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민호] Snapshot / 메이즈러너 전력 60분
오션 드라이브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R바는 신선한 라임과 애플민트를 아낌없이 넣어 플로리다에서 맛볼 수 있는 정통 모히또의 제조법을 택하고 있었다. 어차피 손님의 대부분이 유흥을 즐기는 것이 주목적인 단발성 관광객이므로 저렴한 인공 향 시럽을 넣어 대충 휘저어 파는 곳이 판치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 아직까지 정통 제조법을 취하고 있는 곳은 이 넓은 마이애미에서 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Originals. 제 가게의 모히또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바텐더 갤리의 자긍심과도 같았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잘 탄 것인지, 마치 모히또를 사랑한 헤밍웨이처럼 많은 손님들은 화이트 럼이 들어간 모히또를 찾았다. 이 사실은 영업 실적을 살펴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스트레이트 잔에 담아 파는 양주나 기타 주류는 제쳐두고 그 어느 칵테일보다도 모히또의 판매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심지어 지금 갤리의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이 남자 또한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모히또!’ 를 외쳤으니 말 다 한 것이 아닌가. …뭐, 그렇게 기세 좋게 모히또를 찾았던 것 치고는 주문한 잔을 받아든 지 30분이 지나도 도통 양이 줄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이상하긴 했지만.
헤이, 민호. 왜 안 마셔, 맛이 별로야? 새로 만들어 줘?
바 카운터로 가슴팍을 기울이고 소리 높여 묻자 상체를 반 쯤 틀어 DJ부스를 응시하고 있던 고개가 바 앞으로 돌아왔다. 민호는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를 으쓱 올리며 여상히 대꾸했다. 아니, 여전히 맛있는데?
짧은 소매의 티셔츠를 입어 팔뚝에 붙은 잔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곧은 힘줄이 엷어지는 곳에 위치한 손바닥은 그의 다부진 턱선을 괴다 잠시 뒷목을 문질렀다. 잘근잘근 씹어 끝이 납작해진 빨대로 바닥에 가라앉은 라임 조각을 쿡쿡 찌르는 얼굴이 퍽 무심했다. 숙련된 바텐더로서 손님의 고충을 들어줄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갤리는 팔짱을 끼고 말을 고르며 단골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내 모히또가 맛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가. 민호의 어깨 너머로 방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광경을 보았다. 주말 밤답게 발 디딜 틈 없는 열기 속에서 한데 엉켜 춤추는 사람들, 어둑어둑한 사위를 메우는 LED 조명과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수증기, 시끄러운 음악. 그리고 뭔가 부족한 얼굴. 갤리는 입 끝을 뾰족하게 모으고 턱 끝을 긁었다.
“안 보던 새에 보는 눈이 높아진 거 아냐? 오늘 그렇게 엉망은 아닌 것 같은데. 주말답게 예쁜이들도 많다고.”
“나도 알아.”
의외로 그는 갤리의 말을 쉽게 인정했다. 모히또의 맛은 변하지 않았고, 가게의 분위기 또한 이 정도면 솔직히 나쁜 편은 아니었다. 여전히 시끄러웠으며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이상했다. 아니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갤리의 질문에 차마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감이 안 좋아, 오늘따라. 육감의 동물은 여자라지만 그녀들보다 더 뛰어난 예리함을 갖춘 민호의 감은 거의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물론 그 정확성을 이루는 9할의 확률은 특수한 그의 직업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렇게 멀찍이 앉아 구경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못 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오늘따라 민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감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왠지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뭔가 대단히 큰일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냥 노파심인가? 아님 큰 작전에의 투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만들어 낸 스트레스와 중압감 때문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민호는 잊혀져가고 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정확히 몇 달 전 이맘때쯤 한번 R바의 입구에서 나오다가 마침 오션 드라이브를 찾았던 옆 부서 사람에게 걸릴 뻔 했던 일이었다.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뒷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경험이다. 그것을 떠올리며 민호는 최악의 수를 상상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마약 파티가 벌어지는 바람에 현장을 급습한 동료들이 술에 떡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직장에는 게이 바를 드나드는 호모라고 아웃팅. 하지만 제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닌 이상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린 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유리잔 속 빨대를 뽑았다.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 내려놓은 글라스에는 표면에 달라붙은 애플민트 이파리와 수분을 축축하게 머금은 슬라이스 라임만이 남았다. 마음을 굳혔다. 갈게, 잘 마셨어. 셰이커를 흔들며 다른 손님들의 말상대를 해주고 있던 갤리에게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벌써 가게?”
그를 붙잡은 목소리는 갤리가 아닌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벨트 위로 말려 올라간 옷자락을 반듯하게 정리하던 민호는 고개를 비틀었다. 언제 온 것인지 인기척도 없이 그의 옆자리를 꿰찬 남자가 민호를 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흰 셔츠에 치노 팬츠를 입어 주말 밤의 클럽에 출입하기엔 다소 포멀한 옷차림을 한 그는 다른 바텐더로부터 건네받은 재떨이를 제 앞으로 끌어 와 담뱃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감싼 그의 손은 길고 가늘었으나 도드라진 손등의 힘줄과 크고 작은 흉터들로 투박했고,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고개를 기울인 이목구비에는 그림자가 졌다. 담배를 물고 있느라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턱과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무의식적으로 찌푸린 미간 등에 눈길을 주고 있던 민호는 잠시 망설이다 스툴에 몸을 기대어 삐딱하게 섰다. 여기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마 저 밖의 넓은 오션 드라이브 전체를 들쑤셔도 없을 것 같은 얼굴이다. 우습지만 아주 잠깐, 이 화려한 남자를 만나려고 오늘 내가 이렇게 지루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그의 설득력 있는 외모만 놓고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던 민호는 그가 물고 있던 얇은 담배가 힘을 주고 있던 입술 끝에서 손가락 사이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훅, 나른하게 연기를 뱉으며 그는 다시 민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피사체를 쫓는 카메라와도 같은 눈이다. 흔들림 없는 그 눈동자는 민호의 모습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가기엔 아직 이른데. 퍼피 밥 줄 시간이라도 된 거야? 여전히 대답이 없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네가 떠나면, 그러면 나도 가는 거야. 왜 그런지 알아?”
마치 노래하듯 말을 건네는 남자를 보며 저게 뭔 뜬금없는 개소린가 눈썹을 구기던 민호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아, 어쩐지 말이 익숙하다 했지.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수십 년 전 제 고향 플로리다에서 머물렀다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소설가를 떠올렸다. 그 언젠가 민호는 키웨스트에 있는 생가에서 그가 떠나고 남은 집필실을 본 적이 있었다. ‘노인과 바다’ 가 쓰여진 너른 집필실은 이제 그가 키우던 고양이-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의 후손-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 때 그 집을 대충 둘러보고 나와서 서핑보드를 탔던가, 어쨌던가. 쾌락을 위한 게이 클럽에 와서 로맨틱과 낭만을 찾는 남자가 퍽이나 우스웠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민호는 그런 면에 무척 약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들을 애써 떨쳐내며 그는 손수 밀어 넣었던 의자를 다시 빼내어 엉덩이를 붙였다. 드르륵, 매끈한 바닥 위로 고철덩어리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자연스레 따라붙는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문장이.
“우리 둘 중 한 쪽이 있는 곳엔 언제나 우리가 함께하기 때문인가. 헤밍웨이 좋아해?”
“음…. 좋아하는 건 아니었는데 읽어는 봤지. 예전에 사귀었던 애인한테 잘 보이려고.”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다는 듯 순순히 털어놓은 남자의 답변에 민호는 픽 웃었다. 거 애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사랑받았겠구만. 그리고 답변만큼이나 솔직한 남자의 억양을 들으며 이름도 모르는 그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이애미가 좀 덥지? 영국에 비하면.”
“그래, 아주… 뜨겁네.”
명백한 어필. 연예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마스크를 갖춘 이런 남자가 이 넓은 클럽에서 저를 택했다는 점이 좀 의아하긴 했으나 먼저 신호를 보낸 것은 그 쪽이니 밑져봐야 본전이다. 잠시간 망설이던 민호는 제안했다. ……내가 여기보다 시원하고 좋은 곳을 잘 아는데.
닳고 닳은 스물일곱이다. 사심을 품은 추파는 몇 번이고 던져 보았지만 ‘이런 남자’ 를 상대로 하는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마치 첫 동정을 떼기 위해 여자 친구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10대 철부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대체 이게 뭐라고. 저도 모르게 마음을 졸인 것과는 달리 그는 민호의 제안에 웃으며 곧장 담배를 비벼 껐다. 축축하게 젖은 티슈 위로 열기가 뭉그러졌다. ‘그럼 네가 앞장서봐.’ 민호는 웃음기가 미미하게 걸린 얼굴로 자주 찾던 호텔의 위치를 되새기며 생각했다. 오늘 여길 안 왔더라면 아쉬워서 어쩔 뻔 했나.
민호는 스위치였다. 누군가에게는 매너 좋고 다정한 탑이 되기도 하고 또 거친 상대를 정복하는 것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제법 취향에 부합하는 바텀이 되어주기도 했다. 남자의 섬세한 외모를 보았을 때 제가 탑이겠거니, 하고 능숙하게 남자를 이끌었지만 그는 의외로 후자였다. 객실 문을 걸어 잠그기가 무섭게 입을 맞추고 카펫이 깔린 바닥을 구르듯 지나 치열과 입천장을 혀끝으로 긁으며 엉킨 두 몸뚱이가 시트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을 때, 남자는 민호의 뒷머리를 잡아채어 입술을 떨어뜨리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박는 쪽밖에 안 되거든.
앞서 말했지만, 여러모로 상대방을 약해지게 하는 외모였다. 그래, 이렇게 생긴 남자와 섹스 하는 것도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인데 양 쪽 다 가능한 내가 배려하지. 민호는 순순히 등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남자는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가만히 누워 민호의 손길을 받았다. 셔츠 깃을 벌리고 도드라진 목덜미와 쇄골에 입술을 내리던 민호는 단정하게 붙어 있는 단추의 로고를 보며 그가 입은 셔츠가 제 한달 급여와 맞먹는 고가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마구잡이로 버튼을 뜯어내던 손놀림이 절로 공손해졌다.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몸짓에 혹여나 얇은 천 조각이 잘못될까 조심스레 소매의 단추를 풀던 민호는 그의 손목에 새겨진 생경한 흔적을 발견했다. W? M? 그의 팔목을 붙들고 고개를 돌려가며 살핀 결과 흰 피부 위에 레터링 된 글자는 W에 가까웠다. 아까 가게에서는 어두워서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W야? 탄탄한 맨살 위로 손을 집어넣어 셔츠를 벗기며 묻자 어깨를 들어 옷을 벗기는 행위에 동조하며 남자는 대꾸했다. 아, 내 이름에 W가 들어가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대답이었다. 그는 느긋한 눈길로 먼저 상의를 벗어던진 민호의 몸 곳곳을 훑었다. 이상했다. 애무를 받고 있는 것은 남자 쪽인데 꼭 제가 받는 것 같았다. 단지 보는 것 만으로도.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저릿저릿하고 간지러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머리 꼭대기까지 흥분이 침범해 넘실거린다.
이름이 뭔데? 윌? 윈스턴? 이름에 W가 들어가는, 익명의 남자는 레터링이 새겨진 그 손으로 민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샤워 직후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기가 남은 머리에 미지근한 체온이 닿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이름 안 알려줄 거야?”
“응. 꼭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꼭 알아야 할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나 섹스 할 때 상대방 이름 부르는 버릇이 있거든.”
“그래?”
민호는 일순 남자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캐치했다. 특정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상대방이 섹슈얼 텐션을 느끼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미간을 모으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난감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나 이거 직업상 알려주기 곤란한데 네가 그러니까 알려주고 싶네…. 뭐, 좋아. 편한 대로 불러. 네가 불러주는 게 내 이름이야, 딱 오늘 밤만.
헤밍웨이를 들먹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슈가 코팅에 능하구나.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 몹시 너그러워진 태도로 민호는 턱을 내밀어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의 팔목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알아내려 재차 조르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무슨 일 하길래?’ 머리칼을 휘젓던 손은 어깨와 매끈한 팔뚝을 문지르듯 미끄러져 내려가 가슴팍을 약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유륜을 살살 긁는다. 확실히 약한 부위였다. 민호는 어깨를 움츠렸고 남자는 반문했다. 지금 나 취조해? 아 나왔구나 몹쓸 직업병. 크게 불쾌해 보이는 기색은 없었으나 민호는 열이 올라 벌개진 눈 꼬리를 접으며 사과했다. 미안.
“웃으니까 귀엽다. 무슨 일 하는데? 학생이야?”
제가 물었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경찰이라고 밝혀봤자 손해를 입었으면 입었지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민호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나라 녹 먹으면서 사는 거지. 까라면 까고.”
“아아- 공무원? 많이 힘들겠어?”
그는 말끝을 늘이며 천천히 무릎을 세워 누워있는 자신에게 올라타듯 앉아 있는 민호의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자극에 민호는 본능적으로 배를 접었다. 아랫배에 열기가 뭉근하게 퍼지고 곧 청바지가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앞섶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아으…. 앓는 소리를 내며 민호는 남자의 복부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남의 손을 탄 것이 거의 몇 개월만이었다. 타인으로부터 가해지는 실로 오랜만의 자극에 예민한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엎어지듯 남자의 배 위에 코를 처박은 민호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남자는 웃었다. 뭐야, 왜 이렇게 민감해. 이러다 시작하기도 전에 한발 빼는 거 아냐? 여유 만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다. 민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털었다. 아냐, 원랜 이렇지 않은데…. 그러나 그는 자기변호를 끝마치기도 전에 시야가 빙글 도는 것을 경험했다. 수수한 호텔 천장 위로 지나치게 화려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얘기는 나중에. 이제 나한테 집중해. 잇새로 얄팍한 콘돔 껍질을 뜯으며 남자가 웃었다.
“아침은?”
“먹었겠냐.”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도 못 먹고 참 서글프게 산다, 그치?”
5분 전인데도 군데군데 빈 공석을 살피며 민호의 옆에 앉은 토마스는 훈기가 느껴지는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겉면에 익숙한 로고가 찍혀 있었다. 서브웨이. 출근이 늦어지기에 지각인가 했는데 알람을 일곱 개나 맞추고도 늦잠을 잔 저와는 달리 샌드위치를 사올 여유도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동기 좋다는 게 다 뭐냐?’ 눈을 찡긋거리며 토마스가 생색을 내든 말든 민호는 포장지를 요령 좋게 벗겨낸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곧 눈썹을 찡그리며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시이발 아침부터 에그 앤 치즈라니…. 속이 니글거렸다. 이럴 때 보면 역시 저도 영락없는 한국인이구나 싶다. 민호가 저도 모르게 아파트 냉장고에 묵혀 둔 김치를 떠올릴 동안 비어있던 의자들은 하나 둘씩 주인을 되찾고 곧 프로젝트 빔과 보드, 유인물들이 세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브리핑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난 해 겨울부터 마약 운반책으로 위장하여 잠입 수사를 하고 있던 요원 L과 X로부터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들은 이번 달 말, 그러니까 몇 주 후 마이애미에서 대량의 필로폰 거래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마약을 제공하는 조직은 무려「맨서」. 인터폴이 벌써 몇 년째 뒤를 쫓고 있으나 변변찮은 소득 없이 매번 놓치기만 했던 세계적인 마약 거래상이었다. 물론 ‘맨서’ 와 거래를 하게 될 「WCKD」 또한 경찰 측에서는 놓칠 수 없는 거물이었다. 철저한 계획 아래 두 조직을 현장에서 소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이애미 경찰청과 FBI는 공동 수사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마약청과 이민 귀화국, 세관은 협조 공문을 보냈다. 예상보다 밑그림이 큰 작전이었다.
맥을 못 추는 민호를 보던 토마스가 혀를 차며 물었다. 주말이라고 또 불나방처럼 어디서 질펀하게 구르고 왔구만? 어떻게 알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자 토마스는 까만 제복 깃 위로 드러나 가려지지 않은 민호의 목덜미를 짝 쳤다. 꼭 이렇게 흔적을 남기는 애들이 있더라. 영역 표시도 아니고. 짐승이냐?
…진짜 짐승은 아니지만 짐승 같긴 했지. 민호는 지난 주말,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저를 몰아붙이던 남자를 떠올렸다. 혈기를 가라앉히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양기 충만한 신체는 새벽 반 나절 만에 방전되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민호는 머릿속으로 남자가 새로이 꺼냈던 콘돔의 개수를 헤아리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정말로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섹스를 하고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하늘을 확인한 후 남자의 팔에 끌어 안겨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든다기보다는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욱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조식으로 제공되는 룸서비스를 불러먹기도 힘겨울 정도로 온 몸이 피곤했다. 결국 정오가 지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허물처럼 널린 청바지를 꿰어 입는 민호의 등에 팔을 감으며 남자는 물었다. 번호 알려주지 않을래?
막 버클을 채우던 손이 멈칫했다. 물을 줄 몰랐는데. 조금 망설여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주고받은 원나잇 만남은 그 날 하루로 끝내는 것이 가장 담백하고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수많은 전례들이 증명해 주었다. 게다가 저는 이제부터 바빠질 예정이었다. 아깝지만 스테디한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던 민호는 남자의 핑계를 대었다. 너도 어제 이름 안 알려줬으니까. 그래, 남자는 끝끝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민호는 결국 남자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연거푸 억눌린 신음만 뱉었다. 뭐가 됐든 남자는 적극적인 반응에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단호한 의사 표명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그래,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지.’ 지난밤의 거친 몸짓과 달리 로맨틱한 말만 골라 줄줄이 늘어놓는 그의 머리 위로 한여름의 햇볕이 내려앉았다.
“32번가의 V조선소, 새벽 세 시라고 했고…. 뉴트 생스터. 예전에도 몇 번 봤지? 오스본의 수족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조직 내에서 거래 계획을 성사시킨다던지 여하간 수를 쓰는 건 다 이 새끼 대가리에서 나온다고 봐야 해. WCKD에서는 아마 높은 확률로 이 새끼가 나올 거야. 예전의 세력을 치고 오스본이 조직의 우두머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굵직한 거래 건이니 시덥잖은 아랫놈들을 내보내진 않을 거라고.”
팀장이 열정적으로 브리핑을 하건 말건 민호는 좀처럼 몽롱한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무거운 머리를 팔에 괴었다. 졸지 않고 제대로 듣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내기 위해 손끝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누르고 기계처럼 먹다 만 샌드위치를 삼킬 때, 레이저 포인터로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보드를 주시하고 있던 토마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오 세상에 제비새끼처럼 생긴 것 좀 봐! 내 여동생이 딱 좋아하게 생겼네. 하여간 기집애, 클럽같은 데 막 다니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들어. 자칫 잘못해서 저런 위험한 새끼를 만난다고 생각해 보라고.”
저 놈의 망할 시스터 콤플렉스는 제 동생이 결혼식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절대 못 고치겠지. 민호는 귀찮음과 짜증이 곤두선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어찌 됐든 몇 주 후면 저도 토마스도 작전에 투입되어 저 거래 현장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것이다. 비약이 과하지만, 현장을 덮치기 위해 들이닥쳤다가 용의자의 얼굴도 분간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뱃가죽에 총알이 박히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집중하자. 가볍게 뺨을 두어 번 치고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부릅뜨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컨디션 탓인지 정말로 시력이 떨어진 탓인지 흐릿한 시야는 회의실 앞에 있는 보드를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하였다. 별 수 없이 민호는 종이 위로 떨어진 양상추 부스러기를 털어 내고 선명하게 인쇄된 유인물을 집어 들었다. 클럽에서 놀고 있던 모습을 찍힌 듯 라이더를 입은 남자의 어깨 너머로 술병들과 사람들의 헐벗은 옷차림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토마스가 ‘제비 새끼’라고 칭하며 분개하는 걸 보면 분명 곱상하니 준수한 얼굴이라는 말이렷다. 민호는 얄팍한 종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
“뭐야 민호, 갑자기 왜 그래?”
지난밤을 절로 상기시키게 만드는 그가 사각의 프레임 안에 갇혀 담배를 빼어 물고 있었다. 열기를 품고 있는 그 나른한 얼굴 위로 입 속에서 갈무리하지 못한 분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봐- 민호. 나 월요일 아침부터 토사물 보고 싶은 생각 전혀 없거든?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광란의 주말을 보낸 부작용으로 숙취해소를 하지 못한 것이라 오해한 토마스가 팀장의 눈을 피해 지껄이는 말 따위는 살필 경황이 없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남자, W, 그리고 WCKD.
치기 어린 욕구에 떠밀려 안일하게 생각하고 넘겼던 것들이 순차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결국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민 채 밤새도록 섹스를 즐긴 꼴이 아닌가. 그것도 타의가 아닌 자의로.
“저기 말야, 토마스.”
“왜.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 아무것도.”
그, 어, 그래. 아마 네 여동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제 동기에게 차마 해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민호는 주말 내내 근육통에 시달리던 허벅지를 물끄러미 쥐었다. 사진 속의, 그러나 48시간 전에는 땀과 타액을 나누며 한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던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지.
1. 본격 주제 나오기도 전에 미완성 주의: 혹시나 보고계실 여러분 제가 대구리를 박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제가 잘못..
=11월 25일자로 뒷부분 추가. 근데 안하니만 못한 것 같달찌
2. 검색 걸리면 곤란한 부분이 많은데 보호글을 걸어야 할지
3.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 잘 모르는 장르는 절대 쓰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함