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우리는 네 다리로 걷지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
“미쳤냐? 저길 올라가라고? 걸어서?”
“그럼 뭐, 스쿠터 타고 저길 오르나?”
“…….”
꾸물거릴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내려, 새벽 달 지기 전까지 다 돌려야 해. 거, 웬만하면 표정 좀 풀고. 그렇게 인상 팍 쓰고 있음 산타가 아니라 양아치 새끼 같거든? 하여간 이 새낀 무슨 프로 의식이 하나도 없어.
오히려 제가 말했다면 모를까, 세상이 반 쪽 나도 절대 들을 일이 없을 것 같던 그 얄팍한 입에서 언급되는 프로 의식과 커리어에 대한 모독에 민호는 짜증이 서린 표정을 거두지 않으며 스쿠터에서 내렸다. 민호의 파트너가 그에게 부르는 호칭은 ‘산타’ 였다. 다들 익히 알고 있는 이 호칭을 우연히 들은 일반인들은 ‘별명이죠? 아님 인터넷 계정 아이디인가?’ 하고 저마다 갖가지 아는 체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예상을 뒤엎은 민호의 정체는 산타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진짜 산타였다. 성탄절 전야에 코가 붉은 순록이 모는 썰매를 타고 와 아직 동심을 잃지 않은 아이들의 양말을 채워주는 이야기 속 존재. 아, 물론 민호는 채도 높은 빨강과 흰 색이 섞인 두터운 털옷과 고깔 같은 털모자, 둥글둥글한 부츠 차림이 아닌 붉은 등판에 소매가 흰 야구점퍼를 입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혀져 있는 이미지 속 산타의 옷차림은 민호의 전 대 선배들이나 입었을 법한 구식 유니폼이었다. 선물 배달을 나갔다가 그 구식 유니폼을 입은 제가 그려진 스케치북을 머리맡에 두고 새근새근 잠을 청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민호는 혀를 찼다. 세상에 맙소사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이런 구식 유니폼을 입는 줄 알다니 눈 맞으면 축 처지고 무겁고 아이고 그게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옷인데…. 물론 수면가루에 취해 폭신한 베개에 뺨을 붙이고 잠든 아이들은 제 머리맡에서 이루어지는 하소연을 알 리가 없다.
어휴 시발, 올해는 왜 이렇게 무거워? 건장한 어깨를 지나 반 쯤 내동댕이쳐지던 가죽자루의 끝이 닿은 곳은 까맣게 변한 껌 딱지 자국이 즐비한 골목길의 시멘트 바닥이 아닌 누군가의 발등 위였다. 민호는 고개를 들어 순발력 있게 발로 자루를 받아낸 위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달이 뜬 지 오래인 밤중에도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밤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불만 많은 민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12월의 찬바람에 콧등에 걸쳐놓은 선글라스가 슬쩍 내려가자 쌍꺼풀이 짙은 눈매가 드러났다. 제 눈에만 보이는 뿔이 돋은 민호의 파트너였다.
“야, 취급주의 딱지 붙어있는 거 안 보여? 아이패드, 최신형 휴대폰, 카메라, 맥북. 이 자루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우리 둘 합친 몸값보다 더 나가. 박살나면 징계 때린다고.”
이 고물딱지마저 회수당하고 뚜벅이로 다니고 싶어? 이 엄동설한에? 남자는 멀쩡한 발 한 쪽을 들어 짓이겨진 눈의 잔재와 흙이 붙은 바퀴를 툭 건드렸다. 그의 발치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구식 스쿠터 한 대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쿠션이 터져 군데군데 누런 솜이 튀어나온 것을 테이프로 처치해놓은 안장에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마모된 타이어. 장정 둘에다 선물 자루까지 실어 적재량을 초과해도 애진작에 초과한 고물딱지는 안타깝게도 대중들의 상상 속 루돌프가 끌며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누비는 눈썰매의 실체였다. 만성 기침을 달고 사는 환자처럼 골골대는 모터 소리를 들으며 민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춥다. 미지근한 숨이 차가운 밤공기에 섞여든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이 점점이 두터운 부츠 위를 적셨다.
어둠이 내리면 만물을 환히 비추는 달의 이면엔 그늘이 존재하듯이 모든 일에는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다. 그리고 그 고충을 품고 있는 건 산타와 썰매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중들의 눈에 비쳐진 산타와 루돌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로맨틱하고 동심을 자극하는 존재들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시선이었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그냥 남들 다 노는 황금 같은 공휴일에 일하는 가엾은 공무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가엾은 공무원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한 체계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세계 각국마다 지부를 두고 있는 산타 연맹- 그리고 그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수많은 부서 안에서도 아이들과의 직접적인 접점이 생기기에 가장 중요한 배송 부 현장 1팀, 그 조직을 이루는 가장 작고 기초적인 단위가 바로 한 명의 산타와 한 명의 ‘썰매꾼’으로 이루어진 ‘페어’ 였다. 보통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직접 건네주는 ‘산타’가 양성원에서 훈련을 받고 올라온 썰매꾼들 중 자신과 페어를 이룰 파트너를 정하고, 그렇게 페어가 정해진 후에는 한 팀으로서 한 해 일억 육천만 킬로그램에 달하는 선물들 중 자신들의 분량을 배정받아 실어 나르게 되는 시스템으로 조직은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세계에서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존재했다. 성탄절 날의 해가 뜨기 전까지 배정받은 구역의 모두에게,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선물을 오차 없이 전달해 높은 실적을 보여주는 페어에게는 인센티브와 함께 배달 업무에 용이한 최고급 썰매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민호는 지난해에 최고급 썰매를 부여받은 입사 동기 토마스가 배송업무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어린 썰매꾼인 척이 운전대를 잡은 그들 페어의 썰매는 말이 썰매였지 실은 붉은 빛깔이 매혹적인 스포츠카였다. 그 억 소리가 나는 것을 타고 토마스와 척은 평소였다면 반나절이 걸릴 배송 업무를 단 두 시간 만에 마무리 짓고 퇴근을 했다. 그들이 따뜻한 차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장부를 펼쳐들어 빠진 곳이 없나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민호는 한 블록의 집들도 끝내지 못해 속으로 몇 번이나 욕을 굴리고 있었다. 물론 상황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토마스와 척의 페어와도 같은 우수 사례가 있다면 반대로 실적과 일처리가 형편없어 본부로부터 쌀알 한 톨만큼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페어도 있었다. 그에 해당하는 일례가 바로 민호와 그의 파트너인 뉴트가 이루고 있는 페어였다. 둘은 다 떨어져 덜덜거리는 고물 스쿠터를 몇 년째 타고 다녔다. 교체할 부품도 없어 수리도 못 맡기는 이런 걸 타고 다니다가 비명횡사하면 산재처리는 되는 거냐고 큰 소리를 쳐보고 싶어도 실적이 워낙 개판이라 꿈도 못 꿨다. 사실 인센티브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고물딱지 썰매가 평범한 인간들의 것처럼 꼬박꼬박 기름밥을 먹여야 하는 스쿠터가 아닌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주유비가 들었다면 분명 자신들에게는 주유비 낼 돈도 없었을 테니까.
담배를 빼어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청바지 뒤춤을 뒤적이는 뉴트를 보며 지나가던 아가씨 둘이 수군거렸다. 오밤중에 선글라스를 낀 미친 놈 취급하는 건가, 싶었지만 콧등 아래로 까만 알이 내려가 빼꼼 드러난 눈매가 둥글게 휘자 두 사람은 어머, 작게 감탄사를 뱉으며 얼굴을 숙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귀와 뺨을 하고 머리를 맞대어 더욱 더 은밀히 수군대는 그녀들을 보며 민호는 속으로 정정했다. 시발 그래 저 잘난 낯짝 때문이구나. 멀어지는 두 명분의 등짝을 응시하며 픽 웃는 걸 보니 그 역시 본인을 향한 그녀들의 시선을 백 퍼센트 눈치 챈 것이 틀림없었다. 알고 일부러 그랬구만, 저 끼돌이 새끼. 라이터를 찾는 데 성공해 치익, 담배 끝에 불을 붙이는 그림 같은 모습을 보며 욕을 했지만 사실 민호는 두 아가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어렸을 때, 오로지 그 얼굴에 반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트너로 뉴트를 찍은 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민호는 아주 까마득한 선조 때부터 대대로 성탄절을 축복되게 만드는 ‘산타’ 의 일을 가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늘씬하고 탄탄한 체격에 몸놀림이 빨라 날 때부터 배달에 적합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던 그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보다 오래된 선조들이 그러했듯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썰매꾼들이 훈련을 받고 자라는 양성원으로 갔다. 그로부터 3, 4년 후 나이가 차 본격적인 가업을 잇기 시작하면 민호와 페어를 이룰 파트너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그들의 페어는 연맹에 등록되어 업무를 하게 될 새로운 산타가 연맹으로 찾아오면 양성원에서 선별되어 올라온 썰매꾼들 중 품종-본래 ‘썰매꾼’들은 인간과 순록의 피가 섞인 튀기였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한 명을 고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식이었지만, 민호의 부모님은 그들의 아들에게 더 넓은 선택지를 줌으로서 민호가 평생 함께 할 비즈니스 파트너를 직접 선별하게 했다. 그 결정에는 형제 없이 외로이 자란 민호에게 파트너 이상의 친구를 만들어 주려는 부모님의 깊은 뜻이 있었고, 혈통 있는 일가의 구성원들인 그들에게는 어느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아들이 원하는 썰매꾼과 페어를 이루게 해줄 능력이 있었다.
자, 그럼 천천히 둘러보면서 결정하시죠. 직원의 안내에 따라 부모님과 민호는 훈련 중인 썰매꾼들이 모여 있는 넓고 긴 방을 천천히 걸었다. 카펫이 깔린 통로의 양 옆으로 두텁게 세워진 유리벽 너머로 수 십 명의 썰매꾼들이 순록의 모습을 하거나 혹은 사람의 형상으로 서서 유리 밖을 가로지르는 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양성원에서 나와 연맹으로 발탁되어 산타에게 선택을 받는 썰매꾼들은 이곳을 나가 약간의 학습 후 제 몫의 일을 하며 사람다운 생활을 하겠지만, 훈련 과정에서 미숙한 평가를 받아 발탁조차 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이 곳에 갇혀 살게 되는 걸까.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할 법 한데도 민호는 문득 그런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니 다들 어딘가 모르게 서글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도중, 민호는 지금의 뉴트를 보게 되었다. 저보다 서너 살이 더 많아 보이는, 그래서 이제 성인의 태를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순록들 사이에 제 또래로 보이는 작은 아이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에 손바닥을 얹어 안을 들여다보는 민호를 발견한 직원은 난처한 듯 눈썹을 뉘였다. 아, 그 아이는 어렸을 적에 보살펴줄 부모를 잃고 양성원으로 온 터라 도통 자라질 못해서요…. 흰 피부에 앳된 이목구비, 그러나 여린 인상 속에서도 강단 있게 살아 숨 쉬는 눈매. 유리창 너머의 그 빛나는 눈을 보고 있던 민호는 다른 쪽을 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직원의 권유가 끝나기도 전에 말허리를 잘랐다. 저, 얘랑 할래요.
세상의 온갖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 빚어낸 그 천사같은 얼굴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긴 커녕 오히려 지난 십 년간 저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자라 물이 조금 더 오른, 미려하고 반짝거리는 청년의 얼굴로 그는……담배를 피웠다. “아 존나 하기 싫네 시발.” 욕도 서슴없이 한다. 민호는 나날이 마초 근성이 늘어가는 제 파트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잠들어있을 아이들이 본다면 동심이 박살날 순간이다. 한숨을 푹 쉬면서도 별 수 없이 민호는 주머니에서 찾아낸 길쭉한 것을 뽑아들고 입에 물었다. “나도 불 좀.” 그리고 곧 자연스럽게 그가 문 담배 끝으로 미미한 온기가 붙었다.
“야, 뉴트. 너 이렇게 일하기 싫어하면서 페어 정해졌을 때 왜 그렇게 좋아했냐?”
민호가 묻자 뉴트는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옮겼다. 겨울철에 자연스레 나오는 입김인지 담배연기인지 모를 희뿌연 것을 뱉으며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턱을 치켜들고 한참을 생각하던 그의 속눈썹이 허공을 향해 느리게 깜빡이다 이내 멈추었다. ‘…난 섹스 파트너 정해주는 줄 알았지.’ ‘발정기였냐? 그 어린 나이에?’ ‘아니, 지극히 정상인 시기였는데.’ 어 그래…. 민호는 더 이상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애꿎은 담배만 깊게 한 모금 빨았다. 뭐가 됐든 우린 존나 망했어. 망한 조합이야.
“한대 더 피고 있을 테니까 갔다 와.”
“뭐, 나 혼자 갔다 오라고?”
“그래.”
“업무 중 무단이탈 금지, 페어는 언제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새 까먹었냐, 똘추야?”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규율에 목숨 걸었다고 그래. 왜 이제 와서 꼰대질이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쓰지도 말랬다고, 올해부터 실적 저조한 페어들 모니터링 한다는 거 못 들었냐. 어쩌면 지금 우리 이렇게 뺑끼치고 있는 것도 보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좀 무린데…. 썩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벌려 추운 날씨에 건조해진 입술 끝을 문지르고, 불평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는 뉴트를 따라 민호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의 낮아진 시선 끝으로 얇은 스니커즈를 신은, 그러나 얄팍한 컨버스 천이 감싸고 있는 알맹이는 성치 않은 뉴트의 한 쪽 다리가 걸렸다. 아, 그렇지. 되도록 잊어버리려 해도 주홍글씨처럼 저절로 따라붙어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에 민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조각난 필름처럼, 이어지지 않는 몇 가지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3년전의 사고, 넘어진 스쿠터와 자동차 바퀴, 하얗고 까만 횡단보도 위를 붉고 축축했던 것이 수놓았던, 눈 오는 날. 모두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그러니까, 원래 저 꼴이 났어야 하는 것은 민호 자신이었으나 정작 다쳐 다리까지 못 쓰게 된 것은 공포에 질려 몸이 굳은 자신을 안고 구른 뉴트였다. 이제 시간이 제법 지나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성급한 걸음을 걸을 때 뉴트의 한 쪽 다리는 반 박자 느리게 앞서간 몸을 쫓아갔다. 눈과 비로 곳곳이 얼어붙은, 저 높고 경사진 돌계단을 오르는 것 또한 당연히 무리일 것이다.
“그럼 업혀. 어쩔 수 없어.”
“내가? 너한테 업히라고?”
“그래. 어떻게든 올라가야 할 것 아냐.”
사고 이후 한참동안 죄책감에 시달리고, 수 세대에 걸쳐 이어왔던 가업에 종지부를 찍을까 고민하던 삼 년 전의 민호에게 뉴트는 말했었다. 원래 썰매꾼은 산타에게 귀속되어 있는 존재이고, 난 널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시발,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그렇게 신파 찍고 지랄하면 다신 너 안 봐. 누가 보면 내가 아주 뒤진 줄 알겠다?
그 이후로 둘 사이에서 그 날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딱 민호가 술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이따금 술에 절어 벌개진 얼굴로 그가 제 파트너에 대한 미안함과 그 이상의 것들을 끝없이 주절거릴 때마다 뉴트는 주저 없이 일어서 술집에 민호를 남겨 두고 나오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결국은 그 구질구질한 읍소를 다 들어 주고 집까지 실어 나르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민호에게도 누누이 말했듯, 루돌프라고도 불리는 썰매꾼은 산타를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뉴트는 제가 민호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썰매꾼과 산타의 관계를 넘어 그 이상의 감정들이 섞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거듭 재촉하는 민호에게 뭐라고 거부의 말을 건네려던 뉴트는 제 파트너의 얼굴을 보았다. 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뺨과 답지 않게 처연한 빛을 띄고 있는 눈동자 위로 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민호가 저에 대해 그런 쓸데없는 감정-어디까지나 제 기준-을 품고 있는 것은 뉴트가 아주 싫어하는 일이었다. 색깔이 희게 빠지도록 꾹 감쳐물고 있는 저 입술이 벌어지면 술취한 어느 날처럼 또 다시 그 날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뉴트는 서둘러 담배를 던졌다. “시발 그래 가자 가, 썰매꾼으로 태어난 내가 죄다.” 작은 불씨가 스니커즈 아래에서 짓이겨지는 것을 보며 민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순록이 순수하고 여린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나, 좀 알려줄 사람?
“아, 승차감이 왜 이래? 잘 좀 업어 봐.”
등짝에는 저만한 장정 하나를 매달고 어깨에는 선물 자루를 맨 채 계단을 오르느라 계절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땀방울이 솟는데 이건 팔자 좋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다 큰 사내새끼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쨌는지, 처음에 업히라고 했을 땐 한사코 사양하더니 막상 어쩔 도리 없이 업히게 되자 그간 빼던 것이 무색하게 뉴트는 이 상황을 굉장히 즐기고 있었다. 어깨와 목을 옭죄는 팔다리가 캐롤 허밍에 따라 신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민호는 짜증을 토해냈다. 누가 산타고 누가 썰매꾼인지 모르겠네. 우리 일 편하게 하라고 지원해준 루돌프를 산타가 케어해주는 꼴이라니 이거 원…. 뉴트는 민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는 민호의 목 언저리와 어깨에 걸쳐져 있던 제 양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두 상체가 빈틈없이 바짝 맞닿았다. …그래서, 바꿀 거야?
“뭐?”
“들었어, 본부에서 너한테 연락 넣었다며. 올해 양성원에서 새로 올라온 썰매꾼 있다고, 다리 한 쪽 병신된 나랑 일하기 불편하지 않냐고.”
사실이었다. 12월 초, 본격적으로 근무 체제에 돌입하고 이번 해의 배송 리스트를 받으러 갔던 민호는 실적이 저조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상관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리가 그 모양인데 기동력이 좋을 리가 없지. 전달이 늦어지면 자연히 그게 다 실적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고.’ 뭐 그런 식의 걱정으로 시작한 말의 본론은 결국 양성원에서 올라온 다른 썰매꾼들이 많으니 페어를 바꾸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는데, 십 몇 년 전 양성원에서 열 몇 살의 뉴트를 처음 보았던 그 때처럼, 상관의 제안을 들은 민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게 했던 답변을 똑같이 뉴트에게 돌려주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안 바꿔 씨발놈아, 바꾸고 싶었음 진작에 바꿨지. 내가 방금 지랄한 건……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 말고 누가 내 파트너를 케어해 주냐, 어? 내 파트너 내가 케어해야지.”
민호에게 자신이 보살펴 주어야 하는 대상 비슷한 것으로 인지되는 건 무엇보다도 싫었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민호의 온 신경줄이 자신을 향해 기울어진다는 것은 썩 기분이 괜찮은 일이었다. 뉴트는 방금 전 민호가 망설임 없이 내어 놓은 답변을 입 속에서 한번 되새겼다. 안 바꿔, 씨발놈아. 그것은 제 의지를 관철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는 그 다운 답변이었다. 저 고집불통이 단호하게 그리 대답할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어 확인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를 안도의 감정이 느껴졌다. 실은 민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자신은 정말 상관없었을 거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내심 마음속으로는 민호가 끝까지 저와 함께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 그래…. 뉴트는 얼어붙은 공기에 차게 식은 뺨을 익숙한 등짝 위로 천천히 파묻었다. 뜨끈한 온기, 익숙한 냄새. 저와 함께 십 년을 넘게 자라온 몸이다. 둘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무척 달았다.
“근데 뉴트,”
“왜.”
“…너 지금 밑에 세운 거 뭐냐.”
세운 거? 무심결에 턱을 접어 아래를 내려다본 뉴트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12월이었지.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순록들의 계절. 그들이 사랑하는 넓게 펼쳐진 설원 위를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며, 더운 계절과 가을까지 축적해 두었던 활력과 생기를 발산하는 시기. 그렇게 넘치는 활기는 종족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본능적 의무로 이어진다. 그리고 짐승의 피가 절반이나 섞인 몸은 꼭 이렇게 바뀐 환경에도 배반하지 않고 착실하게 본능에 반응했다. 스물 몇 해 되는 제 생의 절반을 함께 보내온 민호였으니 그 또한 제 뒤에서 ‘세운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몰라 묻는 건 아닐 것이다.
“아, 지금은 진짜 발정기라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허리를 더 가까이 들이민다. 층계의 한 칸 한 칸을 오를 때마다 덜컹거리는 하체와 잔뜩 열이 몰린 앞섶이 민호의 등허리와 골반을 꼿꼿이 찔렀다. 아오 시발 이걸 던질 수도 없고! 근육이 발달한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로 이어지는 오금 언저리를 쥔 채 등에 매달린 저를 어쩌지 못하고 열을 삭히는 민호의 반응을 즐기던 뉴트는 문득 떠오른 음험한 생각에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어쨌든 위에 올라탄 셈이니까 이대로 엎어져도 좋은 그림이 나올 텐데 상황이 영……음, 좀 안타깝다.
“그러게 내가 말했지, 그냥 기다리고 있겠다고.”
“…….”
“케어해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이것도 케어 해 줘야지? 내 산타. 마치고 얼른 집에 가자?”
닥쳐 이 웬수같은 새끼야. 못된 말을 하면서도 힘이 빠져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몸을 한번 더 추슬러 업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시 또 한 번, 하체에 단단하게 와 닿는 찝찝한 감각이 느껴진다. 아까와는 달리 정확히 엉덩이 위에서 느릿하게 비벼지는 감각이 고의성을 품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 항의하였다가는 느꼈냐는 둥, 그러면 스릴 있게 이 자리에서 한판 굴러보지 않겠냐는 둥의 노골적인 반격에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뻔해 민호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어느 미친 놈이 제 업무 파트너에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겠냐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보다 더한 소리도 할 수 있는 미친 놈이 지금 바로 제 등 뒤에 올라타 있었다.
‘아, 뭐해? 일 안 할 거야?’ 여러 가지 이유로 저를 재촉하는 발정난 썰매꾼을 등에 태운 채로 민호는 턱을 들어 남은 층계를 확인했다. 절반밖에 오르지 않은, 첨탑과도 같이 높은 돌계단 위로 굵은 눈발이 날린다. 아직 가야할 길이 구만리였다.
1. 미리 크ㄹㅣ스마스 기념
2. 이제 캐붕같은 것은 1도 신경쓸 여유가 없게 되었다
3.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신나고 싶어서 썼읍니다
4. 동심 PO박살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