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Cheers darlin'
기타케이스의 지퍼를 채우고 한 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올해로 칠 년째, 수리도 맡기지 못해 모서리 곳곳이 긁히고 싸구려 안감이 비치는 오래된 케이스. 그 바닥에 붙은 오늘의 먼지들과 한기를 털어내며 곧 자리를 뜰 요량으로 여기저기 눈인사를 보내자 팔짱을 끼고 삼십분 가까이 저와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진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는 다수의 사람들 중 잘 들었어요, 하고 상냥한 인사를 건네는 한 두 명의 목소리를 들으며 뉴트는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제법 벌이가 괜찮았다. 물론 그 ‘벌이’로 거둬들인 수익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전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에게 있어 버스킹을 하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벌이’ 가 아니었으니 아무런 기대나 예상 없이 획득한 돈 치고는 액수가 많은 셈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돈은 끼니를 떼울 수 있는 2파운드 정도면 충분했다. 남는 돈은 집에 돌아가는 대로 깨진 화분-저금통-안에 넣어둬야지, 생각하며 금일의 수입을 봄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10파운드짜리 지폐 두어 장과 그 외의 동전들이 구겨지고 잘그락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키자 어느덧 얼어붙은 광장 분수대 앞에는 뉴트 혼자만 남아 있었다.
평소 같았음 미적미적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을 한다든지, 또는 좀 적극적으로 근처에서 픽업해온 따뜻한 라떼 같은 것을 내밀며 앙코르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두어 명 정도는 있었을 텐데, 지금 이렇게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각자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는 오늘 노래를 들어준 관객들의 대부분이 꾸준히 자리를 지켜주던 소녀들이 아닌 여러 쌍의 커플들이었기 때문이다. 손과 손, 또는 팔과 팔을 얽고 애정이 담긴 체온을 나누며 매서운 날씨를 극복하는. 그리고 오늘은 그런 연인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로맨틱 무드를 발산하는, 크리스마스였다. 굳이 차가운 길바닥에서 버스킹하는 이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지 않아도 이미 상의해둔 스케줄이 빡빡할 것이다. 시기에 맞춰 특별히 선곡한 노래를 부르며 뉴트는 제 앞에 선 연인들이 행복감과 상대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에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 물론 제가 연인들의 분위기 진전에 일조가 되었다니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었지만 오늘처럼 옆에 누군가가 있었음 하는 날은 좀 더 다른 감정들이 교차한다. 부럽기도 하고, 괜히 남 좋은 일 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뭐 물론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는 주의지만…. 기타케이스의 끈을 흔들어 압박당하는 어깨를 조금 편하게 만들며 기지개를 켰다. 장시간 고수하고 있던 자세에 굳은 몸 이곳저곳이 우둑우둑 소리를 낸다. 아, 그러고 보니 남 좋은 일 하느라 내 밥 먹을 시간도 잊었었네. 이제 나 좋은 일 좀 해 볼까. 멀찍이 보이는 시계탑의 바늘이 여덟시 십 분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뉴트는 화려한 불빛이 흰 눈 위를 색색이 물들이고 있는 상점가로 향했다. 어, 추워. 어깨를 안으로 움츠리며 굳은살이 박힌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눈이 녹은 건널목을 건너는 뉴트의 등 뒤로 승객들을 실은 트램이 지나갔다.
오늘 하루 기준 족히 다섯 번은 넘게 들은 것 같은-그리고 지금도 매장 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엘의 멜로디를 귀에 새기며, 기타케이스를 벗어 제 옆에 세워둔 뉴트는 제가 집어온 햄에그 샌드위치가 바코드에 찍혀 결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결코 돈에 목숨을 거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반나절 벌어 남은 반나절을 연명하는 생활은 절로 경제관념을 심어주고 스스로를 셈에 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기 거스름돈 받으시고요, 고저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몇 개의 동전과 밀봉된 샌드위치가 뉴트의 앞으로 돌아왔다. 이 맛도 이제 슬슬 물려 다른 것을 먹고 싶었지만 얄팍한 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뉴트는 물 한 병과 함께 구매한,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챙겼다. 그러나 그의 몫으로 주어진 것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박스에 담긴 매쉬드 포테이토와 크림 파스타를 비롯한 두세 가지의 레토르트 용기, 비네거맛 감자 칩, 토마토 주스. 정상적으로 값을 지불한 샌드위치가 아닌 그것들 역시 뉴트가 취해도 되는 것들인 양 뭉툭한 손끝에 떠밀려 그의 앞에 놓였다. ‘…뭐야, 폐기?’ ‘폐기 아니고, 너랑 같이 먹으려고 내 돈 주고 샀다 인마.’ 득의양양 생색을 내는 목소리에 뉴트는 시선을 들었다. 출근길에 털모자라도 쓴 모양인지 매일 보기 좋게 다듬어 세우던 앞머리가 눌린,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익살스럽게 눈썹을 올리며 뭐, 하고 시비조로 말을 뱉는다. 제 전부와도 다름없는 기타 다음으로 요즘 자신의 쏟아지는 관심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아니, 어쩌면 기타와 같은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 그래, 사실 버스킹을 했던 광장 근처에 있던 숱한 편의점들은 다 제쳐두고 굳이 20분이나 더 걸어야 하는 세인즈버리까지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뉴트는 오늘도 이 얼굴을 보기 위해 이곳에 출석도장을 찍었다.
“무슨 크리스마스 날까지 일을 해.”
“이거 웃긴 놈이네. 야, 성탄절 날은 뭐, 손님들이 불쌍한 직원 배려해서 편의점도 안 온대냐? 오늘 반나절동안 판 콘돔만 열통은 되는 것 같구만.”
뉴트를 따라 즉석식품들을 가득 안은 그는 낄낄 웃으며 카운터 밖으로 나와 통유리 벽에 붙은 아일랜드 테이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에 두어 번 쓸고 닦아 청결을 유지하는 그 위로 품고 있던 것들을 와르르 쏟아내었다. 밖에 많이 춥냐? 어, 춥지. 좁고 옆으로 긴 테이블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그 위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소박했지만 여느 때에 비하면 나름 훌륭한 만찬이다.
그러니까, 몇 년 전 그 무모한 결심이 아니었다면 지금 두 사람이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식사거리를 나눠 먹는 일은 꿈에도 없었을 풍경이다. 사실 뉴트는 런던 출신이 아니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뉴포트의 어느 보육 시설에서 나이가 찬 친구들과 함께 자립을 앞두고 앞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원장의 지원을 받아 뉴트와 친구들은 밴드 활동을 시작했었고, 그들은 유년시절을 지배한 상실이라는 감정으로 상처 받은 정신에 희망을 불어넣어준 음악이라는 마법을 맛보았다. 그 상냥한 마법 덕에 꿈을 품게 된 소년들은 그것을 발판 삼아 얼마 후면 떠나야 하는 보육원 문 너머의 미래를 도모했다. 덜 여문 소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건 뉴트였고, 그래봤자 결국 일 년 정도의 차이였지만 나름 여러 경험이 많았던 그는 제안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런던으로 가는 게 어때?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을 거야?’ 그 말은 웨일즈의 우물 안 개구리로 런던을 동경했던 그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끌어 모아 런던에 그들이 살 집을 계약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촉매제가 되었다. 비록 허름한 두 칸짜리 아파트였지만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새로운 보금자리에 짐을 풀고 네 사람이 나란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던 첫날밤의 기쁨을 뉴트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마 여지껏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들 중 최고를 꼽으라면 그는 주저 않고 그 때를 꼽을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상과 현실이 닿을 수 없는 북극과 남극처럼 아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런던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처럼 스무 살이 되어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들은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걸음마를 떼야 했고, 그 걸음마를 떼기에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는 대도시의 현실은 마치 신호등 없는 건널목처럼 험난했다. 살인적인 물가와 집세, 공과금 따위로 그들이 마련해 온 몫 돈은 빠른 속도로 바닥을 드러냈고, 오아시스와 마룬 파이브를 꿈꾸던 소년들의 발목에는 현실이라는 족쇄가 채워졌다. 삼시 세끼를 제대로 챙겨먹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모두가 뉴트를 원망하진 않았지만 뉴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모두에게 런던 행을 종용한 것은 자신이었다. 달콤한 환상 같은 말로 친구들을 꾀어 결코 낭만화 할 수 없는 불행이나 맛보게 했다. 그들 중 누구보다 열정이 넘쳤던 토마스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목숨처럼 여기던 베이스를 팔아넘길까, 고뇌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뉴트는 다음 날부터 당장 거리로 나섰다. 생활비를 위해 제 입이라도 하나 덜겠다는 심산이었다. 가진 것이 멀쩡한 몸뚱이와 기타밖에 없었던 뉴트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고, 일주일간 그의 노래를 듣던 어느 노신사가 우연히 기타 케이스에 동전 몇 푼을 넣어준 것을 시작으로 그는 매일 약간씩의 수입을 얻었다. 뉴트는 그 돈으로 1파운드짜리 호밀 샌드위치를 사먹었고 남은 돈은 고스란히 저축을 했다. 그런 생활을 반복해오던 일을 되짚어 보면 그간 버스킹의 목적이 벌이가 아니라고 여긴 자신의 소신은 결국 스스로를 속인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뉴트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벌이가 목적이 아니었다면 오늘 모인 돈이 얼마인지, 또 얼마만큼의 저축을 할 수 있는지 계산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전 세입자가 버리고 간 깨진 화분에 저금통을 만들어 지폐며 동전들을 넣게 된 그 때쯤, 아마 그 때 쯤 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시기가.
목이 좋은 어느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정확히 일주일 째 샌드위치를 사먹었던 날,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방문해 끼니를 해결하는 뉴트의 계산을 맡았던 까만 머리의 아시안 보이는 샌드위치와 함께 데운 우유를 내밀었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뉴트가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듯 우유병을 앞으로 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같이 드시라고.
‘맨날 빵만 먹으면 목 안 막혀요?’
‘…….’
‘이거 어차피 오늘까지 안 팔리면 폐기니까…… 그래도 신선한데, 아니 뭐 싫음 말고.’
그 일을 계기로 안면을 튼 것이 지금 저와 크리스마스의 저녁을 함께 보내고 있는 민호였다. 민호는 뉴트보다 조금 늦게 런던에 오게 된 유학생이었는데, 처음엔 그가 그저 넉살좋고 걱정 없이 사는 한국인이려니 생각했던 뉴트는 곧 민호 역시 그 나름의 딱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막 런던에 도착한 지 삼 개월, 민호는 여타 유학생들처럼 모국의 것이 아닌 언어와 화폐를 사용하며 지구 반대편에서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낯선 땅과 낯선 언어, 새로운 곳에서의 모든 것들은 모험심 강한 20대 청년의 마음을 설레고 즐겁게 만들었다. 매일매일이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갑작스레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는.
민호는 영국에 건너온 지 채 반 년도 되지 않았었고, 남아 있던 동생마저도 군 입대를 해서 집을 비웠던 시기였다. 저 하나가 건너간다고 해서 크게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민호는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드리고 동생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위치와 책임감이 그의 무거운 마음을 엄중히 짓눌렀기 때문이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당장이라도 영국을 뜨고 싶었으나 행정적인 절차들이 1차적으로 그를 가로막았고 또한 당신의 괴로움을 자식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던 민호의 부친이 그의 한국행을 만류했다. 괜한 걱정 말고 네 학업에 매진해라. 젊은 시절에 귀히 여긴 인맥의 덕으로 재기의 희망이 보인다는, 한 달 새에 많이 지치고 피로감이 느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는 비로소 한 시름을 놓고 이곳의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는 부모님이 다달이 그에게 부쳐주던 생활비에 대한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런던 바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러니까 처음엔 고등학생 수학 공부 봐주는 걸 했었는데, 그걸 한 삼 개월 쯤 했나? 이제 좀 애랑 서먹서먹한 것도 없어지고 말야, 어? 이제 막 기초 틀 다지고 이제 응용 좀 들어가 볼까 하는 참에 과외를 그만 두겠다고 통보하는 거에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걔 부모님이지. 아 뭔 바람이 불었는지 대학을 안 보내겠다네, 이 양반들이? 애는 막 공부에 흥미를 붙인 참이었는데 그거 분명 걔 의견 무시하고 부모들 멋대로 결정지은 일일 거야. 참 웃기죠? 어…. 아무튼 그래서 과외자리 잘리고 또 막 헤매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인회의 아는 형이 소개를 해 주더라고요. 돈 필요한 유학생들 물밑으로 파트타임 연결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시급의 절반만 받고 일해도 괜찮겠냐고. 아, 물론 한국 같았음 택도 없는 소리죠. 근데 어쩌겠어요, 아쉬운 건 이쪽이잖아. 원래 F1비자 발급받아서 온 학생들은 파트타임 같은 거 일절 하면 안 되는데…. 나란히 앉아, 말라비틀어진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면서 담담히 말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질문했다. 어, 뭐, 이거 어디 찌르고 이러시는 거 아니죠? 먹을 것도 나눠줬는데 빡빡하게 그러지 맙시다? 애교 살이 두툼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확인을 받아내듯 재차 물어보는 그 질문에 뉴트는 웃었던가, 말았던가.
아무튼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이 부쩍 친해졌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던 도중 두 사람이 동갑이라는 것을 알게 된 민호가 괄괄하게 웃으며 뉴트의 등짝을 쳤기 때문이다. 아이고 그럼 동갑이네요! 야, 편하게 지내자?
“근데 너야말로 왜 크리스마스 날까지 여기 와서 이러고 있냐.”
“크리스마스 날이니까 여기 와 있는 거지.”
너 쫓아다니는 기집애들 많잖아?
오른쪽 눈을 작게 만들며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는, 저저,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표정. 순진하고 무지한 반응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뉴트는 그만 속이 미어져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민호의 집을 구경시켜 달라고 퇴근길 내내 그를 쫓으며 귀찮게 졸랐던 날을 떠올렸다. ‘별로 먹을 거 없는데….’ 주저하면서도 찬장을 뒤적거려 뭔가를 만들어내던 손, 묽은 수프와 달걀말이, 처음 먹어보는 한국의 술, 가까워진 어깨와 눈이 마주치고 충동적으로 가져가 댔던, 피로에 부르튼 입술. 대체 그날의 일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소리치듯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아무렇지 않게 창밖을 구경하며 주스 팩이나 빨고 있는 민호의 옆선을 곁눈질한다. 모두 일어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일들인데, 그게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 날 술에 거나하게 취했기 때문에?
뉴트는 민호의 자취방에서 있었던 그 날의 일을 복기했다. 사실 그 날은 민호만큼이나 뉴트 또한 취해 있었다. 대화 끝마다 짙은 알코올 냄새가 섞인 숨이 느껴졌고, 헤픈 웃음이 균열이 간 낡은 벽을 타고 아무렇게나 튀었다. 취한 정신에 자고 일어나서 모두 까먹은 모양이다, 이해하려 애썼으나 무의식중에 자꾸만 드는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맞닿아 보고 싶은 충동에 무작정 지른 것이었지만 결국은 진심을 담은 입맞춤이 되었고 상대방 또한 영 목석처럼 받기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기대했었는데……백지 상태라 이거지. 전날 밤의 일을 잊는 민호의 술버릇을 탓해야 할지, 아님 그의 눈치 없음과 둔함을 탓해야 할지를 저울질하며 뉴트는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가 짜증스럽게 나갔다. 몰라, 내가 그런 애들을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하냐?
그러나 한 쪽 눈을 감고 더 남은 것이 없나 손에 든 과자봉지를 들여다보는, 태연스런 그 모습에서 뉴트는 미심쩍은 느낌의 어떤 것을 발견했다. 옅게 서린 미소. 일견 무표정처럼 보이는 그 입 꼬리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뉴트의 질문에 딱히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으음…. 하고 짧게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그는 꼭 기다렸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안도와 만족 그 어디쯤에 위치한 포만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게 오늘 같은 날 왜 데이트를 하지 않냐는 의도를 품은 질문을 넌지시 던질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확실히 부드럽다. 설마, 하는 희망 섞인 가정이 그를 시험한다. 뉴트는 민호를 탐색하는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조금 더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너 보려고 왔지.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고 싶어서.”
“새끼, 징그럽긴.”
푹, 고개를 숙이는 민호는 이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쳐진 눈 꼬리 끝이 더욱 더 내려오고 보기 좋게 그을린 뺨 위로 자꾸만 볼우물이 패였다. 퉁명스러움을 고수하고 있는 말투는 평소와도 같았으나 애꿎은 주스 팩의 귀퉁이나 잡아 뜯고 있는 얼굴은 영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콱 말아 물어도 주체하지 못하는 웃음을 결국 실없는 농담 때문이라, 뉴트의 핑계를 대어 포장하는 그 모습을 보며 뉴트는 명확하지 못해 머릿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추측을 조심스레 확신으로 굳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새끼 이거 그날 일 안 까먹고 있는 거 아냐? 덩치에 맞지 않게 눈도 못 마주치고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있는 꼴이 꼭 그러했다. ‘야, 좋지?’ 뻔뻔스럽게 묻자 곧장 옆구리로 가격이 들어온다. ‘꺼져, 이 똘추야.’ 힘을 실어 내리찍은 팔꿈치가 제법 아플 법도 한데 눈곱만큼의 통증도 없었다. 그냥 자꾸 의미모를 웃음만 나온다. 밑 빠진 독에 물 새어 나가듯 흐르는 감정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시종일관 웃는 낯을 하고 있던 뉴트는 헛기침을 하며 얇은 후드를 걸친 어깨를 주무르듯 두어 번 두드렸다. 자, 솔직해지자. 용기가 필요했던 그는 잠시 짧게 심호흡했다.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좋아해.
담담한, 그러나 당사자는 긴장감을 억누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그 고백에 민호는 마시고 있던 음료를 풉 뱉었다. 삼키지 못한 사과즙이 테이블 위로 마구 튀었다. ‘이 기막힌 가난도 함께 말야.’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들어 있던 낡은 손수건을 건네며 뉴트는 말을 이었다. 그는 민호의 얼굴 대신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내가 1파운드짜리 샌드위치로 끼니를 연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100파운드짜리 스테이크를 썰고, 그보다 더 비싼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었다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꼬시기 위한 멘트였다면 빵점을 주고 싶네.”
입가에 묻은 단물을 투박스런 손등으로 훔치며 민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뉴트는 그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장 안에 울리는 밝은 캐롤에 따라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뭐, 빵점을 주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을 거야. 이미 설득 당했으니까.
“예쁘지? 눈 말이야.”
“…어, 예쁘다.”
결국 감정을 숨기는 데 체념한 태도로 못살게 굴던 음료수 팩을 내려놓으며 민호는 대답했다. 이번엔 순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몇 가지의 레토르트 파우치와 알맹이 없이 나뒹구는 빈 빵 봉지를 늘어놓은 채, 두 사람은 나란히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한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밤거리를 걷는 연인들과 어린 아이의 양 손을 나눠 잡은 단란한 이들의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이고, 와인과 케익 박스를 든 채 그들이 걷는 길 바로 옆에 세워진 벽,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결코 그 너머로 함부로 넘어갈 수 없게 두 영역을 구분 짓는 유리 위로 갇혀 있는 정육면체 공간의 두 사람이 비친다.
‘야, 식기 전에 얼른 처먹어.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남기면 뒤진다, 엉?’ 고개를 처박고 싸구려 그라탱을 먹는 데 온 집중을 기울인 까만 머리통과 우물대는 뺨으로 시선을 옮기며, 뉴트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그래, 창밖의 저들이 거니는 찬란한 거리와 저들이 먹었을 비싸고 귀한 음식에 비하면 이 좁디 좁은 편의점도, 우리를 배불린 이 음식들도 하찮은 것이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네가 옆에 있는데.
「너를 사랑해 이 기막힌 재난과 함께」김이듬-막, 명랑하라 팜 파탈(2007)
고백하는 뉴트의 대사와 모든 이야기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비롯되었고.. (._.
1. 연말맞이 손발파.괘
2. 런.던 다녀오신 분들은 이게 얼마나 설정에 구멍이 많은 썰인지 아실 것
3. 민호가 일하는 곳은 그 마트 세/인즈버리 말고 세인/즈버리 로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