 하고 있지만 경쾌함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민호는 벌러덩 망루 위에 드러누웠다. 어, 그러게. 나도 내일은 꼼짝없이 일을 해야겠네. 뉴트 역시 등을 나무바닥 위에 붙이며 민호의 옆으로 몸을 뉘였다. 아침이면 다시 괴기스러운 입을 벌릴 미로의 벽 대신 망망대해처럼 검푸른 밤하늘이 보인다.
유독 별이 많은 밤이었다.
1. 원작설정 영화설정 개★박★살. 내 세계에서만큼은 행복해져라 늍민..
2. 마지막 부분 갈아엎고 싶은데 어케해야 할지 모르겠다
3. 이러나 저러나 슬애긔를 생산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