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Where you at?
1. 상알파x상알파 같은 둘을 쓰고 싶다 다짐했는데 내 안의 늍민 어디로 가는지.....
2. (늘 그래왔듯) 캐붕 주의
3. 네임버스 모르는 애가 쓴 네임버스 세계관 주의
4. 원래 이 글의 원래 제목은 ㅎㅏ이 서울이었고 이로써 틔터에서 열심히 떠벌리던 부루마블 시리즈는 무산이 되었읍니다 그럼 20000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의 신호는 길었다. 청색 불이 점등됨에 따라 두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양쪽으로 오고갔으며 깜빡깜빡 점멸 후 적색 불, 이후로는 왼쪽에 핸들이 달린 생소한 구조의 차들이 그 위를 느리게 달렸다. 뉴트는 건널목에서 멀찍이 떨어진 버스정류장 근처에 서서 그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도로 위에 쏟아지듯 몰려나오는 사람들의 틈에 껴 자신도 길을 건너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렇잖아도 방향을 영 잘못 짚은 것 같은 상황에서 길 하나까지 더 건너 버리면 정말로 길을 잃을 것 같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꽤 걸은 것 같은데 아무리 걸어도 도심 속의 전통미를 자랑하는 고궁이나, 광장에 가면 필수로 봐야 한다고 토마스가 일러준 장군의 칼 든 동상 같은 것은 안 보였다. 호텔 앞으로 나 있는 커다란 보도를 따라 쭉 걸어 내려오는 동안 뉴트가 본 것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귀금속 가게들의 불 꺼진 간판과 음식점 몇 개를 건널 때마다 보이는 휴대폰 판매점이 전부였다. 한참을 걸어 내려온 후에야 비로소 뉴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그는 앳된 티가 역력하던 프런트 여직원의 동글동글한 얼굴을 떠올렸다. 서비스업 종사자의 친절한 미소를 만면에 장전한 태도로 한참을 설명해 줬는데 뭐라고 했더라. 이쯤 되니 아까 호텔에서 나오며 길을 물어봤을 때 입구의 왼쪽으로 가라고 했는지 아님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낮으로 제 사수의 귀와 입이 되어 주고 삼일 만에 자유를 찾은 토마스는… 지금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회포를 푸느라 바쁠 테고, 그나마 말이 통할 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길이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그들은 뉴트가 거리를 좁히려고 마음을 먹는 족족 그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한국말을 한 자도 못 하는 이방인이라는 제 상황이 얼굴에 써져 있기라도 한 건지 도통 저와 눈을 마주치려 들질 않았다. 예전에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했었던 토마스는 그들이 묵을 호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영어가 아닌 능숙한 한국어로 예약을 확인하고 벨보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이렇게 말했었다.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다들 어렸을 때부터 영어 교육을 받았으니까,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으면 남들이 비웃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 같은 외국인에 대한 울렁증으로 이어지는 거고요.’
아니 그러니까 완벽한 문장은 바라지도 않고 난 그냥 짧은 단어에 손짓 발짓으로 광화문이 어디인지만 알려주기만 해도 충분히 고마울 텐데…. 속도는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지만 영 도움이 되지 않는 구글 맵을 켠 채로, 아이폰을 쥐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는 머쓱하게 이마를 문지른 뉴트는 완벽하게 길을 잃은 듯한 예감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발이 묶인 듯 자리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자 마침 바로 앞에 스타벅스 매장이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좁았지만 런던의 회사 건물 앞에서도 자주 보는 낯익은 로고가 눈에 들어오자 불안하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손도 녹일 겸 커피 한 잔 사고 길이나 물어볼까.
몇 시간 남지 않은 오늘까지 포함해서 앞으로 딱, 이틀. 다시 런던 땅을 밟기까지 이틀이 남아 있었다.
국민 소득이 증가하고, 해외 문화와의 교류에 적극적인 데다 음주가무 문화를 즐기는 한국 사람들의 특징 덕에 한국 주류 시장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높은 시장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비슷한 상품들로 살벌하게 경쟁하기 바쁜 유럽의 이웃 나라들에게는 일치감치 시선을 거두고 모두가 블루 오션인 한국을 주시하고 있던 그 시기에, 독일의 W사는 1년 전 한국의 한 주류업체를 인수하여 한국 시장 진출의 시발점을 끊었다. 너도 나도 한국 업체를 찔러볼까 고민하고 눈치를 보던 차에 과감하게 끼어들어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이 바로 뉴트가 일하고 있는 F사였다. F사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마실 수 있지만 도수가 약한 기존의 한국 맥주 대신 좀 더 진한 맛으로 즐길 수 있는 자사 맥주의 강점을 어필했고, 현지로부터 나쁘지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수십 번의 컨텍이 오고간 후에 성공적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브랜드 경영회사인 A사는 F사에게 보틀링과 유통에 대한 한국 시장의 로열티를 지불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사실 이번 출장의 적임자로 윗선에서 거론되었던 건 벤이었다. 섭섭지 않게 챙겨 주는 출장 수당에, 비행기 삯도 비싼데다 직장에 매여 있어 하루 이틀 일정으로는 절대 다녀올 수 없는 아시아 국가에 방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해외 출장 기회라 평소 같았음 다들 눈에 불을 밝히고 탐내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자리를 넘볼만한 여유가 없었다. 현재 뉴트의 부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 쪽에도 진출 계획을 진행하고 있어서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장자로 가장 유력했던 벤은 이제 막 태어난 핏덩어리 같은 아들의 아버지가 된 유부남이었다. 그는 잦은 야근에, 잔업에, 그렇잖아도 육아에 시달리는 와이프의 집안일을 도와주지 못해 눈칫밥을 먹고 있는 형편인데 이러한 최악의 상태에서 일주일이나 집을 비우게 된다면 저녁밥을 굶어야 하는 신세는 면치 못할 것이라며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 말고 하소연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들어 눈 밑이 짙어진 동료의 눈물 젖은 읍소를 들은 뉴트는 ‘그래?’ 하고 한번 되묻고는 이튿날 스스로 출장에 지원했다. 물론 한국어에 능통한 그의 부사수 토마스를 데리고 말이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뉴트라고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복귀 후 사무실에 돌아갔을 때 모니터 위에 빼곡하게 붙어 있을 메모지 더미와 제 앞으로 남겨져 있을 부재중 전화들을 생각했다. 하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출장길에 올랐기에 돌아가면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할 일들이 배로 늘어나겠지만, 사실 그에게는 몇 날 며칠 야근을 자청하며 해치워야 할 그것들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이 있었다.
‘정말 괜찮은 아가씨라던데…… 하필이면 식사 약속 잡아놓은 날 출장을 갈 게 뭐니.’
캐리어에 포멀한 옷가지와 속옷 몇 장, 전압 어댑터와 랩톱을 챙겨 넣고 마지막으로 내일 아침 입을 셔츠와 넥타이를 옷장 문에 따로 걸어놓고 있을 때 뉴트의 방 문틀에 기댄 어머니는 퍽 아쉬운 투로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회사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침대 위에 입을 벌린 채로, 그 안에 든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캐리어 속 단촐한 내용물의 구성은 누가 봐도 비즈니스 차 출장을 떠나는 회사원의 것이었다. 그래, 일개 사원인 제 아들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것을 보며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 쉬는 그녀에게 뉴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게요. 하지만 아직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기회도 많고요.’ 그는 손에 들린 실크 넥타이의 촉감처럼 매끄럽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저 역시 아쉬운 척, 어머니를 안도시켰다. 입매가 올라가고 반질반질한 광대가 봉긋 솟은 착한 아들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의 군소리를 늘어놓기도 미안해진 그의 모친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그를 따라 웃었다. ‘…그래. 얼른 자려무나. 내일 아침 식사는 같이 들었음 좋겠는데….’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뉴트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휴우, 지친 기색으로 눈썹을 들었다 놓으며 눈썹 아래까지 드리워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다시 침대 앞으로 돌아왔다. 어디까지 했더라. 약간의 스트레스와 피로에 옅게 핏발이 선 눈이 크지 않은 가방 안을 명민하게 훑었다. 스웨터 몇 벌, 속옷, 어댑터와 랩톱, 세면도구…. 그는 캐리어 안의 물건들을 재차 확인하고 지퍼를 돌려 닫아 침대 옆에 세워 두었다. 협탁 위 수면등과 함께 놓인 탁상시계가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인데다 집에서 공항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었기에 이제 그만 잠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브리프케이스에 챙겨 넣은 서류를 점검하는 것까지 모두 마친 뉴트는 양 팔을 교차시켜 티셔츠를 뒤집어 벗었다. 그리고 방에 딸린 욕실로 향하려다 문득, 발길을 돌려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수면등의 빛이 닿지 않아 어둑어둑한 커튼과 높고 낮은 몇 개의 책장을 배경으로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거울 너머에 서 있었다. 뉴트의 시선은 그의 목울대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쇄골을 지나 어둠 속에서도 하얗기만 한 살갗 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에 머물렀다. 엷은 표피 너머로 그의 심장이 뛰고 있을 왼쪽 가슴께에 아홉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것’ 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물론 아직까지 사회의 분위기는 우주의 순리처럼 당연시 여기는 그 현상을 받아들이고 제 몸 어디엔가 새겨진 상대를 찾아 떠나는 경우를 보편적으로 여기긴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종교처럼 그것을 맹신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불확실한 운명을 부정하고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고, 또 워낙 기술이 좋아진 오늘날에는 새겨진 문자를 제거하는 수술이나 인위적으로 레터링을 새기는 수술도 생겨났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부작용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뉴트의 부모님은 그러한 현실의 흐름에 편승한 전형적인 케이스로 제 아들에게 이만 다른 상대를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끊임없이 권했다. 물론 지금이야 세 아들 모두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그들 역시 런던 근교의 적당한 가정집에 사는 중산층의 집안이 되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스본 가는 러셀, 캐번디시와 같은 유서 깊은 가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고 했다. 뉴트와 그의 두 형이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세뇌시키듯 되풀이 해 들려줄 정도로 집안의 내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아버지는 오스본의 이름에 걸맞게 당신이 골라 주시는 아가씨와 결혼할 것을 뉴트에게 종용했다.
얘는, 젊은 애 답지 않게.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아직도 미련스럽게 운명론을 운운하니? 어차피 이름을 보니 여기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네 아버지 말 들으렴. 그 왜, 예전에도 얘기했던 조지 씨 둘째 딸 말인데……. 뉴트는 그럴 때마다 언제 봤는지 얼굴도 까마득한 지인의 이름과 함께 괜찮은 가문, 출중한 학벌, 적당한 직장 등을 늘어놓는 어머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체 그놈의 오스본이 뭐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족쇄 같다고 생각했다. 오스본. 그 이름 때문에 자신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자식의 범주라는 울타리 안에서 얌전하게 자라 왔다. 학교를 다니며 부 활동을 하는 것도,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어울리는 것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부모님이 안 된다고 하면 쉽게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런 언행은 오스본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좀 더 오스본의 일원답도록,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그러나 그렇게 자라기를 십 수 년이 되어 가치관이 형성되고 제 나름의 주관과 판단이 바로 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여태껏 자신이 무척 쇼윈도 속 액세서리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자신을 있게 해준 부모님과 가문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저 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각을 했을 땐 솔직히 충격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미래에 저와 함께할 짝을 고르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그 결정만큼은 오롯이 제 뜻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몸 어딘가에 서로의 이름을 새긴 채 종종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운명의 상대라.
정말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지, 매일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확인을 해도 언제나 별 변화 없이, 마치 화상 자국처럼 옅게 남아 있는 그 이름을 볼 때마다 뉴트는 기묘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마치, 뱃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운명을 찾으려는 그에게 던져진 것은 이름 하나 뿐. 그가 몇 살인지, 어디 사는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까지도. 전혀 주어진 정보가 없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이지만 그-혹은 그녀에 대한 막연한 그리운 감정은 시시때때로 뉴트를 찾아들었다. 그는 자신의 것보다 딱 한 글자 적은 상대의 이름을 아로새기듯 그 위를 느리게 쓸어 보았다. 정갈히 새겨진 이름 아래에 잠겨 저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심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뛰고 있었다. …죽기 전에 만날 수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바로 지금, 제 몸에 새겨진 이름의 상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라의 땅을 밟고 서 있었다.
‘그거 한국인이네.’
‘한국인?’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대학생 시절, 부모님 아닌 누군가에게 네임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그의 유일한 청중이 되어주던 룸메이트 첸은 맥주병을 입에 붙이고 홀짝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뉴트보다 체구가 작고 말랐던 그는 홍콩 출신의 유학생으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다. ‘한국인이라고?’ 근 20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놀라 거듭 묻는 뉴트에게 첸은 치즈가 눌러 붙어 눅눅해진 나쵸를 집어먹으며, 한 번 더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제 추측을 확신하듯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무척 쾌활했다.
‘그래, 한국인이라니까. 그 성도 그렇고…… 한국인들이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잖아. 제법 먼데. 찾을 거야, 그 사람?’
그야 당연히, 언젠가 제 힘으로 찾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뜻밖의 계기로 제가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첸의 말처럼 그가 한국인, 그것도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주듯 어제 호텔방에서 샤워를 하다 이름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진 것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이 서울이란 도시가 작은 단위의 마을도 아니고, 어떻게 이 넓은 도시에서 제 이름이 새겨진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지척에 있어도 알아볼 수 없을 확률이 높으니 그냥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 삼일 밤낮으로 제 옆을 붙어 다니며 통역을 도와준 토마스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고 그는 잠시 서울의 밤거리를 걸었다. 런던인들 다를 바가 있겠냐만은 대도시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고 밝았다. 불이 꺼지지 않는 마천루, 빠르게 도심 속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빛 무리, 거리 곳곳에서 들려와 한데 뒤섞인 음악들. 사색에 잠겨 걷기에 좋을 만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다른 언어와 다른 머리색의 사람들이 사는 미지의 영역, 낯선 곳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는 마력은 대단했다. 제가 매일같이 생활하는 곳과 별반 차이도 없는 이 작고 소란스러운 도시를 절로 걷고 싶게 만들었다. 뭐, 물론 길을 잃어 다시 호텔까지 원 없이 걸어가게 될 상황에 처한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공기가 제법 매섭다. 누군가의 담배 냄새가 묻어난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활동하기 편한 종류의 옷이라도 챙겨오는 거였는데. 방문 목적에 맞추어 짐을 간단히 추리다 보니 골라 넣은 옷이 죄다 코트에 수트였다. 모두 하나같이 활동성이 낮고 추위에 취약하기 짝이 없는 옷들이었다. 코트 깃을 여미고 하얀 입김이 섞인 숨을 뿜으며 뉴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올려 키가 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 너머의 구름 낀 하늘을 보았다. 꼭 머지않아 눈이 내릴 것 같았지만 매일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갈 때마다 확인했던 서울의 날씨에 눈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은 없었다. 제가 사는 곳처럼 갑작스러운 비가 내릴 일이 없는 한국의 일기예보는 적중률이 무척 높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추운 도시의 어딘가에 내 이름이 새겨진 누군가가 있단 얘기지. 뉴트는 발갛게 언 코끝을 훌쩍이며 마치 화려한 네온사인 너머에 가려진 듯 얼굴을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그 사람도 몸 어딘가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보며, 지구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으려 애쓰고 있을까.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발생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그 이후인지, 그 기원을 알 수 없지만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는 사료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몸에 존재해온 기현상.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커다란 좌표 위에 놓고 객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과학계에서도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통상적으로 ‘네임’ 이라 불리는, 지구의 60억 인구 중 딱 한 사람에게만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대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에 의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평행선상에 서 비슷한 삶을 살게 되는 둘의 운명.
제 네임의 상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뉴트는 문득 출장 후에 런던으로 돌아오면 다시 식사 약속을 잡을 것이라 쐐기를 박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 당장이야 그의 모친이 시키는 대로 부모님이 권하는 상대를 만나고 이후 몇 번 만나 볼게요, 라든지 성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등의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둘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부담감이 표면 위로 떠올라 뉴트를 괴롭게 만들었다. 내가 런던에 있는 한은 계속 그렇게 집요하게 재촉하실 텐데.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한국어를 배워 파견근무를 나오는 건 어떨까. 곧 주재원 공고 뜰 텐데…. 여러 가지의 대안 책을 생각하며 그는 입술을 감쳐물고 밤의 거리를 살폈다.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과 알아듣지 못할 최신 가요가 정신을 요란스럽게 만드는 인도 위로 백팩을 맨 학생들과 오피스 룩을 갖춰 입은 회사원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었고, 건너편의 커다란 어학원과 정리되지 않은 현수막들이 붙어 있는 사우나 건물, 의료 기기 상점과 또 몇 개의 휴대폰 판매점, 빨간 브레이크 등의 행렬이 줄을 잇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하마터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갈 뻔한, 남자.
그 어지러운 밤의 풍경 속에서 뉴트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사실 줄이 긴 이어폰을 꽂은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는 유심히 뜯어볼 틈이 없었다. 뉴트가 서 있던 스타벅스 옆 H커피숍의 빨간 간판, 철골을 세워 놓고 3층에 있는 가게를 내부 수리 중이었던 건물. 인부의 실수로 운반 중 떨어진 벽돌을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뉴트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재빨리 뛰어들어 남자의 어깨를 감싸고 옆으로 밀쳤다. 인부의 비명과 함께 둘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간 벽돌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났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인명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대로 시선을 내리자 뉴트의 발치에 날카롭게 깨어진 벽돌의 붉고 날카로운 잔해들이 보였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섬뜩함이 남자의 팔뚝을 잡아 쥔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갔다.
「―아이고, 학생! 괜찮아요?!」
사다리 아래에 있던 인부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남자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던 뉴트는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한 쪽 팔을 내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곧 사다리에서 내려온 또 다른 인부 역시 목장갑을 채 벗지도 못한 손으로 남자의 패딩 걸친 팔뚝이며 어깨 등을 더듬더듬 살폈다. 작업용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방심으로 두 손에 쥐고 있던 벽돌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뉴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들이 짧고 빠르게 오고간다. 그는 대충 눈치로 그들의 대화 내용을 유추했다. 눈을 크게 치켜뜨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다. 동양인의 나이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뉴트는 아마 제 아버지의 또래 즈음이 아닐까 생각되는 중년의 남자의 낯이 현장을 목격한 저보다 더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제가 실수로 떨어뜨린 벽돌에 지나가던 행인이 잘못 되었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안전모를 벗고 한겨울에 보기 드문 땀을 훔치며 인부는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한 쪽 귀의 이어폰을 잡아 뺀 남자는 갑작스럽게 제 앞으로 외국인이 뛰어들고, 작업 조끼와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뛰어와 안위를 묻고 사과를 하는 상황에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이다 문득 저와 뉴트의 발아래에 처참하게 깨져 있는 벽돌 조각들을 발견했다. 깨어진 벽돌을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은 서서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3층짜리 건물을 보수하고 있는 작업 현장에 머물렀다. 눈동자가 커지는 걸 보니 그제야 제가 무슨 일을 당할 뻔한 상황인지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턱 끝까지 끌어내리며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어… 괜찮아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뉴트와 남자, 두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을 거듭 확인한 그들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작업 중이었던 사다리 앞으로 돌아갔고, 그들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몇 명의 대학생들이 길 한복판에서 있었던 작은 해프닝의 현장을 흘긋흘긋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이전보단 확실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주의를 기울여 재작업에 착수한 그들은 곧 다시 액자 한 켠의 그림처럼 밤거리의 번잡한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분위기가 평온해졌다.
「저기.」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며 현실감각을 되찾고 있던 뉴트는 머뭇거리듯 등을 두드리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고개를 돌리자 물끄러미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어린 남자의 표정과, 여전히 그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제 손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의 일로 적잖이 놀란 탓이었다. 뉴트는 과장된 태도로 남자의 팔에서 손을 떼어냈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손을 움츠리는 대신 제 입과 턱을 감싸 쥐고 머쓱한 얼굴을 가린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자를 따라 저도 모르게 머리를 까딱였다. 다 큰 남자 둘이서 어색한 얼굴로 서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라니, 남들이 보면 제법 우스꽝스러운 광경일 테다. 뻣뻣하게 굳은 눈동자를 굴리며 이제 스타벅스로 들어가도 되는 걸까, 망설이고 있을 때 아랫입술을 혀로 축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눈매가 반으로 접히며 서서히 번지는 미소가 제법 시원스러웠다.
「진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그 쪽 아니었음 지금쯤 저거 맞고 골로 갔을 거예요. 와 진짜,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질 줄이야…. 근데 어디 가는 길이셨어요?」
다른 한 쪽에 끼고 있던 이어폰마저 완전히 빼 겉옷 주머니에 쑤셔 넣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한번 쓸어내린 그는 짤막한 눈썹을 뉘이며 웃었다. 마지막 음절의 끝이 올라간 것으로 봐선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는데, 몇 마디가 더 길어지자 애석하게도 상황 상으로 대충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뉴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애매하게 입가를 당겼다. 으쓱 올라간 어깨와 찌푸린 미간의 의미를 읽은 것인지 흐음, 하고 목을 울린 그가 꺼낸 두 번째 질문은 영어였다.
“어디 가는 길이셨냐고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니 물론 원어민만큼 발음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을 나누는 데에는 썩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아, 저 숙소 가는 길인데. 사실 진짜 제 숙소는 반대 방향에 있고 등 뒤에 있는 것은 스타벅스였지만 몇 분 전 처음 본 남자가 알 게 뭐란 말인가.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잠시 곤란해 하던 기색을 거둔 뉴트는 등 뒤의 허공에다 대고 아무렇게나 손가락질을 했다.
“저녁 식사 하셨어요?”
“예?”
“식사 안 하셨음 한 끼 대접하고 싶어요. 진짜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어, 혹시 많이 바쁘시거나 식사 하셨으면 연락처 주실래요? 제가 나중에 사례를 꼭…. 신세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지 정말로 휴대폰을 찾는 듯, 입고 있던 패딩의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 위를 순차적으로 더듬거리는 그를 보며 뉴트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요. 같이 먹읍시다, 저녁.’ 재빠른 답변에 안주머니에서 꼭 그의 손바닥만큼 큼직한 휴대폰을 꺼내다 말고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다물지 못하고 조금 벌어진 입술에 잠시 시선을 주며 뉴트는 제 대답을 확인시켜 주듯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뉴트가 남자의 제안에 두 말 없이 그러마 승낙을 한 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남자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고, 또 생판 모르는 외국인의 휴대폰에 제 번호가 입력되는 것 역시 사실 썩 내키지 않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뭐 물론 이러나저러나 제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점과 길을 잃은 이 상황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현지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당장 신세를 갚고 말아버리는 것이 속 편한 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어떤 걸로 드실래요? 잠시 둘러보듯 주위를 살핀 뉴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스타벅스, 졸업 시즌 할인 행사를 하고 있는 귀금속 가게의 홍보용 입간판,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시, 환하게 불 밝힌 익숙한 로고. 개점된 점포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각 나라마다 없는 곳이 없는, 우유부단한 친구와 식사 메뉴를 정하다 ‘아무거나’ 가 세 번 이상 튀어나올 때 결론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곳.
“저기요.”
남자의 눈동자가 뉴트의 길게 뻗은 손끝을 쫓았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빨갛게 불이 켜진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아니, 바로 옆에 돈까스 집도 있고 길 건너면 파스타도 파는데. 정말 이런 걸로 괜찮아요?”
“네, 밤엔 좀 간단하게 먹는 편이라.”
“…그렇구나.”
은박 포장지에 싸인 햄버거, 소금기 강한 프렌치프라이, 플라스틱 컵에 담긴 콜라 잔. 꼭 똑같은 모습을 한 세트의 구성이 정확히 두 개씩 트레이 위를 가득 메웠다. 난방을 하는 것인지 아님 복작거리는 손님들의 열기 때문인지, 적당한 훈기가 도는 매장 안의 온도에 코트를 벗어 옆에 걸어놓고 있자니 남자가 묵직한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맞은편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밝은 조명이 드는 곳에서 보는 남자의 얼굴은 인도주의의 발현으로 몸 날려 그를 구했던 길거리에서 보았을 때와는 또 달랐다. 불과 몇 분 전 처음 봤을 때 휘둥그레 눈을 뜨는 모습이 조금 맹한 구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뭐랄까, 대형견 같은 유순함이 돋보였다.
또한 지금처럼 그가 치아와 깊게 패이는 볼우물을 드러내며 웃을 때, 뉴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약한 바람이 불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적당히 미적지근한 매장 안의 공기보다는 조금 더 뜨겁게 달구어져 해가 쨍쨍한, 마치 세상의 맑은 날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담은 듯한 미소.
“뭐 저야 물론 감사한 일인데… 이런 걸로 보답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드세요.”
누군가가 엎질러 음료수가 흥건한 바닥을 닦는 아르바이트생의 밀대질을 피해 테이블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그는 겉옷을 벗고 맨투맨 티셔츠의 소매를 슥슥 걷었다. 마주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그의 호쾌한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당기며 그의 움직임을 쫓던 뉴트는 별안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잔뜩 커진 눈이 트레이 위로 와르르 감자튀김을 쏟고 케첩을 뜯는 그의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이 아닌 손목의, 시계 줄 너머에 반쯤 가려진 글자를.
그건 분명 제 이름이 틀림없었다.
자신보다는 그것을 불러주는 남들의 편의를 위해 붙여진 것이지만, 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신의 교과서와 학용품, 시험지 따위에 표기를 하고 회사생활을 하면서는 물건을 살 때나 상사에게 제출하던 결재판에 수도 없이 썼던 게 바로 제 이름이었다. 텍스트로는 더없이 익숙한 것이라 시계 줄에 반쯤 가려져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것을 인지하고 나자 미약하게 살랑이던 가슴 속의 바람이 거친 풍랑이 되었다. 정체모를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가슴이 급작스레 요동치고 식은땀이 죽죽 났다. 손바닥의 금을 따라 고인 땀을 보며 뉴트는 중학교 때부터 교육을 받아 와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을 떠올렸다. 네임의 상대를 만났을 때 겪을 수 있는 증상들.
“그거….”
저와는 달리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맥이 뛰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왼쪽 손목을 가리켰다. 저도 모르게 뻗은 손에 예? 하고 눈썹을 올린 그의 의아한 시선이 곧 자신의 손목에 닿았다. 얌전히 앉아 있다 말고 뜬금없이 꺼낸 뉴트의 한 마디에 휘둥그런 눈으로 제 손목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꺼풀을 느리게 꾹 한번 여닫으며, 난감한 웃음. 흡사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모양새다.
“아, 이거 또 고장 났네.”
다만 시선이 닿은 최종 목적지는 조금 어긋난 것 같았다. 남자는 뉴트가 가리킨 손목의 레터링이 아니라 손목에 채워진 자신의 시계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휴,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멈추는구만. 지긋지긋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손목의 시계 줄을 풀었다. 그을린 살갗을 조르고 있던 쇠붙이가 스르륵 풀려나고 그 위에 새겨진 글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10초도 안 될 그 시간이 꼭 영겁처럼 느껴져 뉴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고장난 시계처럼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는 동생이 중국 갔다 오면서 사온 거거든요? 선물 받은 건데 수리만 세 번 했어요. 이게 선물을 준 건지 혹을 붙인 건지….”
이리저리 쓸리고 긁힌 스크래치 자국이 선명해 생활감이 느껴지는 시계 알을 만지작거리며 남자는 불평했지만 뉴트의 귀에 그러한 투덜거림이 들릴 리가 없었다. 그는 벌어진 입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줄곧 남자의 손목을 응시했다. Newt Osborn. 심장과 같은 박자로 쿵, 쿵 맥박이 뛰며 그가 생동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의 것이 틀림없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벽돌을 맞을 뻔한 남자를 구해줬는데, 그 남자의 손목에 내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고? 이건 종종 네임을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에서조차 유행이 지나 써먹지 않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그 현실감 없는 일이 제게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저기, 당신 손목에 적혀있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나에요. 뉴트는 지금 당장 명함을 내밀고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제 이름을 똑똑히 확인시켜 주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제가 살고 있던 곳과는 문화가 확연히 다른 동양권, 그것도 한국에서는 이 ‘네임’ 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저는 미처 알지 못하므로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한다.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치 못한 전개에 그의 눈동자가 황망하게 이곳저곳으로 굴렀다. 방황하던 시선이 화장을 짙게 하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는 여고생들,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픽업을 기다리는 직장인,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수다를 떠는 어머니들을 거쳐 다시 뜯지도 못한 제 음식이 놓인 트레이로 돌아왔을 때 남자가 말을 건넸다.
“한국말은 한 마디도 못 하시고… 출장 오셨나 보네요. 영국 분이시죠.”
“어, 네. 그… 영어 잘 하시네요.”
“여기는 한국이잖아요? 입시 영어의 결과물이죠. 보통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까먹어 버리는데 저는 미군 부대 근처에서 일했었거든요. 의정부에 있는데… 아, 의정부 모르시죠?”
기포가 터지는 플라스틱 잔에 빨대를 꽂아 넣으며 남자가 의정부와 카투사 캠프, 나아가 저는 인천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는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동안 뉴트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내 이름이 적혀있는 걸 봤으니 이제 저 남자의 이름만 확인하면 되는 건데.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제 가슴팍에 적힌 이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눈앞의 어린 남자는 뉴트를 도와 먼저 한 수를 두었다.
“어때요, 한국? 멀리까지 출장 오셨는데 관광은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기회였다. 이렇게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협조해주실 줄이야. 앞으로의 상황을 찬찬히 생각하며, 뉴트는 침착한 손길로 햄버거를 집어 들고 포장지를 반쯤 벗겨 손에 쥐었다. 고개를 젓고 일부러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뇨, 이틀 정도 시간이 여유있게 남았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한국어를 전혀 못해서요.”
그냥 봐도 멋진 곳이라 좀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긴 한데 교통편도 잘 모르겠고…. 미간을 모은 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가련한 어조로 입을 꾹 다문 그를 보며 콜라를 쪽쪽 빨던 남자가 플라스틱 잔을 내려놓았다. 감자튀김의 느끼함을 상쇄시켜 주는 탄산의 맛이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타고 내려간다. ‘저 그러면,’ 그리고 자신의 예상에 조금도 빗나가지 않게 이 외향적이고 친절한데다, 자신에게 목숨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청년은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입을 떼었다.
“제가 좀 안내해 드릴까요?”
걸려들었다. 신세를 보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뉴트는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 짐짓 점잖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괜찮으시다면.”
“아, 그러실래요? 저 지금 방학 중이라 시간 엄청 많아요. 뭐부터 보여드려야 하지? 음, 일단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이틀 동안 속성으로 보여 드릴게요.”
흡사 천진한 아이와도 같은 표정을 짓는 남자를 보며 뉴트는 코트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고 주소록 앱을 띄웠다. 제 연락처를 입력할 요량인 뉴트의 휴대폰 화면을 흘긋 살핀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순순히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공, 일, 공, 육, 삼…. 열 한 자리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 적은 뉴트가 여전히 조막만한 아이폰의 화면을 조작하며 눈을 흘긋 올렸다. 이름이?
“박 민호요.”
역시. 마치 자신의 심장을 감싸고 보호하듯, 왼쪽 가슴께에 간직하고 있는 그 이름을 보다 정확한 발음의, 본인의 목소리로 확인했다. 그것도 스물하고도 일곱 해 만에. 어쩐지 눈 안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뉴트는 피어오르는 입 꼬리를 감추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일생일대의 감격에 젖은 것도 까맣게 모른 채 별 생각 없이 케첩 찍은 감자튀김을 입에 집어넣고, 물휴지에 소금기 묻은 손을 훔쳐내던 민호는 일순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소리 없이 입을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근데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너무 늦게 여쭤봤죠.”
호기심과 미안함이 묻어나는, 새카만 눈. 그 특별한 눈동자를 이전과 다른 눈빛으로 진득하게 응시하며, 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고에 붙어있던 한국 주재원 지원 마감일이 언제까지더라, 돌아가면 열길 제쳐두고 그것부터 알아봐야겠군.
“오스본입니다. 뉴트, 오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